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94 >
“자메이카가 배경이니까 주인공이 전부 흑인이네요.”
“디주니에서 특이한 영화를 찍네요? 제작비가 1,400만 달러밖에 안 되는 걸 보니 별다른 기대는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닐은 동민이 선택한 영화를 황당하게 보았다.
그로 그럴 것이 제작사가 디주니인데 주인공이 전부 자메이카 출신 흑인이고, 거기다 스포츠 영화이기에 왜 이런 영화를 디주니에서 만드는지 황당해했다.
하지만, 디주니는 사장이 바뀌면서 적극적인 인수 합병과 사업의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이것도 윌리는 자유처럼 아이들을 타겟으로 만드는 영화인가요?”
“조금 달라요. 이건 성인 시장도 같이 노리고 있거든요. 아무래도 흑인 관람객도 염두해 두고 있는 것 같고요.”
동민이 선택한 영화는 미래에 한국에서 비슷한 영화를 만들면서 재조명받게 되는 작품이었다.
모종의 억울한 사정으로 88 서울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게 된 주인공은 어떻게든 올림픽에 나갈 방법을 찾다가 우연히 봅슬레이에 대해 듣게 된다.
동계 올림픽까지는 고작 3개월 남았지만 출전을 결심하고, 우여곡절 끝에 코치를 선임한다.
팀원을 모아 자메이카 최초이자 유일의 봅슬레이 팀을 결성한 이들은 눈이라고는 평생 본 적 없는 곳에서 열심히 연습을 하고 동계 올림픽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비인기 종목인 데다 생소한 봅슬레이 도전에 시민들은 관심을 주지 않고 체육부 장관과 스폰서의 비웃음을 사지만, 차를 판 돈과 사비로 동계 올림픽에 나가게 된다.
동계 올림픽이 열린 캐나다 캘거리에서도 주변의 무시와 야유를 받지만 꿋꿋이 출전 자격을 얻어내고 본선에 진출한다.
본선 1차 시도에서 주인공의 실수로 저조한 성적을 내며 꼴지를 기록하지만, 자메이카 특유의 방식으로 재정비하고 2차에서는 놀라운 성적을 내면서 메달권에 올라간다.
이후 모든 이의 관심을 받으면서 언더독의 반란을 바라는 사람들의 응원을 받지만 3차 시도에서 결승점을 앞두고 봅슬레이가 부서지는 바람에 뒤집혀 실격하고 만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봅슬레이에서 내려 직접 밀며 결승점을 통과하게 되고, 그들을 무시하고 괄시하던 이들의 박수를 받으며 스포츠 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쿨런잉이라 제목도 특이하네요.”
“영화 시나리오는 딱히 흠잡을 곳이 없이 상업성을 잘 버무려 놓았어요. 아마 좋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제작비가 1,400만 달러밖에 안 되니 부담은 없네요. 50%인 700만 달러까지는 투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명한 배우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디주니에서도 별다른 기대를 하고 있지 않기에 저렴한 제작비인 1,400만 달러로 만들어지지만, 북미에서만 7천만 달러를 거두고 세계적으로는 10배가 넘는 1억 5,500만 달러의 흥행 수익을 달성한다.
이후로도 2차 시장에서 꾸준히 사랑을 받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저비용 고수익의 알짜 대박 영화였다.
뒤늦게 인터넷 상에 ‘탈룰라’ 같은 밈을 갑작스럽게 만들어 내면서 다시 소문을 타기도 한다.
“그럼 이제 전부 끝난 건가요?”
동민이 마지막 영화라고 한 쿨런잉에 사인을 하자 닐이 한 해 마무리가 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워하는 동민의 표정을 본 그가 다시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직 하나 더 있는 거죠? 이번엔 뭐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영화인 것 같은데 흥행도 어느 정도는 하겠지만, 큰 대박을 잘 모르겠어서요. 분명 좋은 영화이기는 해요.”
“제가 한번 읽어 볼게요.”
