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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나의 기사에게 승리를. (36/146)

#36. 나의 기사에게 승리를.202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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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나였지만, 그것만으로 의사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했다. 귀찮은 벌레들을 쫓아내기 위한 작업의 시작. 크라이어는 광오하게, 그래. 그야말로 미칠 듯이 오만하게 모두를 찍어누르며 올리비아 앞에 다다랐다. 다음 순간. 크라이어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16549710679915.jpg“흐, 흐윽.”

16549710679915.jpg“크허억.”

16549710679915.jpg“허, 허억허억허억.”

휘몰아치던 살기가 사라지자 석상처럼 굳어졌던 이들이 하나둘 다리가 풀려 주저앉거나 쓰러졌고, 예외 없이 참았던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이윽고 크라이어는 느릿하게 모두의 눈에, 머리에 확실히 각인되도록 천천히 올리비아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단 한 번의 등장으로 연무장을 쑥대밭으로 만든 포악하고 거칠 것 없는 최악의 짐승이 단 한 사람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다.

16549710679929.jpg“황녀 전하.”

저 깊은 공동에서 울리는 듯 나지막한 부름이 모든 이의 귀에 쑤셔박힌 순간. 올리비아의 입술이 열렸다.

16549710679934.jpg“크라이어.”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녀가 입을 열자 공기가 바뀌었다. 크라이어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다 잠시 숨을 고르듯 그의 곁에 낮게 깔리면서도 으르렁거리던 공기가 올리비아의 발치에 엎드리는 듯 완전히 고요해졌다. 그곳에 있는 모두가 본능적으로 올리비아에게로 시선을 옮겼고, 이윽고 다른 의미로 얼어붙었다. 태양 빛이 반사되는 만개한 장미보다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과 오늘의 하늘보다 더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크라이어와는 다른 의미로 모든 이의 시선을 붙잡았으니까. 이윽고 크라이어와 눈이 마주친 올리비아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국의 유일한 황녀다운 어마어마한 위엄과 눈을 찌르는 화려한 미소를 마주한 크라이어의 평 역시 아까 올리비아만큼이나 간결했다. 잘하네. 서로를 향한 감상은 똑같기도 했고……. 마주한 둘은 서로만을 오롯이 눈에 담으며 동시에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물론 서로를 향한 감상처럼 그 미소마저 똑같다는 사실을 이곳에 모인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둘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만큼이나 느릿하게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16549710679934.jpg“나의 기사에게 승리를.”

이어 그녀의 손에서 새하얀 손수건이 떨어졌다. 하늘하늘 꽃잎처럼 낙하하는 손수건을 향해 손을 뻗은 크라이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름이나 문양 혹은 아주 작은 이니셜조차 없는 손수건. 하지만 그녀의 온기는 희미하게 남아, 그의 손바닥으로 번지고 있었다.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낙인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뒤로한 채 올리비아의 손수건은 크라이어의 품으로 사라졌다. 그 직후, 황녀의 입에서 나온 ‘나의 기사’라는 말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 -둥! 두두둥! 북소리가 울렸고, 심판이 근엄하게 외쳤다.

16549710679915.jpg“그만!”

두 번째 시합을 무승부로 끝내버린 심판은 곧 세 번째 시합의 대전자를 불러들였다. 제비뽑기로 뽑은 대진이었기에 순전히 운으로 크라이어의 상대가 되어버린 갈색 머리 기사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주변에 있던 이들이 바퀴벌레처럼 흩어졌고, 얼떨결에 제국의 기사들에 의해 연무장 한가운데 자리했다. 그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갈색 머리 기사는 크라이어와 마주했다. 기실 승부는 시작도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리라. 크라이어의 찍어 누르고, 찢어발기는 듯한 살기를 경험한 이들 중 누가 그의 앞에서 검이나 제대로 쥘 수 있을까. 당연히 갈색 머리 기사는 항복을 외치려 했지만, 크라이어는 그럴 틈도 주지 않았다. -캉!

16549710679915.jpg“흐어어억!”

