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내가 이렇게 하고 싶었어.2021.10.28.
“그래.”
그는 제 관자놀이를 쿡 찌르며 덧붙였다.
“여기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고 있기도 하고.”
“뭐?”
올리비아가 되묻자 크라이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답을 반복해주었다.
“피를 보라고 끝도 없이 상기 시킨다. 한시도 쉬지 않고.”
그는 너무나도 가볍게 말했지만, 절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크라이어의 머릿속에서 떠들어대고 있다는 존재는 다른 무엇도 아닌 고대신이리라. 심지어 한시도 쉬지 않는다는 말은.
“잠을…… 못 잘만 하네.”
그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 겪는 것은 단순한 악몽 따위가 아니었지 않나. 신의 속삭임. 대륙의 어느 신을 모시는 신전이든 들어가서 신의 음성을 한시도 쉬지 않고 듣는다고 하면, 모두가 입 모아 말하며 무릎 꿇으리라. 신의 사자. 신의 대리인. 하지만 현실은…….
‘나는 노예라서.’
저주나 다름 없는 것이리라. 올리비아는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의식적으로 쇄골의 낙인을 매만지는 그의 손 위로 그보다 훨씬 작고 보드라운 손이 덮였다.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크라이어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역시 손을 잘라버릴 만큼 기분이 더럽지 않아. 그저 따뜻할 뿐. 작은 동물들은 체온이 높다고 하더니, 그 때문일까. 황녀의 손은 늘 자신의 손보다 훨씬 따뜻했다. 그와 동시에 쇄골의 낙인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 겹쳐진 손을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그냥인가.”
그에 올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녀는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덧붙였다.
“내가 이렇게 하고 싶었어.”
해사하게 웃는 올리비아를 마주한 크라이어는 쇄골에서 느껴지는 쑤시는 듯한 통증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정무를 보느라 몇 시간 자지 못한 황제는 만성 수면 부족과 피로에 잠긴 얼굴을 쓸어내리며 올리비아와 마주했다.
“무투 대회?”
“네.”
이건 또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닌가. 준비도 되지 않은 대회의를 당겨 개최하자고 했던 것만큼이나 난데없는 말. 하지만 황녀의 제안이다. 대회의 이후 시끄러운 일이 좀 있기는 했지만, 덕분에 분수를 모르게 국경 부근에서 얼쩡거리던 몇몇 국가가 아주 조용해지지 않았나.
“뭔가 이유가 있겠지.”
“지금 폐하의 귀를 간지럽히는 이야기들을 싹 사라지게 만들려고요.”
그에 황제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귀를 간지럽히는 이야기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들으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건 모두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앉은 자의 권리이자 의무가 아닌가.
“타국의 기사들이요. 그들을 치워 버릴 방법이 될 거예요.”
올리비아가 덧붙이자 그제야 황제는 흥미를 보였다.
“기사들과 무투 대회라. 무슨 생각이더냐.”
“노르덴 국의 기사의 강함을 모두가 인정하면, 첩이니 뭐니 하는 말이 반쯤은 들어가겠죠.”
“반쯤만 들어가도 좀 덜 간지럽겠구나.”
“네.”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를 향해 황제가 물었다.
“그 기사, 강하더냐.”
“솔직히 말씀 드리면.”
올리비아는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사실을 토해냈다.
“얼마 후에는 홀로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거에요.”
“허허, 네가 그 정도로 믿고 있다면 되었다.”
황제는 허허, 웃으며 올리비아의 과한 신뢰 정도로 넘겼지만, 그건 절대 과한 신뢰나 농담이 아니었다. 올리비아가 네 번이나 겪은 엄연한 사실일 뿐. 하지만 회귀니 고대신이니 하는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저 마주 웃기만 했다.
“그래. 그리 강하다는 기사를 나도 확인 할 수 있겠구나.”
무투 대회를 열어도 좋다는 승인에 올리비아는 살풋 고개를 숙였다.
“황녀.”
“네.”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 했다만.”
황제는 거대한 책상을 가득 매우고 있는 서류 중 하나를 뽑아내 건넸다.
“노르덴 국에서 온 전령이 전한 서신이다.”
“노르덴 국에서…… 전령이요?”
“그래.”
황제가 건넨 서신 끝을 매만진 올리비아의 머리가 아주 빠르게 굴러갔다. 노르덴 국이라면 한창 불의의 사고로 숨진 선대 국왕의 장례식 준비로 바쁠 터. 하지만 만약 장례식 일정과 참석 여부에 관한 내용이라면 폐하께서 일부러 제게 이 서신을 읽어보라고 하진 않으셨겠지. 단숨에 생각을 정리한 올리비아가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번 사건과 노르덴 국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그에 지친 낯빛의 황제의 얼굴에 흡족함과 기쁨이 번졌다. 차기 황위를 이을 황녀가 하나를 내어주면 열을 아니 어찌 기껍지 않을까.
“읽어 보거라.”
황제의 허락에 거침없이 서신을 펼친 올리비아는 단숨에 처음부터 끝까지 긁듯이 읽어내렸다.
“범인을 추적할 수 있다니.”
의아함을 넘어 당혹감을 느낀 올리비아가 서신을 재차 읽어내리다 우뚝 멈췄다. 아아, 그래. 노르덴 국. 그곳에는 고대신을 깨우고, 크라이어를 부활시켜 노예로 낙인 찍은 마법사가 있지.
‘고대신의 문양이다.’
