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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민이 긴장한 채 이름을 물어 본 남자는 180이 넘는 키에 살짝 덩치가 있었고, 착하게 생긴 인상에 살짝 긴 곱슬머리와 사각 안경을 쓰고 있었다.
“당연히 아직 조연출인 저를 모르시겠죠. 저는 한국영화아카데미 11기 출신 봉호준이라고 합니다. 재학 당시에 16mm 단편 영화를 몇 편 만들기는 했지만, 아직 장편 작품은 제작한 경험이 없습니다. 저도 김동민 씨 조사를 조금 해 봤는데 미국에서 쿠안틴 티란타노 감독과 함께 작업을 하셨더군요. 젊으신 나이에 경력이 대단하십니다.”
설마 했지만, 역시나 동민을 찾아온 이는 최고, 최다, 최초의 기록을 모두 보유하게 되는 자타공인 대한민국 영화의 아이콘이며, 예술성과 오락성 그리고 대중성과 독창성을 전 세계에서 모두 인정받는 세계적인 거장이 되는 봉호준 감독이었다.
미래에 그는 가장 영향력 있고 혁신적인 시네아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선구자이자, 비평과 흥행을 모두 섭렵한 천재 감독이 된다.
국뽕 클럽 리스트에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올리게 되는 동민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 중 하나인 봉호준이 영상 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직접 자신에게 찾아오자 잠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게 있었다.
“흠흠. 제가 너무 급작스럽게 찾아온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정의 부대 소개 영상을 보니 국내에서 이런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랐고, 꼭 배워보고 싶어서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보수는 필요 없으니 스테프로 일하며 기술을 익힐 수 있도록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도와드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드려야죠. 군부대에 들어오실 수는 없으실 테니 방송국 측에 요청해서 일하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저야말로 도와주신다면 감사해야죠.”
동민의 횡설수설한 허락에 봉호준이 잠시 얼떨떨해 하다가 자신의 방문 목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에 배시시 웃으며 좋아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학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나름 실력에는 자신 있으니 누를 끼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 계실 수는 없으니 가능한 빠른 시일에 모두 배우실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해 기술을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색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봉호준이 28살이라고 알리면서 동민이 호준이 형이라고 부르기로 했고, 봉호준은 말은 낮추지 않고 동민 씨라고 부르겠다고 대답했다.
얼마 전 소수정예로 영화인을 양성하는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봉호준은 충무로에서 1999년까지 조연출과 각본가로 활동을 하다가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고, 비교적 이른 나이인 31살에 플란다스의 강아지라는 장편 영화로 2000년에 데뷔를 하게 된다.
데뷔작을 대중적인 흥행에는 실패하지만, 작품성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영화 전문가들에게 기대주로 주목받게 된다.
이후 2003년 추억의 살인이라는 작품으로 한국영화계에 충격을 선사하며 큰 반향을 일으키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하면서 한국 영화의 미래로 지목받는다.
그리고 3년 후 봉호준은 지금으로부터 10년 뒤 몬스터라는 괴수 장르 작품으로 그동안의 모든 영화 기록을 뒤엎게 된다.
아직 비교적 신임감독인 그는 여름에 영화가 개봉하자 예매율 최다 스크린 점유 기록을 세우더니 개봉 첫날 45만 명, 첫 주말 263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개봉 21일 만에 1,000만 관객을 넘겨 버린다.
전국적인 흥행 성적을 만들기 쉽지 않는 괴수 영화로 한국 영화 흥행 최고 기록인 1,300만 명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게 되고, 한동안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1위 자리를 유지한다.
이후로도 할리우드 제작진과 배우들과의 교류로 아포칼립스 영화를 만들어 흥행시키기도 하고, 넷플랙스의 지원을 받아 욱자라는 영화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면서 넷플랙스를 한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19년 기생벌레를 만들면서 그는 신화를 쓰게 된다.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몇 안 되는 쌍천만 감독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당연히 기생벌레는 개봉한 해 열린 국내외 영화제 및 시상식에서 상을 쓸어 담게 되고, 202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 국제영화상, 그리고 최고 영예인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4관왕을 달성하면서 세계 영화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다.
“영화아카데미 졸업도 하셨고, 경험도 저보다 많으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배움에 나이나 경력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배울 게 있으면 찾아가 배워야죠.”
“그래도 막내 스태프처럼 일을 하실 수는 없으시니까 저랑 같은 팀장 직급으로 해 드릴게요. 처음에는 저희가 어떻게 일하는지 지켜보시고, 아이디어나 개선점이 생각나시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세계적인 감독은 괜히 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느낀 동민은 성심성의껏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봉호준에게 알려 주었다.
“카메라 앵글은 로우에서 클로즈업하면서 올리면 이런 효과를 낼 수 있어요.”
“느낌이 확실히 다르네요. 그리고 일반 필름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화질이 어떻게 좋게 나오는 거죠?”
“필름의 한계는 뛰어넘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최대한 조명을 활용해서 노이즈를 없애야 하고, 좋은 필름을 지원받을 수가 없어서 개인 사비로 렌즈를 비싼 거로 써서 최대한 선예도를 높여 촬영하고 있어요.”
“역시 장비가 중요하긴 하군요.”
특정 분위기를 내기 위한 렌즈 필터에 관한 심도 깊은 대화도 나누었고, 봉호준은 동민에게 충무로가 돌아가는 이야기를, 동민은 봉호준에게 할리우드 이야기를 서로 해 주었다.
심도 깊은 영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은 금방 친해졌고, 동민의 외박이나 휴가 때 서울에서 따로 만나 종종 술을 마시기도 했다.
“세계적인 감독님들과 그렇게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정말 부럽구나.”
