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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그야 당연히 신을 위해서지요. (28/146)

#28. 그야 당연히 신을 위해서지요.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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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08560587.jpg“끝낼 시간이야.”

남자는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연신 중얼거렸다.

16549708560587.jpg“마지막, 마지막이다. 드디어!”

그리 외치는 목소리는 환희로 가득차 있었지만, 그의 어깨는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잠시 정체되었다가, 물꼬가 터진 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으니까. 이 사건을 벌인 당사자인 고대신의 강림을 바라는 남자조차 어찌할 바 모를 만큼 빠르게. 차라리 앙브흐가 이토록 쉬이 잡히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조금 더 교활하고 훨씬 더 음험하게 일을 진행했으리라. 그리고 이 중요한 의식을 준비하는데 조금 더 시간을 들일 수 있었을 터.

16549708560587.jpg“얼른, 얼른 준비해야지. 지금 당장, 오늘 내로!”

하지만 덜컥 마지막 제물까지 마련되어버린 터라, 남자는 미처 의식의 준비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 마지막은커녕 그 전 제물도 아직 처리하지 못했으니. -덜컥, 덜컥덜컥. 반쯤 눈이 뒤집힌 남자가 의식에 쓸 도구를 정비하는 사이. 굳게 문이 닫힌 어둑한 방에는 세 명의 인영이 죽은 듯이 늘어져 있었다. 그중 둘은 꼭 붙어 있었고, 다른 한 인영은 두 어 걸음 떨어진 곳에 쓰러져 있었다. 눅눅한 공기가 뺨에 겹겹이 내려 앉은지 얼마나 지났을까.

16549708560598.jpg“으……음.”

희미한 신음 소리와 함께 동떨어져 있는 한 인영의 눈꺼풀이 움찔 거렸다.

16549708560598.jpg“으윽.”

정신을 차리기 무섭게 몰려오는 통증에 신음을 흘린 앙브흐가 힘겹게 눈을 떴지만, 핑 도는 시야에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 앙브흐는 재빠르게 주변을 곁눈질로 살폈다. 어둑하고 낯선 실내. 텁텁한 공기. 그리고……. -철그럭. 묶인 손발까지. 정신을 잃는 순간 어렴풋이 눈치챘지만, 역시 납치 당했네.

16549708560598.jpg“후으.”

앙브흐는 침착하게 주변 상황과 제 처지를 정리했다. 그녀는 ‘타렌’이다. 당연히 위험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주 어릴 적부터 뼛속 깊이 새겨지도록 교육 받았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울거나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지 않고 납치범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믿고 싶지 않지만, 역시 그 남자겠지. 자신과 마지막으로 마주친……. 하나, 둘 그리고 셋. 속으로 수를 헤아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끼이이. 신경을 긁는 경첩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으로 눅눅하게 고인 공기가 빠져나갔다. 어스름한 빛과 함께 남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혹시나는 역시나. 이런 흉흉한 시기에도 성실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건실한 청년이 실은 납치범이었다니. 앙브흐는 대번에 남자가 이전에 주절주절 늘어놓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힘든 일이 실은 해결되지 않았던 건가. 앙브흐는 최대한 납치범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며 침착하게 물었다.

16549708560598.jpg“왜 이런 짓을 한 거지? 힘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에게 말하라고 했…….”

범인의 목적을 알아내야 앞으로의 상황 대처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어지는 남자의 답에 앙브흐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기만 했다.

16549708560587.jpg“왜? 그야 당연히 신을 위해서지요.”

남자의 답이 예상과 전혀 다르다 못해,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으니까. 입을 다문 앙브흐와는 달리 남자는 기괴할 만큼 활기차게 양팔을 휘두르며 외쳤다.

16549708560587.jpg“기뻐하십시오! 영광으로 아십시오! 아가씨야말로 마지막 제물이 될 테니!”

희열이 들끓는 목소리로 크게 외친 남자는 곧 모녀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16549708560587.jpg“물론 그 전에 저 제물들을 바쳐야 하니, 얼마간 기다리셔야 될 겁니다만.”

남자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죽은 생선 같은 눈으로 힘없이 서로를 안고 있는 모녀를 가리키며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앙브흐는 그제야 이곳에 자신이 아닌 다른 피해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안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는 아무도 묻지 않은 말을 계속해서 자랑스레 떠벌렸다.

