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이대로 잠시만.2021.11.22.
안쪽에서 상회 지부장의 목소리가 들렸고, 앙브흐는 통통 튀는 걸음으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허무하게 손끝을 스치는 보드라운 분홍 머리칼을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곧 주먹을 꾹 쥐며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아슬아슬하게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앙브흐는 지부장과 마주했다.
“지부장? 미안, 자고 있었나 보네.”
“아닙니다. 이런 꼴로 아가씨를 뵙게 되어 제가 면목이 없죠.”
볼이 핼쑥해진 지부장이 안경을 추어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앙브흐는 대번에 지부장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지부장이 제일 힘들고, 제일 많은 일을 하는 거 뻔히 아는걸.”
진심만이 담긴 그녀의 말에 지부장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지부장은 황급히 눈가를 찍으며 너털웃음을 흘렸다.
“나이 드니 이리 사소한 것에도 감동하고 그러네요, 주책없이.”
“지부장은 잘하고 있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는걸. 조금만 더 힘내.”
기실 이번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지부장의 고생길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앙브흐는 구태여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고, 더해서 황녀 전하께서 직접 이 사건을 살피고 계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지부장을 아끼지만, 그렇다고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제국 황녀의 동향을 떠들어대지는 않을 만큼의 분별력은 있었으니까. 마냥 꽃밭에서 사는 것처럼 보여도 앙브흐는 ‘타렌’이었다.
“네. 그보다 아가씨, 지시대로 정리해둔 도표입니다.”
“응. 고생했어.”
지부장이 건넨 물류의 흐름을 살피던 앙브흐의 눈은 다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앙브흐는 거의 기절하듯 잠에 빠진 지부장을 흘긋 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 뭉치를 들고 살그머니 안쪽에서 빠져나온 앙브흐는 이윽고 우뚝 멈춰 섰다.
“응? 너는.”
그녀 앞을 막아선 남자를 본 앙브흐가 활짝 웃었다.
“잘 지냈어? 일하러 나와주다니 지부장도 고마워할 거야. 물론 나도 그렇고.”
앙브흐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선량한 목소리를 냈다.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앙브흐가 줬던 돈은 모조리 날렸지만, 그 덕에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쨌든 도움이 되긴 되었으니 거짓은 아니리라.
“그래? 다행이다.”
방실방실 웃는 앙브흐를 보는 남자의 입가에도 선량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만 더 힘내줘. 근래에는 실종자도 없으니 조만간…….”
도톰한 붉은 입술로 조잘조잘 떠드는 앙브흐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는 곧 고개를 숙여 제 눈을 감췄다. 그리고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해, 손만 뻗으면 그녀의 목을 틀어쥘 수 있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아가씨!”
그녀의 뒤쪽에서 불쑥 지부장이 나타났다. 그는 자다 일어나 황급히 나온 건지, 머리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부장을 보면서도 앙브흐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고개를 흔들었다.
“더 자지 않고.”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가시는데 누워 있을 수는 없죠.”
눈가의 짙은 그늘을 누르면서도 지부장은 강경히 앙브흐의 배웅을 자처했다.
“으음, 정 그렇다면야.”
“네. 어라? 자네, 오늘도 일이 있었나?”
지부장이 안경을 추어올리자 남자는 허리를 꾸벅 숙였다.
“혹시 몰라서 나왔습니다.”
그의 말에 지부장은 또 감동이 차올랐는지 울컥한 얼굴로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의 어깨를 꽉 잡은 지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서 정말로 고맙네.”
남자는 지부장이 잡은 제 어깨를 내려다보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아닙니다. 제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지요. 그럼 저는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남자가 자리를 뜨려는데, 앙브흐가 불러 세웠다.
“아, 잠깐만.”
앙브흐는 지부장을 향해 손짓했고, 지부장은 눈치 빠르게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남자에게 돈주머니를 손수 건넨 앙브흐가 웃었다.
“이건 그동안 고생했고, 앞으로도 이 상회에서 열심히 일하라고 주는 의미야.”
“아니, 지난번에 주신 것도 있는데, 또 받을 수는…….”
선량한 낯으로 돈주머니를 사양하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브흐가 입을 열었다.
“받아둬. 명령이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일 열심히 하고.”
더없이 선한, 그야말로 선의만이 가득한 그녀의 눈과 마주친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돈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앙브흐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고, 지부장도 그녀와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남자는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앙브흐가 떠난 자리를 한참,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한편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일단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궁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빽빽한 서류의 산맥을 올려다보던 올리비아는 아득해지는 초점을 제대로 잡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좋아. 오늘도 해볼까.”
그녀가 전투적으로 서류를 헤치고 들어가자, 크라이어 역시 늘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읽던 책을 펼쳤다. -사각사각. -팔락. 펜이 종이 위를 누비는 소리와 간헐적으로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시간.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둘만의 시간과 흐르는 침묵은 지독하게 편안했다. 그리고 둘 중 누구도 그것을 특별하게 생각하지도, 새삼스럽게 깨닫지도 못했다. -탁. 볼셰이크의 역사책 중 말보다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적힌 책을 독파한 크라이어가 문득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저보다 한참이나 작은 어깨가 들썩였고, 그 아래 펜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늘 보던 광경이었지만, 늘 신기하긴 했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는 걸까. 움직이는 펜을 따라 들썩이는 어깨에서 일렁거리는 붉은 머리가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아니, 극렬한 새빨간 불꽃보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더 뜨겁다고 했던가. 크라이어는 턱을 괴고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그를 언제나 똑바로 응시하던 푸른 눈동자는 볼 수 없었다. 동그란 아마께로 내려와 살랑거리는 새빨간 머리카락을 따라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볼셰이크라……. 아마도 그가 있던 시대에도 볼셰이크가 있었으리라. 대륙의 시작과 함께한 가문이라고 하니, 언젠지 모를 그의 시대에도 분명 저런 머리카락을 가진 이가 있었겠지. 올리비아의 조상일 테니 어쩌면 그때에도 꼭 그녀 같은 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알던 사이였을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참으로 묘한 인연이지 않은가.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던 그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크라이어는 욱신거리는 쇄골의 낙인을 꾹 눌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움직임을 올리비아는 놓치지 않았고. 검토하던 서류를 내던져버린 그녀가 벌떡 일어나 크라이어에게 한달음에 다가섰다.