“그분들이라고 딱히 특별하지는 않아요. 이제는 그냥 동네 아저씨 같네요. 매번 세탁소에 찾아와서 삼겹살이랑 소주 달라고 하는 게 가끔은 진상이기도 해요.”
“나도 그분들이랑 같이 삼겹살을 구의면서 소주를 마셔보고 싶네.”
“형도 언젠가는 유명 감독이 되어 그럴 날이 올 거예요. 쿠안틴은 종종 한국에 오니까 자리 한번 마련해 볼게요.”
한국 영화인 중에 가장 성공적으로 할리우드와 협업을 하게 되는 봉호준이기에 미리 지인들을 소개해 줄 생각이었다.
“저 제대하면 미국에 놀러 오세요. 친구들 소개해 줄게요.”
“객기 부려서 너 찾아오길 잘했네. 앞으로 잘 부탁하마.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술은 내가 산다.”
봉호준이 우정의 부대 촬영팀에 합류하면서 영상의 변화는 크게 없었지만, 시나리오 구성에서는 많은 개선을 이룰 수 있었다.
우정의 부대 프로그램이 더 풍성해졌고, 특히 그리운 내 어머니는 더욱더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다.
“형은 묘하게 장르 구분이 안 되고 다재다능하네요.”
“한 우물을 파야 하는데 잡다하게 관심이 많아서 문어발이라는 소리를 듣긴 하지.”
“문어발이라고 하기에는 하나하나 수준들이 너무 높은데요?”
“그래도 너만 하겠냐?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네. 지금까지는 나름 신동 소리 듣고 살았는데 너 때문에 겸손해졌어.”
동민은 봉호준과 함께하면서 즐겁고 만족스러운 군 생활을 이어갔지만, 그가 충무로에서 일이 잡히면서 3개월 만에 우정의 부대를 떠나게 되었다.
무급으로 3개월이나 일해준 것도 대단한 것이었고, 동민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그에게 알려 주었고, 역으로 동민도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엑기스만 빼먹고 도망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아니에요. 저야말로 무급 착취 해서 미안했어요.”
“나는 충무로에 계속 있을 거니, 휴가 나오면 연락해 촬영 현장 구경도 시켜줄게.”
그렇게 봉호준이 떠났고, 봄이 늦게 찾아오는 군대에도 꽃이 피기 시작했고, 동민은 상병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봄과 함께 닐이 동민을 찾아왔다.
“요즘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는 거예요? 한국에 나한테 말하지 않은 프로젝트라도 있어요?”
“하하. 모든 진행 사항은 빠짐없이 보고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죠.”
“나야 자주 와 주니 좋긴 한데 너무 자주 오는 것도 의심스럽네요.”
작년에는 꼭 필요할 때만 찾아오더니 올해 들어 부쩍 자주 한국에 들어오는 닐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계속 물어보자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여자친구가 생겼다고요? 축하해요. 그런데 어떻게 만난 거예요?”
“다니엘 아버님이랑 같이 일을 하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너무 괜찮아서 제가 자주 찾아오다가 얼마 전에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 했어요.”
“그러고 보니 닐도 이제 나이가 꽤 되는 거로 알고 있는데 왜 아직 결혼 안 했어요?”
“할리우드에서는 다들 너무 쉽게 만나고 헤어져서 진지하게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한국은 조금 보수적이라 더 좋더라고요. 사실 다니엘 덕분에 어느 정도 한국인이 되어 버린 것도 있지만요.”
그가 한국에 자주 온 이유는 한국인 여자친구가 생겨서였고, 동민도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지만, 제시카를 못 본 지 꽤 되었는데 옆에서 염장 지르고 있는 그를 보자 괜히 심술이 났다.
“이번 여름에 제시카가 한국에 올 수 있도록 준비는 잘하고 있죠?”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이미 부모님 설득 다 했고, 비행기 표도 예매해 두었어요.”
비교적 짧은 겨울 방학에 한국에 오지 못했던 제시카는 여름 방학에는 꼭 한국에 가겠다며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고, 빨리 여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은 여름 방학을 일찍 시작하기에 두 달 정도만 있으면 여자친구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자 동민의 기분이 좋아졌고, 닐의 자랑을 조금 더 들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만나는 사람은 어때요? 소개시켜 줘야죠.”
“안 그래도 다니엘을 궁금해하더라고요. 한국 드라마에 나왔었다고 말해주니 조금 무서워하긴 하던데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런데 다음에 한국 배우 소개 좀 시켜 줘요. 할리우드 배우는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던데 한국 배우는 좋아하더라고요.”
“알겠어요. 휴가 나갈 때 약속 잡아 봐요.”
동민은 뱀파이어랑 인터뷰와 샌드 시계 출연 이후 바로 군 입대를 하는 바람에 대중에게는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었지만, 방송계에서는 아직도 꽤 유명했다.
친분이 있는 배우들은 휴가나 외박 때 종종 만나 술을 같이 마셨고, 우정의 부대를 촬영하면서 위문 공연을 온 가수와도 금방 친해져 따로 보기도 했다.
당장은 동민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할리우드 유명 배우와 친분이 있고, 미국 영화에 출연을 했다는 것이 그들에게 큰 호감으로 다가왔고, 부대에 찾아온 여배우들도 동민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임자가 있기도 하고 여배우가 전부 연상이기에 따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동민은 그렇게 꽤나 즐거운 군 생활을 하고 있었고, 후임이 7명으로 늘어나면서 팔자가 피어났다.
거기에다 후임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다 보니 현장에서 사람 다루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고, 그렇게 군 생활을 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드디어 기다리던 여름이 다가왔다.
< 154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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