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같이 가지 않는 건가.2021.11.04.
“네. 딸아이 유품이라며 누더기 인형을 소중히 품고 다니던 이라서 마음이 쓰이던 차에 말도 없이 일을 쉰 지 한참이라고…….”
지부장이 했던 말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줄줄 읊은 앙브흐가 이내 손을 휘저었다.
“아, 그러니까 이것도 그냥 추측이라. 상회 구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흉흉한 사건인지는 확실하지 않아요.”
아까 사랑의 대서사시도 넘겨짚었다가 단칼에 부정당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확실한지 알아봐야겠네.”
타렌, 실종, 사건, 눈앞의 차기 타렌 후작.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계산을 마쳤다. 타렌 가문을 안심시키기 위한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면 역시.
“타렌 영애.”
“네.”
“사건 해결에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타렌 가문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을 안심시키는 것이지 않겠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앙브흐에게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단지 사건 해결이 이렇게 이루어질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정도의 의사를 확실하게 보여줄 예정일 뿐. 그리고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앙브흐는 양손을 맞잡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가문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이보다 기쁠 수 있을까. 심지어 이번 사건의 해결은 가문뿐만이 아니라 제국 전체에도 도움이 되리라. 그녀는 마음을 다해 외쳤다.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요!”
앙브흐 타렌은 이번에도 오롯한 선의와 황가를 향한 충심으로 충만한 채 기꺼이 이 사건에 목을 들이밀었다. *** 올리비아가 앙브흐와 대면할 무렵. 황녀 궁의 한쪽, 타국의 기사들의 숙소로 배정된 궁의 복도를 각진 턱이 돋보이는 기사가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느 문 앞에 멈춰선 그가 주변을 살피며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손을 들었다. -똑똑.
“들어와.”
다행히 안쪽에서 그가 찾던 이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기사는 주저 없이 문손잡이를 돌렸다.
“응? 자네가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지금쯤 훈련 시간일 텐데.”
각진 턱의 기사를 맞은 얼굴 반반한 기사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자네도 꼭 들어야만 하는 소식이 있어서 왔다네.”
“소식? 일단 앉게.”
그렇게 마주 앉기 무섭게 각진 턱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무투 대회가 열릴 걸세.”
“무투 대회?”
“그래.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가 나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열릴 거라고 하더군.”
말을 전하는 각진 턱의 기사는 괜스레 주변을 쓱 훑은 후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그를 보던 얼굴 반반한 기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그와 자신뿐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저런 행동을 하니, 마치 자신을 의심하는 모양새지 않은가. 그가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황제 폐하께서 집무를 보시는 중앙궁의 사용인에게 들은 말이니 확실한 정보야.”
각진 턱의 기사의 말에 얼굴 반반한 기사는 입을 다물었다. 제국의 황제가 머무는, 아니 집무를 보는 궁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라면 이토록 조심하는 것이 당연했으니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았나. 특히나 제국의 중심, 황궁에서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모자라지 않을 터. 이어 얼굴 반반한 기사는 각진 턱의 기사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정보를 얻다니. 자네 대단하군.”
가감 없는 감탄에 각진 턱의 기사는 별다른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어깨는 한껏 하늘 높이 치솟았다. 하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제국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는 황제의 행사가 고작 타국의 기사에게 이렇게 쉽게 흘러나가다니. 볼셰이크 치하의 제국에서 만에 하나라도 그럴 일은 없을 터. 각진 턱의 기사는 제국의 황궁이 그리 허술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한껏 비대해진 자신감에 눈이 멀어 보지 못했지만, 그가 들은 정보는 전부 철저히 계산되어서 뿌려진 것뿐.
“언제 열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전까지 단련할 시간은 있을 걸세. 제국에서 공식적으로 열리는 대회인 만큼 황녀 전하께서도 참석하실 테고.”
그의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제국 전체의 실력자들이 어지간히 모이는 무투 대회에서 눈에 띈다면 황녀에게 접근할 수 있으리라.
“그것참…….”
하지만 전해준 각진 턱의 기사와는 달리 듣는 얼굴 반반한 기사의 반응은 한없이 떨떠름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해준 각진 턱의 기사는 그나마 ‘기사’라는 작위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였지만, 듣는 얼굴 반반한 기사는 무늬만 기사에 가까운 자였으니까. 그가 자신 있는 건 적을 무찌르는 전투가 아니라 누구든 사랑으로 포용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그 역시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밤 나들이를 위한…….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고. 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들은 거기서 거기인 법.
‘황녀도 사람이니 잠은 자야겠지.’
‘침실이라면 도망갈 곳도 없을 테고.’
한 쓰레기의 썩은 머리에서 탄생한 황녀를 보기 위한, 아니 황녀를 차지하기 위한 밤 나들이를 곧 다른 기사들도 좋은 생각이랍시고 떠올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한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는 점이었고, 당연히 분쟁이 일어났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암묵적인 순번을 받는 것으로 합의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팍팍한 목표 달성에 제 살 깎아 먹기 식의 싸움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무투 대회에서 잘 풀리기만 한다면, 사고사당할 확률도 사라지지 않겠나.”
