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길을 잃었나.2021.09.27.
점점 흐려지던 올리비아의 초점이 크라이어의 부름에 제대로 돌아왔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내며, 서류 뭉치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정보 다루는 것을 좋아할 뿐이야.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니까.”
크라이어는 팔걸이를 느릿하게 툭, 다시 툭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건가.”
“뭐?”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올리비아가 토끼 눈을 뜨고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무엇을?”
“아는 것이 힘이라는 거.”
“예전 볼셰이크의 서고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제국이 볼셰이크 황가…….”
크라이어는 대수롭지 않게 답하다 입을 다물었고, 올리비아도 눈만 깜박거렸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일자로 다물린 크라이어의 입술을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그를 향해 상체를 살짝 숙이며 물었다.
“기억…… 났어?”
설마 하는 심정에 물었지만, 역시나 돌아온 답은 부정이었다.
“아니. 단편적인 것뿐이다. 단편이라고 해야 할지, 찌꺼기라고 해야 할지.”
우울하다면 우울하기 짝이 없는 답을 내뱉으면서도 무표정하고 덤덤한 크라이어를 상대로 올리비아는 할 말이 궁해졌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올리비아가 이내 뭔가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서고에 가볼래?”
“볼셰이크의 서고 말인가.”
“응. 조금이나마 기억이 났으니까, 기억이 난 지점부터 더듬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
“그렇지? 그리고 이건 만약에 경우지만.”
잠시 뜸을 들인 올리비아가 말을 이었다.
“서고에서 당신의 지금 처지와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도 있어.”
말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좀 붙었는지 올리비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크라이어 역시 별다른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속 세계에 빙의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 세계와 싸웠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환생에 검으로 바다를 쪼갠다는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던가.”
올리비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볼셰이크의 아주 기묘한 역사를 읊었다.
“세계도 모자랐는지 신의 의지를 거역한 역사도 있고, 화려한 범죄도 아예 가문 단위로 했다지.”
거기까지 손가락을 접던 올리비아는 마른 웃음을 흘렸다. 심지어 저것으로도 끝이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회귀……도 좀 평범하게 하면 어디가 덧나나 봐. 당장 나만 해도 네 번이나 죽고 돌아오긴 했지만, 예전 기록을 보면.”
“보면?”
“무한으로 회귀를 했어.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죽으면 그 시점으로 돌아가고, 돌아가는 식으로. 그리고 어떤 조건이 충족되면 그 회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쓸데없이 복잡하군.”
“그렇게 한 줄로 축약해버리니까 전혀 복잡해 보이지 않는데…… 여하간 그런 회귀도 있었고,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 이야기 있었지?”
“바다를 검으로 가르는 곳이라고 했던가.”
크라이어의 답에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바다도 가를 수 있…….”
“못해.”
너무나도 빠르고 단호하게 나온 답에도 올리비아는 별반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손님이?”
“아, 그 손님. 그 세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손님이 왔다는 기록도 있어. 심지어 꿈을 통해서 왔다고.”
올리비아가 입을 다물자 크라이어가 의자에 등을 깊숙이 묻었다.
“쭉 듣고 있으려니.”
“응?”
“볼셰이크의 역사에 비하면 고대신의 노예 계약 정도는 별일 아니었군.”
“그건 아니지.”
올리비아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건 아니야.”
중요한 일이라 두 번 말한 올리비아는 아예 손까지 빠르게 흔들었다. 고개와 손을 동시에 흔드는 올리비아를 본 크라이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지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런데 황녀.”
“응?”
“그렇게 볼셰이크 역사를 꿰고 있으면서 네 번이나 전쟁에서 지고 회귀를…….”
“아는 것하고 실현할 수 있는 건 달라.”
크라이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올리비아의 답이 튀어 나왔다.
“전쟁에서 이기는 법을 알아도 말이야.”
그녀는 크라이어를 똑바로 응시하며 속삭였다.
“당신이 검 한번 휘두르니까 아무 소용 없어졌으니까.”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핏빛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 휘영청 떠올랐던 보름달이 그 환한 얼굴을 구름 뒤로 잠시 숨길 무렵. 황녀 궁을 밝히는 조명과 그림자 사이로 한 인영이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복도를 비추는 조명이 있기는 하지만, 달빛이 사라졌기에 밤눈이 밝은 이가 아니라면 그를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제집인 것처럼 황녀 궁의 안쪽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던 남자가 우뚝 멈췄다. 상체를 낮추고 한껏 집중한 남자가 이윽고 몸을 일으켰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이쪽 순찰이 아니군.”
황녀 궁의 순찰 동선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밤마다 살핀 보람이 느껴졌다. 어깨를 으쓱인 그가 다시 걸음을 옮기는 순간. -와장창! 무언가 요란하게 박살 나는 굉음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하란 말이야!”
뒤이어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고함은 누가 들어도 술에 절어 있었다.
“……러지 마세…….”
그리고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누군가의 애원까지. 남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린 방향에서 한 발 더 멀어졌다. 완전히 다른 곳에서 소란이 일어 제게 좋은 일이긴 하지만, 길게 보면 궁의 경비가 강화될 테니 그리 좋은 일도 아니리라.
