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니, 그보다 훨씬 달다. 지독할 정도군.2021.11.18.
그 무언의 압박에 허리를 숙인 크라이어의 귓가로 올리비아의 속삭임이 간질간질하게 울렸다.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물론 그 목소리와 말투는 절대 간지럽지 않았지만.
“일은 다 끝났지 않나.”
그의 시선이 앙브흐를 흘긋 스치자 올리비아도 일단 고개는 끄덕였다.
“그야 타렌 영애와의 일이 끝나기는 했지만, 당신이 여기서 왜 나와?”
방금 전과 완전히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올리비아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에 농축된 ‘타렌 영애의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라는 의미를 크라이어가 모를 리가 없을 터. 하지만 크라이어는 그에 대한 답 대신 엉뚱한 말을 했다.
“일도 끝났으니 하면 되지 않나.”
“뭘?”
맥락 없이 나온 말에 올리비아는 가출하려는 어이의 머리 끄댕이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소설이나 연극, 동화책이나 나올 법한 일 말이야.”
더벅머리에 가려진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입가는 선명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말…… 어? 어어?”
올리비아가 되묻기도 전에 크라이어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그와 발을 맞추게 된 올리비아는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먼저 들어가 보도록. 오늘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어!”
올리비아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면서, 지금이라도 달려가야 하나 고뇌하던 앙브흐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난데없이 나타난 수상쩍기 그지없는 사내를 보고 아는 사람이니 걱정 말라고 했기에, 올리비아가 끌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던 참이었으니까. 심지어 황녀 전하께서 오늘 제가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셨으니.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환하게 피어난 앙브흐는 양손을 흔들며 올리비아를 환송했다.
*** 크라이어에게 손목이 잡혀 얼렁뚱땅 그와 보조를 맞춰 걷던 올리비아가 몸의 중심을 최대한 뒤로 하며 멈춰 섰다.
“잠깐, 잠깐잠깐.”
설사 그녀가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멈춘다 하더라도 그는 가볍게 그녀를 잡아끌 수 있지만, 크라이어도 순순히 멈춰 섰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올리비아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과 힐난에 가까운 목소리에 크라이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을 뿐.
“눈에 띄지 말라고 해서 안아 올리지도 않았는데.”
“뭐야, 그 당연한 걸 하고서 내가 이만큼이나 참았는데! 라고 항변하는 모양새는?”
재차 출가하려는 어이의 뒷목을 잡은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며 물었다.
“그보다 대체 뭘 하려고 이런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소설이나 연극, 동화책에 나오는 단골 소재를 해보려고.”
그의 답에 올리비아는 잠시 눈만 깜박이다 고개를 크게 기울였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하하호호 거릴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일을 안 할 수 있겠지.”
너무나도 간단히 나온 답에 올리비아는 답할 말을 잃어버렸다. 크라이어의 말인즉슨.
‘사랑하는 두 남녀가 변장을 하고 몰래 나들이를 가는 거.’
말이 나들이지, 그건 결국 데이……. 심지어 앙브흐의 마지막 말이 어쩜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떠오르는지. 올리비아는 끈질기게 잡고 있던 어이의 뒷덜미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좋은, 뭐? 무슨 좋은 시간? 물론 앙브흐가 뭘 알고서 그런 인사를 건넨 것은 아닐 터. 그저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겠지. 하지만 지금 크라이어의 말과 이어 보면…….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크라이어를 올려다보다 그가 제게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휙 피해버렸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의 행동이 멋쩍었기에 궁시렁거렸다. 물론 올리비아는 속으로만 궁시렁거리지 않았다. 이미 첫 만남에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꼴도 다 본 사이에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속에 담아두고 끙끙거릴 일은 또 무어란 말인가.
“좋은 시간이라니, 말도 안 되잖아.”
앞뒤 없는 말이긴 했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 크라이어의 걸음이 느려졌다.
“아니, 그러니까 당신하고 나 말이야. 지금이야 협력관계지만…….”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에 크라이어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대신 우뚝 멈춰 섰을 뿐. 그를 따라 이번에도 엉겁결에 멈춰선 올리비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서 제일 복잡한 사정을 가진 사내가 속삭였다.
“일단은 좋은 시간을 보내자고.”
웃음기 섞인 나지막한 속삭임에 잔뜩 구겨졌던 올리비아의 미간도 풀려 버렸다. 그렇게 크라이어와 올리비아는 목적지도 정하지 않고 무작정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걸 산다고? 안목 형편없어, 정말.”
올리비아의 공격에 크라이어는 집어 들었던 물품을 내려두었고.
“그건 아니라고 본다만.”
크라이어의 가차 없는 평가에 올리비아도 쥐었던 것을 원위치시켰다.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서로의 안목을 마음껏 폄하하던 둘은 어느새 손을 잡고 있었다. 딱히 굉장히 덜덜 떨지 않았다. 서로의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지릿 거리는 느낌을 받지도, 서로의 손을 잡은 채 꼼지락거리지도 않았다. 그저 지극히 자연스럽게, 사람에게 떠밀려가던 올리비아를 크라이어가 손을 잡아 빼냈고, 그 후로도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잡았을 뿐. 맞닿은 온기는 불타는 듯 뜨겁지도, 긴장으로 차갑지도 않게 미지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으리라. 변신에 가까운 변장을 한 덕에 그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모르는 이들이 둘을 본다면 영락없는 데이트였으리라. 물론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강낭콩 반쪽만큼도 그렇게 생각지 않았지만. 아니, 만약 누군가 그리 말했다면 아주 정색을 하고 부정했으리라. 헛소리나 개소리하지 말라며,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둘만 전혀 아니라고 입 모아 말하는 데이트 도중, 올리비아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지만, 슬슬 입이 궁금한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올리비아의 눈이 두 배쯤 커졌다.
