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87 >
아직 고등학생이고 영화 이외에는 별다른 지식이나 경험이 없는 동민은 김치 공장 일을 대부분 엄마와 삼촌에게 부탁했다.
공장장과 직원을 뽑는 일은 삼촌이 한인타운에서 잘 구했고, 오픈 전에 직원 교육을 시작했다.
업무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대표는 동민이었고, 회사의 방향도 동민이 정했다.
“최 공장장. 여기 있는 내 조카가 김치 공장 사장이네.”
“김 선생님이 대표가 아니셨군요. 아직 어린 조카가 이렇게 커다란 공장을 지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삼촌이 동민에게 공장을 책임질 공장장을 소개시켜 주었다.
“아마 제가 공장에 가는 일은 거의 없을 거예요. 삼촌이 추천하신 분이니 믿고 잘 부탁드릴게요.”
“어느 정도 나이가 드실 때까지는 자주 오지 않으시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겠네요.”
“그렇다고 아예 안 가는 건 아니니 너무 긴장 풀지는 마시고요. 그냥 제가 대표라는 건 공장장님만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아요.”
동민은 최 공장장에게 몇 가지 요청사항을 알려 주었다.
한인타운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전통적인 김치 생산 라인을 메인으로 하되 미국 현지인들을 위한 마늘향을 획기적으로 줄인 김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연구 개발 부서도 따로 만들어 미국인 입맛에 맞는 현지화된 김치 생산 라인을 따로 돌리고, 현지 시장을 위한 김치는 특히 패키징에 신경 써 달라고 말했다.
동민은 아예 마케팅 부서를 따로 만들기로 했고, 고급 브랜드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자고 했다.
“좋긴 한데 그러면 초반에 적자가 너무 많을 것 같네요. 직원도 많이 뽑으셨던데요?”
“딱히 수익 보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재료 아끼지 말고 최고의 김치를 만들어 주세요.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과 감독에게 나눠줄 거니까 신경 써 주시고, 패키징은 담당 직원을 따로 뽑을 거니까 공장에 집중해 주세요.”
어차피 수익을 내기 위한 공장이 아니라 세금을 줄이기 위해서 세운 거라 돈을 펑펑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동민이 미국에서 김치를 전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김치 냄새였는데 한국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향이 이상하게 미국에서는 심하게 느껴졌다.
마늘과 김치 양념 냄새 때문에 김치를 먹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고, 마늘이 안 들어간 오이소박이나 백김치 류는 현지인들도 어려움 없이 잘 먹었다.
하지만, 김치라면 역시 특유의 감칠맛 나는 매콤한 빨간 배추김치와 무김치가 메인이기에 현지인들이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양념장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자금만 충분하다면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월급 안 나갈 일은 없으니까 신경 써 주시고 필요한 게 있으면 삼촌에게 바로 요청해 주세요. 개발 성공하면 커미션도 많이 나가니까 가능한 빨리 만들어 주시고요.”
최 공장장은 아직 고등학생인 동민이 돈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자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삼촌이 귓속말을 하자 눈이 동그랗게 떠지면서 최선을 다하겠다며 돌아갔다.
김치공장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팀 볼튼 감독이 세탁소로 찾아왔다.
“감독님 오랜만이에요. 이제 조금 덜 바쁘신가 봐요.”
“배드맨 2편 해외 개봉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서 이제야 여길 왔네.”
팀 볼튼 감독은 휴게실로 들어가 능숙한 솜씨로 스스로 삼겹살 구이 세팅을 마치고는 삼촌을 불러 함께 고기를 구워먹었다.
“배드맨 성적이 괜찮은 것 같던데 표정은 별로 안 좋으시네요. 제작사에서 1편에 비해 결과가 적다고 뭐라고 했어요?”
“역시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전편이 흥행하면서 이번에는 제작비를 더 많이 받았는데 매출이 덜 나온다고 뭐라고 하더구나.”
배드맨 1편의 대성공으로 2편 역시 팀 볼튼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제작비를 8천만 달러나 받았지만, 매출은 1편의 절반인 2억 8천만 달러에 그쳤다.
“이정도도 괜찮은 성적인데 욕심이 과하네요.”
“내가 원하는 스타일로 원작을 많이 바꾸긴 했지. 나도 2번이나 만들었으니 더는 미련이 없어서 괜찮아.”
적작의 흥행으로 팀 볼튼 감독이 원하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더 충실해졌고, 배드맨의 수트도 두께가 얇아지면서 디자인이 좋아졌다.
전편에는 둔해 보이는 모습에서 조금 더 날렵해졌고, 우먼캣과 인간팽긴의 분장도 완성도가 상당히 높았다.
제작사의 불만으로 메가폰이 조엘 슈마하 감독으로 넘어가고 다음 편인 배드맨 포에버에서는 팀 볼튼 감독이 자문역으로 참여를 하기에 어느 정도 퀄리티가 유지되지만, 4편인 배드맨과 로빈은 팀 볼튼이 손을 완전히 떼면서 엄청난 불상사가 일어나게 된다.
“다음 작품은 준비 중이세요?”
“아직은 따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없단다. 대신 디주니에서 만들고 있는 크리스마스이브의 악몽에 참여할 생각이야.”
“아! 그 작품이라면 저도 좋아… 아니 시나리오가 참 좋았어요.”
팀 볼튼 감독이 말한 영화는 디주니 산하의 터치스톤 픽처스에서 제작중인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었다.
