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2021.09.20.
크라이어의 시선을 따라간 올리비아는 그 끝에 비장한 얼굴로 오와 열을 맞춰 줄지어 서 있는 기사, 그 비슷한 이들을 발견했다. 각국의 왕과 총리 등 수반들은 어느새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늠름한 모습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륙 전쟁에서나 이렇게 한마음 한뜻으로 좀 움직이지……. 으휴.”
답답한 감상이 담긴 한숨을 푹 내쉬는 올리비아는 어찌 되었건, 원하던 것을 잡아채기는 했다. 비록 그것이, 바짓가랑이였지만…….
“이상으로 대륙 회의를 폐정합니다.”
청명한 올리비아의 목소리와 함께 급히 진행된 세계 평화를 위한 대륙 회의는 몇 가지 숙제를 남긴 채 마무리되었다.
* * * 크라이어가 제국에 머문 지 이틀째.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와의 깊고 깊은 대화는 잠시 미뤄둬야만 했다. 그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온 대륙의 이들을 황궁으로 불러 모은 이유가.”
“세계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황녀.”
“폐하, 제가 언제 허튼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다. 애초에 나서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황녀의 의무에만 성실히 임했던 올리비아가 무슨 일을 주도해서 한 적이 없었으니까. 황제는 어느 때보다 확신에 가득 차 있는 올리비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너를 믿고 있겠다.”
그렇게 올리비아는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자신감만으로 향후 크라이어와 관련된,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대륙 회의를 통해 끌고 온 이들과 관련된 일을 일임받았다. 제일 큰 산이었던 황제의 인정도 받았으니, 이제 자잘한 일들을 처리할 차례.
“거기 있지?”
“네. 전하.”
“현재 비어 있는 궁 중에서 서쪽에 있는 곳들을 정리하도록 해. 배치는 각국의 관계를 고려하고.”
“네.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네?”
“당장 가서 해. 굳이 날 수행할 필요 없으니까.”
올리비아는 보좌관과 사용인들을 물리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크라이어를 만나러 가는데 쓸데없이 사람을 많이 달고 갈 필요는 없다. 그들의 입이 지독하게 무겁다 하더라도 비밀은 언제나 무덤에 묻혀야 지켜지는 법. 처음에야 앞뒤 가리지 않고 그를 밀실로 불렀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굴 필요도 없고.
“황녀 전하.”
올리비아는 제 앞에 불쑥 나타난 인영에 멈춰 섰다. 갑자기 나타난 사내는 과장되게 예를 취하며 그녀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첫눈에 전하를 담은 이후 오늘까지 계속 찾은 저의 정성을 신께서도 알아주셨나 봅니다.”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 자신감을 얻은 건지 그는 느린 숨을 내쉬며 이전보다 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과장되게 예를 차리며 손을 내밀었다.
“제 소개를 허락하여 주시겠습니까.”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이내 턱을 당기고 등을 똑바로 세웠다. 그녀의 얼굴 전체에 더없이 화사한 미소가 번지자 그 역시 덩달아 웃으려는데.
“거절하겠어요.”
“저로 말할…… 네?”
그가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올리비아의 화사한 미소가 더 진해졌다.
“네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알 일이 없겠어. 물러가라.”
뼛속까지 얼리는 한기가 흐르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들자, 한순간 그보다 한참이나 작았던 황녀가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이 거대해졌다. 눈을 홉뜬 그를 향해 올리비아가 한발 다가섰다.
“그대를 내 눈앞에서 다시 볼 일은 없다.”
그는 입을 벌렸지만, 숨통이 조인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 치다 이내 내달리듯 올리비아의 앞에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자, 올리비아는 뻣뻣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이런 놈 저런 놈 나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멍청한 놈도 섞여 있었다니. 앞으로 벌어질 성가신 일들이 눈에 보여 인상을 팍 쓰는데, 뒤쪽에서 바닥을 타고 흐르듯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인데. 과연 제국의 황녀다워.”
