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세상에는 그와 저만 남을 거예요,2021.09.16.
-탕. 짧고 강하게 책상을 내려친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후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정숙하십시오.”
기이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기이한 것은 그의 말 한마디로 모든 이가 입을 다물었다는 사실이었고. 고요해진 이들을 마치 벌레라도 보듯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던 남자가 짧게 말했다.
“유언장이 있으니 선왕의 의지에 따를 것이오.”
그가 뒤쪽을 향해 손짓하자 그림자 속에서 왕세자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초점이 흐린 멍한 눈을 한 왕세자는 마법사의 손짓에 따라 고분고분 움직였다. 왕세자를 자신의 앞에 앉힌 남자가 어깨에 손을 얹으려다 방향을 바꿔 의자에 얹은 후 다시 입술을 뗐다.
“급박한 상황이니 즉위식은 간소하게 치르겠소. 하지만 왕세자가 차기 노르덴의 국왕이 될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그가 국정 전반을 다스릴 것이외다.”
남자가 말을 마치고 손끝으로 의자를 툭 두드리자 그에 맞춰 왕세자가 멍한 눈을 한 채 외쳤다.
“그의 말대로 될 것이오!”
왕궁 대회의장에 모인 이들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곧 대회의장을 나섰다. 한 남자의 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국정 회의. 그것도 현 국왕이 죽고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다. 세 살배기 아이가 봐도 너무나도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남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국왕의 옆에 있게 된 건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국왕 본인을 포함하여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마치 마법처럼. 대회의장에서 가장 먼저 자리를 뜬 파리한 안색의 남자는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왕의 침실에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뒤에서 한 인영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아버지.”
“왔느냐. 그레타.”
“네. 이제 정말 머지않았군요.”
마법사는 딸을 향해 돌아서며 양팔을 벌리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래. 드디어 이런 날이 도래했구나.”
“길었어요. 제국에서 이리했다면……. 알아요. 제국이 아니라 이보다 조금 더 큰 나라였어도 이리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거.”
“길었지. 얼마나 긴 시간이었더냐. 하나 이 더러운 세상을 정화시킬 날이 머지않았다!”
“더러운 세상이죠.”
그레타는 창백한 안색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마법사를 향해 한발 다가섰다.
“그래도 깨끗한 이가 있잖아요.”
“무어야?”
“고대 신께서 선택한 남자.”
“노예 말이더냐.”
“신의 노예죠. 한 번 죽고 정화되어 부활했으니 그만이 깨끗하지 않나요.”
“옳다. 그러니 그가 세상을 불태우게 되지 않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푹. 살갗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불시에 당한 일에 마법사의 눈에는 온통 의문만이 가득했다. 그레타는 주저 없이 그의 배를 찌른 단검을 오른쪽으로 확 비틀었다. 안쪽에서 뼈가 긁히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지만, 그레타는 웃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럽게.
“커…… 커헉!”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핏방울이 후드득 그레타의 얼굴에 튀었지만, 그녀는 눈 한 번 깜박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거품이 흘러나오는 입술 사이로 헛숨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왜……?”
마법사는 심장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경악에 찬 눈으로 그레타를 바라보기만 했을 뿐.
“왜냐고요?”
그레타는 상냥하게 웃으며 그의 배에 꽂혀 있던 단검을 천천히 뽑아 바닥에 던졌다. 하얀 카펫 위에 아무렇게나 굴러간 단검은 붉은 궤적을 그렸고, 그 시작점에 그레타가 있었다. 그녀는 복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무너지는 마법사를 제 품에 안고 피 웅덩이 위에 앉았다. 그의 입가와 턱에 흥건한 시뻘건 피를 문지르며 그레타가 속삭였다.
“아버지도 결국 더러운 세상의 일부일 뿐이시죠. 그러니까 제가 죽음으로 깨끗하게 정화시켜 드리는 거예요…….”
그레타는 제 품에서 숨을 껄떡이며 피를 토하는 마법사를 보듬어 안았다. 그의 입가에 묻은 피로 붉게 물든 그녀의 손가락이 마법사의 뺨도 물들였다.
“안녕히. 아버지.”