제목이 팀 볼튼의 크리스마스이브의 악몽이기에 팀 볼튼 감독의 영화라고 오해받지만, 헨리 셀릭 감독이 팀 볼튼의 드로잉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팀 볼튼이 디주니의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무렵 쓴 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로잉인데 디주니에서 30분짜리 텔레비전 방송으로 만들려 하다 너무 섬뜩하다는 이유로 중지 되었었다.
이후 90년에 되어서야 다시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3년짜리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는데 팀 볼튼 감독이 배드맨 리턴즈로 바빠 헨리 셀릭 감독이 연출하게 되었다.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지평을 연 명작으로 음침한 색채와 크리스마스, 할로윈을 잘 결합시켜 생기 넘치는 캐릭터와 뮤지컬적인 구성으로 매우 호평을 받게 된다.
동민 역시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었는데 팀 볼튼 특유의 기괴함과 사랑스러움의 조화와 판타지풍과 호러틱한 세계관이 잘 접목된 팀 볼튼 스러운 세계관이 아주 돋보이는 작품으로 그의 작품 중 최고로 손꼽히기도 한다.
흥행은 2,400만 달러의 제작비로 9,1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적당한 수익을 남기지만, 3D로 재개봉을 하는 등 이후로도 쭉 사랑을 받게 되는 작품이 된다.
팀 볼튼 감독이 직접 만들었으면 제작비 투자를 했겠지만, 애매한 상황이라 여기는 투자를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는 시간이 많으니 종종 놀러 오도록 하마.”
“네. 감독님은 항상 아파 보이시는데 몸조리 잘하시고, 또 봬요.”
팀 볼튼이 돌아가고,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동민은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방학 숙제를 열심히 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방학 숙제라고 해도 책 몇 권 읽기와 매일이 아닌 방학에 있었던 특별한 날 일기 쓰기가 전부였다.
대부분의 미국 학교는 숙제가 아예 없거나 새로운 학용품 준비해 오기가 전부인데 동민이 다니는 학교는 나름 명문이라 아주 조금 숙제가 있었다.
이틀 만에 숙제를 끝낸 동민은 오랜만에 금용에게 받은 새로운 소설을 꺼내 번역을 하다 시리즈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을 끝낸 부분과 시리즈로 만들자는 의견을 금용에게 메일로 보냈고, 프렌차이즈 영화를 떠올리다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었다.
“여보세요? 닐. 알아봐 줄 회사가 있어요. 미드얼스 엔터프라이즈 대표와 미팅 잡아 주세요. 판권 매입권으로 만나자고 하고요.”
동민을 업고 영화판에서 입김이 강력해진 닐은 어렵지 않게 미들어스 엔터프라이즈 대표와의 자리를 마련했다.
회사 대표실로 들어가자 숄 잰트가 동민을 반겨 주었다.
“천재 투자자로 유명한 자네가 여기에 찾아오다니 영광이군.”
“선배님을 진즉에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숄 잰트는 1968년 50대의 나이로 영화계에 진출해 뛰어난 선구안으로 좋은 작품에 투자하며 제작자로 이름을 떨친 대선배였다.
잭 니콜스가 주연으로 나온 1975년 작 뻐꾸기가 둥지 위로 날아간을 제작하면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고, 84년에는 아마제우스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 8개 부문을 휩쓸었다.
잉글랜드 페이션트로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촬영상등 9개의 상을 더 받게 되는데 이건 95년 작품이니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작품중에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는 영화는 일 년에 단 한 편이고, 그런 영화를 3편이나 제작했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선구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배라고 하기엔 너무 뛰어나서 부담스럽군. 잘나가시는 후배님께서는 무슨 일로 미팅을 잡으셨는가?”
“영화 판권 구매라고 미리 말씀드린 거로 아는데요?”
“하하. 나이가 들면 기억이 가물가물한다네 자네는 아직 팔팔한 나이니 이해 못 하겠지만.”
재즈음반사를 인수해 성공적으로 키워 냈고,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숄 잰트는 거래하기에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그도 동민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고, 95년도에 만들어 지는 아마제우스는 넘기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제작 투자자인 동민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미팅을 허락했다.
“다시 말씀 드릴게요. 시나리오 판권을 사고 싶어요.”
“내가 보유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워낙 많아서 어떤 걸 말하는지 예상이 안 되는구나. 어떤 작품을 말하는 거니?”
“이미 제작하신 영화에요. 정확하게는 1978년과 1980년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던 작품이요.”
동민이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하자 숄 잰트가 바로 알아 듣고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작품은 위대한 명작 아니냐. 쉽게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는 시나리오가 아니다.”
“그 시나리오가 영화화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예산이 엄청나게 들어 갈 걸요?”
“그래도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애장하는 작품이라 내어 줄 수 없구나.”
“애니메이션으로 만드실 때도 제작비 많이 드셨잖아요. 저도 팬인데 넘겨주세요. 가격은 타당하게 지불해 드릴게요.”
“영화로 만들지도 못할 시나리오를 가져가서 어떡할 생각이냐?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영상 판권이지 소설 지분은 없는 거 알고 있지?”
“당연히 잘 알고 있죠.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발전하고 있으니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동민의 이야기를 들은 숄 잰트가 기술이 발전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신이 만들 거라고 답했다.
“거의 80살이시잖아요. 기술이 나오려면 20년은 더 걸릴 텐데 100살에 만드시려고요? 저는 아직 젊으니 후배한테 넘겨주시면 책임지고 선배님의 뒤를 이어 드릴게요.”
사실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숄 잰트가 별세하기 한참 전인 2001년에 영화가 만들어지지만, 아직 10년 가까이 남았고 동민이 판권을 사들이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숄 잰트가 정말 영화로 만들 생각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럼요. 소설처럼 3부작 대서사시를 완성시킬 거예요.”
< 08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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