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
동민이 전화를 건 사람은 올해 새벽에서 황혼까지에 출연하면서 사심을 가득 채운 쿠안틴 티란타노였다.
“영화 촬영은 재미있었어요? 시나리오 보니까 완전 쿠안틴 스타일이던데요?”
“당연히 좋았지. 아직 영화 안 본 거야?”
“한국에는 아직 수입도 안 되었어요. 아마 비디오로 나올 것 같네요.”
“내가 필름 보내줬잖아.”
“군대 안에서 어떻게 봐요.”
군대에 있어서 못 봤다고 말했지만, 사실 장교들과 함께 부대 안에서 시청을 했었다.
자막이 없어서 중간중간 번역하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딱히 대사를 못 알아들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기에 다들 재미있게 보았다.
“셀마 헤이엑이 발에 술을 부어 주고, 발가락에 흐른 술을 받아 마시는 장면은 그냥 변태 같던데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내가 영화를 위해 이미지를 포기했다는 거지.”
“즐기고 있었던 거 다 알고 있어요.”
새벽에서 황혼까지의 감독인 로드리게즈가 인터뷰에서 쿠안틴 감독이 영화에 출연한 이유는 셀마 헤이엑이 눈앞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쿠안틴은 발 페티시에 대한 좋은 연출 중 하나라고 답한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내년에 만드는 브라운 제키 영화 때문에 연락했어요. 아직 투자 안 받았죠?”
“제작비가 얼마 들지 않아서 금방 구할 수는 있는데, 너 기다리고 있었지.”
“예정 제작비가 1,200만 달러라고 적혀 있는데 정말이에요?”
“이번에는 화려한 액션보다 심리 묘사에 집중할 거라 그 정도면 될 것 같아.”
“출연 배우 구성도 화려하던데 출연료 협상을 잘했나 봐요.”
“내 영화는 금방 촬영이 끝나기도 하고, 다들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크게 욕심이 없더라고.”
브라운 제키는 쿠안틴이 폴프 픽션으로 이름을 알린 다음 만드는 범죄 스릴러 영화로 엘모어 레너드의 소설 ‘럼 펀치’를 원작으로 각본을 만들었다.
제목인 브라운 제키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많은 관객들이 시끌벅적하면서도 요란하고 피가 넘치는 영화를 기대하지만, 매우 깔끔하면서도 간결할 범죄 영화를 만든다.
몇 장면에서는 쿠안틴 특유의 스타일이 보이긴 하지만, 액션이 주를 이루는 영화가 아닌 속고 속이는 머리싸움이 주가 되는 영화였다.
“전액 투자를 하고 싶지만, 그건 힘들 거고 1천만 달러만 투자하도록 할 게요.”
“야! 그럼 200만 달러밖에 남지 않는데 괜찮은 거야? 이 정도면 네 영화 아니야?”
“제가 시나리오 건드리지 않는 거 알잖아요. 대신 김치 장면이나 넣어줘요.”
“그래. 네 김치 공장 로고가 잘 보이도록 찍어 줄게.”
쿠안틴의 영화에 계속해서 투자를 하다 보니 레드애플 담배처럼 동민의 김치 브랜드가 일종의 이스터 에그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제키 브라운은 비교적 쿠안틴의 작품 중에서 얌전한 영화이다 보니, 평이 엇갈리게 된다.
쿠안틴 특유의 스타일이 별로 드러나지 않아서 실망이라거나 에너지가 부족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굳이 자기 스타일을 화려하게 뽐내지 않아도 영화를 잘 만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는 말을 듣기고 한다.
실제로 영화의 구성, 연기, 연출, 전개 모두 좋은 테크닉으로 잘 다듬어져 쿠안틴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떼어놓고 보아도 괜찮은 작품이었다.
“영화 찍을 때 너도 미국에 돌아올 거니까 같이 작업하면 되겠네.”
“그러면 저도 좋죠. 그래도 폴프 픽션처럼 대박이 나긴 힘들겠죠?”
“폴프 픽션은 나도 그 정도로 잘될 줄 몰랐어. 이번에는 조금 힘 빼고 만들 거니까 흥행 욕심은 부리지 마.”
