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리우드 김치 재벌-118화 (103/265)

< 118 >

미국 대학 오리엔테이션은 생각보다 훨씬 더 평범했다.

한국처럼 1박 2일로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간단히 학교 설명과 학과 프레젠테이션이 진행되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은 졸업생 선배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는 것이었는데 USC 마피아라는 별명에 어울리는 엄청난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고, 동문끼리 대놓고 밀어주는 문화가 있었다.

“여러분도 USC를 졸업하면 선배들이 도와주겠지만, 사회에 자리를 잡으면 후배를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USC의 결속력은 여러분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잊지 말고 기억하세요.”

신입생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조교들을 따라다니며 캠퍼스 투어를 했고, 인생 2회차인 동민은 별다른 감흥 없이 그들을 따라다녔다.

캠퍼스가 삼촌 집에서 가까이 있어 지나가다 몇 번 들리기도 했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고는 로스앤젤레스 남쪽에 있는 흑인 거주 구역과 거리가 가까워 치안이 조금 불안해 이전 이야기도 나왔었지만, 할렘의 확산을 막는 마지막 보류로 오히려 대학을 중심으로 도시를 발전시키기로 계획을 세운다.

반나절 정도 따라다니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났고, 동민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인솔자가 따로 찾아왔다.

“다니엘 킴이죠? 잠시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제가 맞긴 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별다른 건 아니고 영화학과 학과장님이 잠시 보자고 하시네요.”

인솔자를 따라 딘 오피스로 갔고, 거기에는 아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에드워드 씨 아니세요?”

“하하. 자네를 여기서 보니 기분이 이상하긴 하군. USC 영화학과에 온 것을 환영하네.”

영화학과장 에드워드는 동민이 할리우드 세탁소에서 여러 번 보았던 단골손님이었다.

세탁소의 위치가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베버리힐즈에 가까이 있기에 영화 관련인과 베버리힐즈에 사는 부자들도 자주 세탁소를 이용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역시 베버리힐즈에 살면서 할리우드 세탁소를 자주 이용했고, 동민을 어릴 적부터 쭉 보아왔기에 서로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에드워드 씨가 USC 영화학과의 학과장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요. 이제는 학과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세탁소에서는 편하게 불러 주게나. 학교 안에서는 아무래도 딘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지.”

나름 친분이 있는 사람이 학과장이라는 사실에 동민이 잠시 당황해했지만, 에드워드 학과장은 동민의 정체를 잘 알고 있어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다.

“스티브 스필버그 감독이 자네 이야기를 하더군. 특별한 녀석이 입학을 하니 잘 부탁한다며, 웬만하면 퇴학을 시켜서 빨리 자신에게 보내달라는 말도 했다네.”

“공부하려는 학생을 퇴학시키라니 이상한 분이네요.”

“하하. 나도 그렇게 대답했단다. 카메룬 감독에게도 연락이 왔고, 크리스 콜럼버스와 팀 볼튼 감독에게서도 직접 전화가 왔단다. 네 이야기를 종종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감독들이 직접 연락을 할 줄은 몰랐구나.”

에드워드 학과장은 동민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말했고, 학교의 발전을 위해 힘써 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민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은 영화 관련된 활동이 있을 시 학업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최대한 지원해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결석을 해도 괜찮다는 말인가요?”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지. 그래도 학업에 지장이 가면 안 되니 자네가 빠진 수업은 교수들에게 직접 보충 수업을 할 수 있도록 지시해 두겠네.”

대학 교수에게 1대1 보충 수업을 들으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에드워드 학과장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고, 동민은 이것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헷갈렸다.

어찌 되었든 학과장이 동민의 뒷배가 되어 주기로 한 상황이라 앞으로의 대학 생활은 확실히 편할 것 같았다.

“자네에게 편의를 봐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학칙에 어긋나는 특혜를 줄 수는 없네. 학점은 시험 성적 결과대로 정확하게 나갈 것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너무 공부에 손을 놓지는 말게나.”