“저거다!”
지체없이 솜사탕을 파는 노점으로 달려간 그녀는 제 머리만 한 커다란 솜사탕 두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 이건 당신 것. 먹기 싫으면 그냥 쥐고만 있어.”
올리비아는 크라이어가 무어라 답을 하기도 전에 입을 있는 힘껏 크게 벌리고 솜사탕을 아구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이내 올리비아처럼 한입 크게 솜사탕을 베어 물었고, 곧이어 무덤덤한 감상을 내뱉었다.
“이런 맛이었군.”
“뭐야, 처음 먹어 봐?”
“글쎄.”
대단히 모호한 답이었지만, 답을 한 크라이어나 들은 올리비아나 딱히 애매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과거의 기억이 없는 상태이니, 과거에 먹었을 수도 혹은 먹지 않았을 수도 있을 터. 이윽고 솜사탕 하나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크라이어를 본 올리비아가 토끼 눈을 떴다.
“달지 않아?”
그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크라이어는 솜사탕이 꽂혀 있던 나무막대를 흔들며 곧바로 답했다.
“달다.”
“어? 그런데 그걸 다 먹었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주했다는 듯한 그녀의 반응에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뭐냐, 그 반응은.”
“아니, 당신 의외로 단것을 잘 먹는구나…….”
“왜 의외라고 생각한 거지.”
“그야 당연히.”
“당연히?”
되묻는 크라이어에게 올리비아는 선뜻 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에 미친 짐승. 인간이 아닌 괴물. 대륙의 약탈자 등등. 크라이어가 전쟁 당시 들었던 별칭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지만, 나머지 것들도 대부분 비슷한 의미를 지닌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피와 전쟁, 죽음의 화신. 그런 자라면 단 것을 극도로 싫어할 것 같은 고정된 이미지가 있지 않나. 올리비아는 새삼스럽게 크라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면 네 번의 삶에서 그토록 전쟁에서 이기거나, 아예 전쟁 자체를 막으려고 애를 썼건만, 크라이어의 개인적인 정보는 단 하나도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철저한 보안이라며 혀를 내둘렀는데. 알고 보니 그 자신조차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을 뿐.
“내가 잘못 알고 있었어.”
툭 튀어나온 그녀의 말은 뭔가 중간에 많은 이야기가 빠진 듯했지만, 크라이어는 구태여 캐묻지 않았다.
“그보다 잠깐.”
그가 제 오른뺨을 툭툭 두드렸고.
“응?”
올리비아는 눈을 깜박이며 그를 따라 오른뺨을 더듬었다.
“안 떨어졌다. 잠시 그대로.”
옅은 한숨을 내쉰 크라이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한순간 보드라운 뺨에 거친 손끝이 스쳤고, 이어 그는 제 손끝에 묻은 몽실한 솜사탕을 내려다보다 슬쩍 핥았다.
뒤이어 그는 미간을 구기며 내뱉었다.
“달아.”
그에 올리비아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은 채 답했다.
“그야, 달겠지. 방금 당신도 먹은 거잖아?”
“아니, 그보다 훨씬 달다. 지독할 정도군.”
그의 답에 올리비아는 대번에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당신이 느끼는 것이 훨씬 정확할 텐데. 혹시 독인가?”
잠행 도중에 ‘불행한 사고’를 당하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으니, 올리비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즉효성 독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발현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고대신과 관련된 것일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
“아, 그쪽일 수도 있네. 으음, 일단 속이 타들어 가거나 목구멍이 화끈거리진 않아. 혀도 잘 돌아가고.”
손발 끝을 꼼지락거린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비 증상도 없고. 역시 독보다는 고대신의…….”
독이니 고대신과의 연관성이니 떠드는 둘의 머릿속에 아주 평범하고, 조금쯤 설렐 만한 이유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똑같은 솜사탕이지만, 그녀의 뺨에 묻은 것을 떼어먹었기에 지독하게 달았다는 사실 같은……. 변장을 한 채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누구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는 두 사람. 그리고 그 사실을 불현듯 깨달은 크라이어는 오리입을 한 채 대단히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하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든 올리비아는 이내 그와 눈이 마주쳤다.
“크라이……어?”
마주한 둘의 눈에는 오롯이 서로만이 담겼다. 그 순간, 검붉은 대지 위로 아주 작은, 너무나도 작은 푸른 꽃봉오리가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서로가 집은 물품에 자비 없는 평가를 내릴 무렵. 한껏 기분이 고양된 상태로 가문으로 돌아가려던 앙브흐가 멈칫했다. 오늘 구석진 곳에 있는 상회에 할 일이 있었는데, 다른 일이 앞서는 바람에 깜박하고 있었으니까. 급히 걸음을 돌린 그녀는 이윽고 상회 구역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곳에 도착했다. -달칵. 오후 햇살이 비쳐드는 상회의 안쪽으로 들어선 앙브흐는 유난히 고요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응? 다들 나간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그림자가 누군가의 그림자에 천천히 먹히고 있었지만, 앙브흐는 깨닫지 못했다. 이 부근을 떠들썩하게 만든 연쇄 실종, 살인 사건의 범인이자 고대신을 섬기는 남자. 그가 소리 없이 앙브흐의 뒤쪽에서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느릿하게 하지만 멈추지 않는 갈퀴 같은 남자의 손이 앙브흐의 뒷목을 잡아채려는 순간.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