뭔가 형편없는 소리와 함께 날붙이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때렸고, 직후 날카로운 검날이 미끄러지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까가가각! 빈틈없이 맞붙은 검날과 두 대전자. 소리만 들어보면 매우 그럴싸했지만……. 크라이어와 검을 맞댄 기사는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만약 이를 드러내며 웃는 크라이어의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당장 검을 놔버리고 기절했으리라.

16549710679929.jpg“내가 허락하기 전에 검을 놓으면.”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규정 따위가 무슨 상관일까. 눈앞에 있는 짐승은 진정으로 그의 목을 찢어발기는데 한치 주저도 없으리라. 기절하면 목이 뜯기니 죽기 직전까지 버텨야만 했다. -캉! -카캉! 크라이어는 마치 갈색 머리의 기사를 가지고 놀 듯, 아니 그를 가지고 놀면서 꽤 그럴듯한 볼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심드렁한 눈으로 대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크라이어라면 이곳에 모인 이들 전부가 한 번에 달려든다 해도 모조리 땅에 눕히리라.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상대에게도 상처 하나 없이. 그만큼 그는 압도적이었으니까. 애초에 대전을 하는 것도 추가적인 일이었을 뿐. 그가 충격적으로 등장해 올리비아가 그를 ‘나의 기사’라고 하는 순간 모든 작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16549710679934.jpg“왜 저리 놀고 있어.”

불퉁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 그녀의 오른쪽과 왼쪽에 마치 날개처럼 위치한 이들, 기사 단장들도 고개를 흔들었다.

16549710679915.jpg“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자, 다른 이들의 눈썹이 일렁이더니 하나, 둘 서로를 향해 눈짓했다.

16549710679915.jpg“자네도?”

16549710679915.jpg“흐음.”

16549710679915.jpg“다들 그런 것 같은데.”

그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올리비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눈가를 둥글게 접어 웃을 뿐. 그들 중 직설적으로 할 말은 하고야 마는 단장이 입을 열었다.

16549710679915.jpg“저희들 전부에게 데려가신 겁니까?”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의 답에 기사 단장들은 서로를 향해 눈짓했다. 그들은 모두 이런 대회에 나올 필요도 없고, 만약 나온다면 그야말로 ‘지도’를 위해 나설 이들이었다. 제국의 검. 제국의 방패. 그들이야말로 볼셰이크 제국의 힘을 대표하는 이들이었으니까. 한데……. 눈짓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저 노르덴 국의 이름 없는 기사에게 패배한 눈치가 아닌가.

16549710679915.jpg“이름 없는 기사라…….”

16549710679915.jpg“전하께서 첩…… 크흠, 크흠.”

성마르게 입을 열었던 기사 단장이 괜히 헛기침을 하자, 그와 막역한 단장이 수습했다.

16549710679915.jpg“전하께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탁월하심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16549710679915.jpg“이를 말입니까. 저 정도의 실력자가 숨어 있었다니.”

혀를 내두르던 기사 단장들은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후 단장들 중 가장 오랜 기간 직을 역임한 이가 입을 열었다.

16549710679915.jpg“노르덴 국이었지요. 송구합니다, 전하. 저희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군요.”

그의 말에 다른 기사단장들도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방패이자 창이며, 기둥인 그들의 의무는 단순히 제국 기사단을 강하게 키우는 것뿐만이 아니다. 제국은 물론이요 타국의 인재, 그러니까 한 국가에서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 크게 될 이들을 파악하는 것도 그들이 해야만 하는 일 중 수위를 다투리라. 그러니 크라이어를 놓쳤다는 사실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그들을 돌아보지 않는 올리비아의 입가에 희미하게 쓴웃음이 번지다 사라졌다. 크라이어를 알아보지 못한 건 그들이 일을 못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대륙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크라이어는 드러나지 않고 몸을 바싹 숙이고 있었을 뿐. 게다가 기사나 검술로 유명하지도 않은, 아니 아예 존재감조차 희미한 노르덴 국이 아닌가. 제국과 꽤 가까운 거리에 있는 나라지만, 그것 외에는 뭐 하나 특별할 것 없는 나라다. 그래서 대륙 전쟁이 발발 했을 때, 처음 대처가……. 거기까지 떠올린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수라장을 지나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을 때 올리비아는 최선을 다해 전쟁을 준비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지 않나. 크라이어라는 괴물 앞에서 어떤 준비나 대응도 소용 없다는 사실을 뼛골이 갈리는 경험으로 얻었다. 그리고 네 번의 대륙 전쟁에서 그녀의 뒤에서 고개 숙인 기사 단장들은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괴물이 일으키는 해일을 막으려 했지 않나.

