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리우드 김치 재벌-135화 (120/265)

< 135 >

샌드 시계 드라마 방영이 시작되었고, 동민이 알고 있던 것과 동일하게 월화수목 서울 시내는 차도 다니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모두 빨리 귀가해 집에서 드라마를 보거나 주점에서는 샌드 시계 방영 중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영업을 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어린 주인공 두 사람의 어긋난 운명을 보여주는 듯하다가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가발 업체 여공들이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라며 일어난 YH 사건, 언론 통제로 잘 모르고 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등 굵직한 현대사의 사건들을 다루면서 드라마의 무게감이 한없이 늘어간다.

거기다 최만수와 고연정의 사랑과 오해로 시청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고, 벌써 둘째 주 8화까지 방영을 마쳤더니 수도권에 살고 SBC 방송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샌드 시계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동민 역시 빡빡한 촬영 일정으로 정신없이 세트장을 오가고 있었는데 뱀파이어랑 인터뷰에 출연하면서 알아보는 이들이 조금 생겼었는데 샌드 박스에 얼굴을 비추고 난 다음부터는 길을 가다 마주치는 10명 중 한두 명이 동민을 알아보았다.

“괜히 빌런 역을 맡는다고 했나? 드라마 캐릭터일 뿐인데 사람들이 날 보고 눈으로 욕하는 것 같네.”

“젊은 사람이 그리 살면 안 돼. 생긴 건 멀쩡한 놈이 사람을 그렇게 패고 다니니 쯧쯧.”

잔인하고 비열한 역으로 출연했는데 아직 사람들이 순수해서 그런지 드라마 캐릭터를 현실과 혼동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가끔은 동민에게 들릴 정도로 나쁜 놈이라며 흉을 보는 사람이 있었는데 살짝 흘겨보면 깜짝 놀라 하며 도망칠 정도로 무서운 배역을 맡고 있었다.

반면 동민의 희생으로 원래도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이종재는 더욱 사랑을 받게 되었고, 고연정의 기사로 여성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지금도 이런데 다음 주에 내가 재희를 죽이면 국민 빌런이 되어 버리겠네.”

역대급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드라마다 보니 최만수도 샌드 시계 때문에 상남자 이미지가 굳어 버리는데 동민도 이러다 빌런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아닌지 조금 걱정되었다.

‘바로 군대 갈 거니까 상관없겠지.’

당장은 사람들이 드라마에 빠져 있겠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연기를 할 것도 아니고, 군대에 가면 잊혀질 거라 생각했다.

군대에 가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드라마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한국 드라마 현장은 할리우드와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촬영 현장 사람들의 열정이 넘쳐흘렀고, 아직 시스템이 확립되지 않았는데도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 것도 신기했다.

동민이 나오는 장면이 조금씩 늘어났고, 함께 엑션 장면을 찍던 최만수와도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잘생기고 할리우드에서 왔다고 해서 이상할 것 같았는데 너 꽤 괜찮은 녀석이구나.”

“감사합니다. 선배님이 잘 챙겨 주셔서 처음 드라마에 출연 하는 건데도 재미있게 촬영할 수 있었네요.”

“그래. 드라마가 끝나더라도 종종 보자고.”

“죄송한데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군대를 가야 해서요. 선배님을 뵈려면 휴가 때밖에 시간이 안 되겠네요.”

“아직 어린 거로 알고 있는데 군대를 가다니 기특한 녀석이었군.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는데 군대를 안 가는 방법도 있지 않나.”

동민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군대에 가기로 결정했다며, 한국인이라면 국가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말했고, 최만수는 동민의 말을 듣고는 더욱 좋아했다.

“그래. 남자라면 군대를 가야지.”

최만수는 동민에게 자신의 군 생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특전사 출신같이 생긴 그는 2대 독자라는 이유로 6개월 방위 근무만 마치고 나왔었다.

