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쿠안틴이 구상 중인 영화는 똥종이로 찍어낸 싸구려 잡지라는 뜻의 폴프 픽션이었다.
비평적으로도 매우 높은 평가를 받게 되는 이 영화는 기존 영화의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파괴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옴니버스 형식을 따르면서도 뒤죽박죽된 시간 순서로 영화를 구성하고, 파격적인 스토리와 과감한 시도, 뛰어난 영상미로 관객과 평론가를 사로잡게 된다.
워낙 뒤죽박죽인 시간 흐름으로 한국에서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지방에 있는 영사기사가 필름을 받아 보고는 필름이 이상하게 편집된 채로 왔다며 자신이 생각한 시간 순서로 재편집해 상영하게 된다.
그런데 쿠안틴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매우 흥미로워하면서 그렇게 수정된 필름을 손에 넣고 싶어 안달한다.
칸 영화제에서 뛰어난 작품들과 경쟁하고, 결국 폴프 픽션이 황금종려상을 받게 되는데 어느 관객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레드가 상을 받아야 한다며 항의성 고함을 지른다.
이에 쿠안틴은 가운뎃손가락을 보이며 자신의 맞대응을 하고 이 장면 역시 녹화되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 준다.
“이번에도 영화에 출연할 거예요?”
“당연하지. 큰 역은 아니더라고 잠깐 나오는 조연으로 나갈 생각이야.”
영화에 직접 출연하는 걸 좋아하는 쿠안틴은 새뮤얼 잭선의 친구로 나와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한다.
저예산 영화치고는 출연진이 상당히 화려한데, 새뮤얼 잭선과, 원래 캐스팅 목록에는 없었지만, 존 트라불타의 팬인 쿠안틴이 브라이언 드 팔마에게 중개를 부탁해 캐스팅에 성공하게 된다.
우마 샤먼은 이후로도 계속 함께 작품을 하고 두 사람은 잠시 교제를 하기도 한다.
비교적 저예산임에도 어떻게 캐스팅했는지 신기한 영화 홍보에 큰 도움이 된 브루스 윌리는 평소에도 독립 영화나 작은 영화에 출연하는 것을 좋아해 출연하게 된다.
“이번에는 개들의 저수지와 다르게 여배우도 나오는 거죠?”
“당연하지. 이미 점찍어 둔 배우도 있다고.”
“그럼 그 장면도 넣을 거예요?”
“흐흐흐. 당연히 넣어야지.”
동민이 이야기한 그 장면은 쿠안틴을 처음 만났을 때 친해지기 위해 거짓으로 고백했던 여성의 발 이야기였다.
발 페티쉬가 있는 그는 다음 영화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발을 클로즈업한 장면을 삽입하게 되고, 이후로도 계속해서 여성의 발을 영화에 넣는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이후로는 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쿠안틴은 단번에 알아들었고, 흥분 했는지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조감독으로 도와줄 거지?”
“제작비도 지원할 거예요.”
저예산 영화의 특성상 처음부터 끝까지 세부적인 것도 감독이 확인하고 신경 써야 했는데 동민에게는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영화 촬영도 로스앤젤레스에서 하기에 학기 중에도 부담 없이 그와 함께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고3이긴 한데 SAT 준비는 이미 마쳤고, 조감독 경험이 오히려 입학하는 데는 유리할 거예요.”
“그래 이력서에 명감독인 쿠안틴 티란타노 감독과 함께 작업했다는 게 있으면 하버드에도 합격할 수 있을 걸?”
촬영은 내년에야 시작되지만, 미리 준비할 것이 많이 있었고, 동민은 쿠안틴과 함께 천천히 준비 작업을 했다.
폴프 픽션 사전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 방학이 찾아왔고, 동민은 한국으로 갈 준비를 했다.
“한국에 가기 전에 이건 꼭 보고 가야지.”
1993년의 여름은 영화관에서 튀어나온 공룡들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스티브 스필버그 감독의 주라식랜드가 6월에 개봉했고, 사람들은 스크린에서 살아 움직이는 공룡을 보고 말 그대로 충격을 받았다.