쿠안틴이 겨우 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만들었던 폴프 픽션은 2억 1,500만 달러의 극장 수입을 거두면서 영화 투자의 로또로 역사에 남게 된다.
대부분의 예산을 투자했던 동민은 800만 달러를 투자해 1억 달러가 조금 넘는 수익을 남겼고, 이런 수익률은 다시 기록하기 힘들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제키 브라운 역시 1,200만 달러의 제작비로 7,470만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나쁘지 않은 수익률을 기록하지만, 전작에서 워낙 큰 돈을 벌어들였기에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세한 건 닐이랑 이야기하고, 한국에 오면 소주 한잔해요.”
“좋지. 이상하게 한국에서 마시는 술은 느낌이 다르더라.”
쿠안틴과 통화를 마치고, 브라운 제키를 마지막으로 선택하면서 1997년 영화 투자를 마무리 지었다.
“이 메일은 잘 받았어요. 올해는 투자금 최대치 기록을 달성하네요.”
“아무래도 타이탄익에 돈이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네요.”
“최소 3억 달러는 넘겨야 수익이 나올 것 같던데 괜찮겠죠?”
“내가 보기엔 지금까지 바다 관련 영화들이 꼬라박은 것 전부 카메룬 감독님이 회수할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투자 파일을 정리해 닐에게 메일을 보내자 금방 서류를 정리해 한국으로 찾아왔고, 동민이 직접 사인하면서 모든 과정을 마무리 지었다.
“올해 투자 수익도 역대급으로 나올 것 같아요. 일단 독립기념일의 매출이 예상을 훨씬 넘기면서 수익금을 많이 가져다 줬고, 작년 보다 전체적으로 영화 매출이 높게 나오네요.”
“인플레이션이 있으니 앞으로 계속 매출은 늘어날 거예요. 타이탄익 현장은 어땠어요?”
타이탄익 촬영장에 카메룬 감독을 만나러 다녀온 닐이 현장 이야기를 해 주었다.
“타이탄익 실물을 직접 보니 엄청나긴 하더라고요. 확실히 영화만 잘되면 관광상품으로 인기가 있을 것 같아요.”
“오리지날 타이탄익 만들 때보다 돈이 더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엔진이랑 내부 시설들이 현대식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나 봐요. 타이탄익호 말고 현장 분위기는 어땠어요?”
“카메룬 감독님답게 군대 같긴 한데 리오가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고, 분위기도 살려줘서 나쁘지는 않았어요.”
닐이 타이탄익 현장의 분위기를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고, 카메룬 감독이 수중 촬영 욕심이 많아 세트장 규모를 계속 키워간다며 투덜거렸다.
타이탄익이 얼마나 크게 성공할지 모르는 닐이었기에 걱정이 많은 것을 당연했다.
면회 시간이 금방 끝나 버렸고, 닐에게 돌아가는 길에 타이탄익 현장에 한 번 더 들러 현장 사진을 많이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김동민 병장님. 우정의 부대 진행자가 교체되었다고 합니다. 다음 주는 촬영할 수 있답니다.”
뽀빠이 아저씨가 잡혀가면서 잠시 우정의 부대 프로그램이 중단되었지만, 금방 다른 진행자를 구해 다시 진행되었다.
하지만, 동민은 임시방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년 3월 마지막회 촬영을 하고 우정의 부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그래도 내가 제대하고 끝나니까 이대로 군 생활 마무리할 수는 있겠네.”
동민의 군 복무가 얼마 남지 않았고, 어느덧 말년 병장이 되어 업무에서 하나 둘 손을 떼고 있었다.
“김 병장님 이번 외박에도 송호준 형님 만나십니까?”
“연말이라 호준이 형이 많이 바쁜가 봐. 대신 서대진 형 만나기로 했어.”
동민에게 카메라 연출을 배우기 위해 우정의 부대까지 찾아왔었던 봉호준과는 종종 만나 술을 마셨다.
충무로에서 열심히 경력을 쌓고 있는 그가 한국 영화계에 관해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동민은 봉호준이 궁금해하는 할리우드 근황을 알려 주었다.