올리비아가 몸을 휙 돌리자 기둥 뒤쪽에서 크라이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 당연하잖아. 당신과 저 누군지도 모르는 놈이 같아? 그보다 보고 있었으면 좀 도와주든가.”
“그러려고 했는데.”
“했는데?”
“싱겁게 끝나 버려서 말이야. 게다가 일단 손을 대면 피를 봐야 하니.”
“뭐? 피를 봐? 그럼 안 되지. 안 도와주길 잘했…… 아니, 그보다 피를 꼭 봐야만 하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냥 팔다리 하나 정도 못 쓰게 만들면 됐잖아. 왜 그리 피를 못 봐서 안달이야?”
“너 토끼 눈을 뜨고 잘도 그런 잔인한 말을 하는군. 그리고 피를 보고 싶어 하는 건 내가 아니다.”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크라이어가 느릿하게 몸을 세우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쳐드는 적막한 복도에 그의 그림자가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씩 올리비아의 그림자를 덮어갔다. 이윽고 그녀와 마주 선 크라이어의 시커멓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증오와 분노가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었다. 저 깊은 심연에서 기어 나오듯 그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 사이로 계약의 주인이 흘러나왔다.
“대륙 전체를 잠기게 할 핏물을 원하는 건, 이 빌어먹을 계약의 주인. 고대 신이다.”
* * *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와 조우할 무렵. 노르덴국의 왕궁에서는 왕세자와 그레타가 마주하고 있었다.
“이제 내 말을 들으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레타는 상냥하게 웃으며 왕세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왕세자는 마치 아이처럼 그녀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비비며 온순히 답했고, 그레타는 그런 왕세자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아버지는 저하를 거칠게 다루었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그…… 그레타가 더 자…… 잘.”
“네. 제가 아버지보다 모든 것을 더 잘 다루니까요.”
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든, 마법이든, 혹은 계약이든.
“이제 곧 전부 끝날 거예요.”
“끝나?”
“네. 저하도 신의 품으로 갈 수 있어요. 다른 모든 이와 함께.”
“그……그레타도 함께 가?”
“아니요. 저는 같이 못 가요.”
그레타는 왕세자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의 눈을 가렸다. 눈알을 압박하는 힘이 너무 강해 눈이 터질 것 같았지만, 왕세자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레타는 여전히 상냥한 웃음을 띤 채 노래를 하듯 말했다.
“저는 사랑하는 크라이어와 단둘이, 오로지 둘만이 정화된 세상에 남을 거니까요.”
* * * 그레타의 눈이 제국에 남아 있는 크라이어를 더듬고 있을 때. 올리비아와 크라이어는 회랑에서 한적한 밖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여기라면 아무도 안 올 거야.”
올리비아의 자신만만한 말에 크라이어는 주변을 훑었다.
“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발견한 거지.”
“살려다 보니까. 황궁 곳곳에 도망 다니지 않은 곳이 없어서.”
“황족 전용 비밀의 방이나 통로가 있을 텐데.”
“있기야 있지. 그런데 당신이 그냥 검을 휙 휘둘렀는데 너무나 쉽게 와르르 무너지는 걸 보니까 신뢰도가 한없이 영에 가까워졌지 뭐야.”
어설프게 팔을 휘두른 후 손바닥을 손등으로 휙 뒤집은 올리비아가 한숨을 팍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다양하게도 죽었네.”
“뭘 슬그머니 멀어지는 거야.”
“아니, 새삼스럽게 네가 날 얼마나 많이 죽였나 떠올라서.”
“그런 것치고는 처음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뻔뻔해진 거 같은…… 아니군. 넌 처음부터 뻔뻔했지.”
“너도 한 번 죽었다 살아나면 없던 성질머리도 생기고 할 말은 다 하는 편이 낫다는 걸 깨닫게 될걸.”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했잖아, 난 너한테 죽고 과거로 돌아온다고.”
