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나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고.2021.11.01.
말끝을 흐린 남자가 앙브흐의 주머니를 통째로 내어놓고 입을 다물자 사위가 정적에 잠겼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 파는 행위는 대륙법은 물론이거니와 제국법상으로도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고대부터 내려오는 사람의 욕망은 수요를 만들고,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라오는 법. 돈만 있다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뒷골목에서는 사람도 하나의 상품이 되어 팔려 나갔다. 하지만 이렇듯 대놓고 사람을 사겠다는 이는 드물었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 거금을 내놓은 이는 더 드물었기에, 한동안 어둠 속에서는 소리 없는 대화가 오갔다. 살갗을 찌르는 듯한 침묵이 흐르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쪽으로 오슈.”
걸걸한 남자 목소리와 함께 남자보다 두 세 배 큰 덩치가 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났고, 덩치를 따라 간 남자는 곧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어느새 그의 앞에 숫자가 쓰인 나무패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으니까.
“거기 빨간 건 여자, 파란 건 남자. 연할수록 나이가 많고…….”
숨도 쉬지 않고 쭉 설명을 마친 덩치가 턱짓했다.
“누구로 하시겠소?”
“이것으로.”
“여기서 기다리슈. 함부로 움직여서 팔다리 하나 잃어버리지 말고.”
협박인지 당부인지 모를 이야기를 건넨 덩치가 뒤돌아 나가려는데, 남자가 덩치를 잡았다.
“잠시만요.”
“음? 바꿀 거면 지금 밖에 기회가 없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순조롭게 제물이 될 사람을 샀건만, 뜻밖의 벽에 부딪치지 않았나.
“그런 것이 아니라. 데리고 가는 게 안 된다니요?”
“아, 거참. 간단한 이야기잖아. 뭘 하든 여기서 해결 봐. 방이라면 빌려 드릴 테니.”
방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혀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남자는 다른 것을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거참. 당연한 걸 묻고 있네.”
덩치는 귀찮다는 듯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지만,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아, 당연히 보호를 위해서지.”
덩치의 답에 남자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본 덩치는 못 알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사람…… 큼큼. 상품 수급이 어려워져서 말이야. 있는 상품에 흠집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 상품의 안정과 목숨 보존을 위해 우리 시야가 닿는 곳에 두게 하는 거지.”
제국 전체가 태평 성대라 할 수 있을 만큼 안정되어 있다. 당연히 제 몸을 팔 정도로 절박한 이는 거의 없었고, 빚 때문에 팔려오는 이조차 손에 꼽을 정도. 어느 마을에서 납치를 하는 방법도 있지만, 위험부담이 지나치게 컸기에 소위 ‘사람 사냥꾼’이라는 이들도 손을 뗀 지 오래였다. 게다가 사람을 사고파는 행위 자체를 집요하게 단속하고 또 단속하니……. 눈앞에 있는 이 비실한 놈이 돈을 그만큼 한 번에 내놓은 호구가 아니었다면, 이 대낮에 헛소리하지 말고 꺼지라고 엉덩이를 차버렸을 터. 이런저런 요인으로 최대한 안전하게 장사를 하는 것뿐이었지만, 눈앞의 손님에게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뭐, 우리가 확인만 할 수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해도 상관 없수다. 죽이지만 마쇼.”
덩치의 설명인지 타박인지 모를 것을 들은 남자의 눈 속 깊은 곳에서 시커먼 감정이 뭉클뭉클 치솟았다. 사람을 사고파는 쓰레기들의 입에서 안전이니 목숨이니 하는 말을 듣게 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파는 사람이 팔지 않겠다고 하니……. 사람을 사려 했던 목적은 신을 위한 제물이건만, 저런 놈들이 뻔히 보고 있는 와중에 의식을 치를 수도 없는 노릇.
“됐……습니다.”
“뭐? 어이! 돈은 돌려주지 않는데!”
당황한 덩치가 무어라 떠들어댔지만, 남자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대단히 모순적이게도 수도에서 가장 어둡고 가장 비참한 골목에서는 현재 수도 외곽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연쇄 살인마의 손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젠장!”
남자는 끊임없이 욕을 짓씹으며 입안을 너덜거리게 씹어댔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돈으로 제물을 사는 방법도 막혀 버렸다면, 남은 건……. 주변 이웃들에게 손을 대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남겨두려 했건만.
“지금이 마지막의 마지막이니.”
남자가 마지막까지 이웃들에게 손대지 않으려고 했던 건 이웃과 정이 들었다거나, 매일 얼굴을 보는 이들을 해할 수 없다는 조금쯤은 인간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단지 이웃들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의식이 완성되기 전에 잡힐 확률이 현저히 높아진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차가운 판단이었을 뿐. 아무런 성과가 없어 지친 다리를 질질 끌고 집 근처로 돌아온 그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근처 작은 공터로 향했다.
“안녕.”
“어? 형! 오랜만이야!”
“오빠! 오빠다! 얘들아, 오빠가 왔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를 둘러싼 아이들이 재잘재잘 제각각의 이야기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했는데, 걔가 나보고…….”
“어제는…… 그래서 결국…….”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큰 소리로 떠드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남자는 군말 없이 웃는 낯으로 들어주었다.
“아, 비켜! 내가 할 거야!”
“너나 비켜! 내가 먼저라고!”
떠들어대다 지친 아이들 몇이 남자의 다리에 서로 매달리겠다며 다투는 사이, 말이 느려 이제야 입을 뗀 아이의 목소리에 남자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우리 엄마가 요즘 밤마다 울어, 돈이 없어서 힘들다고…….”
