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래서 포기할 건가?2021.11.11.
“응. 어느 대 조상인지 모르겠지만, 살성이 대단히 무른 분이 계셨던 모양이라.”
“아아, 차원 이동을 해서 머리색과 눈색이 볼셰이크 특유의 것으로 바뀌었다던, 아마도 이름이 아실리였을 거다. 그에 관해 얼마 전에 읽었으니까.”
근래 볼셰이크 역사책을 쌓아두고 읽는가 했더니, 조만간 그녀보다 더 많은 걸 알게 될 모양새였다.
“그랬던가……. 여하간 어디 툭 부딪치기만 해도 멍이 쉽게 들고, 피가 배어 나오기도 하거든. 그리고 회복 속도도 좀 더뎌.”
올리비아는 불만스럽게 제 팔을 툭툭 쳤다. 만약 지금처럼 대륙이 계속 평화로웠다면, 살이 무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으리라. 제국의 황녀인 그녀가 다칠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제국의 황녀라는 그녀의 지위는 전쟁 중에도 변하지 않지만, 패전국의 황녀가 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는 법. 뭐…… 이런저런 더러운 꼴 당하기 전에 단칼에 목이 달아났으니 그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험한 꼴 당하기 직전에 아예 깔끔하게 보내주기도 했었고……. 분명 세 번째 삶이었다.
‘황녀라니,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구역질 나는 온갖 욕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뻗던 놈은 다음 순간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놈의 시체를 피해 뒤로 물러난 올리비아는 무표정했다. 저따위 말을 듣거나 코앞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황녀인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죽일 크라이어가 그녀를 구했다. 물론 그 뒤에는 똑같은 결말을 맞았지만. 만약 그가 그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욕심과 욕망이 뺨에 늘어지게 붙어 있던 놈에게 붙들려 무슨 꼴을 당했을지 뻔하지 않은가.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과거의 잔영을 떨쳐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바에, 노르덴 국에서 온다는 사람 누구인지 추측 좀 해봐.”
올리비아는 마치 화가 난 토끼처럼 발을 탕탕 굴렀다.
“고대신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법사가 아니라 그의 딸이 알아 차렸을 거다.”
“딸?”
“그래.”
“마법사의 딸도 마법사…… 아, 그렇겠네.”
반사적으로 되묻던 올리비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마법’이라는 것 자체가 거의 소멸되어버린 시대다. 게다가 역사서를 뒤져 봐도 마법은 애초에 일인 전승에 기반을 두거나, 특별한 사람들만 모아서 매우 폐쇄적인 사회를 구성했지 않나. 마법사의 혈족인 그의 딸이 마법사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마법사는 몰랐겠지만, 그 딸이 그보다 더 뛰어나다.”
“스승보다 제자가 뛰어날 수도 있는 법이지. 게다가 마법은 재능에 크게 휘둘린다고 보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이던 올리비아는 이어지는 크라이어의 말에 멈칫했다.
“고대신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 딸이 직접 올 수도 있다.”
“으음.”
마법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려고 했으니 그의 딸이 온다는 건 호재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마법사라……. 네 번이나 죽고 다섯 번째 삶을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족속들이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처럼 정보를 쥐어 짜낼 수 있으려나.
“황녀.”
“응?”
“그렇게까지 음험하게 기뻐하는 이유가 뭐지.”
배슬배슬 웃고 있지만, 입꼬리에서 스며 나오는 기운은 그리 귀엽지 않았다. 그에 올리비아는 뻔뻔스럽게 가슴을 활짝 펴며 답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잖아.”
이어 올리비아는 눈썹 끝을 축 내리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솔직히 고대신한테 가서 노예 낙인을 지워 달라거나, 고대신하고 거래하는 건 지나치게 힘들고,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고대신이 강림한다면 대륙은 끝이다. 전부 불타오를 테니까.”
그의 말을 확실히 듣기는 했지만, 단숨에 이해하지는 못한 올리비아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고대신이 나타나면 대륙이 불타…….
“뭐?”
한 번 더 곱씹고 나서야 크라이어의 말을 정확히 이해한 올리비아가 한 박자 늦게 대경했다.
“대륙이 불탄다고? 그거 설마 멸망한다는 말이야?”
“그래. 정확히 말하면, 현 대륙에 있는 인간들이 모조리 쓸려나가겠지.”
“그런 적은 없…….”
올리비아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지난 네 번의 삶을 사는 동안 제국이 멸망하는 동시에 죽었으니, 그 이후의 일을 알 길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크라이어는 그녀의 얼굴에 확연히 드러난 ‘설마’나 ‘혹시’에 확인사살을 했다.
“대륙 전쟁으로 인해 흐른 피를 먹고 고대신이 강림하는 순간, 대륙을 정화 시킨다는 목적으로 모든 것을 불태울 거다. 마법사는 숨기려고 했지만, 그 딸은 순순히 털어놓더군.”
다른 해석의 여지도 없는 아주 확실한 답이었기에 올리비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심정을 감추지도 않았다.
“갑자기? 갑자기 세계 멸망이야?”
“고대신의 원래 목적이 그것이었으니 갑자기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아니, 내 입장에서는 갑자기라고! 나는 제국을 무너뜨린 뒤에 당신이 대륙 정복이라도 할 줄 알았다고!”
누군가 전쟁을 일으키는 궁극적 목적은 결국 상대를 거꾸러뜨리고 지배하는 것에 있지 않은가.
“나는 노예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고대신이 대륙 정복이라도 해서 유일신이 된다던가 그런 비교적 평범한 전개를 예상했는데, 뭐? 멸망?”
크라이어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재차 외쳤다.
