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너와 겹쳐 보여서 말이야2021.12.13.
먹장구름이 서서히 옅어지며, 하늘에서 쏟아붓던 빗줄기도 약해진 다음 날. 고대신을 부르는 의식을 끝장내고, 범인을 잡아 가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황궁은 평온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황녀 궁의 중앙.
“타렌 영애가?”
“네.”
뜻밖의 알현 요청에 서류를 내려둔 올리비아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앙브흐 타렌은 어제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긴 했다.
‘저 둘은 저희 가문에서 돌보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납치당했던 모녀까지 데리고. 신을 찾던 범인은 지금 황궁의 가장 낮은 곳, 지하 감옥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터. 어쨌건 고대신의 머리꼭지는커녕 존재하는지 모를 머리카락 끝도 보지 못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마무리된 지 고작 몇 시간 후가 아닌가. 그 피해자라면 당연히……. 앙브흐 타렌을 마주한 올리비아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쉬어야 할 때 아닌가?”
“다들 그리 말씀하셨지만, 쓸린 상처뿐인걸요. 오히려 전하께서.”
앙브흐는 말끝을 흐리며 눈썹 끝을 축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리비아는 그렇게나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한참이나 맞지 않았던가. 보통 사람보다 조금 좋은 체력을 가졌을 뿐인 올리비아가 멀쩡할 리가 없으리라. 언뜻 봐도 창백한 안색에 피로가 짙게 내린 얼굴이었건만, 올리비아는 가볍게 손을 저었다.
“작은 상처도 없는데, 뭘. 그보다 괜찮다니 다행이네.”
“네. 전하, 외람되지만 그 기사님께서는.”
“그도 멀쩡해.”
물론 단검에 꿰뚫린 손바닥은 멀쩡하다고 말하기 힘들었지만, 그에게 그 정도 상처는 살짝 긁힌 것과 별로 다를 바 없으리라.
“아…….”
딱 떨어지는 답에 앙브흐는 재차 입을 열려다 다물었다. 올리비아는 그런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큰일을 겪은 지 몇 시간 후지 않은가. 크라이어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던 거 같지만. 느릿하게 굴러가는 머리 때문에 거기까지 뒤늦게 생각이 미치자 올리비아는 흐린 눈을 떴다. 설마, 극적으로 자신을 구한 기사라고 크라이어에게 반했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지난번 사랑의 대서사시를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긴 한데……. 이미 자신은 그와 사랑이니 나발이니 하는 것으로 엮이지 않았다고 단단히 못 박아 두었고. 입을 열지 않고 찻잔만 내려다보는 앙브흐의 분홍빛 정수리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손을 더듬었다. -달칵. 찻잔을 집어 들던 올리비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손끝이 무겁고 둔한 데다 시야까지 지독하게 좁았으니까.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실제로 긁힌 상처는 없었지만, 얼음장 같은 손발과 앉아 있어도 문득문득 휙 돌만큼 오른 열까지. 결코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 본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나, 당장 죽어 엎어지지 않는다면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는 법. 서명 하나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 또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지글지글 끓는 열 때문에 버석하게 마른 입안을 적시려 찻잔을 드는데, 앙브흐가 입을 열었다.
“그 기사님. 이번 사건과 뭔가 관련이 있는 거죠?”
그건 그야말로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기껏해야 그녀를 구하던 크라이어의 모습이 마치 동화 속 왕자님 같았다는 이야기나 늘어놓을 줄 알았건만. 물론 허를 찔렸다고 해서 헉! 하는 표정으로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올리비아는 희미한 미소를 유지한 채 의뭉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당연하겠지. 그가 영애를 구하지 않았나.”
흠잡을 곳 없는 답에 앙브흐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건 ‘신’과 관계된 거예요.”
앙브흐가 입을 다뭄과 동시에 그녀의 위로 시커먼 그림자가 번졌다.
“크라이어!”
시야가 핑글 돌았지만, 올리비아는 정확히 크라이어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팔을 제 쪽으로 강하게 당기자, 앙브흐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천천히 걷혔다. 올리비아는 기어이 크라이어를 제 곁에 앉힌 후 입을 열었다.
“영애, 숨 쉬어.”
“으, 허억! 허억, 허억.”
앙브흐는 그제야 제가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팔을 꽉 잡으며 앙브흐를 향해 말했다.
“영애가 뭘 알아챘건, 그냥 담아둬. 아니, 잊어버려.”
그날, 그때. 앙브흐 타렌은 무언가를 봤고,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하나, 그뿐.
“잊어버려.”
올리비아는 숨을 가다듬는 앙브흐를 똑바로 응시하며 반복했다. 그래. 그녀는 잊어야 하리라. 앙브흐가 입에 올린 ‘신’은 아직 실체가 없지만, 그 신의 족쇄에 묶인 크라이어가 그녀를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만약 올리비아가 그를 잡지 않았다면, 앙브흐는 제 숨이 끊어지는 줄도 인지하지도 못한 채……. 하지만 이어지는 앙브흐의 말은 이전보다 더욱 예상 밖이었다.
“도움이 되고 싶어요.”
“뭐?”