시체의 이마에 찍혀 있던 일그러진 문양. 모르는 이가 본다면 단순히 긁힌 상처처럼 보여 그냥 넘어갈 법한 것이었지만, 크라이어와 올리비아는 놓치지 않았다. 이 사건이 고대신과 관련되어 있으니 노르덴 국에서 도사리고 있는 마법사와 이어진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으리라. 서신을 내려다본 채 굳은 올리비아에게 황제가 물었다.
“노르덴 국과 이 사건, 관계 있어 보이느냐?”
“알아 봐야겠죠.”
노르덴 국에 있는 마법사는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테지만, 노르덴 국 자체가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아마도 관련이 있겠지……. 노르덴 국은 마법사의 손끝에서 놀아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몇 번이고 전쟁을 선포했던 노르덴 국의 왕조차 그저 꼭두각시였을 뿐. 심지어 대륙 전쟁이라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는데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도구……. 입안이 소태를 씹은 것처럼 썼다. 하지만 이 기회를 빌어 그 ‘마법사’라는 인물을 조금이라도 캐낼 수 있으리라. 크라이어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답이라고는.
‘염소를 닮은 중년 남자.’
‘웃음 소리가 기분 더럽다.’
‘고대신을 이용해서 뭘 하려는지 비밀이라며 이죽거리며 웃기만 하더군.’
대충 저런 것들 뿐이었으니까.
“노르덴 국에서 사람을 보낸다는 제안을 허락하실 건가요?”
턱을 매만진 황제가 또 다른 서류를 더듬으며 말했다.
“얼마 전 그 공터를 찾아낸 후 더 이상의 피해는 없다고 했지.”
황제는 ‘공터’라는 단어를 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공터지 그 공터에 묻혀 있던 온전하지 못한 시체가 대체 몇 구던가. 심지어 아주 오래된 것들 중에서는 성별이나 나이가 특정되지 않을 만큼 훼손된 것도 있었다. 대부분 실종자 명단에 있는 이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꽤 있었고.
“네. 지금으로서는 멈춘 것 같아요.”
“지금……이라.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인가.”
“끝났다고 단정 짓기에는 위험해요.”
“없이 해결할 수 있겠나.”
황제가 노르덴 국의 서신을 가리키며 묻자 올리비아는 곧바로 답했다.
“장담할 수 없어요.”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이 나온 단호한 답에 황제는 지끈 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단서는?”
“한참이나 부족하죠.”
“흐음.”
황제는 시름 깊은 한숨과 함께 뜻밖의 말을 꺼냈다.
“타렌 가문에서 읍소가 들어왔다.”
“타렌이요?”
의아하게 되묻던 올리비아는 이내 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사건이 일어난 구역에 타렌 상회가 모여 있긴 하죠.”
“그래. 이제 슬슬 상회를 운영하는데도 지장을 줄 정도로 제국민들이 불안해 한다고 하더구나.”
“타렌이라면 돈을 풀어서 사건을 파헤쳤을 텐데요.”
“그렇게 모은 정보와 조사단을 파견해 모은 것들을 취합해서 주지 않았더냐.”
그에 올리비아는 입을 다물었고, 황제 역시 그녀를 독촉하지 않았다. 이윽고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범인을 추적할 수 있다니, 일단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해야겠군요.”
뾰족한 다른 수가 없으니 아무리 의심스럽더라도 제안을 받아들이는 수 밖에. 만약 타렌에서 읍소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더 고민했겠지만. 그 타렌이 아닌가. 황실을 지지하는 든든한 기둥이자, 제국의 안녕을 위해 발로 뛰는 상회의 중심.
“빚을 지기 싫어하는 타렌 후작이 말을 꺼냈다면,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겠죠.”
비단 타렌 때문만은 아니고, 그 마법사라는 자의 꿍꿍이를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그 부분은 구태여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노르덴 국에 전령을 보내마. 그리고 황녀.”
황제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타렌 후작을 만나볼게요.”
*** 쨍쨍 내리쬐는 태양이 정오를 향해 기울 무렵. 벌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딘가 음습하고 어둑한 수도의 뒷골목 중에서도 가장 안쪽. 고대신을 위한 제물로 바쳐질 사람을 사기 위해 남자는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의 품 안에는 앙브흐가 선뜻 건넨 돈주머니가 덜그럭 거렸고, 돈소리를 들은 뒷거리의 사람들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 손이 빠르고 발은 그보다 더 빠른 아이가 상체를 낮추며, 남자를 노렸다. 아이가 어둠 속에서 빛으로 한 발 내디딘 순간.
“야.”
아이의 목을 꽉 잡은 거친 손의 주인은 평소에 아이를 구박데기로 취급하는 남자였다. 아이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고, 남자는 그대로 아이를 어둠으로 다시 당겼다. 음울한 얼굴의 남자는 튀어나가려는 아이의 뒷목을 꾹 누르며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도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저 남자, 건드리지 마라.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마.”
그의 말을 들은 이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돈소리에 길게 뺐던 목을 움츠리며 다시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피냄새가 나. 아주 코가 삐뚤어질 만큼 지독하게.”
저 나이를 먹도록 어둠 속에서 살아남은 남자의 경고를 무시하는 이는 없었고, 돈주머니를 덜그럭거리는 남자는 이내 그들 시야에서 벗어났다. 대단히 평범한 사람처럼, 아니 평범하게 걸음을 옮긴 남자는 이윽고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어느 모로 보나 다른 집과 다를 바 없는 허름한 판잣집. -똑, 똑똑, 똑. 일정한 박자로 문을 두드린 남자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끼이이. 신경을 긁는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침침한 어둠 속에서 겨우 촛불 몇 개가 흔들리는 집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뭘 사러 오셨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나이 지긋한 여자이리라.
“사지 멀쩡한 사람을 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