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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쓸데없이 잘생겼네 (16/146)

#16. 쓸데없이 잘생겼네2021.10.25.

전혀 은근하지 않은 목소리였건만, 어찌나 은근하게 부추기는 것으로 들리는지. 올리비아는 귀를 쫑긋거리며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을 숨기지도 않고 물었다.

1654970606068.jpg“명분은?”

16549706060685.jpg“황녀 시해미수.”

1654970606068.jpg“거창해졌네.”

16549706060685.jpg“한 번에 쓸어버리려면 명분도 거창해야겠지.”

귀찮은 것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니,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심지어 말을 꺼낸 크라이어는 물론이거니와 듣고 있는 올리비아도 전혀 의문을 가지지도 않았다. 크라이어가 지금 잔류하고 있는 기사, 혹은 기사 비스름한 이들을 한번에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머리를 굴리던 올리비아는 이내 고개를 휙휙 저었다.

1654970606068.jpg“지금 쓰레기가 몇 죽어 나가는 건 중요하지 않아. 지금 중요한 건!”

그녀는 눈이 빠져라 들여다 보던 서류를 집어 들고 흔들었다.

1654970606068.jpg“이런 일에 고대신이 관련되어 있을 줄 누가 알았냐고!”

단순한 실종이나 연쇄 살인 정도로만 여겼던 사건이었건만, 공터에서 발견한 시체들의 이마에 찍힌 일그러진 고대신의 문양을 보고도 그리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았다면, 회귀 전 이 사건을 파고 또 파서 반드시 진상을 알아냈으리라. 서류를 마구 흩뿌리며 머리를 다 뽑을 기세인 올리비아를 보던 크라이어가 책을 덮었다.

16549706060685.jpg“진정해라.”

1654970606068.jpg“진정이 되겠냐고! 내가 지금 몇 시간째 이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아?”

16549706060685.jpg“정확히 네 시간 이십 팔분이군.”

1654970606068.jpg“그래! 그렇게나 오래 들여다 봐도 진척이 하나도 없어! 이게 말이 되냐고! 회귀 전에 그 불타버린 범인 놈이 누군지 알아냈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 마지막 서류를 만세 자세로 던져버리고 양팔을 든채 그대로 멈춘 올리비아는 이내 팔을 내리고 시무룩하게 늘어졌다.

1654970606068.jpg“고대신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 회귀 전에 이 사건을 팠어도 아무 것도 몰랐겠…… 뭐야. 왜 웃어.”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지만 가늘게 떨리는 강철같은 어깨로 봐서는 웃는 것이 분명했다. 올리비아가 총총총 그를 향해 다가서서 책을 집어들었다.

1654970606068.jpg“왜 웃냐고. 그만 웃어! 나는 속이 뒤집어지는데 지금 웃음이 나와!”

치밀하게 책 모서리로 그를 퍽퍽 내려치는 올리비아의 손목을 잡은 크라이어가 웃음기가 채 가시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16549706060685.jpg“아니.”

1654970606068.jpg“뭐가 아니야!”

16549706060685.jpg“바보 같은 짓도 황녀처럼 작고 무해해 보이는 사람이 하니 귀엽다 싶어서.”

칼같이 무해하다고는 말하지 않는 점에서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긴 했지만……. 올리비아는 도저히 답할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귀……. 귀엽……? 뭐? 일단 듣기는 했지만, 듣는 것과 이해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가 아닌가.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기에 답을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 올리비아가 입술만 달싹이는 사이 크라이어는 그녀가 흩뿌린 서류로 손을 뻗었다. 그런 그의 흔들리는 은발을 빤히 응시하던 올리비아는 가슴께를, 아니 배를 문질렀다. 깃털을 삼킨 것처럼 속이 간질거렸으니까. 정말이지 저 머리통 속에서 지워진 과거에 뭘 하던 남자였을까. 올리비아의 푸른 밤에 크라이어의 은빛 달이 흔들거렸다. 저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던 올리비아가 그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16549706060685.jpg“어디서 막혔기에?”

그에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머리가 아닌 그가 쥐고 있는 서류로 손을 돌린 올리비아가 그 서류를 툭 두드렸다.

1654970606068.jpg“실종자 명단이 정확하지가 않아서.”

