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당신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려고.2021.10.07.
주홍빛 노을 사이를 제비가 낮게 나는 저녁. 수도 외곽을 지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어깨를 움츠리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여…….”
“으어어억!”
“으허헉!”
갑작스럽게 어깨를 건드는 손길에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가 비명을 지르자 그의 어깨를 쳤던 이도 같이 비명을 질렀다. 제 어깨를 친 이가 이웃임을 확인한 남자가 허옇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자네였나.”
“왜 이리 놀라? 나까지 간 떨어질 뻔했지 않나.”
똑같이 허옇게 질린 이웃이 그를 타박하자 남자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요즘 도는 소문 때문이지, 뭘 새삼.”
“소문?”
의아하게 되묻는 이웃을 한심하다는 듯 위아래로 훑은 남자가 목을 잔뜩 움츠리며 속삭였다.
“시체가 줄줄이 나오고 있다지 않나.”
“뭐? 시체?”
“쉬, 쉬잇. 아, 이 사람도 참.”
눈을 둥그렇게 뜨고 크게 되묻는 이웃의 어깨를 꽉 잡아 누른 남자가 괜히 주변을 살폈다. 우연인지 뭔지, 주변에는 딱 그들 둘뿐. 남자의 목젖이 울렁거리며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밤이 내리는 휑한 길이 을씨년스럽다 못해 괴기…….
“무슨 시체냐니…….”
“으헉!”
“으허억!”
또다시 소스라치게 놀란 남자를 따라 남자의 팔을 툭 친 이웃도 같이 소스라쳤다.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본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색한 침묵을 깨고 이웃이 볼멘소리를 냈다.
“아, 잔뜩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넋을 놓고 먼 곳만 보니까 그렇지!”
두 번이나 엉겁결에 놀란 것이 억울한 건지 표정이나 목소리가 대단히 거칠었다. 그에 남자는 주변을 슬쩍 살핀 후 이웃의 팔을 툭툭 쳤다.
“됐고,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니 어서 가세.”
목을 부르르 떤 남자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이웃 역시 투덜거리면서도 그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둘의 그림자 끝에 또 다른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다 이내 사라졌고, 그 밤.
“누, 누구…… 허억!”
하얗게 질린 누군가가 엉덩이 걸음으로 입이 찢어져라 웃는 남자에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눈앞이 번쩍하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털썩. 속절없는 시간이 흐르고 새벽이 밤의 자락을 물들였을 때. -서걱서걱.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대신의 제물로 바쳐진 누군가의 시체가 또 다른 구덩이에 묻혔다.
*** 축축한 흙 비린내와 비릿한 피비린내가 뒤섞인 밤이 지나고 태양이 떠오른 아침. 올리비아는 변장한 채 황궁을 막 나서는 참이었다. 황궁의 정문이 아닌,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길을 따라 잰걸음을 옮긴 그녀는 문을 지키는 경비원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른 시간에 나가는군. 지금쯤이면 다들 들어오는 시간일 텐데.”
“네. 급히 찾으시는 게 있다고 하셔서요. 허가증 여기 있어요.”
태연한 올리비아의 답에 경비원은 허가증을 꼼꼼히 확인한 후 문을 열어 주었다. 눈을 찌르는 태양 빛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가 황궁 밖으로 한걸음 내딛기 무섭게 바로 옆에서 귓바퀴를 타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현장으로 가는 건가.”
그대로 얼어붙은 올리비아는 바짝 솟은 뺨의 솜털을 문지르며 목소리가 들린 왼편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빈 허공에서 태양 빛으로 일렁거리는 아지랑이뿐. 올리비아는 입을 뻐끔거리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이 이상 이상한 행동을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디 있는 거야?”
“그림자.”
“뭐? 그림……?”
너무나도 간단하고 빠르게 떨어진 답에 올리비아는 가출하려는 어이의 뒷목을 잡아끌며 되물었다. 저 남자가 갑자기 문학적 감성이 솟아올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림자에 있다고 할 리는 없을 터. 말 그대로 그림자에 있다는 말일 텐데, 인간이 어찌 흔적도 없이 그림자에 숨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야. 됐어. 그래. 그림자에 있겠지.”
하지만 곧 상대가 크라이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원한다면 그림자가 아니라 어디든 몸을 감출 수 있겠지. 이어 올리비아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경비가 엉망이라기보다는 변장이 훌륭하다고 해야지. 십 년 넘게 해온 건데 훌륭하지 않으면 억울하고 말이야.”
그녀는 제 머리카락 끝을 탁 튕긴 후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볼셰이크 특유의 선명한 붉은 머리카락은 탁한 밀짚 색 가발에 덮였고, 시리도록 푸른 눈 역시 덥수룩한 앞머리에 반쯤 덮여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에는 무슨 수를 쓴 건지 올리비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리하는 사용인들이 봐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바뀌어 있었으니. 황궁 외곽의 문, 그것도 사용인들이 드나드는 문을 지키는 경비원들이 올리비아를 알아볼 턱이 있을까. 하지만 돌아온 답은 과연 크라이어라고 해야 할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겉모양 조금 바꾸는 것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경비원으로서 실격이 아닌가. 많이 양보해서 걸음걸이나 몸짓을 잡아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골격은 같은데.”
어느새 그녀의 왼편에 서서 나란히 걷던 그가 덧붙였다.
“게다가 드러난 손의 모양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않나.”
“몰라. 아니, 알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남을 자세히 보진 않으니까. 아, 아아아.”