베이비부머로 인구가 넘쳐나던 기간이라 군대를 빠질 수도 있었는데 최소한의 복무라도 하고 나왔다며 자신은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조금 쑥스럽다고 말했다.

자신은 하지 못한 멋진 군 생활을 하고 오라는 덕담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최만수가 동민에게 했다.

그와는 금방 친해졌지만, 이종재는 동민을 조금 어려워했는데 격투 장면 합을 맞추다 보니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뛰어난 무술 실력과 할리우드 배경을 지닌 동민이 아직 신인인 그에게는 너무 높아 보였던 것이다.

“이 드라마만 끝나면 스타가 되어 있을 거니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연기해요. 형은 분명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될 수 있을 거예요.”

“고마워. 그래도 내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서 모두에게 미안하네.”

“연기야 앞으로 늘려 가면 되는 거고, 운도 실력이라고 형이 맡은 역은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지금처럼 침묵을 유지하는 게 더 좋은 배역이에요.”

동민이 계속 다독거려 주자 이종재도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높아져 가는 자신의 인기를 실감하자 자신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배우 말고도 동민을 특별히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중학 PD는 동민이 보일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했다.

“덕분에 화질이 비교도 되지 않게 좋아졌어. 녹음 상태도 너무 좋아.”

“다행이네요. 이렇게 좋은 작품은 좋은 영상과 음향으로 남겨야죠.”

동민은 전생에 샌드 시계를 성인이 되어 다시 본 적이 있었는데 조악한 화질과 고르지 못한 녹음으로 상당히 아쉬움을 느꼈었다.

스토리나 연기, 구성이 너무 훌륭한데 필름의 퀄리티가 떨어져 보는 내내 답답했는데 이번에는 동민이 투자를 하면서 드라마에 영화 필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고가의 필름을 사용했더니 돈값은 하는지 화질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녹음기기도 최신 장비로 교체해 대사가 고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드라마의 초반부는 동민이 합류하기 전에 찍는 바람에 화질에서 차이가 났지만, 주인공들의 과거를 다루고 있는 만큼 회상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잘 어울리기도 했다.

그러한 이유로 김 PD는 동민을 볼 때마다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신가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은데?”

“어휴.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든 자네를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

김 PD가 눈짓을 하자 그의 옆에 있던 남자가 동민에게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김 선배와 함께 SBC에서 드라마 피디를 맡고 있는 박 PD라고 합니다. 동민 군의 액션은 잘 보고 있습니다.”

“피디님이셨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샌드 시계가 끝나고 다음 드라마를 준비 중인데 대기업 연대 자동차에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받은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속도로 사나이라는 허용만 작가님의 만화를 원작으로 만드는 드라마인데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동민 군을 캐스팅하고 싶습니다. 나스카 레이서 역할인데 미국 지하 경기장에서 격투를 하는 장면도 있는데 무술 실력이 뛰어나서 잘 어울릴 것 같더군요. 미국에서 촬영해야 하는 장면도 많이 있는데 마침 영어도 잘하시니 모든 조건이 완벽하군요.”

동민이 김 PD를 쳐다보자 그가 이미 군대 가는 건 이야기했다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저희 드라마에는 여러 인기 배우가 출연하는데 이번에 출연하시면 분명 유명 배우가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군대는 저희 방송국에서 힘써 드릴 테니 입대일을 조금만 미루시죠.”

“박 PD. 동민 군은 한국에서 활동할 생각이 없다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악역으로 출연해 주지 않았나. 자네가 어떤 마음인 줄은 알고 있지만, 캐스팅하기는 힘들 거야.”

동민은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입대를 연기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샌드 시계의 경우 워낙 명드라마로 한국 드라마 역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기도 하고, 때마침 입대 전 스케줄이 딱 맞아떨어지기에 허락을 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고속도로 사나이가 나쁜 드라마는 아니었다.

