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 아는 처지에 더는 말 돌릴 필요가 있어?2021.09.06.
그리고 그런 올리비아의 눈을 따라 그 곳에 모인 이들의 시선도 그 기사에게 꽂혔다. 한밤의 달과 같이 모든 빛을 반사하는 듯한 선명한 은빛 머리와 반쯤 내리깐 검붉은색의 눈동자.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콧날에 이어지는 날 선 턱과 일자로 다물린 입술에서는 묘한 압박감마저 느껴졌다.
“허어…….”
시선이 갈 만은 했지만…… 한순간 눈을 빼앗긴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오래 그만을 보고 있다니. 단아하고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며,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미녀이지만, 이제껏 남자와 관련된 소문 하나 없던 제국의 황녀. 그런 황녀가 저 기사에게 첫눈에 반했다거나 하는 것이라면…… 대륙 전체의 판도가 급변하리라. 사람들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갈 때쯤. 제국 측 인사가 거수한 후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를 시작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회의는 진행되어 갔다.
“……하여 그 안건은 반대를 표하는…….”
누가 무어라 떠들든 올리비아의 신경은 온통 크라이어에게 쏠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구태여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를 몰래 관찰하려고 해도 그 크라이어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할 리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야지. 나 저 남자한테 지대한 관심이 있어요!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제국의 황녀인 올리비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는 없다. 그런데 그러한 제국의 황녀가 변방의 조그마한 왕국에서 온 한낱 기사에게 온 신경을 쏟고 있다면. 그 기사인 크라이어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터. 크라이어는 이곳의 모든 이를 죽여 당장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대륙 전쟁이 일어나기 아직 몇 달 전이니까. 그러니 그녀의 행동으로 만들어질 소문은 크라이어와 협상이든 이야기든 뭐든 하기 전, 올리비아의 숨을 붙여줄 동아줄이 되리라. 뭐, 저 미친놈이 갑자기 눈이 돌아가서 자신을 죽여 버리고 여기를 피바다로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거기까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 올리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매끄럽게 손질된 손톱이 손바닥으로 파고들어 아팠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크라이어를 향한 공포를 조금이라도 희석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 숨을 깊이 들이마신 올리비아가 크라이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들었다. 한창 격렬하게 토론하며 점점 더 커지던 이들의 목소리가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조용해졌다.
“너무 과열되었군요. 잠시 쉬고 재개하도록 하죠.”
올리비아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갔다. 크라이어를 향해.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켜건, 양손으로 입을 막고 경악을 하건, 올리비아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오로지 눈을 내리깔고 세상만사에 관심 없다는 얼굴로 자리하고 있는 크라이어만이 있을 뿐. -또각. -또각또각또각. 그와 가까워질수록 올리비아의 걸음은 빨라졌다. 회의장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을 빨아들이며 마침내 크라이어 코앞에 도달한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저 좀 보죠.”
예의고 인사고 나발이고, 자기소개고 뭐고 다 집어치운 올리비아는 냅다 본론을 던졌다. 경악하는 이들의 헛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에게만 집중했다. 몇 번의 회귀에서 몇 번의 대륙 전쟁을 거치면서 아무런 성과도 없는 건 아니었다. 크라이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온 건지,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사소한 취향 같은 건 몇 개 건질 수 있었으니까. 일단 그는 말을 길게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용건만 간단히, 라고 했던가. 기실 다른 것에 신경을 둘 여유도 없었고. 올리비아는 지난 회귀에서 그에게 죽은 횟수만 무려 네 번.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그의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올리비아는 지금은 멀쩡히 잘 붙어 있는 목을 매만지지 않으려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지독히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겨우 그의 앞에 다다랐을 때. 올리비아 앞에 크라이어가 아닌 다른 이가 툭 튀어나왔다.
“황녀 전하.”
“노……르덴 전하.”
노르덴 국왕의 인사를 기계적으로 받으면서도 올리비아는 크라이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그에게서 눈을 잠시라도 떼는 순간 제 목이 달아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에 노르덴 왕은 난처한 얼굴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크라이어와 그를 태워죽일 듯 바라보는 올리비아를 번갈아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희 기사가 무언가 문제라도.”
“네. 문제 있죠.”
“네?”
“저와 봐야 할 문제가 있어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노르덴 국왕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국의 황녀라고 하기에는 마치 딴 사람인 듯 너무나도 강경한 올리비아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작 기사 한 명으로 제국과 대거리가 오가는 상황은 전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크……음. 경. 잠시 따라오세요.”
마음만 급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부르려다 헛기침으로 무마한 올리비아가 크라이어를 향해 손짓했다. 하지만 그는 묵묵부답. 다시 일 초가 천추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등에 식은땀이 흥건한데도 오한이 일어 올리비아의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쩍쩍 말라붙은 입술을 떼는데, 불행 중에 다행으로 노르덴 국왕이 먼저 나섰다.
“경. 무얼 하는가. 황녀 전하께서 경을 부르고 계시지 않나.”
“송구합니다.”
크라이어가 입을 연 순간, 그의 목소리를 들은 올리비아의 목 뒤 솜털이 일시에 곤두섰다. 목이 뻣뻣했지만,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이……리로.”
