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내 곁에 있어.2022.01.10.
하늘은 높고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 정오를 향해 가는 태양 아래, 제국의 황가인 볼셰이크의 문양이 선명한 마차가 질주하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서도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올리비아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서류를 넣을 자리도 부족하다며 사용인 한사람 대동하지 않고 홀로 마차에 탄 그녀는 곧 작은 창을 열었다.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찡그린 올리비아는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얼마나 남았어?”
허공으로 흩어진 질문에 답이 돌아왔다.
“이대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리면 해가 질 무렵엔 도착한다.”
마차와 가장 가까운 거리, 황녀의 호위기사들보다 더 가까운 곳에서 말을 몰던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한숨을 흘렸다.
“빨리 가는 건 좋은데, 빨리 가는 게 별로 좋진 않네.”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다름아닌 노르덴 국. 고대신의 뜻대로 세계를 정화시킨답시고, 대륙 전쟁을 일으켜 피로 바다를 메울 젠장할 것들의 소굴이 아닌가. 크라이어의 노예 낙인을 지워버릴 방법도 그곳에 있을 터. 한시라도 빨리 가서 마법사의 목덜미를 흔들며 문제를 해결하고 싶기도 했지만……. 올리비아를 네 번이나 죽인 건 크라이어였지만, 그를 짐승으로 다루며 휘두른 원인은 마법사다. 그런 자와 곧 얼굴을 맞대야 하니 그리 기꺼운 일은 아니리라. 어딘가 먼눈으로 과거를 더듬던 올리비아의 시야에 한낮의 달과 같은 은빛이 물결쳤다. 검붉은 시선이 푸른 하늘을 찌르고 들어왔다.
“내 곁에 있어.”
귓바퀴를 타고 구르는 그의 속삭임에 올리비아는 웃어버렸다.
“네 곁에 있겠다.”
지킨다는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는 그녀를 지키리라 속삭이고 있었다. 정말로 그녀의 ‘기사’같지 않은가. 제 입으로 ‘나의 기사’라 했지만, 크라이어는 절대 그녀의 기사가 아니었다. 같은 목적을 가진, 한가지 목표를 향해 죽어라 뛰는 동지라면 동지였지……. 그런데도 그의 말이 꽤 그럴듯해서 어쩐지 울렁거리던 속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올리비아는 이내 원래 하려던 말을 꺼냈다.
“아이작, 들어와.”
-달그락.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무것도 없는 마차 지붕에서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서류 사이로 마법처럼 아이작이 나타났다. -탁. 올리비아는 창문을 닫았다. 제국 기술의 총체가 담긴 마차이니 암습에 대비한 장치는 물론이고 방음까지 완벽했다. 물론 크라이어에게는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마차 벽을 사이에 두고도 올리비아에게 했던 말을 지킬 수 있었다. 곁에 있으리라는…….
“부르셨습니까.”
아이작이 여우눈을 휘며 웃자 올리비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챈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답에 올리비아가 잠시 고개를 기울이다 한번 더 물었다.
“크라이어도?”
“그분은 인간에서 제외하도록 하죠.”
웃음기 섞인 말이었지만, 진심만이 눌러 담겨 있기도 했다. 그에 올리비아 역시 그 역시 인간이라거나, 그런 식으로 구분짓지 말라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런 껍데기뿐인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크라이어는 여러 면에서 인간에서 벗어 났다. 그를 깨운 마법사가 광기에 차 떠들어댔던, 조각난 그의 과거에서도 크라이어는 대단히 강한 이라고 했었다. 그런 본신의 능력에 고대신의 노예가 됨으로써 받은 선물, 아니 빌어먹을 대가로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얻었으니. 그는 괴물이다. 그리고 올리비아 역시 네 번 죽고 네 번 회귀했으니 여러 면에서 인간에서 벗어났으리라. 그러니 그와는 조금 다른 괴물이라 할 수 있겠지. 괴물이 된 남자와 괴물이 된 여자. 어쩌면 운명일지도. 불현듯 떠오른 헛생각을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린 올리비아는 아이작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가 처음 그녀 앞에 섰던 날. 올리비아는 거창한 예를 취하려는 그에게 손을 휘저으며 앞뒤를 다 떼버리고 곧바로 본론부터 제안했다.
‘제국에 머무르고 싶다고 했지? 머물러도 좋아. 내가 허락하지. 물론 밥값을 해야 할 거야.’
‘밥값이라면…….’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와 짧게 눈짓을 주고 받았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 잘 들어. 믿건 믿지 않건, 네 자유야. 하지만 믿는 쪽이 밥값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렇게 그녀는 고대신과 마법사의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이야기 전부는 아니었다. 이를 테면 그녀가 회귀를 네 번 했다는 사실 같은 건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이윽고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자 아이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단지 마음의 창이라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여우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 그러다 문득 제국에서 당겨 주최했던 대회의의 주제가 ‘세계 평화’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회의의 주최자는 눈앞의…….
‘고대신과 마……법사요. 거기다 대륙 전쟁에 세계 멸망까지.’
제국의 황녀가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더없이 진중하게 꺼낸 이야기치고는 지나치게 터무니없다.
‘이야기 시작 전에도 말했듯이 믿건 믿지 않건 네 자유다.’