“그럴 거면 USC에 지원하지 않고 바로 영화계에서 일을 시작했을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전교 1등을 쭉 해 왔는데 대학에서도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싶네요.”

영화 이론의 경우 이미 전생에 대부분 배웠던 것이고 어떻게 보면 미래의 영화 산업을 경험도 했기에 교수들보다 더 정확한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회귀하면서 기억력도 좋아졌기에 공부에 대한 걱정은 별로 하지 않고 있었다.

동민은 학과장실에서 학과장과 요즘 가장 잘나가고 있는 사자왕과 포레스트 캄프 이야기를 나누다 세탁소로 돌아갔다.

“그래도 대학교 첫 수업인데 빠져도 괜찮은 거야?”

“학과장님한테 허락받았다니까요. 거기다 1학년 학기 초에는 진도도 천천히 나가서 괜찮아요.”

“대학 처음 가는 녀석이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동민은 대학교 1학년 첫 수업부터 땡땡이를 치고 한국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 한국에 한 번 함께 갔었던 쿠안틴과 함께 가는 것이었는데 그가 완성한 폴프 픽션 상영과 홍보를 위한 방한이었다.

폴프 픽션은 특이하게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9월 초에 개봉하고, 미국에서는 10월 중순에 개봉하기로 했다.

쿠안틴의 첫 작품인 개들의 저수지는 저예산 독립 영화로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못하고 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개봉했지만, 폴프 픽션은 꽤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첫 번째 정식 상업 영화라 그런지 쿠안틴은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고, 한국에도 미리 도착해 첫 번째로 상영되는 영화를 직접 영화관에서 보고 싶어 했다.

“이거 왜 이렇게 긴장되지? 내가 쓴 대사가 자막으로 잘 번역되었을까?”

“번역은 기대하지 말아요. 쿠안틴 영화는 색감도 특이하고 홍콩 느와르 스타일이라 한국 사람들이 좋아할 거예요. 호들갑 그만 떨고, 오징어 버터구이나 먹으면서 봐요.”

쿠안틴은 오징어 버터구이를 질겅질겅 씹으며 영화와 관객들의 반응을 둘러보았고, 추석 연휴를 즐기기 위해 가족 단위로 영화관에 와서 자신의 영화를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기뻐했다.

“잔인해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다들 좋아하네?”

“한국 사람들이 조금 화끈하긴 하죠. 거기다 진짜 잔인한 장면은 다 편집되어서 그렇게 자극적이지도 않았어요.”

영화관에서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호프에 들어가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쿠안틴과 사람들의 반응에 관해 이야기를 했다.

동민도 이제 대학생이기에 한국에서는 음주가 가능했고, 옛날 통닭과 함께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는 특유의 맛과 느낌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레드 망고 담배를 넣었던데 그건 무슨 의미로 나오는 거예요?”

“레드 망고 담배는 가상의 브랜드로 일종의 이스터 에그 같은 거야. 내 영화에는 항상 그 담배가 나올 건데, B급 감성도 나면서 홍콩 느와르 감성을 더한 브랜드지.”

폴프 픽션에서는 미아가 잭 레빗 슬림에서 빈센트에게 담배를 말아 달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노골적으로 미아가 레드 망고 담배를 드는 게 나온다.

레드 망고 담배는 쿠안틴의 첫 작품인 개들의 저수지에서 처음 나왔는데 이번 폴프 픽션에서는 대놓고 PPL처럼 나왔고, 이후 그의 영화에 계속해서 나오게 된다.

특히 킬 빈에서는 대형 광고 간판에 레드 망고 담배가 나온다.

“성공적으로 상업 상영을 한 거 축하해요.”

“고마워. 한국에서 치킨과 맥주를 먹으며 축하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하네.”

“흥행에 대성공해서 투자금을 불려 주길 바래요.”

“하하. 아주 훌륭한 영화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될 거야.”

