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노예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거든.2021.09.02.
제국력 578년. 5월. 22일. 대륙 전쟁.
“그들이 선포한 전쟁을 끝을 내주리라!”
제국의 황녀 올리비아는 노르덴 국왕이 한 전쟁 선포를 향해 응전을 선언하는 황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또다. 또 이렇게 대륙 전쟁이 시작된다. 전 대륙을 불태우며 제국의 주춧돌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우는 더없이 사나운 전쟁의 불씨. 회귀만 네 번을 했지만, 전쟁의 단초가 되는 사건만 달랐을 뿐. 어떻게든 전쟁만은 막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역부족이었다.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위하여!”
온 하늘을 찔러대고 땅을 울리는 우렁찬 함성을 들으며 올리비아는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전쟁의 끝은 언제나 같았다. 회귀하여 미래를 알고 있는 그녀가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도 결국 언제나…….
“올리비아?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폐하…….”
“그런 얼굴 할 것 없다. 전쟁이라고 해도 금방 끝날 테니.”
승리를 자신하는 황제의 등 뒤에서 올리비아는 입을 벌리다 이내 다물었다. 이 전쟁의 끝은 황제인 아버지와 자신의 잘린 목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한들 무엇 하겠나.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데. 그렇게 또 올리비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전쟁은 나날이 격화되었고, 한 사람에게서 시작된 불씨는 모든 대륙을 살라 먹으며 거대하게 타올랐다. 올리비아가 회귀 전 겪었던 일들이 전부 똑같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의 마지막은 같았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올리비아는 검으로 제 목을 겨눈 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륙 정벌이 당신의 목적인가요?”
앞뒤 없이 튀어나온 그녀의 말에도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그것뿐인가?”
“아니라면, 이 전쟁을 이렇게까지 끌고 온 이유가 대체 뭐죠?”
이 전쟁을 홀로 시작하고 홀로 끝낸 괴물. 어느 날 갑자기 기적처럼, 아니 악랄하고 지독한 마법이라도 부린 듯 온 대륙을 전쟁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기어이 세계를 멸망으로 밀어 넣은 남자. 크라이어. 그는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그가 속삭였다.
“나는 노예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거든.”
“노예? 그게 무…….”
올리비아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다섯 번째 죽음을 맞이했다. *** 제국력 577년. 5월. 22일. 대륙 전쟁 1년 전.
“으헉!”
올리비아는 온몸이 식은땀에 젖은 채 경기를 일으키며 깨어났다. 그녀는 멀쩡히 잘 붙어 있는 제 목을 더듬거렸다.
“또……?”
한탄처럼 헛숨과 함께 새어 나온 목소리는 낮게 쉬어 있었다. 회귀하면 늘 이랬다. 죽음이란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지독하게 끔찍한 것이었으니까. 차라리 기억을 모조리 잃은 채 죽는다면 이런 몸서리쳐지게 더러운 기분을 몇 번이고 느끼지 않아도 될 텐데.
“뭐,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계속 곱씹어 봤자 처음 회귀 때처럼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밖에 더하랴. 세계를 멸망시킬 대륙 전쟁과 자신의 죽음에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끼며 깊은 굴을 파고 들어가는 짓거리는 두 번째 회귀까지였다. 한없이 심각하고 무겁게 상황을 바라본들 자신만 갉아 먹을 뿐. 차라리 유쾌하고 발랄하게, 조금쯤 가볍게 모든 상황을 바라보면, 어떤 실패를 겪던 툭툭 털고 일어나기 편했다. 올리비아는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손에 착 감기는 펜을 쥐었다. 그녀는 이번 회귀 전의 생에서 달라진 것들을 빠르게 휘갈겼다.
“역시 자잘한 건 달라져도 큰 줄기는 변함이 없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대륙 전쟁은 일어났고, 끝내 제국은 패배하며 자신은 죽는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나. 처음 회귀했을 때는 회귀 전 기억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전쟁의 화마에 희생될 모든 이들을 위해서 꼭 막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다음 회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전쟁을 막지 못한다면 최소한 제국을 위해 무언가 할 것이라 결심했다. 그러나 이 또한 실패했다. 제국이나 제국민들을 위해서, 라는 거창한 것에 의미를 둔 회귀는 세 번째까지였다. 네 번째 회귀에서 올리비아는 오로지 제가 살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전쟁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일어났고, 제국은 항상 어떤 식으로든 패배했으며, 황녀인 올리비아는 항상 어떤 식으로든 죽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을 매만졌다.
“살고 싶어.”
입 밖으로 내자 목표가 선명해졌다. 그래. 그녀는 진정으로 살고 싶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무슨 짓이든 아니, 어떤 것이든 될 수 있을 만큼.
“전쟁을 막고 세계 평화를 반드시 지켜내야만 해.”
아주 오래전, 볼셰이크가 황가가 되기 한참 전인 까마득한 옛날. 지난한 대륙 전쟁이 끝난 후, 종전과 평화의 상징으로 하얀 비둘기를 하늘로 날린 황제가 있다 했지. 올리비아는 양손 주먹을 꼭 쥐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스스로를 향해 외쳤다.
“살아남고야 말겠어. 이 한 몸 평화의 비둘기가 되더라도!”
*** 제국력 577년. 5월. 28일. 대륙 대회의. 드넓은 회의장을 훑은 올리비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으로 딱딱해진 어깨와 목을 타고 아픔이 올라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지만, 지금 이런 고통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하. 공국에서 이러한 전언이…….”
“전하. 이 부분의 인력이 모자란다는…….”
“전하.”
