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좀 이상하지 않아?2021.10.11.
그와 이렇게 나란히 걷기 전, 아니, 그를 만나 얼굴을 맞대기 전까지 올리비아가 아는 크라이어는 그녀를 네 번이나 죽인 자이며, 대륙 전쟁을 일으키고 끝내버린 누구도 손댈 수 없는 피에 미친 자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노예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거든.’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크라이어의 팔을 꽉 잡았다. 때릴 때와 마찬가지로 거의 느껴지지도 않는 힘이었지만, 그 온기만은 선연해서……. 크라이어는 파란 핏줄이 불거지도록 힘을 준 올리비아의 하얀 손을 내려다보다 문득 쇄골 부근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 고통은 너무나도 찰나였을 뿐. 만약 다른 곳에서 통증을 느꼈다면, 그저 기분 탓이라고 넘어갈 수 있었으리라. 하나, 쇄골이라면 고대신의 노예라는 징표인 낙인이 찍혀 있지 않은가. 그의 심상찮은 기색을 읽었는지 다음 순간 튀어나온 올리비아의 말에 크라이어는 쇄골이 아닌 제 입가를 매만졌다.
“뭐야? 뭐가 걸려?”
“내가…… 소리 내어 말했나?”
“뭐? 아니, 말 안했어. 그보다 뭐가 걸리는 건데? 얼른 말해봐.”
난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눈을 반짝, 아니 번뜩이는 올리비아를 그는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또!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올리비아가 덧붙였다.
“어떻게 알긴, 얼굴 보고 알았지. 아니, 얼굴하고 분위기? 눈? 공기?”
올리비아도 말을 하다 보니 저도 확신이 없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를 보는 크라이어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번졌다. 그의 심중을 이토록 잘 읽어내는 이가 있었던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에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부……활을 한 이후에는 올리비아가 유일하리라.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고작해야 그를 부활시킨 마법사와 그의 딸 정도 될까. 그러고 보니 그 여자. 그레타도 마치 제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듯 지껄이긴 했었지.
“뭐야, 또. 이번에는 다른 생각 했지?”
귀신같이 그의 생각을 읽어낸 올리비아가 그에게 바싹 다가서며 까치발을 했다.
“아까 찜찜했던 것까지 한 번에 좀 말해봐.”
말하지 않으면 아예 그의 입을 벌려서 목을 들여다 보겠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르는 올리비아를 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낙인이 갑자기 욱신 거렸다.”
“뭐!”
대경한 올리비아가 반사적으로 그의 쇄골을 향해 손을 올렸지만, 이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우뚝 멈췄다.
“네가 팔을 꽉 잡은 후에 말이야.”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던 올리비아가 슬그머니 제 손을 거두어 들이며 한발 물러났다. 그녀는 동그란 어깨를 더욱 동그랗게 움츠리며 물었다.
“나 때문인가?”
“글쎄. 아는 바가 없으니 어느 것도 단정할 수 없지.”
가벼운 그의 답에 올리비아는 금방 납득 한 듯 움츠렸던 어깨를 폈지만, 다시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렇긴 하지. 지금도 아파?”
무의식적으로 손이 나가려는 것을 방지라도 할 셈인지 뒷짐을 진 채 까치발을 든 올리비아를 본 크라이어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매끈한 이마를 밀어냈다.
“아프지 않다. 그보다 어찌됐건 대회의는 잘 끝났지 않나. 노르덴 왕은 사고사로 처리되었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구태여 그가 말하지 않는 것을 더 캐낼 마음도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받았다.
“대회의야 무난하게 끝났지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라이어를 올려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아, 지금 황궁에 어정거리는…….”
크라이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올리비아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황녀가 첩을 들였고, 곧 남편을 들일 거라는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나돌고 있으니 폐하께서 화가 나신 거지.”
물론 황제가 떠도는 소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었다. 심지어 황제는 대회의 후 그녀를 불러들여 확인까지 하지 않았던가.
‘내 너를 믿고 있겠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니리라. 단지 믿는 것과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징계는 다른 이야기일 뿐.
“첩이라.”
크라이어는 주머니에 넣으면 쏙 들어갈 듯 작고 연약해 보이는 곁에 있는 올리비아가 황녀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제 앞에서는 전혀 황녀답지 않게 굴어 잊고 있었건만. 올리비아는 인적이 드문 길을 쏙쏙 골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변복……인지 변신인지에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 걸.”
대체 언제,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크라이어도 그녀만큼이나 변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변신이라고 해야 할까. 달을 베어낸 듯한 은발과 검붉은 눈은 검은 가발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어디서 구한 건지 옷도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허름해 보였다. 더해서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공기도 사라진 지금, 그는 그야말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지만 유달리 키가 좀 큰 남자로 보일 뿐.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도, 눈에 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리고?”
갑자기 멈춰선 그를 따라 올리비아도 멈췄다.
“도착한 것 같은데.”
“뭐?”
한 곳에 고정된 그의 시선을 쫓은 올리비아도 같은 곳을 보았지만, 우거진 수풀 뿐. 수도 외곽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닌가. 하지만 뒤이은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피 냄새다.”