닐은 동민이 망설이고 있는 영화를 직접 확인하겠다고 했고, 동민이 마지막에 숨겨 두었던 시나리오를 건네주었다.
“사랑의 성촉절? 특이한 이름이네요.”
축약본인 시놉서스를 읽던 닐이 처음에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읽다가 진지해지더니 마지막에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줄거리는 기상캐스터인 주인공이 매사에 불만과 불평을 가진 동료들에게도 평판이 좋지 않는 사람인데 성촉절 취재를 위해 펜실베니아 펑서토니로 떠나게 된다.
마을 주민의 환영과 친절에도 빨리 돌아가려고 불평을 하지만, 갑작스러운 폭설로 길이 모두 막히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펑소토니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다음날 눈을 뜬 주인공은 성촉절인 어제 2월 2일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깨닫고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이내 특유의 못된 심보를 발휘해 나쁜 장난을 하게 되는데, 마을 레스토랑 직원의 정보를 매일 캐내어 원나잇을 한다거나 음주운전으로 감옥에 가고, 평소 건강을 위해 먹지 않는 음식을 마구 먹기도 한다.
현금 수송 차량을 털어 초호화 생활을 즐기기도 하지만, 금방 반복되는 하루에 지쳐간다.
슬슬 지쳐갈 때쯤 방송국 일행이던 리타를 꼬시기로 마음먹지만, 매번 실패하게 된다.
결국 무한루프를 끊기 위해 원흉이 된 마멋을 납치하고 절벽에서 동귀어진 하기도 하지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같은 방에서 눈을 뜬다.
여러 방법으로 자살을 하지만, 계속 돌아오는 하루에 지쳐 동료인 리타에게 자신은 매일 반복되는 하루를 살고 있다고 고백하고 진심으로 속내를 털어 놓는다.
그 결과 꼬시려고 하면 멀어지던 그녀가 마음을 열고 다가왔고, 주인공은 그녀와 하루를 보내며 마음이 조금씩 치유되어 간다.
매번 무한루프를 즐기기만 하다가 주변인을 도와주게 되고, 자기계발도 시작해 이것저것 배우기도 한다.
그로 인해 문학에 능통해져 방송에서 멋있는 멘트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얼음 조각상을 만들고, 피아노에도 능통하게 된다.
자기계발만 하지 않고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마을의 유명인이 된다.
결국 그의 선행에 감동받은 리타와 호텔에서 정말로 손만 잡고 잔 이후 2월 3일이 되고, 주인공은 펑서터니에서 리타와 함께 정착해 살자며 집을 구하려는 장면에서 영화의 막이 내린다.
“재미있긴 한데 흥행은 장담 못하겠네요. 좋은 작품인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아마 당장은 그냥 그런 평가를 받을 건데 훗날에는 아주 좋은 작품으로 재평가 받을 만한 작품이에요.”
“그럼 뭘 고민하는 거예요? 제작비도 1,500만 달러밖에 안 하는데 투자하세요.”
빌 머레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사랑의 성촉절은 미국 흥행 수익 7천만 달러를 기록하고 전 세계 흥행 성적은 딱 1억 달러를 넘기면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낸다.
제작비가 1,500만 달러라는 걸 감안하면 좋은 성적이지만, 미래에 재평가되는 것에 비하면 썩 좋은 성적도 아니었다.
개봉 초기에는 그냥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라는 평을 받으나 2005년 재평론을 통해 “내용과 주제가 너무 명백하다 보니 그 뛰어남을 당장 알아채지 못하는 영화… 예전에는 내가 분명히 과소평가했으며… 위대한 영화.”라고 정정한다.
재평가가 있은 다음해에는 문화적, 역사적, 심미적 의의가 있는 영화를 영구 보존하는 National Film Registry의 목록에 추가되고, 일부 대학에서는 교육학개론 수업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랑의 성촉절은 최초는 아니지만 루프물의 정석이자 원조로 평가받기도 한다.