그녀를 빽빽하게 둘러싼 이들이 각자 자신이 맡은 곳에서 일어나는 오만 가지 문제점들을 보고했고, 올리비아는 막힘없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명쾌한 명을 내렸다. 그러니 그녀에겐 단 며칠 만에 급조된 대륙적인 행사인 이 대회의 자체도 문제가 아니었다. 회귀한 당일, 올리비아는 당장 황제를 찾아갔다. 몇 번이나 죽고 회귀한 올리비아는 일단 결심하면 망설이지 않게 되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한다. 해야만 하는 말이라면 한다! 어차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어버릴 거라면, 살려고 뭐든지 발버둥을 쳐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올리비아는 선약도 없이 한창 국정을 보던 황제와 막무가내로 마주했다. 황제는 황망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대륙 회의를 당장 개최해 주세요. 모든 국가의 정상 및 그들이 초대한 이들과 국가를 초월해 대륙 전체를 위한 논의를 해야만 해요. 개최까지 아직 몇 개월 남았다는 사실은 알아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할 수 있으시죠.’
황제는 침묵했고 올리비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주제는 세계 평화입니다.’
무리하게 밀어붙인 대회의. 이건 오로지 한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다. 바짝 곤두선 신경이 잘 갈려진 바늘처럼 날카로워져 관자놀이를 쑤셨지만, 올리비아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놓쳐서는 안 된다. 놓칠 수가 없다. 그 남자.
“크라이어.”
스스로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흘러나온 이름. 그의 이름과 동시에 죽음의 기억이 올리비아를 덮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목을 거세게 문질렀다.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올리비아는 숨을 골랐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시간도 아까웠으니까. 대회의장으로 들어오는 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올리비아는 이 대회의를 개최한 목적인 남자를 떠올렸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에 새겨진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 남자. 대륙의 악귀. 전장의 지배자. 전쟁의 겁화. 온갖 멸칭과 찬양이 뒤섞인 평가를 받는 그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났다. 그리고 올리비아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남자가 되었다. 심장이 심하게 쿵쿵거리며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그건 크라이어를 향한 설렘이나 아기자기한 두근거림이 아니었다. 자신을 몇 번이고 무자비하게 죽인 남자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리가……. 그건, 공포였다. 그리고 공포의 크기만큼 의아함도 커졌다. 그의 손에 목이 잘리기 전 들었던 마지막 말.
‘나는 노예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거든.’
하얗게 질려 핏줄도 보이지 않는 올리비아의 뺨에 비스듬한 그림자가 졌다. 노예라니. 들은 당시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몇 번이고 되뇌어 본 지금까지도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남자가 누군가의 노예라고? 그 크라이어가? 생각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크라이어와 노예라는 단어는 도저히 같은 선상에 놓고 볼 수가 없었으니까. 누군가를 노예로 부리면 부렸지, 그 남자가 누군가의 손짓 한 번에 뭐든 해야 하는 노예라니. 결국 며칠 동안 머리가 터지게 고민한 보람도 없이, 그를 만나게 되는 오늘까지 어떤 실마리도 찾지 못했다. 사람을 풀어 그의 뒷조사를 한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낼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모르면 본인에게 물어봐야지. 과연 그가 답을 줄지는 의문이지만……. 일면식도 없던 제국의 황녀가 난데없이 눈앞에 나타나 묻는다. 당신 누군가의 노예라면서요? 그게 누구죠? 그 상황을 그려낸 올리비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흐린 눈을 떴다. 어떻게 생각해도 미친 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잖아. 그나마 지금은 그가 막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라 그 포악하고 잔혹한 이빨을 본격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때라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올리비아의 목을 타고 마른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독한 술…… 아니, 미지근한 물 한 잔 가져다줘.”
도저히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맨정신이 아닌 상태로 그 크라이어를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겠지. 사용인이 건넨 잔을 단번에 비운 그녀가 크라이어와의 만남에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정리하려는데.
“전하, 이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올리비아의 생각은 그녀를 향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구름처럼 모여든 이들에 의해 뚝 끊어졌다.
“황녀 전하. 저는…….”
“전하. 이리 오랜만에 뵙게 되어…….”
“이번 대회의의 주재를 하셨….”
올리비아는 어떻게든 그녀의 관심을 끌고 눈길 한 번이라도 받기 위해 목을 들이미는 이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코로 흘리며 경청하는 척을 했다. 전부 물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이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기에 그리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응대도 그가 나타나는 순간 다 끝날 일이니 조금만 참으면 될 터. 일 초가 천추 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올리비아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다. 그가 나타났다. 기척도 없이, 소리도 없이. 크라이어는 그렇게 올리비아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이어.”
올리비아는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렇지 않으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으니까. 이윽고 올리비아가 눈짓하자, 대륙 대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지금부터 대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례적으로 본래 예정일보다 몇 개월 이른 시기에 개최되면서, 안건조차 급박히 전달되는 바람에 참여한 이들은 무언가를 제대로 준비할 시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각자 한 국가를 이끄는 정상들이 모이는 자리. 시간이 촉박하면 촉박한 대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움직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번 회의의 안건은.”
사회를 맡은 이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 평화입니다!”
사회자의 말을 받아 회의를 주재한 제국의 황녀, 올리비아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모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아무쪼록 건설적이고 유익한 회의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의아함을 감추며 올리비아의 시선이 고정된 이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써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리비아는 사람들을 훑어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공을 보거나 하다못해 먼 곳의 테피스트리를 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 달을 베어 놓은 머리와 지독하게 깊숙이 가라앉은 붉은 대지와 같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이름도 가물가물한 아주 작은 나라의 왕을 수행하는 기사에게 박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