16549710679915.jpg‘전하! 전하, 가십시오!’

16549710679915.jpg‘크으윽. 제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테니…….’

  단장들의 피로 일그러진 얼굴이 잔상처럼 흔들렸다.

16549710679934.jpg“괘념치 마세요. 나의 기사가 특별한 것일 뿐이니.”

올리비아는 눈을 깊이 감았다 떴다. 기사 단장들의 눈에도 크라이어의 실력을 완벽히 각인 시켰으니 이 작업을 끝내야 할 때다. 그 순간,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크라이어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카라라랑! 퍽. 검이 경쾌하게도 날아가는 소리 뒤로 살벌하게 연무장 바닥에 꽂히는 소리가 울렸다. 갈색 머리 기사는 검을 쥔 자세 그대로 넋이 나가버렸고, 심판은 선언했다.

16549710679915.jpg“그만.”

구태여 승패를 가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리라. 지나가던 원숭이가 봐도 누가 승자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 크라이어는 그대로 심판을 지나쳐 단상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첫 시합과 두 번째 시합의 대전자들처럼 대기하는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하나, 누구도 그의 걸음을 막지 않았다. 고작 한 번의 대전에서 승리한 크라이어는 마치 최종 승리자가 된 것처럼 움직였다. 그는 거침없이 올리비아 앞에 선 채, 그녀의 손수건을 제 품에서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느리게 보이는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며 둘을 주목했다. 곧 크라이어는 그는 올리비아와 눈을 맞춘 채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손수건에 입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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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중하게. 경애를 담아. 검붉은 대지 위로 푸른 제비가 낮게 날았다. 스칠 듯 말 듯 아주 낮은 활공을 하는 제비의 뒤로 검붉은 대지가 울렁거리는 순간. 그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이 이상 그녀를 들여다본다면……. 어쩐지 바짝 마른 입안에서 혀를 한번 굴린 크라이어는 이내 올리비아에게서 멀어졌다. 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올리비아가 심판을 향해 눈짓했다.

16549710679915.jpg“대결을 원하는 자가 있는가!”

대결하는 대상을 지칭하지 않았지만, 지금 연무장에 서 있는 이는 크라이어 뿐. 감히 누가 나설 수 있을까. 크라이어는 단지 팔을 늘어뜨린 채 검조차 뽑지 않았건만, 용기가 아닌 만용을 부리는 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들 모두를 내려다보는 검붉은 눈동자에서 줄기줄기 뻗치던 살기를 잊을 수 없었으니까. 외곽의 귀족들 또한 얼어붙은 채 크라이어와 올리비아를 번갈아 보기만 할 뿐. 적당한 시간이 흐르고 심판을 맡았던 기사 단장이 뒤로 물러나자, 올리비아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느릿하게 연무장과 외곽을 훑는 것만으로 그곳을 완벽히 장악했다. 질식할듯한 두려움과 당혹감에 크라이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이들의 눈이 어느새 올리비아에게 꽂혔다. 올리비아의 입가에 화려한 미소가 번졌고, 붉은 입술이 종막을 고했다.

16549710679934.jpg“폐막한다.”

황녀의 눈에 들기 위해 무투 대회를 손꼽아 기다리던 기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지원하던 타국의 이들 역시 이 갑작스러운 대회의 끝에 불만을 제기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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