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쓸모를 증명해 봐.2021.12.27.
“경쟁자를 제거한 것이 아니었나.”
“아니요, 수고를 조금 덜어드릴까 해서.”
아이작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덧붙였다.
“저는 당신께 잘 보이고 싶거든요.”
대단히 모호한 말이었다. 기실 누군가가 지금의 크라이어에게 잘 보일 만한 목적은 하나밖에 없을 터. 황녀의 곁을 독차지 하고 있는 자이니 그에게 잘 보여 황녀에게 접근하고 싶다는 것. 물론 그런 의도를 가진 이가 아이작처럼 대놓고 ‘잘 보이고 싶다’라고 말하진 않겠지만. 하지만 아이작은 다시 강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께 잘 보이고 싶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을 꺼내면 당연히 크라이어가 되물어야 할 터. 왜? 혹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라고.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그렇군. 수고했다.”
너무나도 간결한 답을 남긴 채 크라이어는 돌아섰다. 아이작은 진정으로 당황했다. 그렇지만 그는 당황할 시간조차 촉박한 나머지 다급히 외쳐야만 했다.
“아, 잠깐! 잠깐, 잠깐만요.”
어느 상황에서건 거의 당황한 적이 없고, 당황한다 해도 이렇게까지 급박한 목소리를 내본적이 없던 아이작은 부리나케 크라이어에게 다가섰다.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으시는 겁니까?”
아이작의 물음에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빠른 답이 돌아왔다.
“안 물어 본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눈앞에서 사라지려는 크라이어를 아이작이 간신히 붙들었다.
“좀 물어 봐 주십시오! 왜 황녀 전하가 아니라 당신께 잘 보이고 싶은지!”
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아이작의 기세에 크라이어는 그제야 그를 눈에 담고 피식 웃어버렸다. 올리비아의 첫 만남이 떠올랐으니까.
‘얼마면 돼!’
그리 외친 제국의 황녀가 제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줄 누가 예상했을까. 아 물론, 올리비아 본인은 익히 예상했었지만.
‘바짓가랑이? 필요하면 앞에 눕기라도 할 생각이었어.’
그리 말한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짓을 하건 당신을 잡아야 한다고 결심했으니까.’
약간 처진 동글동글한 눈과 가녀린 어깨. 평균보다 살짝 작은 체구의 황녀의 결심은 여린 겉모습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전쟁을 막고, 살고자 하는 의지는 그 어떤 강철보다 단단했으니까. 벌써 두 번째인가. 분홍 머리도 올리비아가 겹쳐 보였기에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을 허락해주었지 않나. 크라이어의 분위기가 누그러졌다는 사실을 기민하게 알아챈 아이작이 재빠르게 묻지도 않은 것을 답했다.
“황녀 전하가 아닌 당신께 잘 보이고 싶은 이유는 당신을 모시고 싶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치고 들어오는 아이작의 말에 크라이어는 조금 더 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당신은 강하니까요. 제 실력이 모자라 정확히 재단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압니다.”
아이작은 검 자루를 툭 두드렸다.
“황녀 전하께서 당신께 첫눈에 반해 곁에 두셨다면, 그건 얼굴이 아니라.”
여우눈을 접으며 웃는 아이작은 확신했다.
“강함 때문이겠죠.”
아이작은 틈을 주지 않고 곧바로 더없이 정중하게 주먹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물론 종자나 사용인은 못 하겠지만, 쓸모가 있을 겁니다.”
크라이어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를 처리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발, 그리고 또 한발 아이작을 향해 다가섰을 뿐. 아이작은 그를 향해 기척도 없이, 그야말로 최상위 포식자와 같은 크라이어에게서 눈을 떼지도 못했다. 찰나라도 시선을 돌렸다가는 당장이라도 목을 뜯길 것 같았으니까.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순간.
“쓸모를 증명해 봐.”
심연의 구덩이에서 흘러나오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작은 기회를 잡았다. 크라이어가 어둠 속으로 녹아들고, 아니 어둠이 되어 사라지고 얼마나 흘렀을까.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아이작은 숨을 토해냈다.
“헉, 허억 허억.”
이미 크라이어는 사라졌건만, 숨통을 찍어 누르는 듯한 지독한 압박감에서 이제야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는 멀쩡히 붙어 있는 목을 매만지며 여우눈을 접어 웃었다.
“반은 온 건가.”
시작이 반이라는 볼셰이크 가문과 진하게 얽혔던 조상님의 말씀도 있었지 않나. 그렇게 아이작은 밤중에 황녀의 궁 내밀한 곳까지 발을 들이밀고 살아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 대륙 전체에서 강자들이 모이는 건 아니었지만, 제국 내에서 내로라하는 이들은 모두 모이는, 소소하다면 소소할 무투 대회가 코앞까지 다가온 날의 오전. 황녀 궁에서 나선 올리비아는 황궁의 외곽, 제국 기사단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용인 한 명 대동하지 않은 그녀의 곁에는 단 한 사람.
“크라이어.”
그녀의 부름에 크라이어의 삐딱한 답이 돌아왔다.
“죽이지 말고, 팔다리도 날리지 마라. 긁힌 상처 정도는 괜찮다.”