“저 말고 다른 배우를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사실 이번에 재희 역을 맡으면서 인기가 올라간 이종재를 쓰려고 했는데 그 녀석도 군대를 간다고 하더군. 마스크가 좋은 신인 배우를 정하긴 했는데 아직 신인이라 연기력 문제도 있고, 자네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직접 보고 결정하려 했는데 꼭 출연해 줬으면 좋겠네.”

고속도로 사나이에서 동민이 연기하길 원하는 배역에는 작년 아홉꼬리여우 영화로 데뷔한 장우성이 출연하게 된다.

아주 호화 캐스팅으로 구성된 드라마인데 주인공에 이명헌과 장우성이 형제로 나오고, 누나로 이용애가 출연한다.

히로인 역은 채진실이 맡게 되고, 굵직한 연기파 배우가 대거 출연하면서 꿈의 라인업이 완성된다.

호화로운 출연진을 가진 고속도로 사나이는 자동차 관련 드라마인 만큼 연대자동차에서 공식 협찬사로 이름을 올리며 제작비로만 무려 16억 원 이상을 지원한다.

미국 로케에서는 연대자동차 승용 모델 차량을 50대가량 투입하면서 새로운 모델을 선보이기도 하고, 사내 직원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1금 보안 구역인 자동차기술연구소와 디자인실까지 세트로 제공한다.

자동차 대기업의 대대적인 투자로 TV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인 전 장면 영화 필름 촬영을 하게 되고, 풍부한 색감으로 멋진 영상미를 뽑아낸다.

하지만, 연대자동차에서 제작에 거액을 투자한 만큼 드라마 각본에도 손을 뻗치게 되는데 뛰어난 스토리와 훌륭한 연기, 완성도 높은 OST로 훌륭한 작품을 완성했음에도 연대자동차 홍보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그래도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고속도로 사나이를 본 학생들이 자동차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꾸게 되고 실제로도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직은 한국 자동차가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엔 많이 부족하지만, 많은 인력이 드라마의 영향으로 자동차 업계에 뛰어들면서 2020년경에는 한국의 자동차가 환골탈태를 하게 된다.

샌드 시계를 보고는 학생들이 조직폭력배가 되고 싶어 하는 것 보다 수백 수천 배 긍정적인 영향력이었다.

“저는 딱 2년 군 복무를 마치고, 바로 복학할 계획이라 드라마에 출연하는 건 힘들겠네요.”

“정말 안 되겠는가?”

“저 말고 다른 신인에게 기회를 주세요. 그 사람도 분명 훌륭한 배우로 성장할 수 있을 거예요. 대신 미국에서 촬영하실 때 도움은 드릴게요. 라스베이거스랑, 데스 밸리에서 촬영하실 것 같은데 할리우드에 지인들이 많이 있어서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동민은 기왕 도와주기로 마음먹은 거 자동차 액션에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있는 폭발왕 마이크 베이를 소개해 줄 생각이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고속도로 사나이의 퀄리티가 몇 단계 올라갈 수 있을 거다.

“정말인가? 안 그래도 미국 촬영을 준비하는데 맨땅에 헤딩하는 거라 어려움이 많았는데 큰 도움이 되겠군. 어떤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하는 건가?”

“자동차 추격신을 잘 찍기로 유명한 감독을 소개해 드릴게요. 자동차 폭파 장면이 혹시 있다면, 정말 맛깔나게 만드실 수 있을 거예요.”

동민이 미국에 있었다면 친한 할리우드 배우를 무보수 까메오로 출연시킬 수 있겠지만, 군대에 있어야 하기에 불가능했고, 마이크 베이를 소개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박 PD와의 대화를 지켜본 김 PD의 눈에서는 더욱더 많은 꿀이 흘러내렸고, 샌드 시계 촬영이 끝날 때까지 동민의 편의를 원로 배우만큼 봐 주었다.

“나 떨고 있냐?”

“아니.”

“그게 겁나. 내가 겁날까 봐.”

< 135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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