드디어. 기다리던 이야기가 아닌가. 어려운 이들은 지푸라기, 아니 어둠 속에서 내려온 거미줄이라도 잡는 법. 남자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 점이었다. 누군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조금쯤 이상하고 의심스러운 제안이라도 거부하지 못하리라. 게다가 어렵다며 입에 달고 살던 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면, 그건 실종이 아니라 도망이 되겠지. 제 다리에 붙어서 싸워대던 아이들을 떼어낸 남자는 선량하게 웃었다. 그는 어머니가 힘들어한다는 아이를 향해 지독한 악의와 집요한 목적을 위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도와줄게. 같이 가자.”
***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걸려 있던 정오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무렵. 올리비아는 앙브흐와 마주하고 있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제국에 무궁한 영광과…….”
기나긴 인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올리비아가 물었다.
“타렌 후작에게 입궁하라 일렀을 텐데.”
“네! 아버님께서는 하루 만에 돌아오실 수 없는 곳에서 일을 보고 계셔서 제가 가문의 대표로서 대신 왔어요!”
그리고 돌아온 답에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었다. 지극히 정상적인 답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고조된 타렌 영애의 상태 때문에. 하늘하늘 어깨에서 흔들리는 분홍빛 머리카락과 해맑기 그지 없는 미소. 그리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을 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눈까지. 눈치를 국에 말아먹은 이가 본다 하더라도 눈앞의 타렌 영애가 올리비아를 엄청나게 동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리라.
“타렌 영애.”
“네! 네네! 말씀해주세요!”
혹시나 해서 다시 입을 열었지만,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열광적인 답이 돌아왔다. 눈을 반짝거리는 앙브흐와 마주하고 있는 올리비아는 의아하기만 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앙브흐 타렌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없을뿐더러, 지금의 자신은 타렌 영애가 눈을 저토록 빛내며 무슨 말을 하든 열광적으로 반응할 정도로 뭔가를 이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가문의 영애들 중에서도 ‘황족’에 대한 환상을 키우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지금의 황가는 볼셰이크가 아닌가. 대륙의 역사만큼 오래된 가문이며,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이나 거리의 연극, 전설의 주인공. 어릴 적 볼셰이크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란 이는 없을 터. 그 이야기를 듣고 볼셰이크를 동경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올리비아의 예상은 가차 없이 깨졌다.
“사……사랑은 정말 위대하다는 것을 전하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매일 느껴요!”
아예 일어서서 만세라도 할 기세로 엉덩이를 들썩이는 앙브흐의 외침에 올리비아는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사랑? 갑자기? 뭐라고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기에 올리비아가 침묵하자 앙브흐는 눈을 반짝이며 재잘대기 시작했다.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라니…….”
아, 그쪽 이야기였나. 올리비아는 한동안 눈을 흐리게 뜨고 앙브흐가 써 내려가는 사랑의 대서사시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숨을 쉬려고 앙브흐가 잠깐 말을 멈춘 순간.
“타렌 영애.”
“네! 아, 송구합니다. 전하. 제가 흥분해서, 정말로 송구합니다.”
이제까지 엉덩이를 들썩이던 앙브흐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굽히자 올리비아는 손을 저었다.
“사랑에 관한 영애의 고견은 잘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사랑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걸 꼭! 말해주고 싶네. 곧 그것을 증명할 대회도 열릴 거고.”
“네! ……네?”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되묻는 앙브흐의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똑같은 답을 반복해서 들려줬을 뿐.
“나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그리고 올리비아는 재차 같은 답을 할 준비를 했다. 저 정도로 사랑의 대서사시를 홀로 쓴 이라면, 몇 번을 말해줘도 쉬이 믿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도 올리비아의 예상은 빗나갔다.
“네. 송구합니다.”
앙브흐는 순수하게 올리비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이건 또 의외로 순순히 수긍해버리네……. 대단한 사랑의 서사시를 짜고, 그걸 또 참지 못하고 망상의 대상이된 사람 앞에서 양껏 떠들어대더니. 좋게 말하면 순수하고 해맑지만, 나쁘게 말하면 눈치는 물론이고 생각도 없지 않은가. 뭐, 아닌 걸 아니라고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봐서는 순수함 쪽에 가까운 거 같지만. 올리비아는 곧 옅은 한숨을 내쉬며 찻잔 끝을 매만졌다. 타렌 가문의 차기 후계자가 예상에서 한참 빗나간 자라는 건 중요하지 않지. 순수함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니. 카모마일을 한 모금 머금은 올리비아는 앙브흐가 완전히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기묘할 만큼 고조되어 있던 앙브흐의 호흡이 안정되자 올리비아는 가타부타 다른 쓸데없는 말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근래 타렌 가문의 상회 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심려가 크다고 알고 있어.”
“아…….”
앙브흐는 마치 대여섯 살 아이처럼 풀이 팍 죽어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앞에서 보고 있던 올리비아의 미간에 희미한 금이 갔다. 이대로 괜찮은가, 타렌. 그녀는 곧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타 가문이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괜한 오지랖으로 이러쿵저러쿵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차기 후계가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보다 그들이 더 잘 알겠지.
“그렇지 않아도 일할 사람이 눈에 띄게 줄고, 그나마 일을 하던 사람도 실종되었다고 지부장이 힘들어했어요.”
칭얼거리듯 흘러가는 앙브흐의 말을 올리비아는 놓치지 않았다. 귀를 쫑긋 세운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실종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