앙브흐는 크라이어의 시선에 턱을 덜덜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목숨을 빚졌으니, 그만큼 돌려드리고 싶어요.”
“차기 타렌 가주로 훌륭하게 의무를 다해주면 그걸로 족해.”
올리비아의 철벽에도 앙브흐는 굴하지 않았다.
“그 말씀 그대로 저는 타렌입니다. 어떤 일이든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만, 결코 가볍게 둥둥 떠다니지 않는 앙브흐의 눈을 마주한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그녀가 결코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기실 여러 면에서 인간에서 벗어난 것이 확실한 크라이어와 미래의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올리비아라도 ‘신’과의 계약을 깨뜨리는 건 지독하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리라. 그러니 크라이어와 올리비아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해야만 하는 상황일 터.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게 이성적이고 효율적으로 돌아갈 리 없다. 그럴 수도 없고. ‘신’은 크라이어의 역린이자 약점이 아닌가. 만약 앙브흐가 ‘신’을 입에 담지 않았다면, 그저 도와준다고만 했다면 일이 조금 쉬워졌으리라. 하지만 쏟아진 물처럼,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절대로 열리지 않는 문과 같이 강경한 거부에 앙브흐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검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목을 단숨에 찢어 놓을 듯 넘실거리고 있었기에 여전히 턱은 덜덜 떨렸지만,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앙브흐는 누구보다 선하고, 누구라도 선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을 만큼 순진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 ‘타렌’의 유일한 후계자답게 눈치가 빠르고 머리 회전도 대단히 빨랐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처럼 더럽게 힘들고 위험한 상황을 겪었으면서도, 어려운 일에 직면한 이들에게 오롯한 선의로 손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고 있었고.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그 장소에서 앙브흐는 보았다. 아니, 알아차렸다고 해야 할까. 황녀 전하와 저 소문의 기사의 어깨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미증유의 어떤 것이 지긋이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그건 기사가 입에 담았던 ‘신’이리라.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전하께서는, 그리고 전하의 기사는 ‘신’에 맞서고 있는 거죠?”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이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것도 앙브흐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려움에. 그렇기에 앙브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앙브흐는 활짝 웃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렇기에 올리비아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슨 결과가 나올지 알고?”
그저 어려운 남자를 도와줬기에, 그녀는 마지막 제물로 낙인찍혀 납치당했다. 만약 크라이어와 올리비아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면……. 앙브흐는 고개를 잠깐 기울이다 이내 답했다.
“모릅니다.”
너무나도 간단히, 힘차고 발랄하게 나온 답이 아닌가.
“뭐……?”
“그래도 저는 돕고 싶어요.”
말은 가볍고, 표정은 순진했지만, 앙브흐의 속에 자리한 심지는 강철같이 단단했다. 그리고 그런 앙브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올리비아의 귀에 속삭였다.
“어느 정도 쓸모가 있나.”
그에 올리비아는 토끼 눈을 뜨고 크라이어를 돌아보았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표정과 눈빛으로 묻고 있었기에 크라이어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그래. 저만큼이나 돕고 싶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몇 분 전에 신을 입에 담았다고 죽이려고 들더니?”
“죽이지 않았잖아.”
가출하려는 어이의 멱살을 잡은 올리비아가 물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가 뭐야?”
“보여서.”
앞뒤를 다 잘라버린 답에 올리비아는 그의 팔을 당기며 그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가 보이는데, 나도 같이 봐.”
크라이어는 그녀를 밀어내거나 몸을 당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와 숨결이 섞일 만큼 가까이 다가서며 속삭였다.
“아니, 너와 겹쳐 보여서 말이야.”
귓바퀴를 타고 흘러드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가슴께를 문질렀다. 기분 탓인지, 깃털을 삼킨 듯 속이 간질거렸으니까.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잠시 잊고 있던 앙브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자리를 비켜야 할까요?”
당연하게도 둘만 있던 자리가 아니니 앙브흐도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속닥거림을 모조리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동그랗게 뜬 눈이나 비꼼의 부스러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서 앙브흐는 진심으로 자리를 비켜야 하냐고 묻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올리비아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손을 저었다. 반쯤 엉덩이를 들었던 앙브흐는 도로 자리에 앉았고, 그런 그녀에게 올리비아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꺼냈다.
“전에도 말했지만, 사랑의 사자와도 관계없는 사이야.”
만약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황녀가 그리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만 맞춰 줬으리라. 속으로는 사랑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비스름한 관계일 거라 의심과 확신을 반복하면서. 하지만 앙브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눈치와 기지는 오히려 평범한 이들보다 날카로웠지만, 그녀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람의 말을 온전히 믿었으니까. 당연히 앙브흐는 올리비아의 말에 일말의 주저도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시원스럽고 단호한 답에 오히려 올리비아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렇게나 단숨에 믿을 만큼 아무 사이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가…….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아니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내 몸을 일으키는 앙브흐를 보고 흩어졌다. 앙브흐는 우아하게, 더없이 정중하게 올리비아를 향해 예를 취했다.
“황녀 전하를 위해, 이 앙브흐 타렌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겁니다.”
뒤이어 앙브흐는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앙브흐라고 불러주세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에게 속삭였다.
“어디가 나랑 닮았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