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8 >
동민이 숄 잰트로부터 구입하려고 하는 영상 판권은 1950년에 쓰인 오래된 판타지 소설이었다.
영국의 작가이자, 언어학자이며 대학 교수로 문학비평가 활동을 하던 존 로날드 루엘 토르킨 이라는 사람이 3부작으로 쓴 소설로 근대와 현대 판타지의 시조로 알려진 작품이었다.
토르킨의 작품 속 사건과 인물, 스토리도 훌륭하지만, 그가 창조한 세계관은 이후 판타지 장르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호르빗이라는 종족도 그가 만들었고, 오크나 엘프, 드워프 역시 토르킨이 창조한 종족이었다.
이외에도 마법이라든지 미스릴 같은 광물까지 창조했다. 언어학자로서 영어권이 아닌 다른 언어권 신화에 푹 빠져 있던 그는 영국에는 흥미진진한 신화가 부족하다며 판타지 장르 자체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가 쓴 가락지의 제왕은 50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4위에 기록될 정도로 엄청나게 팔렸다.
실력이 되는 이가 각 잡고 만든 소설이라 그런지 오랜 기간 엄청난 팬덤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은 보톤 토르키니스트로 불리며 활동했다.
토르키니스트는 일반 팬덤과 그 규모와 깊이를 달리하는데 상업적인 면보다 주로 학문적, 철학적인 면으로 파고들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한 연구를 좋아하는 영국에는 토르킨 학문이 존재하고, 열성 팬 중에는 고학력자 비중이 꽤 높았다.
“내가 진성 토르키니스트라는 건 알고 찾아 왔겠지?”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을 때 꽤나 깊게 관여하신 건 들었어요.”
“실사 영화화하기에는 나보다 젊은 자네가 더 좋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넘겨줄 수는 없다네. 내가 가락지의 제왕 문제를 낼 테니 맞혀 보게나. 자질을 보인다면 좋은 조건에 거래하도록 하겠네.”
동민도 진성 팬이기도 하고, 가락지의 제왕이라면 리뷰 영상을 여러 편 만들면서 수많은 자료를 조사하였기에 어느 정도 자신은 있었다.
“여러 종족의 대표가 모여 토론 끝에 가락지를 파괴하기로 하는고, 비밀결사대를 만들게 되지. 이때 몇 명이 참가하고 그들의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다행히 쉬운 거네요. 푸루도와 이웃 샤무엘, 메리안, 피핏 호르빗 4인방과 서부 방랑자였던 알고른, 곤돌을 대표하는 보루미루, 어둠숲의 요정을 대표하는 리골래스, 북부 난장이 대표 킴뤼, 신성의회 대표인 간도르프까지 총 9명이 가락지 원정 비밀 결사대로 구성되지요.”
“흠. 기본은 알고 있군. 내일까지 질문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없으니 핵심 질문 한 가지만 더 하겠네. 토르킨이 이 가락지의 제왕에서 특별한 메시지는 없다고 했지만, 강조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무엇인지 알고 있나?”
위대한 영웅의 일대기로 쓰인 것 같은 가락지의 제왕에는 토르킨이 중간중간 강조한 그의 철학이 있긴 했다.
잠시 고민하던 동민이 정답을 숄에게 말했다.
“평화롭고 욕심 없는 삶의 소중함.”
“정답일세. 토르킨이 직접 편지를 통해 밝혔었지.”
동민의 대답에 숄 잰트가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가 만족하는 표정을 짓자 동민이 영상 판권을 살 수 있겠다며 좋아했지만, 가격은 아주 사악했다.
“무려 토르킨의 가락지의 제왕인데 이 정도면 저렴한 거라네.”
“어휴. 제가 사겠다고 찾아왔으니 어쩔 수 없네요. 그런 이 가격에 계약 하는 거로 해요.”
“아. 그리고 애니메이션 판권도 사 가게나.”
