#39. 그를 돌려보내도록 해.2022.01.13.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왕궁 복도. 숨통이 막히는 적막이 내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안내를 자처했기에 제일 앞서가는 그레타와 그녀와 몇 걸음 떨어져 뒤따르는 올리비아. 그리고 올리비아와 걸음을 맞춰 나란히 걷고 있는 크라이어까지. 푹신한 카펫을 밟고 가는 탓에 발소리는커녕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에 올리비아는 숨이 막혔다. 하지만 숨이 막히는 것보다 그녀를 더 힘들게 하는 건 앞에 가는 그레타의 머리채를 잡지 않기 위해 참는 것이었으리라. 당장이라도 주홍빛 머리채를 잡고 짤짤 흔들며, 저 머릿속에 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꾹 눌러 참았다. 상대는 마법사다. 마법사. 마법사. 마법사! 염불을 외듯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뇐 효과가 있었는지 그레타가 우뚝 멈춰 설 때까지 올리비아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목을 뒤로 꺾지 않았다.
“이곳입니다.”
한눈에 봐도 다른 문에 비해 화려하고 두 배 정도 큰 문 앞에 멈춰선 그레타가 문고리를 당겼다. -달칵. 지나치게 곤두선 신경 탓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천둥이 꽂히듯 귀를 크게 울렸기에 올리비아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크라이어를 찾아 손을 휘저었고, 이내 새끼손가락이 훨씬 크고 거친 그의 손가락과 부딪쳤다. 반사적으로 그의 손가락을 잡아 쥐려던 올리비아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그레타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으니까.
“전하, 저는 이만 실례해도 될까요?”
그에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하던 올리비아의 미간에 희미한 금이 갔다. 무례하다 못해 건방지기 짝이 없지 않은가. 평범한 안내인이었다면, 올리비아가 축객령을 내리기 전까지 방의 이곳저곳을 설명하고 그녀의 편의를 위한 조처를 취하느라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으리라. 물론 눈앞에 있는 이 화려한 미인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마법사니까. 하지만, 그녀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크라이어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니 올리비아가 그레타의 무례를 눈감아줄 이유는 없다. 오히려 그냥 넘어간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겠지.
“안내인의 본분을 알지 못하나.”
뼈가 있는 올리비아의 말에도 그레타는 화려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답했다.
“제 본분은 어디까지나 안내였지요. 나머지는 저들이 맡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쪽에서 기척도 없이 사용인 여럿이 나타나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 꼴을 본 올리비아가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그리고 기사님은 저와 함께 가셔야겠어요.”
그레타는 올리비아를 지나쳐 크라이어를 향해 다가서며 덧붙였다.
“왕세자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그 말에 혀끝까지 밀려 나온 ‘안돼.’라는 말을 간신히 씹어 삼켰다. 아무리 그녀가 제국의 황녀라 한들, 아직 노르덴 국에 적을 두고 있는 기사인 크라이어를 왕세자가 부른다는데 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 크라이어에게 흘긋 시선을 준 올리비아는 이내 턱을 당기고 등을 폈다. 순식간에 제국의 황녀다운 묵직한 위엄을 휘감은 올리비아가 제게서 등을 돌린 그레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안내인.”
올리비아는 그레타가 그녀에게 돌아서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그를 돌려보내도록 해.”
뼈가 시릴 만큼 서늘한 목소리였다. 뒤늦게 올리비아를 향해 돌아선 그레타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돌려보내라니 그 무슨……?”
올리비아는 손을 들어 그레타의 입을 막은 후, 그녀를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너 따위가 뭔데, 감히 내게 반문을 하느냐는 듯한 시선으로 저보다 키가 큰 그레타를 내려다보던 올리비아가 곧 입술을 뗐다.
“그는 노르덴 국의 기사임과 동시에 내 손님이니까. 내가 아니라고 할 때까지, 그는 내 손님일 거야.”
내가 그를 놓아주기 전까지, 그는 어디에도 가지 못한다. 타국의 기사를 상대로 이토록 무도하고, 이토록 고압적인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이가 또 있을까. 만약 올리비아가 제국의 황녀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대륙에서 유일한 제국, 볼셰이크의 황녀가 한 말이기 때문에 크라이어는 돌아오리라. 올리비아의 곁으로.
“원하던 대로 이만 가보도록. 쉬고 싶으니 다들 나가 봐.”
그녀는 무심하게 방 안으로 들어서다 멈칫했다. 올리비아는 우아하게 고개만 돌린 채 크라이어를 향해 명령했다.
“돌아갈 곳을 착각하지 마.”
등 뒤로 문이 닫힘과 동시에 올리비아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소리 없이 욕을 짓씹으며 고함을 치다 이내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네.”
한숨과 섞여나온 진심. 심장을 두근반 세근반 뛰게 만들었던 삼자대면이 너무나도 빠르고 허무하게 끝이 났다. 이게 맞는 건가? 라는 의문도 잠시. 올리비아는 고개를 빠르게 흔들었다. 지금 만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그게 더 큰 일이었겠지. 그런 상황이 일어났다면, 올리비아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마법사 측에서 눈치챘다는 말일 테니까.
“이게 맞는 거야.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는 이 상황이 옳은 거라고.”
