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겉모양과 내면은 일치하지 않는 법이지.2021.10.21.
“쓰레기라니!”
더할 수 없는 모욕을 들었다는 듯 기사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크라이어는 눈썹 한 올 까딱하지 않고 받아쳤다.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지,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하지 않으면 무어라고 할까.”
“네놈!”
몰래 들어왔다는 사실을 잊은 건지, 그 사실을 지워버릴 만큼 크라이어의 존재에 화가 난 건지. 기사는 크게 고함치며 크라이어를 향해 단숨에 다가섰다. 하지만 그는 원하던 대로 검을 뽑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검붉은 궤적을 그리는 눈과 마주친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으니까. 검자루를 쥔 기사의 손등에 핏줄이 터질 듯 불거졌지만, 그는 눈도 깜박할 수가 없었다. 숨이라도 내쉬는 순간, 저항할 새도 없이 거대한, 아주 무자비한 짐승에게 온 몸이 갈가리 찢길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 기사는 지금 크라이어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저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하는 자. 그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발치부터 휘감아 올라온 압박감으로 어깨가 무거워 무릎을 꺾게 만드는 자. 그런 자들을 세간에서는 소위 지배자라 하던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넘긴 기사는 곧 제가 한 행동을 깨닫고 치밀어 오르는 모멸감에 입을 뗐다. 하지만 크게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건 헛숨 뿐.
“허, 허억, 허억!”
대체 언제 숨을 참았는지도 알 수 없건만, 기사는 참았던 숨을 내쉬느라 한참이나 헉헉거려야만 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크라이어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림자 속에서 도사리는 포식자처럼 기사를 응시할 뿐.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떨치려 기사는 있는 힘을 다해 버럭 고함쳤다.
“네 놈과 내가 다를 것이 무엇이냐! 너도 고작 황녀 전하의 잠자리 상대인 주…….”
하지만 기사는 고함을 다 치기도 전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서 빛이 번쩍한 것 같은데 목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았으니까. -스륵. 다음 순간 눈에서 빛을 잃은 기사가 스르륵 무너졌고, 그가 보지도 못한 속도로 검을 뽑아 휘두른 크라이어가 무심하게 검을 털었다. -투둑. 검날에서 튕겨 나간 핏방울이 복도에 붉은 궤적을 남겼다. 검을 갈무리하던 크라이어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날이 갈수록 많아지는군.”
밤이 깊어갈 무렵 황녀 궁으로 숨어드는 또 다른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 크라이어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자리를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 궁의 사용인이 나타났다. 그는 짧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밤은 조용한가 했더니.”
그렇게 그날도 어느 타국의 기사가 ‘사고사’로 처리되어 황녀 궁에서 실려 나갔다. *** 궁의 안쪽에서 크라이어가 처리한 쓰레기 정리가 절찬리로 이루어지는 시각. 황녀 궁의 집무실도 캄캄한 밤이 비켜 간 듯 눈부시도록 밝았다. 그리고 어느새 아주 당연하게도 집무실에는 두 사람이 자리했다.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깊은 밤, 침실은 아니지만 집무실에서 단둘이 몇 날 며칠을 함께 하는 남녀. 기실 원래 해야만 하는 일에 황제의 부탁을 빙자한 징계로 내려진 일을 처리하느라 집무실에서 나올 수 없는 것뿐이었지만……. 그 사정을 알 길 없는 이들은 누구라도 같은 생각을 하리라. 심지어 황녀를 굳게 믿고 있는 황제조차, 주변인들의 입방아에 시달리다 못해 최측근을 보내지 않았나.
“전하.”
황제의 최측근이자 올리비아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 한참 전부터 곁을 지켰던 세바스찬이 단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후우, 세바스찬.”
그러자 올리비아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양팔을 펼치며 한껏 억울하다는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 서류 보이지? 내가 딴 짓할 시간이 있어 보여?”
그녀의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서류 더미, 아니 산맥을 본 세바스찬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냐, 워낙 말들이 많으니까. 확인하라고 하셨겠지.”
크라이어는 서류 더미 뒤에 가려 보이지도 않았건만, 세바스찬은 구태여 그를 보려고 힐끔거리지 않았다. 황제만큼이나 그 역시 올리비아의 말이라면 하늘과 땅이 뒤집어 진다고 해도 믿으니까. 그에 오히려 올리비아가 서류 뒤쪽으로 외쳤다.
“크라이어! 잠깐 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류 뒤쪽에서 기척 하나 없이 불쑥 크라이어가 나타났다.
순간적으로 그와 눈이 마주친 세바스찬은 곧 가볍게 고개를 숙였지만, 그의 손끝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류의 산맥이 일순 다른 무언가로 보일 정도로 위협적인 사내가 아닌가. 희미하게 피 냄새가 풍기는 건 기분 탓만은 아니리라. 조금 전에도 황녀 궁에서 실려 나오는 시체들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니. 그리고 그런 세바스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들었지? 오늘 쓰레기 처리.”
“네.”
“이제까지 전부 크라이어가 한 거야.”
“송구합니다. 황녀 궁의 경비를 더 단단히 하겠습니다.”
세바스찬이 허리를 깊이 숙이자 올리비아는 대번에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황녀궁의 경비가 뚫렸다는 사실은 이미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명했다.
‘그냥 내버려 둬.’
만약 궁의 경비를 강화하고 밤에 벌레가 기어오는 길을 차단해 버리면, 그 벌레를 죽일 수가 없지 않은가. 지금 황녀 궁 근처에서 꿈틀거리는 귀찮은 것들을 조금이라도 처리하는 편이 덜 귀찮을 텐데, 그 기회를 없애면 안 되지.