올리비아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1654970606068.jpg“말했었잖아. 그 남자, 실종자 집에 불에 바싹 탄 시체로 발견됐었다고.”

16549706060685.jpg“그래서 누군지 특정하지 못한다고 했었지.”

1654970606068.jpg“적어도 어느 집에서 발견된 지 찾아낼 수 있다면, 그곳에서 잠복이라도 해서 범인이 불타기 전에 잡을 수 있을까 해서.”

올리비아는 실종자 명단을 집어 들고 종이 비행기를 접었다.

1654970606068.jpg“이 명단을 전부 다 달달 외우고 지도를 뒤지고, 기억을 더듬어도 이 목록에서 범인이 발견된 집을 찾을 수가 없어.”

16549706060685.jpg“그 집을 아는 건가?”

1654970606068.jpg“아니. 알면 이렇게 머리를 뜯고 있지도 않겠지. 어렴풋이 봤던 거라 전부 의심이 가지만, 전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올리비아가 날린 종이 비행기를 간단히 잡아챈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16549706060685.jpg“실종자 명단에 나온 집들을 전부 확인하면?”

1654970606068.jpg“전부?”

16549706060685.jpg“그래.”

1654970606068.jpg“일단 그런 방법도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닌데.”

올리비아는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1654970606068.jpg“이 명단에 나오지 않은 실종자들도 분명히 있을 거야. 그러니 명단의 집을 전부 확인한다 해도.”

16549706060685.jpg“회귀 전에 확인했던 그 집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건가.”

1654970606068.jpg“응.”

올리비아는 곧 서류의 산맥을 요리조리 피해 커다란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 와중에도 서류를 챙겨온 그녀는 이미 다 외워버린 사건 관련 내용을 다시 훑었다.

1654970606068.jpg“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딴 짓을…….”

심한 욕을 읊조리며 소파에 방만하게 반쯤 드러 눕다시피한 올리비아 위로 그녀를 전부 덮는 그림자가 졌다.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서류 뒤로 빼꼼 얼굴을 내민 올리비아가 물었다.

1654970606068.jpg“뭐야.”

크라이어가 소파 암레스트를 잡고 그녀를 양 팔로 가둔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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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상황이라면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콩닥콩닥 거리는 공기가 흐르거나, 눈을 찢어져라 크게 뜨며 입도 같이 벌려 비명을 지르거나 둘 중의 하나였으리라. 하지만 올리비아는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네 번이나 회귀한 시점에서 평범과는 억만광년 거리로 멀어졌으니까. 그녀는 저를 가둔 강철같은 팔을 흘끗 보더니 서류를 흔들거리며 다시 물었다.

1654970606068.jpg“뭐야, 갑자기.”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술을 뗐다.

16549706060685.jpg“아까 손을 뻗다가 거두어 들였지.”

1654970606068.jpg“아까? 내가?”

난데없는 질문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올리비아는 곧 입을 다물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답을 피하고 있다는 것이 역력했지만, 크라이어는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크라이어의 눈을 피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올리비아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1654970606068.jpg“그냥, 손이 갔어.”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크라이어는 그 개미 기어가는 소리만큼이나 작은 속삭임을 놓치지 않았고.

16549706060685.jpg“그냥?”

1654970606068.jpg“응. 그냥…….”

아무 답도 되지 않는 답이었건만, 정말로 그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진실로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가지고 손을 뻗은 것은 아니었으니. 서류 뒤로 얼굴을 숨긴 올리비아의 동그란 이마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처음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도 마찬가지의 답을 했었지.

1654970606068.jpg‘나도 몰라, 그냥 손이 나갔어.’

  어떤 면으로 보면 참으로 한결같지 않은가. 크라이어는 더 캐묻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16549706060685.jpg“이제 놀라지 않나.”

그에 슬그머니 서류를 치운 올리비아가 제 심장께를 문질렀다.

1654970606068.jpg“그러게. 이제 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전처럼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거나 입 밖으로 튀어 나올 정도로 거칠게 뛰지도 않았으니까. 그렇게 빤히 그를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새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1654970606068.jpg“쓸데없이 잘생겼네.”

군더더기 없는 그녀의 말에는 희미한 탄식이 섞여 있었기에 크라이어의 눈썹이 비죽 솟았다.

16549706060685.jpg“쓸데없이?”

