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신은 무자비하다는 사실을.2021.12.09.
다시 그의 품에 안긴 올리비아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흰 김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올리비아의 눈앞에 방금 전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귀를 때리는 폭우 소리를 뚫고 광기에 가득찬 목소리가 울렸다.
“기뻐해라! 너는 정화되어 신의 품에 안길 테니!”
언뜻 봐도 의식용으로 쓰일 법한 기괴하게 생긴 단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 남자.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아이와, 그런 아이의 앞을 가까스로 막아선 앙브흐. 그 둘을 향해 손을 뻗지만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지는 어미까지. 상황을 파악하고, 위험을 재고 따질 시간 따윈 없었다. 올리비아는 그야말로 반사적으로 크라이어의 팔을 뿌리치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신이시여!”
“안 돼!”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던 아이의 죽어버린 눈동자에 한순간 선연한 불이 피어올랐다. 그 불꽃은 아이의 앞을 가로막은 앙브흐를 보드랍게 감싸 안았고, 다음 순간. 아이는 불꽃에 안겨 있었다. 저를 감싸 안은 불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고 따뜻해서 아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앙브흐와 아이를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든 올리비아는 둘을 꽉 안았다. 곧이어 아이를 노리던 남자의 단검은 올리비아의 등으로 향했지만, 결코 그녀를 찌르지는 못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단검은 그녀의 등 대신 단단한 손바닥을 뚫었으니까. -톡. 톡. 단검의 검날을 타고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크라이어는 제 손바닥에 힘을 주며 관통한 검날을 그대로 잡아 당겼다. 검자루를 쥐고 있던 남자가 반사적으로 힘을 줬지만, 그가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하리라.
“크아악!”
기괴한 장식이 덕지덕지 붙은 단검의 검자루가 남자의 손바닥을 찢으며 피를 냈다. 하지만 검자루부터 흘러 검날을 탄 남자의 피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크라이어의 피와 섞이지 않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곧이어 크라이어는 마치 손에 묻은 먼지를 털 듯 아무렇지도 않게 손바닥에 박혀 있던 단검을 빼내 바닥으로 던졌다. -퍽. 단검은 비가 내려 진흙이 된 땅이 아니라 빗방울이 튀는 돌덩이에 꽂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뽑을 수 없을 만큼, 날이 보이지 않게 깊숙이. 여기까지 단 몇 초. 눈앞이 하얗게 점멸하면서 번개가 지나기 무섭게 천둥이 내려 꽂혔다. -콰쾅! 우르르릉.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얼이 빠진 남자의 시야에서 크라이어가 사라졌다. -콰르릉! 천둥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낸 크라이어가 돌에 박힌 단검을 가볍게 밟자, 이내 단검은 검자루도 찾아 볼 수 없게 돌 깊숙이 박혔다. 돌이 마치 부드러운 치즈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나도 간단히 단검을 박아 넣은 크라이어가 돌아섰을 때, 올리비아의 품에 안긴 아이의 눈과 검붉은 눈동자가 스치듯 마주쳤다. 아이가 빗물이 흘러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순간.
“아…….”
아이의 말라붙은 목에서 헛숨이 흘러나왔고, 눈 한 번 깜박하는 사이에 크라이어는 남자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커헉!”
크라이어의 손속은 가차 없었다. 그는 피가 흐르는 손바닥으로 남자의 얼굴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리며 이를 드러내고 사납게 웃었다.
“지금 너의 신은 어디에 있나.”
웃고 있지만 그건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으리라.
“크, 커헉, 커어억.”
얼굴이 잡힌 남자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크라이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빗물에 미끄러지는 남자의 손가락은 크라이어의 손등에 긁힌 상처 하나 내지 못했고, 그의 귓가로 짐승의 그르렁거림이 울렸다.
“너의 신은 어디에 있나.”
얼굴이 부서질 듯한 고통에 버둥거리던 남자는 크라이어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철퍽. 이윽고 진흙탕에 쓰레기처럼 내던져진 남자는 얼굴이 으스러지는 고통에 허겁지겁 제 얼굴을 문질렀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남자는 더이상 고통 따윈 느낄 수도 없었다. 그의 발치부터 스멀스멀 휘감고 오른 살기가 곧 모가지를 잡아 눌렀으니까.
“컥, 커헉.”
숨이 턱, 막혀 컥컥거리며 피투성이 손으로 진흙을 긁어대던 남자가 우뚝 멈췄다. 마치 마법처럼 그의 숨통을 짓누르던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벌벌 떨리는 목을 이리저리 매만지던 남자의 위로 긴, 아주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삐걱거리는 고개를 든 남자는 멍청하게 제 앞의 거대한 짐승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는 짐승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남자는 입을 벌리며 신을 찾았지만, 그의 목구멍에서는 헛숨조차 흘러나오지 못했다. -툭, 투둑. 빗방울이 튕기는 단단한 어깨에서 흰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라 흩어졌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느리게 흘러 미친 듯이 흔들리던 남자의 동공이 힘없이 풀어졌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이지러지는 그의 신형 가운데 검붉은 눈동자가 번뜩이는 순간.
“크라이어!”
온 사방에서 진동하며 울리는 거센 빗소리를 뚫고 빗살처럼 올리비아의 부름이 꽂혔다. 그 직후 남자는 눈을 빠르게 껌벅거렸다. 눈앞에 인간이 있었다. 그를 단숨에 찢어 놓을 기세로 아가리를 벌리던 미증유의 짐승이 아닌. 한 명의 인간이. 크라이어가 우뚝 멈춰서자 올리비아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저, 전…….”