올리비아는 잘게 떨리는 제 손끝을 내려다보다 주먹을 꾹 쥐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만 해. 그리고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상들의 지혜를 되뇌며 눈을 깊이 감았다 뜬 그녀는 이내 다리에 힘을 줘 일어났다. 곧장 침대로 향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네 번의 삶과 죽음을 겪으면서 몸으로 체득하지 않았던가.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한다는 것을.
*** 올리비아가 홀로 침대에 엎드린 채 시체처럼 축 늘어질 무렵. 크라이어와 그레타는 왕궁의 심처로 이동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에 다다른 두 사람은 어둑한 방에 들어섰다. -탁. 문이 닫히기 무섭게 크라이어가 물었다.
“왕세자는?”
“글쎄요. 어딘가 있겠죠.”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왕세자가 자신을 불렀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군. 아니, 어차피 왕세자는 마법사의 꼭두각시일 테니 거짓말이라고 할 수는 없나. 하지만 그 마법사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크라이어.”
그의 생각을 비집고 진득하게 휘감기는 부름이 울렸다.
“크라이어, 크라이어, 크라이어크라이어크라이어크라이어크라이어.”
정신이 나간 듯, 정신이 나갈 듯 그를 불러대던 그레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다른 이들처럼 미지근한 온기를 지닌 그레타의 손이 크라이어의 뺨을 매만졌다.
“겨우, 겨우 닿았네요.”
크라이어는 속삭이는 그레타의 손을 쳐내거나 자르지 않았지만, 뺨을 기대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이처럼 무표정하게 그녀를 내려다볼 뿐. 그레타는 그의 뺨을 매만지며 아련하고 애절한 시선을 보내다 곧 손을 거두었다. 손끝에 남은 그의 온기는 금세 사라졌지만, 그조차도 지나치게 만족스러워서 그녀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드디어 당신과 함께 있게 되었어요.”
감격에 젖은 목소리와 환희에 찬 눈동자, 그리고 더없는 기쁨으로 빛나는 얼굴까지. 누군가 그녀와 크라이어를 본다면, 아주 오랜 기간 부득이한 사정으로 헤어졌다가 겨우 재회한 연인의 모습이라 생각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레타는 진정으로 그리 생각했다.
“너무 길었어요. 당신이 곁에 없다는 게 얼마나…….”
잘게 떨리는 그레타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크라이어의 귀에는 하나도 닿지 않았다. 그저 의미 없는 소음처럼 흩어질 뿐. 그가 그레타의 말을 제대로 들었던 건, 제 쇄골에 그녀가 낙인을 찍던 그 순간뿐이었다. 크라이어도 알고 있다. 그레타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있을까. 어느 밤. 새카만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절망하는 그의 앞에 나타나 그레타 본인이 고했지 않나.
‘신의 첫 번째 온전한 종복인 당신만이…… 당신만이 정화된 세상에서 단 하나 남을 제 상대에요.’
그리 말하며 그를 열렬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레타가 품은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랑이건 집착이건, 구역질나는 병이건. 크라이어는 진정으로 그녀에게 그 어떤 관심을 부스러기조차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그는 그레타에게 시선 한 조각 주지 않은 채 물었다.
“마법사는 어디에 있지.”
감정이 철저하게 배제된 마른 목소리에 아주 찰나에 그레타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순간이었을 뿐. 그녀는 다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계세요.”
“없다고?”
이미 왕세자가 나왔을 때부터 알아채긴 했지만, 그 마법사 놈이 왕궁을 비우다니. 고대신의 제단이 왕궁에 있으니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 예상했건만. 크라이어의 시선이 방의 한쪽, 소담하게 마련된 작은 제단으로 향했다. 참으로 우습지 않은가. 대륙을 피로 적시고, 모든 인간을 불태워 정화시킨다는 고대신의 제단이 고작 저것이라니. 누군가에게 진실을 말한다 해도 믿지 않으리라.
“제단을 두고 떠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셨죠.”
그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흘리듯 덧붙였다.
“완벽한 제단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떠나지 못하니까.”
그 답에 크라이어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완벽한 제단의 완성. 그리고 떠난다? 이 애들 장난 같은 제단이 아닌 또 다른 제단을 만들고 있는 건가? 아니, 마법사가 이곳에 없으니 이미 완성되어 떠난 것이리라.
“그렇다면 마법사는 새로운 제단에 있는 건가. 그곳으로…….”
크라이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레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에 크라이어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레타의 답과 마법사의 행방이 모순되고 있었으니까. 그런 크라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레타가 입을 열었다.
“그 황녀.”
하나, 그녀의 붉은 입술이 속살거리는 건 마법사의 행방이 아니라, 올리비아였다.
뱀처럼 크라이어의 팔을 휘감아 안은 그레타가 올리비아가 머무는 방 쪽으로 시선을 흘리며 덧붙였다.
“거슬리지 않아요?”
과거의 어느 날 엿봤던 크라이어를 부르던 그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오늘.
‘내가 아니라고 할 때까지, 그는 내 손님일 거야.’
그레타의 입매가 비정상적으로 뒤틀렸다.
“저는 거슬리네요.”
아주, 아주 많이 거슬렸다. 그레타의 속살거림에서 들끓는 건 단순한 살의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조금 더 고약하고 구역질 나는, 지독한 무언가였지. 그리고 그건 명백히 올리비아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거슬리는 건 치워야 하지 않을까요?”
비단같이 매끄러운 속삭임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순간, 크라이어의 검붉은 광야에 모든 것을 집어삼킬 만큼 광폭한 바람이 휘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