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나는 살아남고 말 거야2021.09.23.
크라이어는 입가를 눌린 탓에 발음이 샜다. 비틀린 그의 입매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올리비아가 입술을 앙 물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뭐?”
“네가 제일 중요하단 말이야! 전쟁을 시작한 것도 너고, 그 전쟁을 끝내는 것도 너야! 노예든 뭐든! 고대 신이든 뭐든! 너야, 너!”
크라이어의 입가를 누르던 잘게 떨리는 손끝이 그의 아랫입술을 스치며 툭, 떨어졌다. 그대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숨을 삼키던 올리비아를 향해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내 탓…….”
“아니야!”
올리비아가 고개를 젓자 불꽃이 일렁이듯 그녀의 새빨간 머리카락도 함께 물결쳤다.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가 뜬 후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과 노예 계약을 한 이유가 있을 거야. 단순히 고대 신의 힘을 빌리는 거라면 그 마법사 놈이 스스로 계약을 했어도 될 일이잖아. 하지만 아니었어. 굳이 당신을 택한 거야. 계약을 수행할 사람으로. 당신, 죽었다가 살아났다며?”
“부활하기 전에도 난 그저 기사였을 뿐이야.”
“그 외에 기억나는 건?”
올리비아의 질문에 크라이어는 답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지?”
“그……렇군. 그래. 기억이…….”
“노예 계약을 깰 수 있을 거야. 아니, 깰 거야. 네 과거를 찾든, 설사 그것이 열쇠가 아니라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크라이어는 쇄골에 찍힌 낙인을 더듬었다.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은 모조리 낙인이 찍힐 당시였다. 마법사는 낙인을 준비했지만, 정작 그 낙인을 찍은 자는 그의 딸이었다.
‘……이어. 선택받은…… 함께…….’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손등 위로 올리비아의 손이 겹쳤다. 그녀는 그가 그곳을 매만지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쇄골을 만질 때마다 텅 비어가는 그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스산함에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게 되었을 뿐. 손등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어 그의 손을 잡은 올리비아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살아남고 말 거야. 그러니까 너는 전쟁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온 세상의 피를 네 손에 담을 수도 없을 거고.”
푸른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올리비아의 눈을 마주한 크라이어의 밤보다 더 칠흑 같은 눈동자에 아주 작은, 너무나도 작아서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파편들이 박혀 들었다. 차마 지금은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희망이라는 것의 부스러기들이었다. *** 밤의 장막이 드리우고, 잔뜩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에는 달빛조차 희미한 시각. 새벽을 거니는 부엉이의 눈이 번뜩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 누군가 정신없이 땅을 파고 있었다. -퍽, 퍼퍽. 흙덩이를 마구잡이로 쑤시는 건 삽이나 다른 도구가 아닌 누군가의 맨손이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오로지 땅을 파고 또 팠다. 제국 수도의 외곽, 그것도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기에 망정이지…….
“흐, 흐우욱. 훅훅.”
거친 숨을 내쉬며 눈도 거의 깜박이지 않은 채 광적으로 땅을 파대는 모양새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누군가 그를 봤다면, 치안대를 부르기 전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으리라. 얼마나 그렇게 땅을 파고 또 팠을까. 어느새 그가 땅속에 파묻힐 만큼, 그러니까 사람 하나 묻기 딱 좋은 크기로 땅이 파였을 때쯤. 남자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는 시커먼 흙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이내 그보다 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은 검은 흙투성이에 이미 손톱도 몇 개 빠져 피가 흘렀고, 차림도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이번에는 땅이 아닌 하늘을 올려다보며 또 얼마나 지났을까. -찌르르르. -푸드득. 어디선가 이름 모를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부엉이가 날아올라 벌레가 침묵하는 순간. 남자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그는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그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벌레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이 길게, 귀밑까지 길게 찢어졌다. 웃는 듯했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검붉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은 그의 뺨에 눈물이 쏟아졌지만, 그 얼룩은 어찌나 두터운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의 벌어진 그의 입에서 흐느낌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비를, 신이시여 자비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남자는 진정으로 자비를 바라고 있었다. 단지 그가 찾는 ‘신’이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신들’이 아니었을 뿐. 그의 신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대륙에 존재했다고 내려오는 고대신이었다. 형상은 물론이거니와 이름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신. 그 신이 현재 떠받들어지고 있는 신들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만 전해 내려올 뿐. 그리고 남자는 그 강함이 필요했다. 정말로 간절하게.
“신이시여.”
이름 없는 신을 찾는 남자의 부름에 응답이라도 한 걸까. -퍼드득. 부엉이가 다시 날아오르는 순간, 아주 잠깐 구름 뒤에 가려졌던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성심을 다해 기도하는 남자 주변에도 달빛이 들었다. 아가리를 벌린 흙 비린내가 나는 구멍. 그리고 구멍 옆에 모로 누워 있는 인간. 아니, 시체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빛을 받은 남자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아아, 신이시여.”
그는 이마를 땅에 박으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신을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다. 그리고 달이 구름 뒤로 다시 숨어드는 순간. 고개를 번쩍 든 남자의 눈알이 기묘하게 데굴거리며 굴렀다. 그는 거미처럼 구덩이 위로 기어올라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갈고리 같은 손이 시체의 옷을 잡아끌자 시체는 곧 구덩이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남자는 애달프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하면 될 텐데.”
