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맹세한다. 내 너를 해하지 않는다고. (14/146)

#14. 맹세한다. 내 너를 해하지 않는다고.2021.10.18.

크라이어는 그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올리비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묵묵히 그녀만을 올려다보는 그를 내려다보는 올리비아의 입술이 열렸지만,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크라이어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올리비아의 손을 잡고 제 이마에 그녀의 손등을 댔다.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림과 동시에 그의 입술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보다 더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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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705593035.jpg“맹세한다. 내 너를 해하지 않는다고.”

그의 맹세는 마치 어떤 주문처럼. 마치 어떤 마법처럼. 올리비아의 심장께에 아주 깊숙이 박혔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를 혼돈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대륙 전쟁을 일으키고 대륙 전체를 피바다로 삼켜버린 남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올리비아의 눈에는 크라이어가 그 누구보다도, 아니, 그 무엇보다도 정결하고 신성해 보였다. 정…… 뭐? 신성……? 이 남자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머릿속이 덜그럭거렸다. 대체 이 남자는…….

1654970559304.jpg“당신 말이야.”

올리비아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1654970559304.jpg“과거에 뭘 하던 사람인지 몰라도, 하나는 확실해.”

16549705593035.jpg“무엇이?”

1654970559304.jpg“부활하기 전에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어. 절대로.”

그에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툭 튕겼을 뿐.

16549705593035.jpg“앞으로 내가 무서워질 때면 지금의 맹세를 기억해라.”

1654970559304.jpg“어릴 때 폐하께서도 하지 않으신걸.”

그가 튕긴 이마를 슥슥 문지른 올리비아가 이내 크라이어의 강철같이 단단한 등을 꾹꾹 눌렀다.

1654970559304.jpg“이제 가봐.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 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지금도 여전히 그녀는 피 냄새를 맡을 수 없고, 땅의 오염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그걸로 괜찮았다. 크라이어를 믿을 수 있으니까. 그녀가 미는 대로 순순히 걸음을 뗀 크라이어는 시체 몇 구를 더 발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끈적거리는 흙과 시체를 살피던 크라이어의 눈이 무섭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의 주변 공기가 주변을 일그러뜨릴 정도로 묵직해졌다는 사실을 알아챈 올리비아가 눈을 크게 떴다.

1654970559304.jpg“크라…….”

다음 순간,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낀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대체 언제 온 건지 그녀를 훌쩍 안고, 대체 언제 간 건지 공터 한가운데로 돌아간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16549705593035.jpg“황녀.”

1654970559304.jpg“응.”

16549705593035.jpg“평범한 실종이나 살인 사건이 아닌 거 같다.”

그가 쥐고 있는 나뭇가지 끝을 따라간 올리비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1654970559304.jpg“이건.”

16549705593035.jpg“그래.”

이미 바싹 마른 시체의 이마에 으스러진 문양을 가리킨 크라이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16549705593035.jpg“고대신의 문양이다.”

  *** 고대신의 문양이 낙인처럼 찍힌 시체를 만든 장본인인 남자는 절망하고 있었다.

16549705623367.jpg“모자라. 모자라. 모자라. 모자라. 모자란다고.”

똑같은 말만 중얼거리는 그는 제 앞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16549705623367.jpg“하나, 둘, 셋, 넷…….”

그의 손끝에 걸리는 물품들은 다양했다. 누더기 인형, 반지, 뜯어낸 옷자락, 손톱, 뭔가에 떡진 머리카락 등등. 각양 각색의 물품들은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고대신을 위해 바쳐진 제물들. 그들의 흔적을 늘어놓고 미친 듯이 홀로 중얼거리던 남자가 우뚝 멈췄다.

16549705623367.jpg“돈이 필요해.”

사람들이 아이들을 단속하고 몸을 사리면서 제물로 바칠 사냥감을 찾을 길이 요원해졌다. 며칠간 내내 밤을 기며 먹이를 찾았지만, 빈 손으로 돌아왔을 뿐. 남자는 얼굴을 문질러 그의 굳건한 믿음을 저 아래로 감추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달칵. 집을 나선 남자는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이웃과 마주쳤다.

