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돌아오겠지.2021.12.23.
제국의 괜찮은 귀족? 아니지. 그 남자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절대 이름 없는 기사 따위는 아니리라. 아직은 그를 알아본 이가 황녀 외에는 없는 것 같으니 아이작에게는 다행이랄까. 모두가 그의 진가를 확인하고 나면, 그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겠지. 지금의 황녀와 같이.
“미리 점수를 좀 따둘까.”
여우눈을 길게 접어 웃은 아이작은 마치 그림자에 녹아 들어가듯 응접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 아이작이 응접실에서 모습을 감추고 밤이 깊어 갈 무렵.
“그만 먹을래.”
올리비아는 수저를 내려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웃으며 다시 수저를 건넸다.
“체력 회복은 해야지. 일은 해야 한다며.”
“그렇게 웃지마, 진짜 무섭다고. 눈이 안 웃고 있잖아.”
그가 쥐여주는 수저를 들기는 했지만, 올리비아는 노란 호박 수프를 휘적이기만 할 뿐.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나이가 몇인데 밥투정이야.”
“전에는 나보고 핏덩이라며!”
“그건 상대적인 거고. 먹어야 회복이 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전쟁을 겪었으니.”
하지만 그의 말에 올리비아는 아까보다 더 크게 고개를 저었다.
“굶주림을 겪을 만큼 전쟁이 오래 지속된 적은 한 번도 없어. 개전 이후 당신이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으니까.”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막을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붉은 해일. 거기까지 떠올린 올리비아는 별안간 배슬배슬 웃었다. 바로 그 붉은 해일이 이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통곡의 벽이 되어 그녀의 곁에 있으니까. 본데없이 날카로운 그 검이 그녀의 턱밑이 아니라 고대신, 아니 마법사의 턱 밑에 겨눠졌다.
“뭐냐, 그 웃음은.”
“뭐, 왜, 뭐. 그보다 말이야.”
뻔뻔스럽게 턱을 치켜들던 올리비아는 이내 그의 곁으로 종종걸음으로 바짝 다가섰다.
“당신이 강제로 재운 덕분에 이제 열 안나. 그냥 봐도 알잖아.”
눈을 번뜩이며 까치발을 한 그녀는 별안간 크라이어의 손에 양 뺨이 잡혔다.
“호야?”
오리입이 된 채 뭐냐고 묻는 그녀의 입으로 먹기 좋게 잘린 휘낭시에가 쏙 들어왔다.
“이거라도 먹어.”
레몬 향이 확 풍기는 휘낭시에를 오물거리다 넘긴 올리비아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손에서 레몬 향이 폴폴 풍기는 달콤한 휘낭시에가 나오니까.”
“나오니까?”
“너무 이상해.”
그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나머지 휘낭시에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단 걸 싫어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이상하고.”
“즐기지 않는다고 하면 조금 덜 이상하겠지.”
“아니, 입에 넣는 거 자체가, 합.”
“그거 먹고 거기까지 해.”
이번에는 얼그레이 향의 마들렌을 오물거리던 올리비아가 쌉쌀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 직후, 그녀 주변에서 달콤한 향을 풍기며 한들한들 떠다니던 공기가 한 번에 확 가라앉았다.
“들었지?”
맥락 없이 툭 나온 질문에 마찬가지로 서늘한 공기를 휘감은 크라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노르덴 국에서 온 꼭두각시도 같은 꼴이 되었다고.”
“응. 둘 다 갑자기 불에 타버렸다고 했어. 그리고.”
그녀는 손을 더듬어 서류 한 장을 건넸다.
“거기 붉은 줄이 있는 부분.”
“불에 탄 시체 외에는 그을음조차 없었다?”
“깨끗했대.”
고개를 끄덕인 올리비아는 입 바로 옆에 손을 붙이며 목소리를 한껏 죽였다.
“마치 마법처럼.”
턱을 아래로 내린 채 눈만 빠끔 위로 뜨며 올려다보는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마법이군.”
“아마도?”
“고대신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 동시에 기괴한 불에 휩싸여 죽었다면 확실하겠지. 그러고 보니.”
크라이어는 서류를 내려두며 말을 이었다.
“회귀 전에도 범인이 불에 탄 채 발견되었다고 했었지.”
“응.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네. 그렇다면 그때도 마법사의 입김이 닿았던 거겠지?”
“그래.”
올리비아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마법이란 정말 대단하네. 노르덴 국에서 황궁에 있는 사람을 둘이나 태워 죽일 수 있다니.”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턱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이상하기도 한데?”
“마법이 이상한 건 특별한 일이 아니지.”
“아니, 마법으로 이런 짓을 했다는 게 이상한 게 아니라. 이런 짓을 할 수 있으면서도 구태여 당신을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켰…… 아.”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올리비아의 미간에 깊은 계곡이 생겼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미간을 슬슬 문지른 크라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를 원한다고 했었잖아.”
“그러게…… 전쟁을 해야만 피가 흐르니. 취향 참.”
코가 삐뚤어질 만큼 지독한 피 냄새가 나는 이야기인데도 올리비아의 한마디에 크라이어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게 취향이라고.”
“고약한 취향이지. 피니 정화니. 뭐, 범인이 잡혔고, 그 뒤에 뭐가 있는지 아니까 죽어버린 게 딱히 아쉬운 일은 아니지만. 왜 구태여 마법을 써서 죽인 걸까? 그냥 내버려 두면 어차피 죽었을 텐데.”
“그리고 그 범인을 잡을 수 있게 꼭두각시까지 보냈지.”
서로를 응시하던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혀를 찼다.
“결국 제거하려고 한 건 확실하지만, 이유는 알 수 없다는 건가.”
