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선의로 시작한 일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진 않아.2021.11.15.
‘사랑하는 두 남녀가 변장을 하고 몰래 나들이를 가는 거.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사건을 겪기는 하지만 결국 알콩달콩하게 서로의 사랑만 확인하는, 그런…….’
말을 할수록 올리비아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황녀,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 한 대 칠 표정인데.’
‘그야 나는! 이렇게 허리가 휘어져라 살인 사건이며, 고…… 하여간! 죽도록 일하고 있는데, 타렌 영애 눈에는 하하호호 당신과 놀러 다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니, 억울하고 분하니까 그렇지!’
정말 별거 아닌 일에 한껏 열을 낸 올리비아는 그 사실을 금방 깨닫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무튼 당신은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따라와.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잖아.’
‘그야 어렵지 않다만, 그렇게나 억울한 건가.’
‘뭐? 아니, 그 이야긴 그만두자.’
몇 분 전 과거를 유영하던 올리비아는 저를 부르는 앙브흐의 목소리에 현실도 돌아왔다.
“도착하면 먼저 실종자들의 집부터 둘러 보나요?”
“뭐?”
“조사요! 뭐부터 할까요? 뭐든 맡겨 주세요! 상회가 모여 있는 곳이라면 지리는 물론이고 오가는 이들도 빠삭하게 알고 있답니다!”
자신감에 넘쳐 제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앙브흐의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니라면 범인에 대한 단서를 살펴볼까요? 가문에서 모은 정보를 황궁으로 보내긴 했지만, 다시 보면 뭔가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올리비아는 부담스러울 만큼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아니 의욕을 불태우다 못해 아주 몸이라도 던질 기세인 앙브흐를 단호히 멈춰 세웠다.
“영애가 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니야.”
“네?”
“영애가 오늘 나와 함께 할 일은 피해 입은 지역의 제국민들의 사정을 정확히 알아보고, 위로하며 향후 어찌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는 거니까.”
이보다 더 명확하고 강경할 수 있을까. 앙브흐의 긴 속눈썹이 벌새의 날개처럼 빠르게 팔락거렸지만, 올리비아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범인을 잡거나 사건의 단서를 추적하는 것은 전문가들이 해야 하는 일이야.”
“네. 알겠습니다.”
앙브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상당히 실망한 듯했지만, 범인을 잡는데 꼭 도움을 주겠다며 억지를 부리거나 멋대로 튀어 나갈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저렇게 순진하고 남을 도와주는데 진심이라면, 뒷생각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위험에 모가지를 들이밀 텐데. 그건 또 아니고……. 여러모로 예상 밖이란 말이야. 이렇게 되면 크라이어와 그냥 동행해도 괜찮았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올리비아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또 모르는 일이지. 인생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하는 법이니까.
“가볼까.”
“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비아와 앙브흐, 그리고 그림자를 타고 움직이는 크라이어는 타렌 상회 지역에 들어섰다.
“실종자들의 집에는 이미 조사관들이 계속 드나들었을 테니, 주변인들의 말을 들어보는 편이 낫겠지.”
그리고 아주 희박한 확률이긴 했지만, 어쩌면 죽은 범인이 발견되었던 집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뒷말을 삼킨 올리비아가 움직이자 앙브흐도 군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는 일은 올리비아의 생각처럼 착착 진행되지 않았다.
“제가 그만 중요한 물품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랬구나. 이걸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길 한구석에서 허둥지둥 하고 있는 이에게 다가선 앙브흐가 자초지종을 물었고, 그 사람의 사정을 들은 그녀가 선뜻 묵직한 돈주머니를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무사히 해결되길 바랄게.”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에게 산뜻하게 손을 흔들어준 앙브흐는 올리비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체했어요.”
“아니, 제국민을 도와주는 일이니 무어가 급할까.”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 없는 답을 심드렁하게 뱉은 올리비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앙브흐의 첫 번째 선의를 그러려니 하고 넘긴 올리비아는 곧 두 번째 선의를 맞닥뜨렸다.
“돌아선 그녀의 마음을 어떻게 돌릴 수 있을지 막막해서…….”
“힘들겠다. 일단 그녀가 좋아하는 선물이라도 사서 가보는 건 어때?”
세상이 무너지도록 한숨을 내쉬는 남자에게 다가선 앙브흐는 어김없이 그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그렇게 두 번째도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 하지만 세 번, 네 번……. 앙브흐는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스치는 모든 어려운 이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건넸다.
“흑흑흑, 으아아아앙!”
“무슨 일이니, 울지 말고 말을 해보렴.”
“어, 언니가아아.”
앙브흐가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통에 일정이 지체되고 있긴 했지만, 어차피 보여주기식 일정이었기에 그냥저냥 손을 놓고 있던 올리비아의 귀가 쫑긋거렸다.
“언니?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언니, 우리 언니가, 으아아앙!”
심드렁하던 올리비아의 눈이 매서워졌다. 혹시 언니가 실종되었나? 만약 이번 사건과 관련된 일이라면……. 하지만 이어지는 아이의 말에 올리비아는 다시 심드렁해졌다.
“언니가 이번에 결혼하는데, 선물을…….”
“저런, 선물로 줄 것을 망쳐버렸구나. 그럼 으음.”