***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의 소맷자락을 잡아 당길 무렵. 노르덴국의 왕궁은 갑작스레 서거한 왕의 장례식 준비로 부산스럽다 못해 정신이 없었다.
“그게 아냐!”
“태피스트리 손질에 적어도 한달은 걸린다고…….”
“그럴 시간이 어딨어! 다른 것으로 쓰든가 열흘내로 완료하라고 해!”
사용인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불을 밟고 다니듯 서 있거나, 걷는 이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난데없는 죽음이었기에 국가 단위의 장례식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건만, 왕세자가 명을 내렸으니까.
‘한시라도 빠르게 국장을 준비하라.’
누구의 명이라고 감히 거역할까. 애초에 왕세자의 지위가 확고했기에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곧 왕위에 오를 분이 아닌가. 사용인들은 너무 바쁜 탓에 식당에 갈 시간도 없어 일하던 복도에 주저앉아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뛰어다닌 탓에 눈앞이 노래지고 침도 다 말랐지만, 먹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에 빵을 잘게 찢어 수프에 넣고 한술 뜨던 사용인이 입을 열었다.
“죽은 듯이 잤으면 좋겠어.”
그에 다른 사용인들도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꾸역꾸역 빵을 입에 넣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있던 사용인은 이렇게까지 급하게 국장을 준비하라 이른 왕세자를 떠올렸다. 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포크 끝에 있는 작은 주홍빛 당근으로 갔다. 그리고 연쇄적으로 떠오르는 왕세자와 그의 곁에 있는 화려한 미인인 그레타.
“그 여자…… 머리색이 이런 주황색이지.”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웅얼거린 사용인은 이어 고개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돌아버리게 바빠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 여자는 좀 많이 이상하지. 언제부턴가 국왕 전화와 왕세자 전하 곁에 최측근 사용인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 붙어 있던 이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들. 그들에게서 위화감을 느낀 이들은 귀족들이 아니라 사용인들이었다. 마법사가 술수를 쓴 건 귀족들이지 사용인들은 아니었으니까. 사용인은 주홍빛 당근을 포크로 쿡 찍으며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하지 않아?”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넋을 놓고 점심을 먹던 사용인들이 하나둘 귀를 기울였다.
“뭐가?”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 뭐라고 해야 하지.”
하지만 말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말문이 막혔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애매했으니까. 공작이나 후작같은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요, 특별히 맡은 직분이 있는 것도 아니니. 게다가 국왕 전하가 찾으실 필요도 없이 늘 곁에 있었기에 사용인들이 마법사를 따로 부를 일도 없었다. 마법사의 명칭을 고르던 사용인이 곧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 전하께서 서거하신 이후로 뵌 적이 없지 않아?”
마법사라고 지칭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용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보탰다. 그만큼 마법사가 국왕의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익숙해졌으니까.
“맞아. 근래 뵌 적이 없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 늘 계시던 분이…….”
어느 사용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들 뒤쪽에서 긴 그림자가 졌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있나 보네.”
“아, 재미난 이야기는 아니고, 전하께서 서거하시고 바로 자취를 감추셔서 이상…….”
처음 말을 꺼낸 사용인이 말을 줄줄 늘어놓다 입을 꾹 다물었다. 고개를 든 그의 앞에 주홍빛 머리카락이 일렁거리고 있었으니까. 하얗게 질린 사용인들이 먹던 것들을 거의 던지다시피 내려두고 벌떡 일어났다. 그 여자는 늘 그렇듯 혼자가 아니었다.
“그레타.”
왕세자의 부름에 그레타는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사용인들을 훑었다. 그 시선이 뱀의 비늘같이 선뜩해 사용인들은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고.”
그녀는 고함을 치지도, 하다 못해 눈살을 찌푸리지도 않았건만. -꼴깍. 사용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레타는 이내 그곳에 모여 있는 마지막 사용인까지 모조리 눈에 담은 후 다시 입술을 뗐다.
“궁 내부의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다니.”
말이야 맞는 말이었지만, 마법사가 궁에 속한 적이 없으니 엄밀히 말해 ‘내부’의 일은 아닐 터. 심지어 이 한적한 복도에서 점심을 먹다가 사용인들끼리 나눈 욕도 아닌 단순한 이야기였건만. 하나, 왕세자를 끼고 있는 그레타에게 그런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사용인은 아무도 없었다. 왕세자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선 그레타의 입술이 벌어졌다.
“입을 함부로 놀렸다면 대가를 치러야겠지요.”
왕세자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속살거림이었다.
“그렇지 않나요. 전하.”
그레타의 속삭임에 왕세자는 명정한 눈으로 사용인을 똑바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입을 함부로 놀렸다면 대가를 치러야겠지.”
사용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지기 무섭게, 왕세자가 명했다.
“이 자리에서 전부 죽여라.”
마치 굴러다니는 쓰레기라도 치우라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자 어느새 나타나 사용인들을 둘러싼 기사들이 검을 휘둘렀고, 사용인들은 자비를 구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전부 목이 떨어졌다.
마지막 사용인까지 죽어 넘어진 것을 확인한 그레타의 구두 끝에 핏물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저 미소지었을 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복도에서 눈을 번히 뜬 채 서 있기만 하는 왕세자의 귓가에 그레타의 속살거림이 울렸다.
“제국에 전령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