“꺄아악!”
“……려! 이러지 마……!”
아까 울린 굉음보다 더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끝으로 사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금세 제압했군.”
남자는 뱀의 비늘 같이 번들거리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 다시 잰걸음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한참이 지난 후, 말라붙은 남자의 입술이 쩍 갈라졌다.
“제기랄, 역시 황궁은 황궁이로군.”
이제껏 그가 속한 왕국의 왕궁의 중심부, 황후의 궁을 밥 먹듯이 드나들면서 이토록 긴장해 본 적이 없건만. 심지어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준비도 철저히 했는데도 긴장으로 인해 등이 식은땀에 흠뻑 절어 있었다.
“운이 좋았어.”
누군지 몰라도 사고를 친 덕분에 그가 들킬 가능성이 한층 낮아졌다. 때마침 사고를 친 놈을 향해 비웃음과 감사를 보낸 남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멍청한 놈들. 이런 지름길을 놔두고 안내하라느니 마라느니 어렵게 돌아가기는.”
각국에서 제국의 황녀를 사로잡기 위해 모여든 놈들이 모이면 하나같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황녀 전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으니…….’
‘알현도 거절당했고…….’
‘산책로도 막히지 않았습니까…….’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고. 어떻게든 황녀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황녀의 머리카락 끝도 볼 기회가 없으니 눈에 들고 말고 시도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아마 사고를 친 놈도 무작정 황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술에 절어 주정을 부리는 것이겠지.
“아니지, 이렇게 움직일 능력이 없으니 저런 짓거리나 하겠지. 무늬만 기사인 놈들이니.”
어둠을 틈타 이리저리 족제비처럼 움직이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밤에 소리나 기척 없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기사는 모르긴 몰라도 그 수가 많지 않으리라. 남자 역시 이 기술을 기사로서 필요해서 익혔다기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갈고 닦은 것이지 않나.
“이제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
황녀의 궁 가장 내밀한 안쪽에 도달한 그가 교활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황녀의 침실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주변인 건 확실하리라.
“암살 위협에 대비해 매일 방을 옮긴다고 했으니.”
그가 황녀의 침실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운에 달렸을 터. 하지만 남자는 꽤 자신 있었다. 그와 불장난을 즐기던 왕비가 머무르는 침실을 쏙쏙 잘 찾아냈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여긴 거 같은데.”
굳게 닫힌 문을 올려다보던 남자가 망설이지 않고 문고리를 잡고 돌린 순간.
“길을 잃었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듯 울렸다. 작살 맞은 참치처럼 어깨를 튕긴 남자가 반사적으로 제 허리춤을 더듬었지만, 제국의 황궁에서 타국의 기사가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허락될 리 없을 터. 허둥거리던 남자는 별안간 우뚝 멈췄다. 만약 제국의 기사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를 곧바로 연행했을 텐데, 아직 제가 멀쩡히 두 발로 서 있다는 뜻은……. 남자가 인상을 팍 쓰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놈은.”
그의 시선 끝에 걸린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 기사. 황녀가 첫눈에 반해 곁으로 들였다는 노르덴 국의 애송이가 아닌가.
“네 놈이 왜 여기…….”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이곳은 황녀의 침실이 있는 곳이고, 저놈은 황녀의…….
“길을 잃었다면 사용인을 불러줄까.”
기둥에 비스듬히 기댄, 놈의 얼굴은 그림자가 짙게 내려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덤덤했지만 듣는 남자에게는 충분한 위협이었다. 만약 누군가 이 자리에 온다면 저놈은 멀쩡하겠지만, 자신은……. -뿌드득. 남자는 이가 부서질 듯 갈아붙였지만, 화를 참기 힘들었다. 한 번 지나간 기회는 좀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절호의 기회를 같잖은 놈에게 막혀 날려버렸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결국, 돌아선 남자는 자신에게도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돌아와서…… 허억!”
하지만 그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느새 온 건지 그의 코앞에 크라이어가 있었으니까. 어둠에 반쯤 잠긴 그는 그 속에서 도사리며 먹잇감이 아가리로 들어오기를 바라는 짐승처럼 보였다. 남자는 입을 벌렸지만, 헛숨만 새어 나올 뿐.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난 쓰레기의 등 뒤로 오한이 흘러내림과 동시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분명, 복도에 조명이 있을 터인데. 한데, 어째서 빛 한점 들지 않는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검붉은 눈만이 번뜩이고 있는 건지. 일 초가 천추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덜덜 떨리는 남자의 턱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뭐 하는…… 컥!”
그리고 그는 입을 떼기 무섭게 발이 허공에서 떠올랐다.
“반드시 뭐라고?”
한 손으로 남자, 그러니까 쓰레기의 목줄을 잡고 들어 올린 크라이어는 웃고 있었다.
“컥, 커컥!”
숨통이 조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검붉게, 이제 검게 질린 쓰레기가 버둥거렸지만, 크라이어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귓가로 지극히 낮은 크라이어의 목소리가 마치 어둠이 기듯 흘러들어왔다.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