희미한 희열마저 느껴지는 그레타의 목소리가 마법사의 귓가에서 꺼져 들어갔다. 그렇게 노르덴의 국왕이 사고를 가장한 암살을 당한 그날. 더러운 세계를 정화하기 위해 고대 신과의 계약으로 크라이어를 강제로 부활시키고, 그에게 고대 신의 노예 인장을 찍어버린 이름을 잃은 마법사는 유명을 달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딸의 손에.
“고대 신께서 정화하시는 세상에는 그와 저만 남을 거예요. 아버지가 원하시던 깨끗한 세상이 되겠죠.”
그레타는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거침없이 아버지의 시체를 발로 찼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마법사는 들어오지 않았다. 기묘하게 번들거리는 그레타의 눈은 지금쯤 제국에서 열린 대회의장에서 정화될 벌레 같은 인간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크라이어에게 향할 뿐. *** 노르덴 국왕의 죽음은 그저 불운한 사고로 처리되었다. 누구도 그의 죽음에 대해 암살이나 여타의 가능성을 꺼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 했다. 제국의 황궁에서 타국 왕이 암살을 당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어떤 살얼음판 위를 걸어야 할지 원숭이라도 예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노르덴이라면 대륙에서 아주 미미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가 아닌가. 이득 관계가 있는 이라도 그의 죽음에 구태여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아니, 의문을 품을 만큼 신경을 쓰지 못했다고 함이 맞으리라. 대회의장에 모인 이들 모두가 눈을 쟁반만큼 커다랗게 뜬 채 올리비아와, 그녀의 바로 곁에 있는 크라이어를 보기 바빴으니까.
“……여, 노르덴국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분명 황녀가 위로를 전하면서 노르덴에서 왔던 이들을 모조리 돌려보냈지 않았나.
“향후 치러질 국장에도…….”
그러니까 그 노르덴에서 왔던 이들 모두가 돌아갔는데, 어째서? 어째서 저 기사만이 제국의 황녀 곁에 남아 있는 거지? 모두의 머릿속에서 공통으로 뽑혀 나온 의문이었다.
“설……마 정말로…….”
누군가의 입에서 흰 숨과 함께 새어 나온 소리가 전염이라도 되듯, 둘을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가설이 팍 떠올랐다. 그리고 고양이도 죽인다던 호기심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결국 간질거리는 입을 열고야 말았다.
“황녀 전하!”
“네.”
“저…… 저 기사는 어째서 돌아가지 않은 겁니까?”
크라이어를 향한 삿대질에 올리비아의 입가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다. 그따위로 삿대질하지 말라고, 잘못 걸리면 당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으니까. 라는 말을 꼴깍 삼킨 그녀는 이내 오로지 가식만이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 고아하고 차분한 웃음 뒤로 짧은 답이 흘러나왔다.
“그는 양국 간의 원활한 교류를 위해 제국에 체류할 겁니다.”
“네?”
“그게 무…… 아니, 저희! 저희 기사도!”
“무슨 소리요! 저희 기사들이 훨씬 뛰어…….”
그야말로 벌떼가 따로 없었다. 올리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회의장에 있던 각국의 정상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일시에 자신의 기사들의 뛰어남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양국 간의 교류라고?”
크라이어의 나지막한 속삭임에 올리비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그럼 뭐, 너한테 첫눈에 반해서 도저히 보낼 수가 없기에 내 첩으로 들이겠다고 할 수도 없잖아. 물론 지금 무슨 말을 하건 그렇게 받아들이겠지만.”
혼기가 찬 미혼의 황녀가 처음 보는 남자, 그것도 타국의 기사를 이 많은 사람이 보는 와중에 독대했다.
“양국 간의 교류로 가지.”
“아니, 너무하시네. 내가 당신한테 첫눈에 반한 건 아니지만, 만약에 그랬다 하더라도 몸서리치며 싫어할 필요까지는 없잖아. 내가 뭐 어디가 뭐가 어때…….”
“곧 죽여야 하는 여자가 사랑을 속삭이는데 좋아할 수는 없지 않나.”
“……멍청한 질문에 현명한 답이었어.”
“그보다 어떻게 처리할 거지?”
거의 광기에 가득 차 그들과 동행한 기사들을 추천하는 이들을 향해 크라이어가 턱짓하자 올리비아는 간단히 답했다.