몇 번이나 돌아왔는지 손가락을 하나둘셋, 하며 꼽던 올리비아가 이내 어깨를 부르르 떨며 손을 털어냈다. 죽음을 복기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어, 그것도 자신을 죽인 상대의 코앞에서…….
“후하, 후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쉰 올리비아가 가슴을 한껏 내밀고 탕탕 두드렸다.
“좋아. 그럼 이제 말해 보실까. 네가 그 미치…… 아니, 피의 학살……이 아니라 대륙 전쟁을 일으켰던 이유라는 그 명령……이 아니라 계약 말이야.”
자꾸 말이 헛나오기는 했지만, 어쨌든 요점은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크라이어는 팔짱을 낀 채 이끼 낀 벽에 등을 기댔다. 석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차가운 한기가 스몄지만, 미지근한 온기보다 이쪽이 천만 배는 나으리라. 적막이 내렸지만, 그건 마치 사나운 폭풍이 몰려오기 전의 고요함과 같았다. 뺨을 가끔 간질이던 산뜻한 바람이 점차 어수선해지고, 올리비아의 입술이 연고를 알 수 없는 추위에 푸른빛으로 물들어갔다. 작게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그럴 리 없을 텐데 하얀 입김이 흘러나오는 순간.
“그 계약은.”
크라이어의 목젖이 진동하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어, 어어어?”
올리비아는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와 제 의지와는 관계없이 뒤로 밀리는 머리에 휘청거리다 이내 제 눈을 가린 커다란 손을 더듬었다. 매끄러운 손끝이 거칠고 굵은 마디마디를 타고 올라가기를 한참.
“뭐야, 왜 이래?”
그녀의 두 눈을 한 손으로 가린 채 뒤로 밀어버린 크라이어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봐도 그리 거창할 거 없는 이야기라서.”
“뭐?”
크라이어는 곧 그녀의 눈에서 손을 거두며 말을 이었다.
“간단한 이야기야. 정신이 나가버린 마법사가 어느 고대 신과의 계약을 위해 죽은 남자를 되살리고, 부활한 남자는 강제로 고대 신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뿐이니까.”
짙게 침강한 그의 눈만큼이나 가라앉은 목소리는 지독하게 메말라 있었다.
“그 노예는 주인의 뜻대로 세계를 피바다에 처넣고 ‘정화’ 시키게 되겠지. 한마디로 세계 멸망이다.”
올리비아의 속눈썹이 소소리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파르르 흔들렸다. 크라이어의 입매가 비틀렸다.
“어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지? 미친 마법사와 마왕, 세계 멸망. 전부 어느 동화책이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것들이잖아.”
“그……치만…… 그렇지만.”
올리비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잠깐 사이에 바싹 말라버린 입술을 뗐다.
“그건 결국 영……웅이 이기잖아.”
“그래. 그것들은 꾸며낸 이야기니까. 이건 현실이라서 영웅 따윈 없어. 네가 회귀하기 전에 봤던 것처럼 마왕도 아니고. 고작 노예가 피투성이 손을 들어 올리며 포효할 테니.”
크라이어는 비소했다. 그것을 포효라 할 수 있을까. 절규이리라. 통한의 외침이리라. 그는 노예의 인장이 찍힌 쇄골을 으스러지게 쥐어 잡았다. 살을 뜯어내고, 뼈를 긁어내도 사라지지 않는 낙인. 벗어나고 싶다. 이 노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현실이 통곡의 벽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는 그 벽을 넘지도, 무너뜨리지도, 그렇다고 뚫을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자유가 아닌 끝을 바라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하나 그마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굴을 사지가 잘린 채 기어가는 것과 같았다. 크라이어와 올리비아 사이에 다시 새카만 적막이 내렸다. 다음 순간.
“뭐……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