쿠안틴은 적당히 흥행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8백만 달러로 만들어진 폴프 픽션은 전 세계 흥행 2억 1천만 달러를 넘게 벌어들이면서 제작비의 25배에 가까운 엄청난 성적을 달성하게 된다.

사자왕과 포레스트 캄프, 짐 개리의 마스크와, 아놀드의 트루 라이가 경쟁 중인 여름 극장가에서 2억 달러가 넘는 성적은 그야말로 대단한 기록이었다.

뒤죽박죽 꼬아버린 시간 순서와 알 수 없는 사건들로 관객들은 정신없이 영화를 보다 보면 마지막에 숨겨둔 복선과 암시를 확인하면서 쿠안틴의 천재성을 느끼게 된다.

한국에서도 추석 시즌 개봉작 중 흥행 1위를 하면서 성공적인 쿠안틴의 정식 데뷔를 장식한다.

“내일부터 영화 잡지사랑 인터뷰를 하는 거죠?”

“인터뷰가 3건이나 잡혀 있긴 한데 감독 단독 인터뷰니까 편하게 이야기해도 괜찮겠지?”

“그래도 언론이랑 이야기하는 거니까 말조심해야 할 수도 있어요. 한국이 개방적이면서도 은근 보수적이에요.”

동민은 쿠안틴에게 한국 언론과 인터뷰할 때 주의해야 할 점과 요령을 알려 주었고, 다음 날 그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쿠안틴 티란타노 감독님. 이번에 개봉하신 폴프 픽션은 정말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상당히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셨더군요.”

“안녕하쇄요우. 저눈 쿠안틴입뉘다. 김취를 매일 먹코 이써요. 한식 마뉘 조아해요.”

쿠안틴이 동민이 알려준 인사말을 건네자 인터뷰를 하러 온 기자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 관심이 많으셨군요. 그래서 영화 첫 장면에 한국을 언급하신 건가요?”

“그건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 블랙 조크로 넣은 대사입니다. 실제로 흑인 고객들이 한국인 상점 주인의 발음을 알아듣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한답니다.”

인터뷰어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을 했는데 긴장한 쿠안틴이 진지하게 해명을 했다.

“감독님 이력 중에 상당히 인상적인 게 있던데 비디오 매장에서 점원으로 오래 일을 하셨더군요.”

“맞습니다. 저는 비디오 매장에서 수많은 영화를 섭렵했고, 할리우드 관계자들과 깊은 토론을 나누면서 영화에 관한 지식을 쌓아 왔습니다. 덕분에 저만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거 용기가 나는 말이네요. 사실 저도 영화를 찍은 경험이 있는데 홀라당 망하는 바람에 지금은 비디오 매장에서 일을 하면서 영화 평론글을 쓰고 있답니다.”

쿠안틴은 그의 말을 듣고는 정말 기뻐하며 더욱 열심히 그의 질문에 답변을 해 주었다.

인터뷰를 보는 남자에게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도 물어보았는데 그가 주저하더니 해가 꾸는 달 꿈이라는 한국판 범죄 로맨스 느와르 영화를 30살의 나이에 만들었다고 답했다.

이숭철이라는 유명 가수가 주인공으로 나왔는데 결과는 그야말로 폭망이었다.

본인 스스로 망했다고 하는 이 영화는 이후 시간만 있으면 유통되는 비디오를 모두 수집해 소각해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제작사의 입김과 그의 B급 취향, 여러 가지 사정이 혼재된 이 영화는 감독을 10년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게 만든다.

영화를 직접 보지 않는다면 평범한 느와르 필름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상 희대의 괴작으로 홍콩 느와르를 지향한다며 아비장전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멋을 부린 대사, 액션, 기타 설정으로 보는 이의 손발을 오징어로 만들어 준다.

동민도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이라 훗날 기대를 하고 어렵게 구해 영화를 보았는데 그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날 정도였다.

< 118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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