“뭐야, 설마 또 아픈 거야?”
“그래.”
“고통의 강도는? 1부터 10까지로 치면?”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당장이라도 제 쇄골에 코를 박을 듯 가까이 다가선 올리비아의 동그란 이마를 밀어냈다.
“애초에 10이라는 고통의 강도를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달라지니, 그렇게 수치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아, 그렇네. 그러니까 10은…….”
올리비아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답했다.
“조금 불편한 정도다.”
그는 쇄골에서 손을 떼어내며 목을 좌우로 가볍게 꺾었다.
“누군가와 대련하는데 별다른 지장이 없는 정도.”
그런 그의 팔을 올리비아가 퍽퍽 내려쳤다.
“대련이 문제가 아니잖아! 고대신과 관련된 낙인 쪽이 훨씬 중요하지!”
물론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고개를 저었다.
“계속 아픈 것도 아니고, 특정 조건을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도 않으니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낙인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의 특정 조건을 굳이 꼽자면 올리비아였지만, 그도 확실치 않았다. 그녀와 맞닿을 때 늘 아프다면 확실히 올리비아가 조건이 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눈썹 끝을 축 내린 올리비아의 시선은 그의 낙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풀리지 않는 문제를 잡고 있는 건 의미가 없겠지. 게다가.”
그는 낙인이 있는 쇄골 부근을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애초에 낙인은 낙인일 뿐. 뭔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눈이라면 다르겠지만.”
그는 제 눈가를 툭 두드렸고, 올리비아도 반사적으로 제 눈가를 매만졌다.
“눈?”
“그래.”
올리비아는 그의 검붉은 눈을 빤히 응시하다 물었다.
“눈이 뭐가? 혹시 눈에서 뭐 나오기라도 해?”
“뭐?”
“아니, 그러니까…….”
제가 말을 하고도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깨달은 올리비아가 말끝을 흐리자 크라이어는 고개를 흔들었다.
“눈에서 뭐가 나오진 않는다. 단지 고대신의 노예가 되면 눈동자가 이따위 색으로 바뀌는 것뿐.”
“이따위 색이라면, 검붉은……색? 원래 그 색이 아니었다는 말이야?”
기억도 없으면서 그걸 어찌 아느냐는 의문이 올리비아의 표정에 드러나자 크라이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나도 원래 눈 색이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마법사의 딸이 그리 말했으니 사실일 거다. 미친 것들이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거든.”
언제였던가. 아마도 그가 부활하고 고대신의 노예 낙인을 찍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으리라.
‘크라이어. 당신 눈은 정말로 아름다워요.’
그레타는 크라이어를 앞에 두고 더없이 황홀하다는 표정으로 그의 눈가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고대신을 섬기는 이들만이 이런 눈동자 색을 가지죠.’
크라이어의 검붉은 눈동자 속에서 스멀스멀 증오와 분노, 끝을 모르는 체념과 절망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 검붉은 눈동자는 낙인 만큼이나 그를 옥죄는 족쇄이자, 상징이었다. 그가 고대신의 노예이며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원하지도 않은 부활, 원하지도 않았던 계약.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노예의 굴레. -콰드득. 크라이어가 앉은 소파의 암레스트가 그의 손아귀에서 눈 뭉치처럼 부스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눈을 제 양손으로 가렸다. 작은 손바닥부터 시작된 어둠, 그곳에서부터 어둠과 어울리지 않는 온기가 밀려 들어왔다. -투둑. 암레스트의 부스러기가 떨어짐과 동시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던 크라이어의 손등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미친 듯이 끓어 올라 부글거리던 증오와 분노, 절망과 체념이 자그마한 온기에 잠잠히 몸을 뉘었다. 크라이어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린 작은 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의 거친 손끝이 얇고 보드랍지만, 펜을 쥔 부분만 딱딱한 그녀의 손마디를 타고 내려가다 우뚝 멈췄다.
“황…….”
“그냥 손이 나갔어. 그것뿐이야.”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둘 사이에 뜨뜻미지근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올리비아의 손 위로 크라이어의 손이 덮였다. 움찔한 그녀가 제 손을 빼내려는 찰나.
“이대로 잠시만.”
나지막하고, 어딘가 탁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스몄다. 어쩐지 미미하게 떨리는 것 같기도 한 그의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덜컥 멈춰, 그대로 그의 눈을 가린 채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올리비아가 재차 입을 열려는 순간. -똑똑. 느닷없는 노크 소리에 올리비아의 어깨가 작살 맞은 참치처럼 크게 튀어 올랐고, 노크 소리 뒤로 사용인의 황망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녀 전하, 송구합니다만, 노르덴 국에서 손님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