“다 처리하니까 괜찮아. 그게 역할이기도 하고. 그렇지?”
갑작스럽게 붙은 역할이었지만, 크라이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세바스찬 앞이라 공대를 하는 그의 답을 들은 올리비아의 뺨의 솜털이 일시에 곤두섰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다 이내 꾹 다물었다. 둘만 있을 때야 상관없지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 사이에는 신분의 벽이라는 것이 존재하니까. 겉으로 보면, 올리비아는 볼셰이크 제국의 유일무이한 황녀이자 차기 황제고 크라이어는 노르덴 왕국의 이름 없는 기사일 뿐. 물론 속을 뜯어보면 그런 신분 따윈 아무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 사이의 비밀이 아닌가. 더없이 날카로운 이빨을 감춘 크라이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바스찬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는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저런 짐승을 곁에 두시다니. 다른 의미로 걱정이 아닐 수 없지만, 어쨌든 황녀 전하께는 고분고분 고개를 숙이는 모양이니.
“그리 알아두겠습니다.”
“응. 계속 시끄럽겠지만, 어쨌든 다들 상상하는 그런 사이는 절대 아니라는 것만 폐하께 다시 한번 전해줘.”
“네. 그리고 전하.”
“응?”
“혹여 잠자리가 불편하십니까.”
조심스러운 세바스찬의 물음에 올리비아는 손사래를 쳤다.
“아냐. 다들 신경 써주는 만큼 잠자리야 늘 편하지. 요즘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숙면에 좋은 차를 올리겠습니다.”
딱딱한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오롯한 걱정이 기꺼워서 올리비아는 사양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걸음을 돌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세바스찬.”
올리비아가 그를 불러세웠다.
“네. 전하.”
돌아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인 그를 올리비아는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바로 옆에 벼락이 쳐도 절대 놀라지 않는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아다닐 정도로 차분하고 침착함의 대명사인 세바스찬. 첫 번째 삶에서는 저 단정한 얼굴이 무너지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세바스찬도 무너졌다. 그의 죽음이 아니라 올리비아의 죽음으로……. 첫 번째 삶에서 황궁이 함락되고, 올리비아에게 죽음이 한발씩 다가왔을 때.
‘전하.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멀리 가십시오.’
한 치 흐트러짐 없던 세바스찬은 땀과 먼지로 엉망이 된 얼굴로 올리비아의 등을 떠밀었다. 그의 손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아마도 그 피는 황제 폐하의 것이었겠지. 하지만 그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크라이어의 검 아래 스러졌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바로 전인 네 번째에도 세바스찬은 그 답지 않게 숨을 헉헉 거리며 그녀를 위해 희미하게 웃었다.
‘전하,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네 번이나 같은 말을 들었는데, 한 번도 빠짐없이 가슴이 무너졌다. 올리비아는 세바스찬에게 한달음에 다가섰다.
“세바스찬.”
“네.”
“세바스찬.”
“네.”
그렇게 몇 번이고 그를 불렀지만, 그는 한 번도 빠짐없이 그녀의 부름에 차분히 답했다. 올리비아는 세바스찬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이내 손을 뻗었다.
“여기 늘 뭐가 묻어 있더라.”
그의 주름진 오른쪽 눈가를 쓱 매만진 그녀는 배슬배슬 웃었다. 세바스찬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앞뒤 없는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의문을 표하지도 당황하며 그녀가 매만진 부분을 가리지도 않았다. 단지 정중히 고개를 숙였을 뿐.
“황공합니다.”
그에 올리비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가도 좋아.”
허리를 깊이 숙인 세바스찬이 문을 나선 직후.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간 건지 보이지 않는 크라이어를 찾아 종종 걸음으로 서류의 산맥 안으로 들어선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크라이어.”
그를 부른 올리비아는 양손을 허리에 척, 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 이상 타국의 기사들이 죽어 나가는 걸 사고사로 무마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볼셰이크의 역사책을 훑어내리던 크라이어가 무심히 답했다.
“본보기 삼아 효수해 걸어두는 건 어때.”
“그런 끔찍한 장식 따윈 필요 없어.”
올리비아가 진저리를 치자 크라이어가 책을 내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장식이라고 말한 적 없다만. 전부터 느꼈지만, 그런 얼굴로 잘도 무자비한 소리를 하는군.”
“겉모양과 내면은 일치하지 않는 법이지.”
선량한 얼굴의 청년이 사람들을 잡아 죽여 제물로 바치는 연쇄 살인마인 것처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잖아.”
“아아, 볼셰이크의 가르침인가.”
그는 내려두었던 볼셰이크의 역사책의 커버를 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지 않나.”
“뭐, 뜻만 통하면 됐지.”
뻔뻔하게 턱을 치켜든 올리비아가 늘 건네는 인사처럼 별다른 기대 없이 진행 상황을 물었다.
“어때? 뭐 좀 참고할 만한 거 있어?”
“아니. 신에 관한 내용은 많지만, 대부분 맞서 싸웠다는 것이 골자다.”
“으음, 아직 자료는 많으니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다시 책을 집어든 크라이어가 지나가듯 이야기를 꺼냈다.
“효수 말인데.”
“그런 장식 안 한다니까.”
“그냥 던진 말이 아니다. 정말로 본보기로 모두에게 경고할 필요가 있으니까. 효수가 아니라면 다른 방식으로.”
“으음. 당신이 처리하는 쓰레기가 좀 많긴 하지.”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쓰레기가 너무 많아서 죽이지 말라고 당부하지 않았나. 다음 순간, 올리비아의 귓바퀴를 타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굴러들어왔다.
“차라리 한 번에 처리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