“애니메이션은 직접 만드신 거라 애착이 있으신 거 아니에요? 안 주셔도 괜찮아요. 그건 제가 양보 할 게요.”
“판권이라는 게 어떻게든 분쟁이 발생하기 마련이란다.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이 서로 다른 작품이라고 해도 저작권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같이 사거라.”
숄 잰트가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동민에게 자신이 만들 애니메이션 판권도 함께 구매하라고 권유하였다.
생각해 보니 그의 말도 일리가 있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더니 이번에도 비싼 가격으로 동민의 눈탱이를 후려쳤다.
하지만, 판권 가격에 비해서 비싸다는 것이지 미래에 가락지의 제왕이 벌어다 줄 매출에 비교하면 거의 헐값에 가까웠다.
‘싸게 사긴 했지만 거의 10년을 묵혀야 하니 이 정도면 적절한 가격이겠지.’
“토르키니스트로서 기술이 빠르게 향상되어 내가 살아생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동민이 뜨끔했지만, 숄 잰트에게 기술 개발 투자를 하고 있으니 언젠가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했다.
닐에게 구체적인 계약을 맡겼고, 여름 방학이 끝나는 바람에 동민은 학교로 돌아갔다.
가을 학기가 되면서 고등학교 2학년으로 진학했고, 토미 맥과이어와 리오나르도 디케프리오는 졸업하여 학교에서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동민의 일상에는 큰 변화 없이 학교와 세탁소를 오가며 영화 투자를 하고, 스튜디오를 오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학교에서는 대학교 진학을 위한 진로 상담이 시작되었다.
“다니엘. 넌 USC 영화과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지?”
“네 선생님. 처음부터 거기로 진학할 생각이었어요.”
“네 성적이면 아이비리그에 있는 명문대도 진학할 수 있을 건데 이미 마음을 정했다니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구나.”
유니버시티 오브 서든 캘리포니아 영상예술대학은 미국을 넘어 세계에서도 최상위로 손꼽히는 명문 이였다.
동부의 뉴욕 대학교, 서부의 AFI과 함께 미국 영화학과 탑 3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할리우드 친화적인 상업적 영화산업 전반과 관련된 수업이 즐비했다.
캠퍼스가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 가까이 있었는데 한인 타운 바로 아래 위치해 있어 할리우드와도 멀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사용하는 장비를 학교에서 직접 다루어 볼 수도 있고, 할리우드와 연계된 수업이 많기에 동민은 바로 남가주 대학 영화학과에 진학할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영화학과만 유명한 게 아니라 미국에서도 명문 대학으로 알려져 있었다.
남가주 대학교라고 해서 주립대학교 같지만, 사립 대학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유층 자제들이 재학하는 학교로 유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아이비리그 출신도 USC 동문 때문에 출세하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USC 카르텔이나 마피아로 불릴 정도로 동문회의 파워가 막강했다.
아예 학교 표어가 Connections for Life 일 정도로 인맥으로 도와주는 걸 중요시한다.
‘그럼 아베 신조 후배가 되는 건가?’
한인 타운에 가깝다 보니 한국인 학생이 아주 많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도 기업과 정치권 자녀들이 유학을 많이 왔다.
일본 총리가 되는 아베 신조도 중퇴 하긴 하지만 USC를 다녔었다.
“영화학과는 경쟁도 심하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데 활동 경력은 괜찮은 거니? 네가 어릴 적 영화와 드라마에 나오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단다.”
“제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독립 영화가 10월에 개봉하고, 여러 유명 감독님에게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 정도면 괜찮겠죠?”
“성적이야 문제없으니 그 정도 경력과 추천서라면 합격하는 데 어려움은 없겠구나.”
담임선생님은 할리우드에서 가르치는 만큼 USC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었고, 동민 정도면 문제없이 합격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동민도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감독과 현지 스태프들 사이에 워낙 유명하기에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학 상담이 끝나고, 방과 후 쿠안틴 작업실에 찾아갔다.