턱이 각진 기사의 말에 얼굴 반반한 기사도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별다르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밤마다 스리슬쩍 사라진 다른 기사들이 하나같이 ‘사고사’를 당하고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자네도 이렇게 앉아만 있지 말고 일어나게나. 어서!”
“아니, 그렇게 잡아끌지 말래도.”
“어허,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움직일 생각도 없으면서!”
턱이 각진 기사가 우악스럽게 얼굴 반반한 기사의 팔을 잡아끌면서 두 사람은 한차례 실랑이를 벌였다. 그렇게 두 기사의 엇갈린 반응은 타국의 기사들이 머무르는 곳곳에서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타국의 기사들은 진짜 기사에 가까운 이들과 무늬만 기사인 이들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반응은 달라도, 그들 두 부류가 목표로 하는 것은 같았다.
“무투 대회라면 황녀 전하께서도 반드시 참석을…….”
“강자를 꺾지 못해도 그 자리에서 황녀 전하의 눈에 들 수만 있다면…….”
“지금 황녀 전하의 곁에 딱 붙어 있는 놈도 대회의에서 그냥 데려오셨다지? 그렇다면 황녀 전하의 눈에 띄기만 하면 나에게도 기회가…….”
떡 줄 올리비아는 생각하지도 않건만, 여기저기에서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는 이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람 대 사람으로 무력을 겨루는 무투 대회는 어느새 황녀를 쟁취하기 위한 경쟁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 무투 대회에 관한 소문이 황궁에서 체계적으로 조용하게 퍼지고 있을 무렵.
“무투 대회?”
“응.”
자신만만하게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린 올리비아가 턱까지 치켜올렸다. 누가 봐도 내가 잘났다, 라는 의미를 마음껏 뽐내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올리비아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피식 웃었다.
“비열한 얼굴로 뭘 꾸미고 있나 했더니.”
“큼, 크흠!”
무투 대회를 떠올릴 당시 제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지나치게 비열했던 터라 차마 부정도 못 한 올리비아는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여기 목록. 이미 다 전달해 뒀으니까, 죽이지 말고! 되도록 상처도 입히지 말고! 겨루기만 하고 와. 다 돌고 나면, 지금 어느 정도 실력인지 가늠할 수 있겠지.”
올리비아는 한번 말하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재차 강조했다.
“절대 죽이지 마. 부상도 안…….”
“그렇게까지 강조하면 손이 미끄러져서 팔다리 하나쯤 날릴 수도 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기에 올리비아는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 위로 크고 짙은 그림자가 졌다. 성큼 올리비아 코앞까지 다가선 크라이어가 그녀의 손에서 목록을 빼내며 구겨진 미간을 톡 두드렸다.
“알았으니까, 인상 좀 펴라.”
그의 손가락 끝이 닿은 부분을 문지른 올리비아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또또! 폐하께서도 하지 않으셨는데! 당신 말이야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그보다 한참이나 작은 올리비아는 까치발을 들며 그의 가슴께를 쿡 찔렀다.
“난 어린 애가 아니야.”
“아아, 그렇지.”
“뭐야, 그 성의 없는 답은.”
크라이어는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어린 애는 아니지 확실히. 어느 모로 봐도 확연한 성인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아직 한참이나 어리지.”
“뭐? 무슨 말…….”
너나 나나 비슷한 나이대일 거라고, 강력하게 말하려던 올리비아는 멈칫했다. 입을 다문 올리비아에게 크라이어는 더없이 가볍게 덧붙였다.
“나는 아주 오래전 사람일 테니까.”
그가 부활하던 순간의 기억은 불확실하지만, 얼마 후 그레타가 속삭였었다.
‘지금처럼 타락한 세상이 아닌 정결한 시대의…….’
정확히 언제인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시대’라는 단어를 쓸 만큼 오래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의 과거에 대한 단서라면 그 정도일까.
“그야 그렇…… 아니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옛날 사람이라고 해도 어쨌든 내 나이 또래에 죽었잖아! 그리고 그 나이로 부활했고! 설마 부활하면서 어려졌다거나 그런…… 혹시 그래?”
자신 있게 그를 향해 삿대질하던 올리비아의 손가락이 쪼그라들었다. 만약 정말로 어려졌다면, 그는 할아버지일 수도 있을 테니까. 이미 지나간 시대의 이를 부활시키는 일도 가능한데, 사람 하나 어려지게 만드는 일도 불가능은 아닐 터. 크라이어는 의뭉스럽게 입술 끝을 비죽 올리며 웃었다.
“글쎄. 나는 과거 기억이 없으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그렇게 말하면 더는 할 말이 없잖아.”
올리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뭐?”
앞뒤 없는 말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크라이어가 다시 답을 내놓았다.
“그냥 손이 나갔다고.”
그 답에 올리비아는 입을 꾹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그렇다는데 더 이상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심지어 저 말은 크라이어에게 손을 댈 때마다 제가 했던 말이 아니었나. 다시금 구겨지려는 그녀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펴준 크라이어가 몸을 일으켰다.
“슬슬 움직여야겠지.”
그가 걸음을 옮기다 멈칫했다. 당연히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던 올리비아가 그의 뒤에서 손만 흔들고 있었으니까.
“같이 가지 않는 건가.”
그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토끼 눈을 뜨며 제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