올리비아의 건조한 목소리 뒤로 아이작의 질문이 뒤따랐다.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건 필시 비밀이라는 뜻이겠죠.’
누구나 의문이 들 것이다. 비밀을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발설하는가. 하나, 그 이유 같은 건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야 하는 법. 아이작이 어떤 발버둥을 친다해도 크라이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저는 무엇으로 밥값을 해야 합니까?’
‘정보.’
짤막한 답이 었지만, 아이작에게는 충분한 답이기도 했다. 이윽고 무언가 혼자만의 결정을 내린 아이작은 깊이 허리를 숙였다 편 후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언제건 밥값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만.’
지나가던 공작새가 봐도 꾸며낸 듯한 난처한 표정으로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저는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소속이 그곳으로 되어 있…….’
아이작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무언가를 성의 없이 휘갈긴 그녀는 설렁줄을 당겨 서신을 한 통 보냈다.
‘이제 너는 제국 소속이야.’
그렇게 올리비아는 아이작의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결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아이작은 밥값을 하기 위해 노르덴 국에서 고대신에 관한, 아니 마법사에 관한 정보들을 빼내 올 것이다.
“네 밥값 말인데.”
“네.”
“만약 조금이라도 수상쩍은 낌새를 느끼거나, 아니 전날 꿈자리라도 사나웠다면 그만둬.”
마법이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며, 그 가능의 범위조차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지 않나. 올리비아가 보기에는 마치 마법처럼 움직이는 아이작이라 해도 실제 마법사는 아니다. 만약 아이작이 꼬리라도 밟힌다면, 최악의 경우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그에게 전했던 이야기 전부가 마법사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도 있다. 지나친 비약이고, 너무 나간 예상일 수도 있지만 상대는 마법사. 그것도 고대신이니 나발이니 떠들어대는 미친놈이다. 어떤 경우라도 대비해야만 하리라.
“명심해.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무조건 도망쳐. 네 모든 것을 걸고.”
경고인지 당부인지 걱정인지 모를 올리비아의 말에 아이작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 크라이어가 말한 대로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린 마차는 저녁 노을이 저물어 갈 무렵, 노르덴 왕궁에 도착했다. 올리비아를 맞은 이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노르덴 국의 왕세자였다.
“황녀 전하.”
그녀를 향해 정중한 예를 취하는 왕세자에게 적당히 인사를 건네면서도 올리비아의 눈은 그의 주변을 면밀히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미간에 희미한 금이 갔다. 보이지 않았으니까. 크라이어를 몇 번이나 찔러 익히고 또 익혔던 마법사의 외양. 그와 일치하는 이가 왕세자 주변에 없었다.
‘마법인지, 세뇌인지 그런 것 때문에 국왕 곁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분명 그리 말했지 않나. 그러니 국장이 치러지는 지금, 그 마법사는 반드시 차기 노르덴 국의 왕인 왕세자 곁에 있어야만 할 터. 한데 왜? 설마 왕세자 곁을 비울만큼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그 중요한 일이란건 무엇이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의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 뿐. 하지만 곧이어 들리는 왕세자의 말에 더는 생각을 이어갈 수도 없었다.
“……하여 이 기회를 빌어 저희 쪽 기사가 돌아와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왕세자의 말에 올리비아는 일단 되물었다.
“기……사라면?”
왕세자는 입밖으로 답을 내는 대신 올리비아의 곁을 지키는 크라이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그는 크라이어에게 시선을 둔 채 답했다.
“노르덴 국의 기사이니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야 되겠지요.”
덤덤한 그 말에 올리비아는 선뜻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리라 예상은 했다.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제국에 잡아 두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노르덴 국의 기사였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사람이 왕세자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마법사에게는 크라이어가 그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일 테지만, 노르덴 국에서는 아니지 않나. 국왕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면서까지 그를 앞세우는 마법사가 이런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기사 하나를 귀환시키라고 황녀에게 요구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올리비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왕세자는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아니, 누군가를 소개했다는 것이 옳으리라.
“그 문제에 관해 전권을 맡긴 이입니다. 아울러 국장 기간에 황녀 전하를 모실 책임자이기도 하고요.”
아니, 그러니까 왕세자씩이나 되면서 왜 일일이 그런 말을 황녀에게 하는……. 어이가 없는 일이 어이가 없는 타이밍에 연달아 일어나다 보니, 올리비아의 신경이 잘 갈린 바늘처럼 바싹 곤두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왕세자의 뒤에서 이미 저물어 버린 노을빛과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이 일렁거렸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화려한 미인. 올리비아가 처음 만난 그레타에 대한 감상은 그 정도였을 뿐. 그레타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림과 동시에 크라이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올리비아를 제 뒤쪽으로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레타.”
그의 나지막한 부름에 올리비아는 간신히 무표정이 무너지려는 것을 막았다. 그레타. 그레타라면 분명.
‘내게 낙인을 찍은 건 그레타다. 마법사의 딸.’
이렇게? 이렇게 갑자기 마법사, 아니 마법사의 딸과 삼자대면을 한다고? 이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조금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태풍이 불어닥친 올리비아의 머릿속과는 달리 크라이어와 그레타는 고요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을 뿐. 그렇게 올리비아, 크라이어, 그리고 그레타.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