16549708560587.jpg“저들은 차라리 이리 되기를 바랐을 겁니다. 현세가 지옥과 다름없으니 신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 정화되는 편이 저들에게 더 좋겠죠.”

그야말로 헛소리가 아닌가. 설사 모녀가 죽기를 바랐다 하더라도 남자의 손에 이따위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할 리가 없을 테니까. 게다가 모녀는 살기 위해 남자가 하라는 대로 따랐지 않나. 결국, 남자의 말은 어디까지나 제 편의와 이득을 위한 궤변이었을 뿐.

16549708560587.jpg“이제까지 제가 정화시킨 제물들도 다 감사하며 눈을 감았지요.”

흰자위를 보이며 킬킬거리며 웃던 남자는 별안간 웃음을 멈추고 휙 뒤돌아 나갔다. -쿵, 드르륵, 키기기긱.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상자를 끌고 들어온 남자는 상자를 활짝 열었다.

16549708560587.jpg“이건 첫 번째로…….”

상회에서 함께 일하던 남자의 딸의 유품인 누더기 인형, 이름도 모르는 여자의 반지, 노인에게서 뜯어낸 옷자락, 거의 닳아버린 손톱,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 등등. 그렇게 그는 자랑이라도 하듯 그간 제물로 바쳐진 이들의 물품들을 꺼내놓으며 주절주절 혼자만의 이야기를 토해냈다.

16549708560587.jpg“이들 모두가 제게 정화되었습니다.”

앙브흐는 그가 하나하나 꺼내 들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 물품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어째서 기뻐……하는 거야. 그의 손아귀에서 유명을 달리한 이들의 유품을 마치 전리품처럼. 번들거리는 눈으로 저열한 환희를 즐기는 남자와 정면으로 마주한 앙브흐는 순간적으로 속에서 치미는 구역질에 그녀는 허리를 접고 쿨럭거렸다. 남자는 그런 앙브흐를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만 늘어놓았다.

16549708560587.jpg“그들 모두 정화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식을 찾은 이들이지요.”

그의 손에 스러진 이들은 빚에 시달리는 모녀처럼 각기 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가 떠들어대는 말이 개소리인 것은 변함없었다. 그렇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앙브흐는 깨달았다. 첫째로, 눈앞에서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남자가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연쇄 실종 및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신, 정화 따위의 말을 늘어놓기에 설마 했더니. 이 남자가 저 모녀와 ‘타렌’인 자신을 납치한 건 어떤 이득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16549708560587.jpg“……하여 당신을 마지막 제물로 바쳐 고대신께서 강림하시면!”

그래. 이 자는 광신도였다. 종교적 맹신이라면,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떤 협상이라도 쓸모가 없으리라. 이 짓거리는 그에게 ‘사명’일 테니. 이를 악문 앙브흐는 팔에 힘을 주며 묶여 있는 손을 풀어내려 애를 썼지만, 손목에 쓸린 상처만 났을 뿐. 그리고 그런 그녀의 움직임을 언제 봤는지 남자는 앙브흐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덜그럭.

16549708560587.jpg“손을 풀어 드릴까요?”

그는 앙브흐의 발목에 단단히 감긴 쇠사슬을 들고 웃으며 물었다. 손이 자유로워도 절대 나갈 수 없다는 뜻이리라. 앙브흐는 순순히 온 몸의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이 이상 어떤 시도를 해도 소용 없을뿐더러, 자칫 납치범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

16549708560587.jpg“이런, 그건 또 싫으십니까.”

남자는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매끄러운 분홍 머리를 내려다보다 벌떡 일어났다.

16549708560587.jpg“준비를 해야지, 준비를.”

남자는 노래하듯 혼잣말을 흥얼거리며 거칠게 아이의 뒷목을 당겼다.

16549708560587.jpg“아, 아가.”

품에 꼭 안고 있던 아이를 뺏긴 어미는 푹 꺼진 눈으로 아이를 쫓으며 쉬어버려 거의 나오지 않는 소리를 냈다.

16549708560587.jpg“아아, 걱정하지 마. 함께 정화시켜 줄 테니.”

그는 어미의 이마에 일그러진 고대신의 문양을 그려 넣은 후, 곧바로 아이의 이마에도 같은 문양을 그렸다.

16549708560587.jpg“자아,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렴. 오빠가 도와줄 테니.”

생기가 빠져나간 아이의 뺨을 쓰다듬어준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문을 나서려는 남자의 등 뒤로 앙브흐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16549708560598.jpg“그렇다면 나는 왜?”