반복되는 시간이란 소재로 즐거움과 교훈을 주는 작품으로는 최초이고 루프물 장르를 확립한 작품이 된다.
처음에는 까칠하고 나쁜 성격의 이기적인 주인공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인생을 깨닫고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교훈을 담은 영화로 이후 시간을 반복하는 로맨스물에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인격적 결함이 있던 주인공이 우연히 초자연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내면을 성찰하고 인간성을 회복한다.”라는 플롯은 할리우드 코미디 영화의 한 갈래로 자리 잡게 된다.
동민도 전생에 영화 리뷰를 하면서 다시 보았던 영화 중에 상당히 충격과 감동을 받은 영화로 흥행을 떠나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몇 번의 하루를 반복하는 건가요?”
“시나리오를 보면 정확하게 34번의 2월 2일이 나오는데 당연히 그보다 훨씬 많을 거예요. 라흐마니노프 곡을 잘 칠 정도면 20년 이상 연습을 해야 할 건데 천 년 이상이지 않을까요?”
각본가의 말에 따르면 주인공 기준으로 1만 년 정도 하루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1년이 365일이니 365만 일을 반복하게 되는 셈이었다.
닐과 사랑의 성촉절 이야기를 나누다 투자하기로 결정하고 사인을 마쳤다.
전생에 동민이 종종 읽던 웹소설 루프물의 시초가 되는 영화에 투자를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정말로 끝이네요. 중간에 좋은 영화 시나리오가 나오면 또 투자하겠지만요.”
“예전에는 예산에 아슬아슬하게 딱 맞춰서 투자를 했는데 이제는 자금에 꽤 여유가 있네요.”
그동안 디주니 주식을 계속해서 모으고 있었지만, 어느덧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달았고, 여유 자금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다.
다행히도 김치 공장도 지었고, 한국에 아빠 회사를 설립하면서 정기적인 지출이 생겨 자금 흐름은 문제가 없었지만, 서대진과 아이들이 대박이 나면서 한국에도 현금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래도 법인을 설립하면서 내부 회계사를 고용해 다행이네요. 제가 숫자를 조금 보긴 하지만, 이제는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서요.”
“닐도 이제 슬슬 이직 준비를 해야겠네요.”
“저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으니 불러만 주시죠. 보스.”
동민은 그동안 도와준 닐과 계속 함께할 생각이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조금 더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설 계획이었다.
“일 년 반만 있으면 졸업이니까 그때 움직이도록 해요.”
“다니엘은 홈 스쿨링이나 조기 졸업 생각은 없어요?”
“당장 보면 그게 좋긴 하겠지만, 길게 생각하면 평범하게 학교를 마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대학도 가능하면 졸업까지 하고 싶어요.”
할리우드에서는 홈스쿨링으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고, 활동하기에는 그 편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유명해졌다가 고생하는 연예인을 워낙 많이 보아 왔기에 기초를 단단히 다져 오래 가고 싶은 동민이였다.
‘한류가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지.’
사실 아직 동양인으로서 미디어에 진출하는데 높은 장벽이 있었기에 급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동민은 계획대로 학교생활에 충실히 보냈고, 간간히 금용 소설을 번역하고 시나리오를 변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는 디주니 스튜디오로 끌려가 춤과 노래 레슨을 받다보니 금방 연말이 다가왔고, 레슨을 받기 싫었던 동민은 겨울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스위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위스는 처음 가보네.”
스위스를 떠나 전생을 합쳐도 유럽행은 처음인 동민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스위스까지는 11시간 정도 걸렸고, 한국에 가는 것 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퍼스트 클래스을 타고 이동했기에 장시간의 비행이었지만,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구나. 오는 길에 불편하지는 않았니?”
“전혀요. 여긴 자연이 너무 아름답네요. 동화 속에 나오는 마을 같아요.”
오랜만에 만난 어드리 햅번은 동민을 반갑게 반겨 주었다.
< 09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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