올리비아는 그의 에스코트도 받지 않고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둥근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는 크라이어밖에 없었다. 이윽고 준비된 밀실에 도착한 올리비아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그와 자신이 이곳까지 오는 것을 그 많은 이가 봤으니, 여기에서 크라이어가 제 목을 슥삭 잘라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그렇겠지. 그렇게 믿자. 애써 자기 최면을 걸며 먼저 밀실로 들어선 올리비아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크라이어가 밀실로 들어왔다. -달칵. 문의 걸쇠가 내려가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려 올리비아는 크게 어깨를 떨었다. 드디어. 드디어 단둘이 되었다. 심장이 너무 심하게 쿵쿵거려서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당연히 설렘 따위와는 거리가 먼, 부정맥에 가까운 두근거림이었다. 차라리 회의장에 모여 눈을 굴리고 있는 이들의 생각처럼 자신이 크라이어에게 첫눈에 반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를 불러내는 상황이었다면, 참 행복했을 텐…….
“전하께서 좋게 봐주셨다면 송구합니다만, 저는 아직 누구와 함께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녀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라이어가 지극히 정중하지만, 이상하게 귀찮음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예를 취했다. 역시나 그답게 얄팍한 예법을 애매하게 지키고는 있었지만, 인사 따위는 국에 말아 먹었는지 용건만 간단히 전하는 말이었다.
“당신한테 반해서 여기로 끌고 온 거 아니에요. 진짜 볼일이 있어서 부른 거죠.”
올리비아는 소름이 돋은 뺨을 문지르며 그의 말을 단칼에 부정했다. 그녀는 곧 크라이어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예법 따윈 지킬 필요 없어요. 반말을 하든 존대를 하든 마음대로 해요.”
누군가에게 존대를 들으면서 이렇게까지 몸서리쳐지는 경험은 그가 처음이었다. 하긴. 그가 처음이 아닌 경험이 몇 번이나 될까. 올리비아는 제국의 황녀로 태어나 반말이라고는 황제 폐하 외에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크라이어는 첫 만남 때부터 올리비아를 향해 거침없이 말을 놨다. 아니, 말만 놓았나…… 그녀의 목을 아주 단칼에 날리기도 했지.
“당신이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겠죠.”
난데없이 제국의 황녀에게 불려 와 단둘이 되고, 그보다 더 파격적이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연속으로 들은 크라이어의 눈썹 끝이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올리비아는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다다 말을 쏟아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여하간 무서워서 아주 잠시의 침묵도 견딜 수가 없었으니까.
“제가 당신을 이리 부른 이유는 한 가집니다. 어떻게 하면, 아니 뭘 하면 되나요?”
올리비아는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기세를 크라이어가 읽지 못할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제 이빨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듭니다만.”
“그러니까. 아니, 뭘 해야만!”
올리비아는 더 없이 결연한 얼굴로 크라이어를 향해 한 발 다가서려고 했지만, 차마 거기까지는 용기가 나지 않아 반걸음 걷다 말았다.
“당신에게!”
그와 그녀 사이의 거리는 두 걸음도 채 되지 않았지만, 올리비아에게는 그 단 두 걸음이 까마득한 절벽으로 이어지는 구덩이처럼 보였다.
“당신에게 제가 무얼 해 주면 되나요.”
“전하. 저는 노르덴 왕국의 일개 기사일 뿐입니다. 제국의 황녀 전하께서 저에게 어떤 것을 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크라이어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자 올리비아는 양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더욱 결연히 외쳤다.
“뭘 하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건가요!”
올리비아의 필사의 외침 뒤로 깊은, 아주 깊은 침묵이 무겁게도 내려앉았다. 숨통을 틀어막는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일단 숨부터 쉬지.”
“으, 허억! 흐하악!”
크라이어의 말에 올리비아가 참았던 숨을 내쉬며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쪼그라들었던 가슴에 공기가 들어차기 무섭게 올리비아는 숨이 막혀 눈물이 맺힌 촉촉한 푸른 눈으로 크라이어를 응시했다.
“바, 방금 반말을!”
“말 놓아도 된다며.”
껍데기뿐이었던 정중함이나 예법을 집어치운 크라이어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느긋하게 올리비아를 살폈다. 마치 포식자가 먹잇감을 탐색하듯, 그렇게. 그의 시선에 마치 뱀을 앞에 둔 개구리가 된 심정으로 올리비아는 되뇌었다. 나를 죽이지 말기를. 지금 당장 나를 죽이지 말기를. 염불처럼 같은 말을 되뇐 효과일까. 크라이어는 딱히 당장 올리비아의 모가지를 비틀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올리비아에게는 대단히 다행스럽게도 크라이어가 그녀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전쟁이라니 무슨 말이지?”
“다 아는 처지에 더는 말 돌릴 필요가 있어?”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는 것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다 아는 처지? 그러고 보니, 전하. 무엇을 알고 있지?”
“전부 다.”
올리비아는 숨을 쉴 틈도 없이 바로 답을 내어놓았다. 기실 지금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답에 크라이어는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전부 다 알고 있어! 당신이 전쟁을, 대륙 전쟁을 일으켜 피바람을 몰고 올 거라는 것도! 당신 손안으로 온 대륙이 떨어져 피가 강처럼 흐르고, 사람들이 죽음으로 신음하게 될 거라는 것도! 그리고!”
정신없이 말을 뱉어내던 올리비아의 목이 순간적으로 턱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