“그리고 정화라니? 지금 대륙의 인간들이 무슨 벌레라도 돼? 정화는 무슨 개소리가!”
크라이어 앞에서 황녀의 품위를 내다 버린 지 오래되긴 했지만, 이렇게나 험한 말을 쏟아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할 수만 있다면 더! 더! 심한 말이라도 마음껏 퍼붓고 싶었을 뿐. 한동안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던 올리비아는 이내 풀이 팍 죽었다.
“고대신이 강림하면 모든 것이 끝이라니. 역시 고대신하고는 말이 안 통하잖아.”
다섯 번째 삶 만에 처음으로 ‘저’ 크라이어를 막아서나 했더니, 알고 보니 진짜 흑막인 상대가 지나치게 체급이 컸다. 침울해진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린 크라이어가 속삭였다.
“그래서 포기할 건가?”
어째서인지 은근하게 들리는 그 속삭임에 올리비아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당신이 말했었잖아. 한번 뱉은 말은 책임져야 하는 법.”
시리도록 푸른 볼셰이크의 눈동자는 푸른 불꽃이 되어 고대신을 섬기는 노예의 상징인 검붉은 눈동자를 단숨에 갈라놓았다.
“그러니까 대신 마법사를 구워 삶…… 아니, 튀겨 죽이건 뭐건 해서 당신은 자유가 되고 나는 세계 평화를 지켜, 아니지 세계 멸망을 막아 보자고.”
올리비아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대단히 동요하고 흔들렸지만, 살기 위해 무슨 짓이건 하리라는 결심을 꺾지는 않았다. 멱살이라도 잡아끌고 갈 기세로 타오르던 그녀는 이내 휙 뒤로 돌아서서, 산맥을 이루는 서류 더미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거 확인 한번 해봐. 서신만 봐서는 노르덴 국에서 누가 올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라면 혹시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에게 노르덴 국에서 온 서신을 건넸다.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었고.”
쓸데없이 긴 인사치레를 건너뛰고 바로 본론을 확인한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노르덴 국의 인간, 언제 도착하지?”
“곧.”
손가락을 꼽던 올리비아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잠시만.”
그녀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몇 번이며 펼쳤다 접기를 반복했다. 회귀 전, 그러니까 총 네 번의 삶을 샅샅이 더듬던 그녀가 탄식했다.
“시간을 맞출 수 있나?”
“시간?”
“노르덴 국에서 범인 색출에 도움이 된다는 사람이 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야 않겠지만.”
주먹을 꼭 쥔 올리비아가 수도 외곽을 쏘아보며 말했다.
“이 사건의 범인이 불탄 시체로 발견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앙브흐는 한껏 비장하고 심각한 얼굴로 제 차림새를 살피고 또 살피고 있었다. 이제껏 가문이 관리하는 상회 지역에 셀 수도 없이 다녔지만, 오늘은 무려 ‘사건’을 파헤치러 가는 길이 아닌가.
“역시 조금 더 편한 복장으로 올 걸 그랬나.”
평소보다 한참이나 간소한 옷을 입기는 했지만, 자신의 가문은 ‘타렌’이 아닌가. 앙브흐는 착하고 순진하긴 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고 멍청하진 않다. 그렇기에 ‘타렌’의 간소함이 보통 기준과는 조금 다르다는 사실도 알았고.
“아무래도 과한…….”
-툭. 치맛자락에 은은히 뿌려진 진주 가루를 톡톡 두드리던 앙브흐의 어깨를 누군가 가볍게 쳤다. 반사적으로 돌아서서 인사를 하려던 앙브흐가 엉거주춤하게 멈췄다.
“영애. 가지.”
그리 말하는 이는 황녀 전하가 아니라 눈을 덮는 앞머리를 얼굴을 반쯤 가린 왠 낯선 여자였으니까. 한참 척척 걸음을 옮기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돌아선 그녀는 눈만 동그랗게 뜨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앙브흐를 향해 손짓했다. 하지만 앙브흐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결국 앙브흐에게 돌아간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영애? 오지 않고 뭐 하는 거지?”
그제야 앙브흐도 입술을 뗐다.
“누……구?”
“아, 이런. 변복을 하고 있어 알아보지 못했나.”
올리비아는 덥수룩하게 얼굴을 가린 앞머리를 선뜻 올렸다. 가려졌던 볼셰이크의 선명한 푸른 눈동자와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자 앙브흐는 황급히 무릎을 굽히려다 또 멈칫했다. 올리비아가 변장을 하고 나왔다는 말은 황녀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것일 테니까. 영 눈치가 없진 않네. 도로 무릎을 펴면서 고개를 살짝 숙이는 앙브흐를 향해 올리비아가 손짓했다.
“출발하지.”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곁에는 크라이어가 없었다. 그는 일단 몸을 숨긴 상태였으니까. 앙브흐와 만나기 몇 분 전.
‘당신은 변장할 필요 없어.’
‘잠행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되묻는 크라이어에게 올리비아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잠행도 맞고, 당신과 함께 가는 것도 맞지만 동행은 아니야.’
이상한 말장난 같은 답에 크라이어의 고개가 모로 기울자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아무리 변장했어도, 혹시라도 타렌 영애가 당신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또 그 사랑의 대서사시가 시작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수긍했다고 하지 않았나.’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는 수긍했지만, 오늘 당신과 동행하는 것을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 뭐니 뭐니 해도.’
잠깐 말을 멈춘 올리비아는 대놓고 혀를 찼다.
‘쯧, 지금 나나 당신이 함께 돌아다니는 건 동화나 소설, 연극이나 음유시인들의 노래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소재에 딱 부합 하니까.’
‘단골 소재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