조금만, 정말로 조금만 더. 그의 신을 모시기 위한 의식의 제물을 이제 몇 개만 더! 강렬한, 아니 격렬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 이제는 제물 사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당사자인 남자가 제일 잘 알고 있으리라. 그간 남자의 손에 제물로 바쳐진 이들만 십 수명. 이제 그가 제물을 물색하고 포획했던 부근의 소문이 흉흉해지고 있어, 사람을 사지 않는 이상 제물을 찾기 힘들 터.
“이것 가지고도 모자라겠지.”
시체에서 뜯어낸 패물을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에서 피딱지가 귀를 긁는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신께서는 언제나 길을 보여주시리라.”
이윽고 남자는 제 얼굴에 묻어 이미 굳어버린 핏자국을 긁어내며 느릿하게 콧노래를 불렀다.
“흠, 흠흠, 흠흠흠.”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기괴한 상황과는 달리 봄의 나들이 같은 경쾌한 콧노래가 비릿한 밤을 울리고 있었다. *** 갑작스러운 대륙 회의가 끝나고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났다. 하지만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대륙 회의에서 노르덴 왕국의 이름 없는 기사를 보고 한눈에 반해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는 소문은 좀처럼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비슷한 얼굴을 찾을 수야 있겠지만.”
“찾아! 일단 비슷한 놈이라도 찾아서 황녀 전하의 눈에 띄는 곳에 둬!”
황녀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끌기 위해 크라이어와 비슷한 이를 찾는가 하면.
“이름이 뭐라고? 아니,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야. 당장 가서 그 기사에 대해 모조리 다 알아 와. 특히 좋아하는 것들은 반드시!”
올리비아의 눈에 든 크라이어의 눈에 들기 위한 움직임도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황궁에서도 올리비아의 눈에 들기 위해 소위 ‘기사’라는 타국의 남자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황녀 전하께서 산책하시는 경로가 어딘지 살짝 알려 줄 수 있을까?”
누가 봐도 잘생겼다, 라는 감탄이 나올 만한 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황녀 전하께서 다니시는 길이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울 게 확실하니, 산책한다면 그쪽으로 꼭 가보고 싶어서 말이지.”
금발의 기사는 그리 말하면서 사용인을 향해 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미소를 흩뿌렸다. 사용인은 그런 그를 빤히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였고, 기사는 그녀를 향해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다른 의도는 없어. 순수히 산책을 하러 가고 싶은 것뿐.”
달콤하게 감기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리자 사용인의 뺨이 붉어졌고, 기사는 곧 돌아올 답을 자신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한 답뿐.
“저와 가죠.”
답을 듣기는 들었지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금발의 기사가 눈만 껌벅이는 사이.
“저와 갑시다! 산책!”
황궁, 정확히 말해 황녀 궁의 사용인은 더없이 해맑게 외쳤다. 아니, 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아예 기사의 소맷자락을 잡고 힘차게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왜, 왜 이러는…….”
당황한 기사가 한 발 뒤로 물러섰지만, 사용인은 그가 물러난 만큼 다가서며 더욱 환하게 웃었다.
“산책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잖아요. 살짝 알려드리기는 무슨. 제가 특별히 황녀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경로로 모시겠습니다.”
할 말을 잃어버린 기사를 사용인은 힘차게 끌었고, 황궁 곳곳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올리비아의 산책 경로나, 좋아하는 음식, 즐겨 듣는 음악이나 선호하는 예술품까지. 뭐라도 하나 건지기 위해 타국의 기사 비스름한 이들은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황녀의 관심 한 조각이라도 얻어서 그녀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서. 칼만 안 들었지 험악한 전투와 다름없는 치열한 다툼이리라. *** 금발 기사가 사용인에게 잡혀 어정쩡하게 산책로를 돌고 있을 무렵.
“흐음, 그래.”
“네. 전하.”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용인은 깊이 허리를 굽힌 후 사라졌다. 그녀는 지금 세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세세히 적힌 서류들을 차곡차곡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국 내의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타국의 동태에 관한 전반적인 것들도 있었기에 그 양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건만. 올리비아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서류를 하나하나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대륙 전쟁에 휘말려 죽기만 네 번. 죽고 또 죽으며 회귀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정보’의 중요성이었으니까.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볼셰이크 대대로 내려오는 말을 이렇게까지 뼛속 깊이 체감할 줄은 처음 죽기 전까지 몰랐었건만.
“일을 그렇게 즐겁게 하는 건 처음 보는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울리는 깊은 공동에서 울리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에 서류를 넘기던 올리비아의 손이 멈칫했다. 느긋하게 앉아 검자루를 매만지는 크라이어를 바라보는 올리비아의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회귀하기 전 올리비아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을 즐기지 않았다. 아니, 지금도 정보를 수집하고 추출하는 일을 제외하면 전부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에 가까우리라. 단지 눈앞의 남자의 손에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네 번이나 죽음을 맞이하다 보니, 생존에 관한 일이라면 절로 즐길 수 있게 되었을 뿐.
“……황녀, 황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