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나는 당신이 무서워.2021.10.14.
“제국에 전령을.”
꼭두각시처럼 그레타가 한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왕세자의 눈은 맑았다. 그 소름 끼치도록 투명한 눈을 보면 누가 감히 왕세자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그는 기괴하게도 단 한 번도 눈을 깜박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있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이윽고 왕세자의 입을 타고 그레타의 말이 흘러나왔다.
“수도 외곽에서 일어나는 사건. 그 범인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제국 수도 외곽의 사건.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사건의 흔적을 찾아 꼬리를 더듬기도 전. 그 사건이 일어난 곳과 멀리 떨어진 노르덴 왕궁에서 그레타는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챘다. 얼마 전, 그녀가 제 아비인 마법사를 찔러 죽여버리기 전부터 느꼈던 희미한 기척. 아버지는 느끼지 못했겠지만, 그보다 훨씬 뛰어난 마법사인 그레타는 느끼고 있었다. 그 기척이 점점 더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기척이라면 당연히 고대신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뱀의 그것처럼 번질거리는 빛을 발했다. 한차례 입술을 핥은 그레타의 속살거림을 왕세자가 똑같이 반복했다.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잡기 위해 돕겠다.”
그레타가 입을 다물자 왕세자도 입을 다물었고, 그녀가 발길을 돌리자 왕세자도 그녀 곁을 걸었다. 이윽고 왕의 집무실로 돌아온 그레타는 왕세자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속삭였다.
“잘했어요.”
왕세자는 그제야 눈을 감았고, 그레타는 그런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이 떨어진 왕세자의 이마에 언뜻 고대신의 문양이 드러났지만, 찰나였을 뿐.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처져 있는 왕세자를 일별한 그레타는 왕의 집무실에서 왕이 앉는 자리에 앉아 등을 깊숙이 묻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자꾸만 신경을 툭툭 건드는 기척을 따라갔다. 제국의 심장부, 수도의 외곽. 이리저리 흔들리는 기척은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그레타는 짧게 혀를 찼다.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고대신을 숭배하는 이가 무슨 짓을 벌이는 건 전혀 달갑지 않았으니까. 잘 모르는 어중이떠중이가 잘못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면, 고대신의 강림은 늦춰질 뿐. 자칫 아예 강림이 무산될 수도 있으니 누군지 찾아내서 반드시 불에 태워야 하리라. 그가 무엇을 했건 모든 것을 정화 시켜야 할 테니.
“크라이어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제국의 황녀에게 잡혔다고 했었지. 아니, 아마 그가 그곳에 머무르기를 원했으리라. 황녀 따위가 그를 잡아둘 수 없을 테니. 하지만 그레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이런 작은 피라미를 처리하는데 그의 도움을 청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모든 것은 고대신의 의지로.”
정결한 신의 전사인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신의 의지이리라.
“크라이어.”
그의 이름을 부르며 텅 빈 화폭을 쓰다듬는 그레타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났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이리도 선명하답니다.”
빈 화폭을 감싸 안으며 눈을 감는 그레타의 눈꺼풀 위로 짙은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 노르덴 왕궁의 복도에 사용인들의 피가 흩뿌려질 무렵.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빽빽한 나무와 수풀을 헤치고 꽤 너른 공터에 다다른 참이었다.
“여기다.”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주변을 꼼꼼히 살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묻는 것이 늦었다만.”
“응?”
“이 사건, 기억에 없나?”
그가 묻는 것이 회귀 전 일이라는 사실을 단숨에 알아들은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런 사건이 있기는 있었어. 있었긴 한데…….”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모은 올리비아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때는 따로 수사관이 배정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은 종결됐어.”
“종결? 그렇다면 범인을 알 수 있을 텐데.”
바로 범인을 잡으러 가지 않느냐는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지만, 올리비아는 재차 고개를 흔들었다.
“범인을 몰라.”
“범인을 잡지 못하고 종결됐나.”
“아니. 범인을 찾기는 했지만, 완전히 불에 탄 시체인데다 발견된 장소도 실종자들 중 한 명의 집이었거든.”
결국 지금으로서는 범인의 실마리를 찾을 단서가 전혀 없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피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어디서?”
“여기. 그리고 저기도.”
파헤쳐진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주변보다 색이 진한 땅을 가리키던 크라이어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수풀 밖까지 흘러나오던 피 냄새와 거기 뒤섞인 사체가 썩어가며 내는 시취까지. 아주 코가 비틀어지게 지독했으니까.
“여기?”
올리비아는 크라이어가 처음 짚은 곳으로 한 발 내딛다 눈을 깜박거렸다.
“뭐야?”
갑작스럽게 발이 공중에 붕 떠버렸으니까.
“크라이어?”
그녀를 한 팔로 가볍게 안아 올린 크라이어가 땅을 박차자 발아래 축축한 흙이 뭉개지면서 안쪽에서 더욱 검붉은 흙이 튀었다. 사건 현장으로 보이는 공터에서 좀 떨어진 곳에 올리비아를 내려준 크라이어가 물었다.
“설마 했다만, 피 냄새를 맡지 못하는 건가?”
그의 말에 올리비아는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가까이 가야 맡을 수 있지. 난 당신과는 다르게 평범한 인간이라고.”