“이제 수정 다 끝난 거죠?”
“응. 더 이상은 수정할 것도 없어. 이제 다음 달에 개봉만 기다리면 되겠네.”
함께 작업 하면서 지켜본 쿠안틴의 데뷔작 개들의 저수지는 동민의 투가적인 투자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독립 영화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었다.
배우들은 의상 지원 없이 자신들의 옷을 입고 촬영했고, 비싼 필름 때문에 촬영도 빠르게 끝내었다.
많이 부족한 촬영 현장에서 조감독을 하면서 배운 것보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 준비하고, 촬영이 끝나고 편집하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완성된 작품을 직접 보니 감상이 어때?”
“지극히 쿠안틴스러운 영화가 만들어졌네요. 피가 강렬하고 배경이 미국인데 묘하게 동양적인 색채가 들어 있어요.”
쿠안틴은 동민의 평가에 아주 만족해했고,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크리딧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 있는 걸 본 동민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진학 상담을 받았다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USC에 가려고요.”
“거기가 좋은 학교이긴 한데 네가 꼭 대학을 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솔직히 너 정도면 바로 활동을 시작해도 괜찮을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캠퍼스 라이프를 경험하고 싶네요.”
“캠퍼스 라이프라고 하기엔 학교가 집에서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이후로도 쿠안틴과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간이 흘러 개들의 저수지가 10월 8일 개봉하였다.
저예산 영화이다 보니 홍보를 하지 못했지만, 영화를 관람한 이들의 반응이 좋아 입소문이 퍼졌고, 조금씩 상영관을 늘려 갔다.
쿠안틴 특유의 흥겨움과 폭력성, 90년대 영화계에 영향을 준 연출 기법 등으로 호평을 받았고, 특히 주제와 상관없는 아무 내용의 긴 수다가 타란티노 특유의 스타일로 정립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니엘! 이것 봐.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어. 그리도 다른 영화제에서도 계속 연락이 오고 있다고.”
“축하해요. 쿠안틴도 이제 영화감독으로 인정을 받겠네요. 영화제 나갈 턱시도는 삼촌한테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
그동안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쿠안틴이 드디어 영화계의 주목을 받으며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쿠안틴을 찾는 이가 많아지면서 비디오 가게를 그만 두고 영화제에 참석할 준비를 했고, 세탁소로 턱시도를 만들기 위해 찾아왔다.
“오~ 명감독님 오셨군요.”
“하하. 명감독의 조감독은 잘 있었는가?”
동민의 장난에 쿠안틴이 좋아하며 최근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폭풍 수다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다다음 주에 프랑스로 가기로 했어.”
“턱시도를 빨리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네요. 프랑스면 삼촌도 더 신경 써서 만들어 주실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읽고 있는 건 뭐야? 시나리오 같은데?”
동민에 세탁소 카운터에서 시나리오를 읽고 있었고, 쿠안틴이 관심을 보였다.
“이건 공개되면 안 되는 기밀이라 보여줄 수 없어요. 시나리오가 사전 유출되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죠?”
“네가 가지고 있다는 게 이미 유출된 거잖아. 재미있어 보이는데 조금만 알려 주라.”
“영화는 아니고 내년에 제작하려고 준비 중인 텔레비전 드라마에요.”
동민이 읽고 있던 시나리오는 내년에 퐉스에서 제작하기로 한 드라마였다.
시즌까지 롱런하는 드라마로 동민도 아주 좋아했었는데 퐉스에서는 전혀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다.
드라마 분위기가 워낙 칙칙해 인기가 없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엄청난 팬덤이 형성되고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내용이 이상한데? 너무 마이너 한 주제인데 괜찮을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라서 반응이 좋을 것 같아요. 이미 투자했는걸요.”
이미 투자를 마친 드라마 시나리오의 표지에는 커다랗게 X라고 적혀 있었다.
< 088 > 끝
ⓒ 아마기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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