배드맨 이후로 미국 전역에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 긴 줄이 생겨났고,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민은 시사회에 초대 받아 영화에 출연한 배우와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영화를 보았는데 다시 보니 이전에는 몰랐던 배우가 주라식랜드에서 나왔다.
“새뮤엘 잭선이 여기에도 나왔었네?”
폴프 픽션에서 아프로 머리를 하고, 잔인한 살인자로 나오는 새뮤엘 잭선은 주라식랜드에서는 범생이 같아 보이는 흑인 과학자로 출연했다.
오랜만에 다시 본 주라식랜드는 전생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영화를 여러 번 보아온 동민이 보아도 재미있었다.
동민이야 CG가 익숙했지만, 컴퓨터 그래픽에 생소한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공룡의 움직임에 열광했다.
주라식랜드는 개봉일부터 매일 새로운 흥행 기록을 달성했고,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공룡 열풍이 퍼져갔다.
영화가 성공적으로 개봉하는 것을 직접 확인한 동민은 한국으로 날아갔다.
여름 방학 시즌에 맞춰 6월에 주라식랜드를 개봉한 미국과 다르게 한국은 여름 방학이 늦게 시작하기에 아직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고, 대신 다른 열풍이 한국을 강타하고 있었다.
“우리 아들 일 년 사이에 키가 많이 자랐구나.”
동민은 중학교 이후로 키 성장이 느려졌는데 디주니에서 열심히 춤을 추다 보니 성장판이 자극을 받았는지 키가 부쩍 자라 있었다.
엄마가 집에서 동민을 반겨 주었고, 아빠는 계속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는 언제 들어오신대요?”
“오늘은 네가 왔으니 일찍 들어온다고 했는데 잘 모르겠구나. 워낙 바빠서 엄마도 얼굴 보기가 힘들단다.”
한국에 불고 있는 열풍은 2집으로 돌아온 서대진과 아이들이었다.
데뷔한 지 1년 만에 하연가와 나에게, 마지막 공연이라는 곡으로 2집 컴백을 한 서대진과 아이들은 220만 장이라는 엄청난 판매 기록을 세우며 한국을 휩쓸고 있었다.
작년에 1집으로 데뷔해 4년 동안 매년 새로운 앨범으로 돌아오는데 엄청나게 바쁜 스케줄 속에 혼자서 곡을 다 쓰는 현철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텔레비전에는 계속해서 서대진과 아이들이 나왔고, 밖을 돌아다녀도 그들의 음악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들이 한국을 점령한 것을 확인하고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준 집밥을 먹고 쉬고 있는데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왔다.
“아이고 우리 아들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아빠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은데?”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찮으세요?”
일 년 만에 본 아빠는 작년 여름보다 더 홀쭉해져 있었다.
서대진과 아이들이 신드룸을 일으키면서 아빠의 업무도 기적처럼 늘어났고, 살인 같은 스케줄과 미디어의 관심으로 기력이 빠져 나가 있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아빠가 소파에 쓰러지듯 앉으며 말했다.
“동민아. 서대진과 아이들이 너무 커져서 아빠가 감당하기엔 힘이 들구나. 네가 잘될 거라고 하긴 했는데 예상 밖으로 너무 잘되어 버렸어.”
방송국에서는 서대진과 아이들이 더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를 원했는데 현철은 예능이나 코미디 프로에 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복장 역시 방송국에서 요구하는 규정이 있었고, 서대진과 아이들은 원하는 복장을 못 입게 하면 음악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겠다며 아티스트로서의 목소리를 높였다.
방송국 출신인 아빠는 둘 사이에 끼여서 조율을 하느라 피가 마르는 상황이었다.
“너무 힘드시면 계약 연장 안 하셔도 돼요. 2년 계약 하셨죠?”
“그래도 서대진과 아이들이 벌어다 주는 돈이 얼만데 계약을 포기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지금은 힘들더라도 금방 적응될 거야.”
