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그거 마음에 드는군.2021.12.30.
시간은 팽팽한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무투 대회 당일.
“후우우.”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이. -달칵, 달칵. 끊임없이 검집에서 검을 넣다 빼는 이.
“하하하하! 이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크게 웃으며 긴장을 떨치려는 듯 더 크게 떠드는 이. 입술을 짓씹으며 불안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이까지. 황궁의 중앙 연무장에 모인 무투 대회 참가자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시선은 한곳에 모였다. 연무장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높디높은 단상. 그 자리에 위치한 단 하나의 의자. 엄청나게 화려하고 섬세하지도, 그렇다고 위엄 있거나 거대하지는 않은 적당한 크기의 단출한 의자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앉을 이는 다르다. -둥! 둥! 둥! 연무장 어딘가에서 울리는 큰 북소리와 함께 황궁의 사용인의 목소리가 하늘 높이 솟았다.
“황녀 전하 드십니다!”
사용인이 입을 다물자 단숨에 연무장에는 적막이 내렸다. 단상의 뒤쪽에서 작고 가냘픈 인영이 흔들린다 싶더니 이윽고 황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이라도 보기를 고대하며, 타국의 기사들이라고 들어온 놈들을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밤놀이를 하게 만든 이. 단상에 올라선 올리비아는 그녀 뒤의 의자처럼 단출하기 그지없는 차림이었다. 한창 서류의 산맥을 치워내다 바로 나온 참이니 화려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모시는 사용인들이 그녀의 발치에 매달려 애걸하지 않았나.
‘전하, 제발 옷이라도 갈아입으심이.’
‘망토, 망토라도!’
‘전하 입술 연지라도 한번 물어주시면!’
물론 올리비아는 그 모든 것을 손짓 한 번으로 물려버렸다. 갖춰진 복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거적을 입어도 빛날 수 있지만, 보석으로 휘감으면 더 빛나는 법이니까. 단지 그때가 지금이 아닐 뿐. 이번 무투 대회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크라이어가 적당히 힘을 써 수군거리는 이들과 위험한 밤놀이를 하는 놈들의 입을 닥치게 만드는 것. 그렇기에 올리비아에게 지금은 화려한 보석 따위는 필요 없었다. 가냘픈 체구의 그녀를 휘감고, 연약한 발목 근처에서 스멀대다 공간 전체를 짓누르는 위압감 하나로 그런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니까. 올리비아는 황궁의 중앙 연무장에 빼곡히 모인 이들을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내려다보았고, 그들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꿀꺽. 누군가의 목젖이 울렁거리며 침이 넘어갔다. 볼셰이크 제국의 핏줄. 대륙의 시작부터 함께 했다 일컬어지는 가문의 유일한 후예. 엷은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고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사위에 나뭇잎이 서로의 몸을 비비는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울리는 때. 올리비아의 입술이 열렸다.
“무투 대회를 시작한다.”
-둥! 두둥!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을 울리고 하늘로 치솟는 북소리가 울렸다. 이어 올리비아가 손을 들자 북소리가 멎었고, 그녀는 숨을 크게 내쉬며 외쳤다.
“그대들에게!”
무투 대회 참가자들은 각자의 무기를 가슴에 붙이며 그녀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고, 그들의 머리 위로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내렸다.
“무운을.”
-쿵! 다음 순간, 발을 구르는 소리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쿵, 쿵쿵. -쿵쿵쿵. 무투 대회 참가자들이 일제히 오른 다리를 들어 땅을 내려치고 있었다. 하나, 혹은 둘씩 맞지 않던 발 구름이 이윽고 완전한 하나가 되어 대지를 울리는 순간. 그들 모두의 얼굴에 희열과 기대감, 긴장 등 온갖 감정들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저 땅을 내려치는 소리에 지나지 않건만, 어째서나 이렇게 가슴을 울리고 피를 끓게 만드는 것인지. 연무장을 둘러싼 채 멀찍이서 그들을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도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정렬!”
이윽고 시작된 첫 번째 시합. -챙! -까가가각. 검이 부딪치고 검날이 맞물려 미끄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를 몇 분. 고작 몇 분 만에 누가 봐도 승패가 확연히 갈리자 심판을 맡은 제국 기사단의 단장이 외쳤다.
“그만!”
그러자 일시에 두 참가자의 움직임이 멎었고, 승자는 빠르게도 결정되었다. 첫 시합을 지켜보던 어느 기사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만하란다고 그만해야 한다니.”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가 아닌 어디까지나 실력 고하를 나누는 대회였기에 진검은 허용되나, 심판이 그만을 외치면 반드시 멈춰야만 했다. 물론 어느 정도 피를 보는 것은 허용되나 상대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 상태. 타국의 기사끼리 드잡이질을 하다 제국에서 사망자가 나와 버리면 귀찮아지기에 올리비아가 규칙으로 못을 박아버렸으니까. 첫 시합을 별다른 감흥 없이 지켜보던 어느 귀부인이 부채 뒤에서 속삭였다.
“어떤 이가 우승할까요?”
“글쎄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그렇죠. 이번 무투 대회는 이례적으로 예선도 치르지 않고 시작되었으니까.”
“게다가 참가자들이 타국에서 온 기……사? 들이 모두 포함되었다죠.”
기사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이의 입가에 비소가 걸렸고, 주변에 있던 이들 역시 비슷한 표정을 걸었다.
“싱거운 전투를 보겠군요.”
“그래도 그 유명한 기사를 볼 수 있잖아요.”
“아아, 그.”
