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달군.2021.09.30.
그리고 다음 순간, 크라이어의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커, 커억……. 커어억.”
살고 싶은 쓰레기가 있는 힘을 다해 제 목을 쥔 크라이어의 손을 할퀴고 버둥거렸지만, 헛된 노력일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쓰레기의 발버둥이 서서히 잦아들다 이윽고 완전히 멈췄다. -털썩. 싸늘한 대리석 바닥에 형편없이 널브러진 쓰레기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는 이내 등을 돌렸다. 모처럼 얼굴을 내민 달빛을 따라 크라이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 -똑똑. 한밤중에도 집무실에서 서류에 코를 박고 있던 올리비아가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고개를 올렸다.
“들어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리 없이 열린 문 뒤로 크라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이어?”
예상치 못한 이의 등장에 올리비아가 토끼 눈을 떴다.
“무슨 일이야?”
“불이 켜져 있기에.”
“일이 남아서. 오늘도 침실에서 자긴 힘들 거 같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다 굳은 목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는 올리비아를 보던 크라이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선택이군.”
일이 너무 많아 제대로 쉬지 못한다는 이에게 하는 답치고 아주 이상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꽉 쥐고 있던 펜을 아예 놓아버린 올리비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에 대한 답은 마치 오늘 밤은 꽤 선선하다는 말을 하듯 가볍기 그지없었다.
“널 강제로 어떻게 해보려는 쓰레기가 있어서 처리하고 오는 길이라.”
“아, 그래. 쓰레기 처리…….”
전혀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은 답에 올리비아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 멈칫했다.
“뭐? 쓰레기?”
“이 시간에 몰래 황녀의 침실 근처에서 서성이는 놈이 할 만한 짓이 정상은 아닐 테니까.”
강제, 쓰레기, 이 시간 그리고 몰래. 불친절한 그의 말에서 단어를 쏙쏙 빼내 조합해 하나의 그림을 그려낸 올리비아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그……렇겠지. 처리했다고?”
“그래.”
“처리를 어떻……. 아냐. 됐어. 말하지 마.”
저 크라이어가 순순히 황궁의 기사들을 불러 쓰레기를 치우지는 않았을 터. 쓰레기의 최후 따위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기에 올리비아는 곧 화제를 돌렸다.
“당신과 관련된 걸 보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어.”
이어 그녀는 작은 초상화를 서류뭉치에서 쏙 빼냈다.
“비슷한……가?”
손바닥만 한 초상화와 크라이어를 번갈아 보던 올리비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머리 색은 같고, 눈동자 색은 비슷하긴 하지만……. 올리비아의 책상 근처에 있는 소파에 느릿하게 자리 잡고 등을 깊숙이 묻은 크라이어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았다.
“뭐가 비슷하다고?”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곧 초상화를 던져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전혀 안 닮았어.”
이 초상화의 인물이 어디를 어떻게 봐서 저 남자와 닮았단 말인가. 설사 겉가죽이 조금 비슷하다 할지라도 검붉은 눈동자 안에서 넘실거리는 것을 결코 흉내 낼 수는 없을 터. 혼자서 전 대륙적인 전쟁을 일으키고 혼자서 그 전쟁을 끝내버린 남자의 눈. 광기라고 해야 할까.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크라이어에게 바짝 다가서서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밤이 섞인 듯 탁한 붉은 눈동자는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타인은 결코 잡을 수 없는, 아니, 크라이어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감정의 격류들. 그러다 문득. 정말로 불현듯 올리비아는 그 휘몰아치는 텅 빈 눈에서 아주 옅은 서러움을 발견했다. 그건 아주 찰나였고, 너무나도 희미했기에…….
“가깝다.”
귓바퀴를 타고 바로 옆에서 들리는 느릿한 목소리에 올리비아의 목 뒤의 하얀 솜털이 바짝 솟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올리비아를 본 크라이어가 손수 그녀의 어깨를 툭 쳐주자.
“으아아!”
그제야 후다닥 뒤로 물러난 올리비아가 제 팔에 돋아난 소름을 마구 문질렀다. 놀라고 무서워하는 고양이처럼 어깨를 바싹 세우고 숨만 새는 하악질을 내뱉은 올리비아를 본 크라이어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만.”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야 너무 쿵쿵거려서 당장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던 심장이 진정되었다. 그리고 그사이 크라이어는 올리비아가 그와 비교하던 손바닥만 한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나와 닮았다고?”
“아니, 전혀.”
올리비아는 대단히 진지한 얼굴로 두 번 반복했다.
“전혀 안 닮았어.”
크라이어는 초상화를 내려두고 턱을 쓸어내렸다.
“얼굴을 제대로 본지가 너무 오래 지나서.”
“거울이 여기…….”
“아니. 그보다 이건 다 뭐지?”
크라이어는 올리비아가 던져둔 작은 초상화와 그 주변에 쌓여 있는 서류를 향해 눈짓했다.
“정보.”
“정보라.”
그중 서류 하나를 뽑아낸 크라이어가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게 쓸데없는 것까지 정보라고?”
“쓸데없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지나 봐야 알아.”
야무지게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이 서류 속 남자가 오늘 사탕을 두 개 먹었다는 정보는 시간이 지나도 중요하지 않을 거 같은데.”
답할 말을 찾지 못한 올리비아는 입술만 달싹였고, 크라이어는 서류를 아무렇게나 내려두며 완전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보다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 있다고 들었는데.”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의 귀가 쫑긋거렸다.