“그 정도겠네. 어쨌건 두 가지는 알았어.”
올리비아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첫째로 고대신에 관해 아는 건 마법사만이 아니라는 것.”
“둘째는?”
“마법사는 그 고대신을 아는 이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
눈을 가늘게 뜬 올리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 두 가지를 이용하면 마법사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때려줄 수 있을 거 같지만, 첫 번째가 너무 장벽이야.”
“고대신을 알고 있다고 하면.”
“그래. 지독한 취향을 가진 고대신을 아는 놈 치고 제대로 된 놈이 있을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니까.”
“아아, 그렇지. 자원해서 노예 낙인을 찍은 놈도 있으니까.”
“뭐?”
올리비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펄쩍 뛰어올랐다.
“당신 말고 노예가 또 있어?”
“그래.”
크라이어는 당장이라도 누구냐고 토해내라는 올리비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는 모른다. 있다고 듣기만 했으니까.”
맥빠지는 답에 올리비아의 동그란 어깨가 축 처졌다. 시무룩해진 그녀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냈다.
“그렇게 먼 이야기보다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불타버린 것들 말고 또 뭐가 있나?”
그에 올리비아는 몇 시간 전 만났던 앙브흐와의 만남을 풀어 놓았다. 앙브흐에게 크라이어의 상황, 그러니까 고대신이니 노예니 하는 모든 것을 말하진 않았다. 물론 그러다 보니 말할 것이 별로 없긴 했지만……. 어쨌건 그녀에게는 노르덴 국, 특히 왕궁에 주의를 기울이라 말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앙브흐는 소식을 가지고 왔다.
‘장례식이 미뤄질 것 같다고?’
노르덴 국에서 손님, 그러니까 꼭두각시가 왔을 때는 국장이 미뤄진다는 말은 없었는데.
‘네. 노르덴 국에 있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거의 연기가 확정되었어요.’
앙브흐는 올리비아가 밀어준 찻잔에 각설탕을 쏟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말해 봐.’
‘국장에 필요한 물품들이 왕궁으로 들어가는 빠르기가 현저히 느려졌거든요. 그 대신.’
앙브흐는 차가 아니라 설탕물에 가까운 걸쭉한 무언가를 한 모금 넘긴 후 말을 이었다.
‘다른 것들의 주문이 엄청나게 들어왔다고 했어요.’
올리비아는 거기까지 말한 뒤 눈을 가늘게 떴다.
“주문 들어 온 물품이 돌덩이라고 하더라.”
“돌……?”
“응. 거대한 돌.”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렸다. 처음 앙브흐에게 ‘돌’이라는 말을 들었던 올리비아처럼 크라이어도 꽤 복잡한 표정이었다. 국장도 미루면서 할 만한 일이라면, 당연히 마법사의 주도하에 벌어진 일이리라. 한데 돌……이라니. 돌, 돌이라.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올리비아는 어렴풋이 뭔가를 떠올렸지만, 뒷 가사가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 노래처럼 어렴풋하기만 했다. 고대신, 돌, 마법사. 폭우가 내렸던 그 날에도 분명 돌이…….
“크라……”
답답한 마음에 올리비아가 그를 불렀지만, 어느새 시야에서 그가 사라져 있었다. 텅 비어버린 자리를 바라보며 눈을 빠르게 깜박이던 올리비아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돌아오겠지.”
어느새 그가 그녀의 곁에 있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졌다는 사실을 올리비아는 물론이고 크라이어조차 깨닫지 못했다. *** 올리비아의 앞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크라이어는 어둑한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을 타고 걷는 그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황녀 궁의 내밀한 곳에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무투 대회 발표 이후 쓰레기들이 기어들어 오지 않는다 했더니.
“하나 더 붙여서 둘인가.”
순서를 정하니 마니 하더니 한 놈이 아니라 두 놈. 처리하는 거야 하나건 둘이건 별 차이 없으니 빨리 끝내고 돌아가야겠군. 지극히 자연스럽게 올리비아에게 ‘돌아’ 가야 한다고 생각한 크라이어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미끈한 얼굴의 기사는 크라이어를 보지도 못한 채 바닥에 엎어졌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그에게 시선 한 조각 주지 않고, 그 너머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는 지금 발치에 엎어진 놈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았으니까. 그림자를 쏘아보던 크라이어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나와라.”
명령에 가까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쏘아보던 그림자 속에서 아이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손을 가슴께로 붙인 아이작이 입을 열었다.
“또 뵙는군요.”
“다시 볼 일은 없겠군.”
가차 없는 답과 함께 한발 내디딘 크라이어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아, 위험해라.”
아이작이 거의 정확하게 그의 간격, 그러니까 검을 휘둘렀을 때 단칼에 그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거리에서 벗어났으니까. 보는 눈뿐만이 아니라 본신 능력까지, 이제껏 본 놈들과는 아예 급이 다른 놈이었다. 하지만 크라이어 앞에서는 도토리 키재기일 뿐.
“큭!”
아이작은 눈 깜박할 새도 없이 코앞까지 다가선 검붉은 눈동자에 튕기듯 뒤로 물러났다. 당연히 그를 잡을 수 있었지만, 그대로 놓아준 크라이어는 낮게 웃었다.
“우연은 아니었군.”
“피하는 것이 고작이긴 합니다만.”
아이작은 크라이어가 다시 움직이기 전에 다급히 입은 놀렸다.
“저는 밤놀이에 관심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요.”
그는 크라이어를 살피며 덧붙였다.
“그래서 이놈도 직접 처리했지요.”
이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떠들어대는 얄팍한 거짓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손속을 처음으로 피한 놈이다. 크라이어의 검붉은 광야 처음으로 아이작이 제대로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