그 말을 끝으로 다들 입을 다물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 모르는 이가 없을 터.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연무장을 가득 메운 이들 중 ‘그’를 찾았지만, 멀리서 볼 수 있는 건 수많은 이의 각기 다른 머리 색뿐. 참으로 대단하게도 우아하게 목을 길게 뺀 이들이 그중 은빛을 찾았다. 황녀 전하께서 대회의에서 집어온. 그래, 그야말로 집어온 노르덴 국의 이름 모를 기사.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꽁꽁 숨겨 두는 바람에 알려진 거라고는 머리카락과 눈 색, 그리고 그 황녀 전하의 눈을 한눈에 빼앗을 만큼 조각 같은 얼굴뿐. 아주 가끔, 흘러나오다 마는 소문 중에는 정돈되지 않은, 아니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같은 자라 했던가.
“흐음, 보이지 않네요.”
“아무래도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연무장 외곽의 귀족들의 잘 포장되고 여유로운 대화와는 달리, 연무장의 숨소리와 간헐적으로 들리는 말들은 거칠고 숨이 막혔다.
“젠장, 저 자식! 꼴에 기사라고 검을 새로 받았군.”
“흥, 남 말할 땐가. 그러는 네 놈도!”
눈을 번뜩이며 몸을 움찔거리는 이들과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하는 자들. 더해서 기사의 ‘기’자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어쨌건 황녀의 눈에 들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온 이들까지. 이윽고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놈은 어디에 있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무장에 모인 참가자들의 눈이 희번뜩하게 빛나며 이리저리 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시야 어느 곳에도 ‘그놈’은 찾을 수 없었고, 또 다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설마 나오지 않은 건가?”
“그럴 리가! 이번 대회는 황녀 전하께서 직접 명하셨지 않나. 타국에서 온 기사들은 모두 참가하라고!”
성마르게 분통을 터뜨리는 누군가의 말에 매끄러운 금발을 뽐내는 기사는 혀를 찼다.
“쯧, 어디건 예외는 있는 법이거늘.”
황녀 전하께서 주최하신 무투 대회이니 전하의 곁을 독차지하고 있는 그놈이 몇 마디 베개송사를 건넸다면…….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은 끝을 맺지 못했다. -쿠르릉. 연무장으로 통하는 여러 개의 문 중, 가장 거대한 문. 그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굉음을 토해냈으니까. 조금씩 열리는 그 문은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할 때나 쓰는 것이었기에 굳게 닫혀 있었다. 한번 열기 위해서는 잘 훈련된 군인 십여 명이 달라붙어야만 하는 무거운 문이 열리고 있었다. 연무장에 모인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외곽에서 차를 마시던 귀족들 역시 눈을 크게 뜬 채 서서히 열리는 문만 바라보았다. -쿠우웅. 마침내 거대하고 지독하게 무거운 문이 완전히 열렸을 때.
“저, 저자는!”
“맙소사!”
연무장 안은 물론이거니와 외곽에서도 경악이 터져 나왔다. 환한 대낮인데도 달을 베어놓은 듯 날카로운 빛을 띠는 은발과 불길하게 번뜩이는 검붉은 눈동자. 크라이어는 활짝 열어젖힌 문으로 느긋하게 걸어들어왔다.
-쿠쿵! 이윽고, 그의 뒤로 거대한 문이 닫히면서 먼지구름을 만들어 냈지만, 누구 하나 눈을 깜박이지 못했다. 아니, 누구 하나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음이 옳으리라. -저벅저벅. 들릴 리 없을 터인데 그의 걸음걸음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건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저……저 문을 혼자?”
“그럴 리가 없…….”
크라이어가 홀로 열고 들어온 ‘문’에 대해 아는 귀족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연무장의 참가자들. 그들은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놈의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폭급한 살기가 그들의 목을 죄고 있었으니까.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크라이어가 그들을 향해 다가서는 만큼 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이마에서는 핏대가 솟았다.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속눈썹이라도 흔들리는 순간 목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들은 사냥감이었고, 크라이어는 언제든 목을 물어뜯을 수 있는 피라미드 꼭대기의 포식자였다. 두 번째 시합은 이미 시작되었건만, 시합을 하고 있는 이들도 검을 맞댄 채 허옇게 질린 얼굴로 크라이어를 바라보고 있을 뿐. 그 공간의 주인은 크라이어였다. 그리고 그 모든 이와는 달리, 홀로 자유로운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한쪽만 올라갔다. 아마도 크라이어가 봤다면, 그 비열한 웃음은 뭐냐고 물었을 그런 미소이리라. 잘하네. 연무장을 말 한마디 없어,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쑥대밭으로 만드는 그를 향한 감상은 지극히 짧았다. 당연히 그녀도 크라이어에게서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살기를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의 살기가 그녀만 비껴갔으니까. 어떻게 한지 모르겠지만, 그는 그렇게 했고 올리비아는 홀로 편히 숨 쉬고 있었다. 대회 시작 몇 분 전.
‘대회에서 보여 준답시고 힘을 숨길 필요 없어. 다른 놈들하고 같은 시간에 와서 그놈들이 지껄이는 헛소리도 들을 필요 없고.’
크라이어가 처한 상황이라면 으레 일어나는 사건이 있지 않나.
‘괜히 대기하면서 이놈 저놈 소리 들으면서 꾹 참다가 대회에서 멋지게 날려버릴 필요 없다는 말이야.’
애초에 이놈 저놈 소리를 크라이어가 한 번이라도 참아 줄지 의문이긴 했지만……. 고개를 흔든 올리비아가 말을 이었다.
‘등장할 때부터 압도적으로 눌러버려. 숨도 못 쉬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꿈틀거리지도 못하게 짓밟아 버려.’
답 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크라이어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지금. 과연 압도적이지 않은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삼킨 올리비아는 이윽고 크라이어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