16549705623367.jpg“여어, 요즘 얼굴 보기 힘들구먼.”

그를 향해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는 이웃에게 남자도 웃으며 답했다.

16549705623367.jpg“안녕하셨습니까. 일이 좀 있어서요.”

16549705623367.jpg“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쉬엄쉬엄해. 아무리 젊어도 영원히 젊진 않으니까.”

남자는 이웃의 사소한 말에도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16549705623367.jpg“네.”

16549705623367.jpg“아참, 여 좀 있어 봐.”

이웃은 그 말만 남기고 집 안으로 사라졌지만, 남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그 자리에 얌전히 서 있을 뿐.

16549705623367.jpg“거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얼굴이 좀 상했어. 이거 좀 먹어.”

금방 다시 돌아온 이웃이 내민 바구니에서는 고소한 빵냄새와 절로 침이 고이는 음식 냄새가 솔솔 났다. 바구니를 받아든 남자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16549705623367.jpg“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16549705623367.jpg“뭘, 지난번에 지붕 고치는 일도 그냥 해줬는데. 그래서 그런데, 내가 허리가 안 좋은데 의자가 덜그럭 거린다네.”

이웃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16549705623367.jpg“죄송합니다. 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서요.”

16549705623367.jpg“아, 그런가? 그래. 시간 날 때 언제라도 들러주면 고맙지.”

어느새 당연하게 남자가 의자를 고치는 것처럼 되었지만, 남자는 선량한 미소를 잃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9705623367.jpg“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리를 꾸벅 숙인 후 다시 길을 나서는 남자를 보던 이웃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혼잣말했다.

16549705623367.jpg“참, 착한 청년이야.”

이제까지 말썽은커녕 목소리도 한번 높인 적 없는 근면성실한 청년. 사람들과의 교류도 잦고, 근처 아이들과도 종종 놀아주는 사람. 늘 웃는 낯으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웃. 대체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가 근래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며 공포에 떨게 만드는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을. 이웃을 뒤로한 남자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지나는 이들은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남자도 어김없이 인사를 돌려주며 걷기를 한참. 타렌 가문에서 운영하는 상회의 지부 중 한 곳에 다다랐다.

16549705623367.jpg“안녕하십니까.”

16549705623367.jpg“어? 세상에! 자네 괜찮은 건가!”

16549705623367.jpg“네. 죄송합니다. 말도 없이 오랫동안 나오지 않아서.”

16549705623367.jpg“아니, 괜찮네.”

그간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웠던 일터에 얼굴을 비춘 남자를 사장은 별다른 말 없이 받아주었다.

16549705623367.jpg“자네처럼 열심히 일하는 이는 찾기가 힘드니 말일세. 그런데 자네 혹시…….”

사장은 남자와 함께 일했던 이의 행방을 물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흔들 뿐.

16549705623367.jpg“허어. 자네도 모른다니……. 허 참, 자네도 그렇고 그이도 실종된게 아닌가 했는데. 그 왜 딸아이 유품이라며 누더기 인형을 가지고 다니던……. ”

중얼거리는 사장의 말에 남자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일터로 향했다. 그늘진 곳으로 들어선 그의 입이 조금씩 열리더니 이윽고 찢어질 듯 웃는 낯이 되었다.

16549705623367.jpg“숭고한 제물이 되었지.”

사장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실종된 동료의 최후를 떠올린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환희는 얼마 가지 못했다.

16549705623367.jpg“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일터에서 사냥감을 찾았지만, 그조차 녹록치 않았다. 실종이니 살인이니 흉흉한 소문이 피부에 와닿자, 모두가 몸을 사리고 있었으니까. 역시 돈을 모아서 사람을 사는 수밖에 없군.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일에 몰두했다.

16549705623367.jpg“후우.”

어느 정도 일을 마치고 벽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남자는 천천히 다리를 굽히고 주저 앉았다. 목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말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빙 돌아가야만 하다니. 하지만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고 누군가 그랬던가.

16549705705681.jpg“여기서 뭘 하고 있어?”