그녀의 말은 일견 타당해 보였지만, 크라이어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이 지독한 냄새를 맡지 못한다고?”
크라이어가 되묻자 올리비아는 아예 코를 찡긋거리며 킁킁 거렸지만, 풀 내음 외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응. 오히려 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걸. 달콤한 꽃향기? 지독하다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리저리 부지런히 살피던 올리비아는 어느새 공터로 돌아가 있는 크라이어를 발견하고 외쳤다.
“왜 혼자 가!”
“거기 있는 편이 낫겠군. 이 주변 땅은 지독하게 오염되었으니까.”
크라이어의 말을 들은 올리비아의 얼굴에 다시 의아함이 차올랐다.
“오염이라니?”
그녀의 의문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주변에는 푸른 수풀이 우거져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달달한 꽃향이도 났으니까. 물론 흙이 파헤쳐진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오염이라니. 하지만 크라이어는 올리비아에게 제대로 된 답을 주는 대신 근처에 널려 있는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후웅. 그가 가볍게 나뭇가지를 휘두르자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마치 보드라운 케이크가 썰리듯 축축하고 검은 땅이 쩍 갈라졌다. 고작 올리비아의 검지 두배쯤 되는 길이의 아주 얇은 나뭇가지로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 광경을 본 유일한 목격자인 올리비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무어가 놀라우랴. 검을 한번 휘둘러 제국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황궁의 성벽을 무너뜨린 남자다. 나뭇가지가 아니라 그냥 손가락만 그어서 저런 결과를 냈다고 해도 놀라지 않으리라. 대신 그녀는 뭐라도 보려고 까치발을 들고 손을 휙휙 흔들었다.
“크라이어, 뭐라고 말 좀 해! 무슨 일이야, 대체.”
답답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가 움직이지 말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을 터. 그가 제게 진실만을 말한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쓸데없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지도 않았기에 올리비아는 순순히 크라이어의 경고대로 제자리를 지켰다. 기다리던 그녀의 미간에 골이 하나, 둘 그리고 세 개까지 늘어났을 때쯤.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시작됐다고 했지?”
“실종?”
“그래.”
지난 밤, 꼼꼼히 훑었던 서류를 되새김질한 올리비아가 답하자 크라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됐다. 적어도 몇 년 전부터.”
“그게 무슨 말이야, 거기로 가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코앞에 서 있었다.
올리비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얼어버렸고, 크라이어는 그런 그녀의 턱을 손수 닫아주었다. 그의 손길에 입을 딱 다문 올리비아는 문득 억울함이 몰려와 그를 노려보았다.
“답답해하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보여주려고 한 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크라이어도 기척 없이 불쑥불쑥 코앞에 나타나는 그의 행태에 올리비아가 뿔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푸른 눈에서 넘실거리는 억울함과 아직도 간헐적으로 떨리는 그녀의 움츠러든 둥근 어깨를 본 크라이어는 곧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알았으면 그러지…….”
“앞으로도 이렇게 할 테니까 익숙해지는 편이 낫겠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흔드는 크라이어를 향해 올리비아가 바락 외쳤다.
“그게 미안하다는 태도…… 읍! 읍읍읍! 으읍!”
제 얼굴 반을 가리는 커다란 손에 입이 막힌 올리비아가 그의 손을 탁탁 내려치며 불만을 표했지만, 이어지는 크라이어의 말에 멈칫했다.
“익숙해져.”
비스듬한 그림자가 진 크라이어의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는 가감 없는 진심만을 담고 있었으니까.
“위험한 순간마다 매번 네게 경고를 하면서 너를 구할 수는 없으니까.”
그에 올리비아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디 한군데 반박할 구석이 없는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둘은 한배에 탔고, 한가지 목표를 향해 같이 뛰어야 하는 사이가 아닌가. 그리고 그 목표는 하하호호 웃으며 이룰 수 있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고 먼, 코앞까지 검 끝이 왔다 갔다거리는 아주 위험한 것이고. 하지만……. 올리비아는 천천히 크라이어의 손을 떼어냈다.
“크라이어.”
그녀의 부름에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와 같은 푸른 눈과,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대지와 같은 검붉은 눈이 마주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올리비아가 입술을 뗐다.
“당신 말이 맞아. 익숙해져야겠네.”
“그래.”
숨 쉴 틈도 없이 돌아온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그의 가슴을 툭 밀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정말로 지금 그녀와 그의 상황에서는 완벽하게 맞는 말이었지만. 네 번. 무려 네 번이다.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가차 없이, 무자비하게 네 번을 죽였다. 아무리 그와 손을 잡았고, 그가 아무렇게나 검을 휘둘러 피를 보는 살인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도.
“나는 당신이 무서워.”
크라이어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는 올리비아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본능적인 공포였다. 생태계의 최정점 포식자와 그의 먹잇감에 불과한 피식자의 관계처럼. 크라이어는 올리비아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는 올리비아를 이해하지도, 그녀의 공포를 공감하지도 못하니까. 단지 그는 오롯이 진심만을 담아 전했을 뿐.
“널 죽이지 않는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담긴 진심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올리비아는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알아. 알아도 심장이 덜컹덜컹 내려앉으니까 문…… 뭐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