우뚝 멈춰선 남자가 뒤로 돌아, 처음 들어올 때처럼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웃고 있었다. 입이 찢어질 것처럼.

16549708560587.jpg“아가씨요? 아가씨가 저를 도와줬으니까요.”

16549708560598.jpg“뭐?”

16549708560587.jpg“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도와주겠다고. 그러니 도움을 받는 겁니다.”

분명 그런 말을 했었지만…….

16549708560587.jpg“아가씨께 도움을 받고, 저도 아가씨를 도와드리고. 아주 좋지 않습니까.”

16549708560598.jpg“무슨…… 소릴 하는 거야.”

16549708560587.jpg“어라? 제 말이 어려웠습니까? 아주 간단하지 않습니까. 아가씨께서 저를 도와주시고 저는 아가씨를 도와드리고.”

그냥 말만 뜯어놓고 들으면 간단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도움’이란 대체……. 앙브흐는 남자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불현듯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울렸을 뿐.

1654970864516.jpg‘선의로 시작한 일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진 않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앙브흐는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에게 선의로 도움을 줬다. 과거의 아픈 상처라던가, 죄의 속죄라던가, 어려운 이들을 도우면서 자기 과시를 한다던가. 그런 그럴듯한 이유 따윈 없었다. 천성이 선한 그녀는 그저 할 수 있기에 손을 내밀었을 뿐. 그리고 그 결과가 광신자에게 납치라니. 보통 사람이라면 이 순간 허탈함과 조금 더 나아가 분노를 느끼리라. 하지만 앙브흐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선의가 불러온 이런 결과에도 실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생각만 했을 뿐. 입을 다문 앙브흐를 향해 남자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16549708560587.jpg“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 곧.”

그가 허리를 편 순간 눈앞이 점멸하면서 번개가 쳤고, 곧바로 귀를 때리는 천둥이 따라왔다. -우르릉! 곧이어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올리비아는 덜덜 떨리는 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악물었다. 크라이어가 막아주고 있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게 달리는 그의 품에 안겨 비를 맞는 상황. 마치 창처럼 온몸으로 꽂히는 거센 빗줄기에 올리비아는 입술이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우비를 입고 움직였어도 흠뻑 젖을 거센 폭우였건만, 비를 막아줄 우비도 없이 움직이고 있으니…….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한데, 삽시간에 몰려든 시커먼 먹장구름이 하늘을 먹어치우더니 맑은 하늘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눈을 뜨기도 힘들어 연신 눈을 깜박이던 올리비아가 덜컥 멈췄다. 아니, 그녀를 안고 달리던 크라이어가 우뚝 멈춰 섰다. 비가 지독하게 쏟아지는 터라 사방이 뿌연 장막이 덮인 듯 뭔가를 제대로 보기 힘들었지만, 그의 시선은 한 방향에 꽂혀 있었다. 그런 크라이어의 귓바퀴를 타고 빗소리가 없었어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올리비아의 속삭임이 흘러들어왔다.

1654970864516.jpg“도, 도착…….”

16549708645175.jpg“그래. 여기다.”

1654970864516.jpg“마……말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더니. 과……장이……아니 었…….”

입술이 얼어붙어 더듬더듬 흘러나온 말에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핏기 하나 없이 질린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새빨간 머리카락을 넘겨준 그가 덜덜 떠는 그녀의 둥근 어깨를 망토로 감싸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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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08645175.jpg“볼셰이크의 책에서 나오는 것을 따라 한 것뿐이다.”

그의 망토도 흠뻑 젖어 있었지만, 어렴풋하게 남은 그의 온기에 올리비아는 앞을 여몄다. 입을 뻐끔거리며 얼어붙은 입을 푼 올리비아가 이전보다 한결 매끄럽게 말을 꺼냈다.

1654970864516.jpg“대체 조상님들은 무얼 하고 다니신 거야.”

혀를 찬 올리비아는 지나치게 힘을 주는 바람에 통증이 느껴지는 목을 억지로 돌렸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폭우 속에서 지극히 보통 사람인 그녀가 볼 수 있는 건 없었기에 곧바로 크라이어에게 물었다.

1654970864516.jpg“범인이 있다고 한 곳이지? 피 냄새는?”

16549708645175.jpg“움직일 수 있겠나.”

그의 물음에 입술이 보랏빛으로 질리다 못해 검게 변한 올리비아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0864516.jpg“움직여야지.”

그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크라이어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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