올리비아는 크라이어가 입술을 떼는 것을 보지도 않고 손을 휘저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당신 정도니까 반박하지마.”
크라이어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너무나도 순식간에 피었다 사라진 미소라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익숙하게 황궁에서 벗어난 올리비아는 더욱 익숙하게 수도의 시끄러운 거리에 녹아들었다.
“황궁에서 자주 나왔다고 했지.”
어느새 온 건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 곁에서 나란히 걷는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는 가볍게 답했다.
“의무니까.”
볼셰이크 제국의 황녀이며, 차기 황제인 올리비아가 호위도 없이 홀로 황궁에서 벗어나 수도를 헤집는 이유는 따로 없었다. 물론 제국민들의 생활이 궁금해! 성을 나가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따위의 말랑말랑한 생각 때문은 아니었고. 아마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 까마득한 과거, 이런 회귀를 거듭하기 전 첫 번째 삶에 있었던 첫 잠행에서 아주 잠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이후의 잠행의 이유는 오로지 황실, 그러니까 볼셰이크의 피를 이은 자들의 의무 때문일 뿐.
“이번 잠행은 의무가 아니라 폐하의 부탁 때문이지만.”
며칠 전 황제가 올리비아를 불러들였던 새벽.
‘연……쇄 살인이요?’
황제가 건넨 서류 뭉치, 아니 뭉치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서류 몇장을 쥔 올리비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수도 외곽에서 주로 사람들이 사라졌고 다시 나타난 이들이 없다.’
‘사라졌다면 실종이 아닌가요?’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황녀에게 맡기고자 한다.’
황제의 통보에 올리비아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과거를 헤매던 올리비아의 초점은 크라이어의 물음에 현실로 돌아왔다.
“대단한 가문의 누군가 실종된 건가.”
어찌 보면 당연한 질문이었다. 제국의 황녀가 실종 사건 하나를 전담으로 맡아 매달리게 되었으니.
“아니. 서류를 쭉 봤지만, 수도 외곽지역에서 드문드문 실종자가 발생한 거야.”
“그런데 왜 네가?”
“일종의 징계의 의미겠지.”
“징계?”
크라이어의 눈썹이 비죽 솟았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제국민들의 실종과 죽음이 그냥 징계로 치부해 버릴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야.”
올리비아는 며칠 동안 한 두 시간만 쪽잠을 자면서 일을 한 탓에 딱딱하게 굳은 뒷목을 매만졌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제국민들의 안전과 내일을 위한 일의 처리가 더 급하다는 거지.”
“그런 의미로 물은 게 아니다. 제국민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는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아니까.”
크라이어는 저도 모르게 쇄골 부근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아, 하긴 너도 잠을 안 자지.”
정확히 말하자면 자지 못하는 것에 가깝겠지만……. 어쨌든 그 역시 올리비아처럼 잠을 거의 자지 못하기에, 그녀 곁에서 볼셰이크의 역사책을 읽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가끔 서류로 이루어진 그 빽빽한 산맥이 무너지지는 않을지 궁금하더군.”
“아, 그 산맥……. 깔려서 크게 다쳤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어. 선선대 황제폐하셨던가. 아니면 그보다 선대?”
그녀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서류에 깔려서 이 부근이 골절되셨을 거야.”
배 부근을 툭툭 두드린 올리비아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물론 그런 상태에서도 그날 처리 해야하는 서류는 다 하셨다지.”
사소한 것이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갈비뼈가 부러졌는데도 숨이 막힐 만큼 많은 서류를 처리했다는 건 그리 사소한 일이 아니리라. 하나, 올리비아에게는 그리 대단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다. 볼셰이크라는 제국에서 황녀로 태어나 많은 것들을 누리는 만큼 짊어져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까. 비록 네 번의 회귀 후에는 제 목숨이 제일 소중해지긴 했지만……. 살기 위해 세계 평화를 지켜야만 하니, 결국 제국민들의 안녕도 지키는 것 아니겠나. 고개를 흔든 올리비아가 대화를 되돌렸다.
“아무튼, 이 조사는 ‘대륙 대회의를 내 멋대로 강행해서 빨리 열자고 밀어붙인 것에 대한 징계’일 거야.”
어깨를 으쓱인 올리비아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크라이어의 소맷자락을 잡아 당겼다.
“이쪽으로.”
그녀를 따라 순순히 왼쪽으로 방향을 꺾은 크라이어가 물었다.
“대륙 대회의가 예정보다 일찍 열리긴 했지. 왜 굳이?”
“아, 별다른 이유는 아니고. 당신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려고.”
앞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이 듣는다면 참으로 규모가 큰 낭만적인 말이었다. 크라이어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제국의 황녀인 올리비아가 준비가 덜 된 국가적인 행사를 강제로 앞당기다니. 하지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낭만의 ‘낭’ 자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세계 평화를 지키는 비둘기의 소임을 다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정쟁의 시발점인 당신을 어떻게든 구워 삶아야 했으니까.”
정말로 어떻게든 했지……. 돌아서려는 그의 바짓가랑이까지 잡고 매달렸으니. 새삼 그때가 떠오르자 올리비아는 눈을 흐릿하게 떴다. 정말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니 잊어야지.
“평화의 비둘기.”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고 나직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스며 있어 올리비아는 그의 팔을 퍽퍽 내려쳤다.
“그만 좀 웃으라고. 뭘 들을 때마다 웃는 거야. 정말 답지 않…….”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나. 답지 않게, 라니. 크라이어다운 것이 무엇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