“들어?”
“무슨 사건인지 묻지 않나.”
“그건 뭔지 알아. 그보다, 들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눈을 빛내던 올리비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누구에게 들었어?”
일견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올리비아 입장에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가 이 황궁에서 머무른 이후, 그녀가 아닌 다른 이와 말을 섞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크라이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나도 귀가 있어서 말이지.”
“엿들었어?”
“그걸 엿들었다고 해야 하나.”
애매한 그의 답에 올리비아는 눈을 깜박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냥 들린 거구나.”
너무나도 빠른 수긍에 이번에는 크라이어가 되물었다.
“더 묻지 않는 건가?”
“당신이 말한 적 있었거든.”
“뭐?”
“지금 생으로 회귀하기 전에.”
하나둘 손가락을 꼽던 올리비아는 과거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두 번째 죽음에서 돌아온 세 번째 회귀였을 터. 황궁이 함락되고 크라이어의 검 앞에 길게 목을 드리웠을 때.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 앞에서까지 황녀의 품위를 어느 정도 지키려고 노력했던 올리비아가 물었다.
‘어떻게 나를 찾았죠?’
그래, 그녀는 분명 황궁의 가장 깊숙한 곳. 대대로 황가에서만, 그것도 황제와 차기 황제에게만 내려오는 비밀 공간에 있었다. 그런데 크라이어는 마치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단번에 그녀를 찾아냈다. 거기까지 떠올린 올리비아가 한껏 얼굴을 굳히고 미간을 찌푸리며 최대한 낮은 목소리를 냈다.
“벽을 뚫고 네 숨소리가 들렸거든.”
크라이어의 눈썹 끝이 미미하게 파도쳤다. 한동안 올리비아를 빤히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설마 방금 내 흉내를 낸 건가.”
그 반응에 머쓱할 만도 하건만, 올리비아는 볼이 약간 발개진 것 외에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겠어. 당신이야, 당신. 당신이 벽 뚫고 내 숨소리를 들었다고 했어.”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다음에 죽을 때는 숨을 최대한 참아도 봤는데.”
“그런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더라.”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자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렸다. 침묵이 편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잠시 참던 올리비아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이내 다물었다. 크라이어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으니까. 무덤 같은 적막 속에서 올리비아가 한 뭉치의 서류를 끝내고 다른 서류 뭉치에 손을 대는 순간, 긴 침묵을 지키던 크라이어가 입술을 뗐다.
“내가 보통 사람들보다 귀가 좋은 편이긴 하지만, 벽 너머로 사람의 심장 소리나 숨소리까지 듣지는 못한다.”
그에 올리비아의 긴 속눈썹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나비 날개처럼 빠르게 팔락거렸다. 한동안 입만 뻐끔거리던 올리비아가 벌떡 일어났다.
“뭐? 그럼 그때 말한 게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녀는 혀끝까지 올라온 다음 말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죽음을 앞둔 이에게 거짓말이라니, 그런 야만적인 짓거리를! 그리고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크라이어가 고개를 저었다.
“죽기 직전의 사람에게 거짓말할 정도로 무식하지는 않다.”
“아, 역시 그렇…….”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올리비아가 멈칫했다. 그때의 크라이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크라이어가?
“지금도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뭔가를 재보듯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펴는 크라이어의 미간에 깊은 계곡이 파였다. 그런 그를 보던 올리비아는 서류를 내버려 두고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던 다과를 몇 개 챙겼다. 가을철의 다람쥐의 빵빵한 볼처럼 양손 가득 다과를 채운 올리비아는 곧바로 크라이어에게 다가섰다.
“황녀? 무슨…….”
그와 발끝이 부딪치는 순간, 그녀는 손안에 든 다과를 와르르 쏟아냈다. 그의 다리 위가 다과 부스러기로 엉망이 되었지만, 올리비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중 하나를 집어 들고 크라이어의 입으로 밀었을 뿐.
“이거 먹어.”
느닷없는 강요 아닌 강요에 크라이어의 눈썹이 비죽 솟았지만, 올리비아는 강경했다.
“먹어. 머리를 잘 돌아가게 해 주는 거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을 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위아래로 빠르게 끄덕거렸다.
“나도 알아. 단지.”
그가 또다시 홀로 곪고 곪은 속으로 침잠해 버릴 것 같았기에 어떻게든 뭐라도 하고 싶었을 뿐. 하지만 올리비아는 차마 뒷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자, 크라이어는 구태여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황녀.”
“응?”
그의 시선이 다채로운 색으로 엉망이 된 다리 부근에 머물렀다.
“황녀로서 뭔가 많이 사라진 거 같은데.”
굳이 뭐가 사라진 건지 크라이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올리비아가 냉큼 말했다.
“아, 이를테면 품위나 체신이나 예법 같은 거?”
그녀는 마른 웃음을 지으며 크라이어의 다리에 쏟아둔 다과를 하나 집어 들고 오물거렸다. 입안에 넣기 무섭게 혀 위에서 녹아 사라지는 다디단 것의 잔향을 더듬던 그녀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필요가 없다는 걸 이미 아니까. 의미 없는 짓은 하지 말자고 결심한 터라.”
씁쓸한 미소가 번진 올리비아의 입가를 보던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
본능적으로 움츠러든 올리비아의 입매에 그의 손가락이 스치듯 지나쳤고, 그는 곧 그 손가락 끝을 핥았다.
“달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