앙브흐는 품을 뒤졌지만 이미 앞선 이들에게 전부 다 줘버린 터라 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앙브흐는 난처해하면서도 절대 올리비아를 돌아보거나 그녀에게 한마디라도 건네지 않았다. 사람을 돕는 일은 어디까지나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 뿐. 가뜩이나 자꾸 지체되는 참에 염치도 없이 아이를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나. 어차피 근처에 상회가 있을 테니 그곳으로 보내서 뭐라도 쥐여주면……. 하지만 앙브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 언니 신발 예쁘다.”
그 와중에 옴팡지게도 앙브흐의 차림새를 훑은 아이가 중얼거리자, 앙브흐는 기꺼이 신발을 벗었다.
“신던 것이지만, 이것으로도 괜찮다면.”
“고마워!”
신발을 품에 안은 아이는 활짝 웃으며 달려나갔고, 뒤에 남은 앙브흐는 그런 아이를 위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멀어지던 아이가 이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그제야 허리를 편 앙브흐가 올리비아를 향해 돌아섰다.
“거듭 죄송합니다. 자꾸 지체가 되어서.”
“아니, 아까도 말했듯이 괘념치 마. 그보다.”
올리비아는 아이가 떠난 자리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영애.”
“네?”
방실방실 웃는 앙브흐는 처음 나왔을 때와는 달리 거의 헐벗고 있었다. 심지어 신발도 없었으니까. 그녀의 신발은 울고 있는 아이의 품에 고이 안겨 어디론가 가고 있을 터. 아마도 운이 좋다면 무사히 그 신발을 돈으로 바꾸거나, 제 보물 상자에 넣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백에 오십 정도는 다른 이에게 빼앗기고, 더 나아가 아이도 해코지를 당하겠지. 무릇 선의란 늘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정도는 타렌가의 교육으로 앙브흐 역시 이미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왜 그렇게까지 호의를 베풀거나 누구든 도와주려 하는 거지?”
일견 이상한 질문이었다. 선의로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을 왜 하냐니? 그리고 앙브흐는 아주 당연한 답을 내놓았다.
“어려운 이들이 있으니까요.”
“나도 같이 봐서 알아. 하지만 어려운 이들이 있더라도 그들 모두를 영애처럼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하진 않지.”
설마하니 제가 없었더라면 황녀님도 저와 똑같이 하셨을 거예요, 라는 답이 나오려나.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거기까지 머리가 꽃밭은 아니었던지 앙브흐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으음……. 잘 모르겠어요. 아프고 슬픈 이가 있고, 제가 도와줄 수 있어서 도와준 것뿐이니까요.”
그저 선의로만 가득한 그 답에는 거짓 부스러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런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면서 제가 이토록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할 생각도 없어 보였고. 그렇기에 올리비아는 충동적으로 입을 놀렸다.
“한 가지 조언해도 될까?”
“물론이죠!”
올리비아는 앙브흐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진 않아. 사람들은 선의를 선의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도 않고.”
대단히 차갑고 비정한 말이리라. 하지만 올리비아의 말이야말로 어디까지나 현실이었다.
“특히나 영애처럼 힘이 있는 자들이 건넨 도움의 파장은 더 큰 법이지.”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자마자 짧게 후회했다. 괜한 오지랖을 부렸어. 이제까지 괜찮은 것을 보니 어떤 결과가 나오건 알아서 잘 해왔을 터인데.
“상냥하시네요.”
앙브흐는 그리 말하며 활짝 웃었다. 왜 그쪽으로 의식이 흘렀는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올리비아는 따로 답할 말도 찾을 수 없었고.
“혹시 제가 잘못되거나, 제가 도움을 준 이들이 잘못될까 봐 걱정하시는 거죠?”
딱히 눈앞의 앙브흐 타렌이 잘못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올리비아는 굳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죠.”
너무나도 가볍고, 너무나도 올곧은 답이었다. 더해서 앙브흐는 태양처럼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도 저는 할 수 있는 한 어려운 이들을 도울 거에요.”
오롯한 선의만이 느껴지는 그 답에 올리비아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
“이 정도로 하고 돌아가지.”
“네!”
비록 범인을 잡거나 실종자를 찾지는 못했지만, 어려운 이들을 아주 많이 도와주었기에 앙브흐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막 타렌 상회의 구역을 벗어날 무렵.
“끝난 건가.”
저 깊은 우물 속에서 울리는 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냐!”
불쑥 나온 낯선 남자를 본 앙브흐는 당연히 바짝 경계하면서 올리비아 앞을 막아섰다.
“비켜서라.”
순진무구하고 남을 의심할 줄 모르는 선한 성정을 타고났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타렌의 후계자다. 지금 상황에서 누구의 안전을 우선시해야 하는 가는 확실히 알고 있었기에 앙브흐는 망설이지 않고 제가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앙브흐의 등에 가려진 올리비아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왜 지금 여기서?
“비키지 않으면 비키게 만들겠어.”
어려운 이를 도와줄 때와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강경한 앙브흐를 향해 크라이어가 손을 내자, 동시에 앙브흐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비명이든 고함이든 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영애, 괜찮아.”
올리비아가 앙브흐의 팔을 덥석 잡아당기면서 크라이어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크라이어는 순순히 한발 물러났고, 앙브흐 역시 입을 다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지금은 나처럼 변장 한 거고.”
“아, 그러시군요.”
이번에도 앙브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으로 물러났고, 크라이어는 망설임 없이 한걸음에 올리비아 코앞에 섰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올리비아는 거의 그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소맷자락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