후임 중 절반은 잠시라도 봉호준과 함께 작업을 했었기에 그를 알고 있었고, 가끔은 부대에 찾아오기도 해서 동민이 그와 자주 만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은퇴하셨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완전 은퇴는 아니고, 그룹만 해체한 거야. 미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음악 작업은 계속하고 있더라고.”
어느덧 연말이 다가와 약속이 많이 잡혔고, 작년과는 다르게 말년 병장이 된 동민은 쌓여 있는 외박과 휴가를 이용해 지인들을 만났다.
“현철이 형. 로스앤젤레스는 지내보니 어때요?”
“날씨는 정말 좋더라. 한인타운만 안 가면 사람들이 못 알아봐서 편한 것도 있고. 너도 빨리 제대하고 미국에서 보면 좋겠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미국에 가면 미국 가수들 소개해 줄게요.”
“꼭 소개해 줘야 한다. 마이크 잭선 비밀리에 왔을 때 나 안 불러서 얼마나 서운했는지 아니?”
여름방학에 제시카와 디주니 미미 마우스 클럽 아이들이 왔을 때 현철은 미국에 있었고, 마이크 잭선이 SN 엔터테인먼트에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민에게 여러 번 전화해 잔소리를 했었다.
생각보다 뒤끝이 있는 그에게 항복한 동민은 미국에 돌아가면 유명 가수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연말이라 한국에 잠시 들른 현철은 연말 파티에 동민을 초대했다.
“오늘 누구 오는 거예요? 서대진과 아이들 멤버 형들은 안 불렀을 것 같고, 김정서 형 불렀죠?”
“잘 알고 있네. 다른 사람도 불렀으니까 기다려 봐.”
정현철과 미국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금방 두 사람이 도착했다.
한 명은 안면이 있는 록커 김정서였고, 다른 한 명은 올해 가요계의 마이다스의 손인 김창한의 리안기획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홀로서기에 나선 김건머였다.
김건머는 김창한과 결별 이후 자신의 손으로 프로듀싱한 4집으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96년에는 대형 가수들이 동시에 컴백하면서 별들의 전쟁이 일어나 정신없는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동민이 오랜만이네.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졌는걸?”
“정서형은 하나도 안 변했네요. 잘 지내셨죠?”
“현철이한테 네 이야기는 자주 들었어. 여기는 건머야. 누군지는 알고 있지?”
김정서가 김건머를 소개해 주었고, 김건머는 처음 보는 동민을 궁금해했다.
“신인 배우야? 처음 보는데?”
“샌드 시계에 잠깐 나오긴 했는데 배우는 아니고 영화 쪽 공부를 하는 학생이야. 미국에 살고 있고, 여름에 마이크 잭선을 SN 엔터테인먼트에 초대했던 녀석이야.”
김건머도 SN 엔터테인먼트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었고, 동민이 그 소동의 주인공이라고 하자 흥미를 보였다.
“대단한 녀석이었네? 미국에서 와서 비율이 다르구나.”
“제가 데뷔했을 때 기획사 사장님 아들이기도 해요.”
현철도 동민을 어떻게 만났는지 간략하게 말해 주었고, 친화력이 좋은 김건머가 금방 동민을 마음에 들어 하며 소주를 따라 주었다.
“지금 군인이라고? 군인 팔자가 좋구나. 나는 해군홍보부대에 있었는데, 내가 군대에 있었을 때는 말이야.”
자칭 소물리에(소주)인 김건머가 술자리를 이끌었고, 동민은 유명 가수들과 함께 재미있는 연말을 보냈다.
가수 모임 이외에도 친한 배우들도 만나 술자리를 가졌고, 다들 조만간 미국으로 돌아가는 동민을 아쉬워했다.
군인이지만 한국에서 화려하게 96년을 마무리했고, 97년이 되자 정말로 제대가 며칠 남지 않게 되었다.
이제 말년의 말년이기에 막사에서 TV를 보며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뉴스에서 반갑지 않은 속보가 올라왔다.
“재계 14위인 한보그룹이 부채를 갚지 못해 부도되었다는 속보입니다.”
< 167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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