10대의 마음을 휘어잡으면서 강력한 팬덤이 형성되었고, 청소년의 소비로 매출이 올라가고 있기에 서대진과 아이들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했다.
원래 1집 활동 후에 서대진은 직접 기획사를 차려 독립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동민의 간섭으로 원하는 대로 지원해 주어 아직 계약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큰 문제가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계약을 할 수는 있겠지만, 현철과는 이미 친해졌기에 사이가 좋을 때 해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제가 현철이 형이랑 한 번 이야기를 해 볼게요. 형도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독립을 원할 수도 있어요.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에서 영화 수입을 해야 하니 기획사는 계약이 만료되면 그만 하세요.”
아빠는 끝까지 미련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동안 옆에서 함께 한 엄마가 이러다 몸 망가지겠다며 동민이의 의견을 따르자고 설득했다.
계약을 연장하면 미국으로 가 버리겠다는 엄마의 협박에 결국 아빠는 서대진과 아이들의 의견을 따르겠다며 항복 선언을 했다.
“일단 2집 활동을 마칠 때 까지는 계약을 유지하고 다음 앨범 작업에 들어갈 때 결정하도록 하마.”
재계약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아빠는 시원섭섭한 감정을 느끼며 피로에 지쳐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아빠와 함께 기획사에 가자 서대진과 아이들이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언제 한국에 온 거야? 아직 학기 중 아니야?”
“미국은 여름 방학이 일찍 시작해요. 대신 겨울 방학이 짧고요. 요즘 한국에서 서대진과 아이들이 가장 유명하던데요?”
여름 방학이라 한국에 온 동민을 다들 반겨 주었다.
일 년 만에 부쩍 자라난 동민을 신기해했고, 미국에서 가지고 온 음반을 선물로 주었다.
“디주니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면서? 미국 텔레비전 쇼는 어땠어?”
“춤이랑 노래를 주로 하긴 했는데 어린이 프로라 동작이 큰 율동에 가까웠어요.”
미국 댄스에 관심이 많은 서대진과 아이들이기에 동민에게 춤을 보여 달라고 했다.
디주니 어린이 프로그램은 보수적인 미국 사회에서 보는 채널이기에 춤의 대부분이 포크댄스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동민이 잠시 고민했지만, 한국에는 디주니 채널이 없기에 조금만 보여주기로 했다.
“하하. 정말 건전한 춤이네. 아이들이 보기에 좋겠다.”
현철은 동민의 춤을 보고 재미있어 했고, 댄서 출신인 형섭과 준호는 동작을 진지하게 분석했다.
서로 연습 했던 춤을 보여주고, 일 년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보인 것은 다음 달에 개봉하는 주라식랜드였는데 공룡이 실제로 나온다는 걸 믿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공룡 비슷한 게 나오는 영화라고는 일본에서 인형 탈을 쓰고 만든 영화밖에 없기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모습을 상상을 하지 못했다.
미국 생활에 관심이 많은 세 사람은 동민에게 여러 질문을 했고, 대답을 해 주다 적당한 타이밍에 재계약 이야기를 꺼냈다.
“아빠가 2년 계약을 했는데 올해 활동이 끝나면 만기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부담 가지지 말고 이야기해 주세요. 아빠는 원래 영화 쪽 사업을 하고 있어서 재계약 안 해도 상관없어요.”
“사실 나도 고민하고 있었어. 대표님이 잘해 주시긴 한데 개인적으로 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재계약을 힘들 수도 있을 거야. 이런 건 직접 말씀드려야 하는데 너에게 먼저 말해 버렸네.”
“형들이 너무 잘나가는 바람에 아빠가 많이 힘들어 하더라고요. 기획사는 처음인데 유일한 가수가 너무 유명해져서 정신이 없나 봐요. 형들은 독립해도 잘할 것 같으니 마음 가는 대로 하세요.”
동민의 예상대로 이미 독립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재계약은 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계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우리 약속한 게 있었지?”
< 101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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