“각국 기사들을 하나씩 들여야지.”
올리비아는 이리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저리도 필사적인지도…….
“첩보다는 낫군.”
“그 부분은 좀 잊어버려. 기억에서 잘라내라고.”
“황녀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소름 돋으니까 전하 소리도 치우시고.”
올리비아는 소름이 우수수 돋은 팔을 문지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기사들을 하나씩 들여 제국에 두면 저들이 우려하는 것들을 한 번에 조용히 시킬 수 있을 거야.”
“우려하는 바라면, 역시 황녀의 첩인가.”
“그놈의 첩은 무슨. 진짜……가 아니라 그것도 일정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진짜는 전쟁이야. 전쟁.”
“그들은 대륙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는 내 존재를 모를 텐데? 회귀한 이가 황녀뿐만이 아니라면 알 수도 있을 테지만.”
“네가 일으키는 전쟁이 아니라, 제국에서 일으키는 전쟁 말이야.”
“아아. 이번 대륙 회의 주제가 세계 평화였지.”
“그래. 그것도 몇 개월 후에나 있을 회의의 다른 주제를 갑자기 세계 평화로 바꿔버렸으니, 제국에서 무언가 준비하고 있다고 불안해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겠지.”
“그러니 각국에서 합법적인 첩자인 기사들을 제국에 두도록 허락하겠다?”
“그런 셈이지.”
“그런데 황녀.”
“응?”
“기사가 아니라 첩들이 몰려올 거 같은데.”
크라이어의 입가에 비소가 맺히자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저희끼리 교통정리라도 된 건지 어느 정도 소란이 잦아든 회의장. 각국 정상들의 바로 곁에 새로운 이들이 한 사람씩 자리하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그들의 면면을 살피다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를 냈다. 자신에게도 간신히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였지만, 그 크라이어라면 능히 들을 수 있으리라.
“저 중에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되는 거 같아?”
그녀의 물음에 크라이어는 몸을 숙여 올리비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작위라면 다들 받았겠지만, 기사 역할을 할 정도의 놈들이라면 글쎄.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적을 거다. 전쟁보다 첩 자리가 더 신경 쓰이는 모양인데.”
“이런 젠장.”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마시는 놈들은 어찌나 많은지. 과연 볼셰이크에서 전해 내려오는 조상님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들은 틀린 거 하나 없다니까. 세계 평화를 위해 일부러 시일을 당겨 촉박하게 대회의를 개최했건만, 관심은 모조리 제 혼사에나 쏠려 있으니 절로 짜증이 치밀었다.
“차라리 전쟁을 일으켜 저 번들거리는 눈들에게 경각심을 줄 생각은?”
“절대 없어. 어떤 식으로든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돼.”
전쟁이 뭔가, 국소적인 전투나 하다못해 몇 사람이 모여 벌이는 패싸움이라도 대륙 전쟁의 빌미가 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평화는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서.
“평화의 비둘기라서?”
“그래, 나 비둘기다. 구구, 구구구. 됐어? 만족…… 웃지 마. 웃지 말라고.”
고개를 모로 돌린 그의 어깨에 흐르는 잔떨림을 본 올리비아가 이를 악물었지만, 크라이어는 그녀의 말 어디에서 더 자극을 받은 건지 떨림이 더 심해지기만 했다.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지만, 그에게 그런 것이 통할 리도 없고……. 멱살을 잡으려다 오히려 그의 가슴팍에 대롱대롱 매미처럼 매달리게 되겠지. 하지만 약이 오르니 뭐라도 하고 싶어 올리비아는 곱게 모으고 있던 손을 풍성한 치맛자락 뒤로 뺐다.
“뭐 하는 거냐.”
“때리고 있잖아.”
“모기가 지나갔나 싶을 정돈데.”
“아픈 척이라도 좀…… 크흠. 이럴 때가 아니지.”
올리비아는 멱살을 잡는 것과 진배없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 제 솜방망이 주먹을 슬그머니 거두어들였다.
“우리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지?”
“글쎄.”
“당신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하고, 마……법사인지 뭔지 하는 놈의 이야기는 하지도 못했잖아.”
“그래. 하지만, 이 소란부터 어떻게 해야 할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