우뚝 멈춰선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서류를 한바탕 끝낸 그녀에게 쉬어야 한다며 이마를 눌러 일어나지도 못하게 할 때는 언제고, 함께 가자고 하더니……. 똑같은 소리를 반복한다며, 1절만 하라더니 그 똑같은 소리를 할 게 뻔한 그녀와 함께 가겠다고 고집한 건 그가 아닌가.
“그래.”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래야.”
“내가 굳이 함께 가자고 했지. 하지만.”
그는 검 자루를 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하라고 한 건 아니었잖아.”
올리비아는 검 자루가 아닌 그의 팔을 퍽퍽 두드렸다.
“힘 조절이 안 될 수도 있다고 한 건 당신이잖아.”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강철같은 팔을 내려쳤지만, 솜방망이에 불과한 그 주먹에 크라이어는 어깨를 으쓱였을 뿐.
“제국의 검들과는 마주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그들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할 수 있을지는 상대를 해 봐야…….”
“그러니까 그 상대를 할 때 행여라도 죽이거나…….”
크라이어는 이야기 내내 진다거나 혹은 질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올리비아 역시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의 상대로 누가 오건, 그를 꺾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두 사람 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죽이네, 살리네, 팔다리를 날리네 마네 하며 전혀 귀엽지 않게 티격태격하기를 얼마간. 전체적으로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곳에 도착했다.
“이쪽으로.”
그녀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정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곧 담쟁이덩굴이 귀신같이 덮인 문 앞에 선 올리비아가 손짓했다.
“여기로 가자.”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통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숨겨져 있고, 비밀 문이라고 하기에는 눈썰미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발견할 애매한 문이었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선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를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대륙 전쟁을 네 번이나 겪다 보니 황궁의 통로란 통로는 다 외우게 되더라고.”
그 문을 통해 들어서자 순식간에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똑똑.
“들어와.”
안쪽에서 들리는 딱딱한 허락에 올리비아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정면으로 들이치는 태양 빛에 눈살을 찌푸리는 올리비아 앞에 순식간에 그림자가 졌다.
“전하를 뵙습니다.”
절도 있지만 대단히 간결한 예를 취한, 안경을 쓴 이를 향해 올리비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쑥 찾아왔지만, 단장, 시간 좀 내줘.”
“하명하십시오.”
“대련 한 번.”
그녀 역시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런 올리비아의 태도가 익숙한 듯 앞뒤 없는 말에도 그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올리비아의 질문 아닌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크라이어가 한발 앞으로 나섰고, 안경 쓴 이의 눈썹이 비죽 솟았다. 그 소문의 기사로군. 제국 기사단의 단장들 사이에서도 말이 나왔던 자가 아닌가.
‘언뜻 지나가다 봤지만, 허우대만 멀쩡한 놈은 아니었다.’
황녀궁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 그를 유일하게 먼발치에서나마 본 단장의 평가. 과연. 황녀궁에 우글우글 모여 있는 얼굴만 매끈한 놈들과는 다르군. 그는 대놓고 크라이어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턱짓했다.
“대련장으로 나가지. 전하께서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선수 쳤다.
“위험하니까 여기 있으라는 말하지 마. 위험할 일은 병아리 눈물만큼도 일어나지 않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까.”
딱 잘라버리는 그 말에 단장은 크라이어를 아까보다 더욱 자세히 살폈다. 거의 그를 해체할 듯 면밀히 뜯어보던 단장은 짧게 탄식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실 만하군요.”
제국 기사단의 단장. 제국, 아니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가 아닌가. 그런 그였기에 크라이어와 직접 검을 맞대지 않고, 골격과 기세, 그리고 올리비아의 한마디로 그의 수준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크라이어와 안경을 낀 단장이 마주했다. 시작을 알리는 신호나 목소리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둘을 한눈에 담은 직후. -챙! -까가가각! 날붙이가 부딪치며 짧은 불꽃이 튀어 올랐고, 올리비아가 눈을 한 번 깜박하자 어느새 둘은 검을 늘어뜨린 채 처음 자리에 서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크라이어와 검을 맞대고 몇 분, 아니 몇 초 지나지 않아 검을 늘어뜨린 단장은 올리비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에 올리비아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끝이야?”
“네. 제가 졌습니다.”
“뭐?”
대체 언제 졌단 말인가. 크라이어와 그가 대련장에 마주 선지 몇 초 지나지도 않았건만. 물론 그들만큼 강하지 못한 올리비아는 그들 사이에 어떤 공방이 오갔는지 알지 못한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대련’이기에 저 정도 강자들이라면 서로의 실력을 파악하는 즉시 승패를 알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금방?”
“네. 송구합니다.”
단장은 흔들림 없이 고개를 숙였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바라보았지만, 그 역시 말없이 고개를 숙일 뿐. 둘만이 아닌 상황이었기에 그의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하지만 올리비아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를 향해 재빠르게 다가섰다. 일단 그를 위아래로 훑어 혹시나 긁힌 상처라도 있나 살핀 그녀가 입을 열려는데 크라이어가 빨랐다.
“걱정하실 필요 없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에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크라이어가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기사 단장을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사실을. 하나, 그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강함을 가늠하는데 한 번의 대련으로 끝내는 건 어불성설. 올리비아는 안경을 낀 단장을 향해 돌아섰다.
“단장.”
“네.”
“모든 단장들에게 전하세요.”
그렇게 무투 대회가 얼마 남지 않은 햇살 좋은 어느 날. 제국의 검이자 방패인 기사 단장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올리비아를 향해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