쭈그리고 앉아 무릎에 고개를 묻은 그의 정수리 위로 발랄한 목소리가 톡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남자의 시야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분홍빛 머리가 가득 들어왔다.

16549705705681.jpg“네가 이곳에서 일을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들었어.”

남자는 답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눈앞에 나타난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뽀얀 손등, 매끄러운 손톱, 그리고 아무리 수수해 보여도 숨길 수 없는 재질 좋은 원피스까지. 심지어 눈앞에 있는 여자는 자신이 귀하신 분이라는 것을 숨길 생각도 없는 듯 했다.

16549705705681.jpg“지부장이 요즘 사람이 줄어서 힘들다고 하던데.”

이곳에서 일하는 이라면 지부장을 그냥 지부장이라 할 리 없을 테고, 이 곳에서 일하지 않는 이라도 평민이라면 타렌 상회의 지부장을 저리 마구 불러대진 않으리라.

16549705705681.jpg“힘든 일이 있다면 말해봐. 너같이 일 잘하고 성실한 사람은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눈앞의 이 여자는…….

16549705705681.jpg“타렌의 이름으로 해결해 줄게.”

앙브흐 타렌은 해맑게 웃으며 단언했고, 남자는 주저 없이 80의 진실과 20의 거짓이 섞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16549705705681.jpg“흐음. 돈이라. 얼마나 필요해? 아니야, 일단 이걸 가지고 가.”

그녀는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남자에게 건네주었다. 묵직한 주머니에서는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났고, 그 안이 돈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사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16549705705681.jpg“더 필요하면, 지부장에게 말해서 받으면……. 아니다.”

앙브흐는 고개를 흔들며 덧붙였다.

16549705705681.jpg“지부장을 통해서 나에게 말해.”

앙브흐 타렌은 일할 사람이 모자라고 근래 분위기도 흉흉하다며 울상을 짓는 지부장을 위한 순수한 호의와 힘들어 보이는 남자를 향한 오롯한 선의로 손을 내밀었다.

16549705705681.jpg“언제든 내가 널 도와줄 테니까.”

  *** 앙브흐에게 돈주머니를 받은 남자가 늦은 밤, 이웃집의 문을 두드릴 무렵. 손톱 달이 걸린 밤하늘 아래, 황녀 궁은 고요함에 가라앉아 있었다. -타탁. 그리고 그 고요함을 밟으며 궁의 안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이가 있었으니. 몸을 낮춰 빠르게 달리던 그가 우뚝 멈췄다. 그가 가려던 길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으니까. 기사는 본능적으로 몸의 중심을 아래로 내리며 검자루를 쥐었다. 본디 황궁에서는 타국 인물들의 무기 반입을 금지하고 있었다. 하나, 근래 타국의 기사들이 워낙 사고사를 많이 당하다 보니, 자신을 보호할 목적이라면 무기 반입이 허락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물론 ‘사고사’라고 알려지긴 했지만……. 하나같이 밤이슬을 밟다 사고를 당하다 보니 기사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이야기가 돌았다.

16549705623367.jpg‘황녀를 독차지 하고 있는 놈이 간계를 부려, 기사들을 죽이고 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린 기사의 얼굴이 대단히 험악하게 구겨졌다.

16549705623367.jpg“모습을 드러내라.”

기사는 으르렁거림과 동시에 당장이라도 달려들 수 있게 검자루를 꽉 쥐었다. 무늬만 기사가 아닌 매우 드문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간교한 계략을 부려 황녀의 총애를 받는 놈을 처단할 마음이 굴뚝 같았으니까. 이윽고 일렁이던 그림자를 타고 저 깊은 구덩이에서 흘러나오는 듯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16549705593035.jpg“하나를 처리하면, 또 하나가. 또 하나를 처리하면 그 뒤가.”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인영이 느릿하게 몸을 바로 세우고 한 발 내디뎠다. 인영의 얼굴은 그림자에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그 입매에 번진 비소만은 선연하기 그지없었다.

16549705593035.jpg“쓰레기 순번이라도 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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