1654970606068.jpg“그래. 쓸모없어.”

그녀의 가차 없는 평가에도 크라이어는 딱히 실망하거나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16549706060685.jpg“그런 평가는 처음인데.”

1654970606068.jpg“잘생겼다는 거?”

16549706060685.jpg“아니. 쓸데없고 쓸모 없다는 쪽.”

1654970606068.jpg“뭐야, 잘생긴 거 알고 있었어?”

16549706060685.jpg“글쎄.”

1654970606068.jpg“뭐야, 그 애매한 답은.”

기실 크라이어 역시 제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그럴 필요도 없거니와 관심도 없었으니까. 다만, 그를 부활시키고 고대신의 노예의 낙인을 찍은 마법사의 딸인 그레타가 그에게 속살거렸을 뿐.

16549706216824.jpg‘신의 선택을 받은 당신은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완벽한 조각상과 같군요.’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침묵하는 크라이어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이제껏 그와 얼굴을 맞대면서 단 한 번도 생김새에 대해 생각해 본적은 없었지. 회귀 전에는 그와 마주하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으니 상판이 어떻게 생겼는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으니 당연했고. 회귀 후에도 오로지 크라이어를 잡아 전쟁을 막고야 말겠다는 생각만 가득했기에 얼굴을 살필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은발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반듯한 이마에서 이어지는 매끄러운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까지.

1654970606068.jpg“이런 얼굴이니 황녀가 첫눈에 반했다느니, 첩이라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지.”

미간에 깊은 계곡이 파인 올리비아가 불만스럽게 말을 이었다.

1654970606068.jpg“이따위로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이 아니었으면 실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곁에 뒀다는 미담이 전해졌을…… 실력?”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흘리던 올리비아가 말을 딱 멈추고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그녀가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머릿속에서 톱니바퀴처럼 어떤 계획이 착착 맞아 떨어졌다.

1654970606068.jpg“크라이어.”

그를 부르는 올리비아의 입가에는 입이 찢어져도 선량하다고 할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16549706060685.jpg“그 비열한 웃음은 뭐냐.”

1654970606068.jpg“비열이라니, 무례…… 흠, 흠흠.”

크라이어의 말에 인상을 팍 썼던 올리비아는 이내 제 입가를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차마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비열함이었으니까.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의 가슴팍을 꾹 눌렀다.

1654970606068.jpg“일단 비켜봐.”

그에 순순히 그녀를 해방시켜준 크라이어가 맞은편 소파에 앉자 올리비아도 곧 똑바로 앉았다.

1654970606068.jpg“계속 강해지고 있다고 했지?”

16549706060685.jpg“그래.”

1654970606068.jpg“그럼 지금은 어느 정도야? 아니, 지금 제국에서 당신을 이길 수 있는 기사가 있어?”

올리비아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지나가던 공작새가 봐도 답을 정해두고 묻는 것이었지만, 크라이어는 가차 없이 현실적인 답을 내놓을 뿐.

16549706060685.jpg“제국의 기사를 다 알지 못해서 단정할 수 없다.”

그에 올리비아는 잔뜩 솟았던 어깨를 내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1654970606068.jpg“이럴 때는 누구든 나를 꺾을 수 없다, 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16549706060685.jpg“쓸데없는 거짓말을 하길 원하나.”

1654970606068.jpg“진지하게 받지 마. 으음.”

손을 더듬어 펜을 든 올리비아는 순식간에 목록 하나를 작성해서 건넸다.

1654970606068.jpg“여기 있는 이들하고 한 번씩 겨뤄봐. 미리 말해둘 테니까.”

크라이어는 별다른 답 없이 목록을 슥 훑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1654970606068.jpg“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16549706060685.jpg“죽이지 않겠다.”

숨 쉴 틈도 없이 나온 답에 올리비아가 와락 외쳤다.

1654970606068.jpg“죽일 생각이었어?”

그에 크라이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을 뿐.

16549706060685.jpg“누군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건 이렇게 된 후로 한적이 없어서.”

그가 말하는 ‘이렇게’란 무의식적으로 매만지는 쇄골에 찍힌 낙인과 관련이 있으리라.

1654970606068.jpg“고대신이 피를 원……한다고 했었지.”

잔뜩 가라앉은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오히려 짧게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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