앙브흐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부름에 올리비아는 입꼬리를 당겨 웃어 주었다.
“이제 괜찮아. 전부 다 괜찮아질 거야.”
무슨 말이건 더 속삭여주고, 보듬어 안아줘야만 했지만 올리비아는 지체없이 몸을 일으켰다. 앙브흐와 아이의 위로 크라이어의 망토를 덮어 앞을 여며준 뒤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향해 돌아섰다.
“후으.”
여전히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 사이에서 약한 숨이 흘러나왔고, 비를 너무 맞은 몸은 형편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퍼붓는 비를 맞으면서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올리비아는 한발, 그리고 또 한발. 크라이어를 향해 다가섰다. 핏줄이 불거진 단단한 손등을 하얀 손가락이 더듬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폭우 탓에,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았지만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만은 선명해서. 올리비아는 기어코 크라이어의 손에 제 손을 끼워 넣었다. 마디마디가 얽힌 두 사람의 손은 마치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처럼 맞붙었다. 그리고 올리비아와 크라이어의 손이 빈틈없이 완벽히 맞물렸을 때. 크라이어의 짐승이 숨을 죽이며 올리비아의 발치에 엎드렸다. 그리고 짐승의 아가리에 반쯤 먹혀 있던 남자는 그 사실을 단번에 깨닫고 이제껏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헉, 허억, 커허억.”
한껏 쪼그라들었던 가슴에 빗물과 공기가 들어가자, 흐릿했던 남자의 눈에 초점이 잡히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린 남자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다.
“시……실패.”
의식은 실패했다는 사실을. 설사 그의 눈앞에 자리한 훼방꾼이 당장 사라지더라도 의식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만 할 터. 하지만 이리 된 이상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흐……흐흐흐흐. 흐흐, 하하하.”
찢어진 듯 벌어진 남자의 입술 사이로 신경을 긁는 듯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앙브흐의 품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아이의 몸에서 잔 떨림이 일었고, 앙브흐는 아이를 추슬러 안았다. 그녀는 아이를 안은 채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그라고 남자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피와 비, 진흙으로 범벅된 손을 내려다보며 계속 웃었다. 진정으로 한순간, 너무나도 허무하고 지나치게 간단하게 모든 것이 끝나버렸지 않나. 마지막, 신의 강림이 코앞이었건만.
“뭐가 우습나. 곧 죽을 놈이.”
크라이어의 신랄한 말에도 남자는 기괴한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잡혀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으니까. 단지 한 가지를 안타까워했을 뿐.
“이 세상에 고대신의 자비를 내리지 못하다니…….”
남자의 광기 어린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의 입가가 비틀렸다.
“으, 크윽!”
그는 남자의 손등을 발로 짓뭉개며 그르렁거리듯 속삭였다.
“자비? 자비라고?”
“정화는 시, 신께서 베푸시는 자비!”
“하!”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그를 통렬하게 비웃었다.
“자비. 자비라.”
크라이어는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훨씬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착각을 하지. 네가 믿고 모시는 신이 정의이며, 신은 자비로울 거라고.”
원치 않는 부활과 원치 않는 낙인. 그 역시 신의 자비를 바란 적이 없다고 하지는 못하리라. 그에게 낙인을 찍은 신이 아닌 다른 신을 향해. 하지만 크라이어는 답을 받지 못했다. 그 어떤 신으로부터, 그 어떤 답도……. 크라이어는 남자의 손이 아닌 목을 짓눌렀다. 남자는 컥컥거렸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너는 신이 행하는 것의 의미나 뜻을 모른다. 누구도 모르지.”
그건 남자뿐만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던지는 말이리라. 먼, 아주 먼 곳을 바라보던 크라이어는 흰자위를 보이며 완전히 정신을 잃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그리고 네놈 같은 것들은 끝까지 알려 하지 않겠지.”
올리비아는 입술을 꾹 깨물고 양손을 꽉 모아 잡았다. 눈앞에 있는 크라이어의 등이 마치……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신은 무자비하다는 사실을.”
나지막한, 끝이 보이지 않는 깊고 깊은 구덩이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 올리비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뒤에서 있는 힘껏 팔을 뻗어 그를 안은 올리비아는 닿는 순간, 마비될 듯 차가운 그의 등에 뺨을 부볐다. 피부를 타고 번져 든 그녀의 온기가 그의 뼈를 은은하게 태우기 시작했다. 크라이어는 제 허리를 감은 투명하도록 하얀 팔을 내려다보다 눈을 감았다. 누구도 다가설 수 없는 더없이 단단하고 거칠던 그의 등에서 천천히, 아주 조금씩 힘이 빠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쿵. 그의 심장이 꼭대기부터 저 아래 바닥까지 단숨에 내려앉았다. 검붉은 눈의 동공이 바짝 수축되었지만, 그 강렬한 고동은 한 번뿐. 곧이어 그를 대신하듯 다른 고통이 밀려왔다. 올리비아의 옅은 숨결이 피부 한 겹 위로 흩어질 때마다, 쇄골의 낙인에서 마치 칼로 쑤시듯 날카로운 통증이…….
“크라이어.”
하지만 등을 타고 심장으로 스며 피로 흘러 온몸을 휘감아 도는 올리비아의 부름에 크라이어는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았을 뿐. 그렇게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날. 고대신의 강림을 바라는 남자의 어설픈 의식은 누구도 알 수 없고, 아무도 알지 못할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