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75 >
예상하지 못한 소설에 동민이 당황해하자 금용이 너무 걱정하지 마라며 말을 더했다.
“내가 아무리 그래도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녀석에게 이런 걸 맡기겠니? 혹시 네가 영화의 길을 걷지 않으면 이대로 묻어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영상화하라고 하면 되니 너무 부담가지지 말거라.”
“아니에요. 이건 꼭 제가 영화로 만들어 볼게요. 올해부터 저도 영화 작업에 들어가니까 선생님의 소설이 영상화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예요.”
동민은 금용에게 특수효과의 발전과 컴퓨터 그래픽 작업에 관해 설명해 주었고, 그도 기술의 발달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네 말대로라면 무공을 직접 펼치는 것처럼 만들 날이 언젠간 오겠구나.”
“당장 만들 수는 있지만, 어색함이 느껴지긴 할 거예요. 하지만, 10년에서 20년 정도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발전할 거니까 10년만 시간을 주세요.”
“하하. 더 기다려 줄 수도 있지만,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 모르겠구나.”
금용이 장수한다는 걸 알고 있는 동민이기에 꼭 볼 수 있게 해 주겠다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동민은 쿠안틴과 함께 서국 감독에게 소개를 부탁한 감독을 만나러 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번 영화는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네가 그 소문의 소년이구나. 만나서 반갑다. 고맙긴 한데 영화가 평론가에게는 인기가 있었는데 대중적으로는 망해 버려서 타격이 크구나.”
동민이 일부러 소개받아 만난 감독은 자신만의 독특한 영상미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허무, 고독을 주제로 다룬 로맨스, 드라마를 연출하는 왕가이 감독이었다.
열혈남자라는 액션 영화로 88년에 데뷔해 흥행과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작년엔 90년 자신만의 색감을 담은 아비장전을 만들었는데 액션을 기대한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받게 되었다.
왕가이 감독의 페르소나가 되는 장국영을 만나 닐리리 맘보 댄스 장면을 넣고 발이 없는 새 이야기를 하는 등 파격적인 영상미와 허무주의를 담은 작품은 명작으로 많은 영화상을 받게 되었다.
전작의 흥행으로 제작사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으며 가장 잘나가는 장국영, 장만옥, 유가령, 장학우, 유덕화, 양조위 등 톱스타를 대거 출연시키지만, 한국에서는 액션이 없다는 이유로 영화관의 유리창을 깨기도 할 정도로 나쁜 반응을 받았다.
결국 제작사는 파산하고, 아비장전 2편을 계획했던 왕가이 감독의 계획은 무산되어 94년까지 다음 작품인 동서사독을 만들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당장 결과가 안 좋더라도, 좋은 작품은 만드신 건 확실해요. 혹시 당장 영화를 만들 여건이 안 되신다면 할리우드에 놀러 오세요. 제가 유명 감독님들 소개시켜 드릴게요.”
“다니엘 세탁소가 할리우드에서는 유명하답니다. 와 보시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동민은 성용과 이염걸이 방문한 적 있으니 물어보라고 했고, 꼭 미국에 놀러 오라고 여러 번 말 했다.
동서사독을 만들면서 왕가이 감독 특유의 기약 없는 늘어짐과 즉흥 촬영이 이어지던 중 시간이 비어 23일간 특별한 시나리오 없이 즉흥 연기로 짧은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가 만들어지는데 이 영화로 왕가이 감독이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홍콩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남녀의 만남과 해어짐을 허무적으로 표현한 영화 중경산림으로 왕가이 파라덕스를 형성하게 되고 다음해 타락한 천사라는 영화로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자신만의 영화 스타일이 확고한 왕가이 감독과 영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흘렀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요즘 시간 여유가 많은 그를 계속 만나 대화를 했다.
“아무리 봐도 절대 고등학생 같지 않은 영화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게 정말이지 다니엘의 정체가 의심스럽군.”
“할리우드 한 가운데서 살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여기 있는 쿠안틴도 많이 알려 줬고요.”
“저도 지금까지 저만큼 영화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다니엘이 처음이었어요.”
쿠안틴은 영어자막도 없이 아비장전을 보고는 왕가이 감독의 팬이 되었고, 그와의 대화로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다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올해는 모르겠고, 내년에는 할리우드에 들릴 수 있도록 해 보겠소. 건강하게 지내고 다음에도 볼 수 있기를.”
공항에 마중까지 나온 왕가이와 인사를 하고 동민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지만, 쿠안틴은 지금 바로 작업을 시작해야겠다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동민도 한국에서 일이 끝나는 대로 미국으로 돌아가 쿠안틴의 영화 촬영을 도와주기고 하고는 공항에서 그와 헤어졌다.
“진짜 마이클 잭선 사인이네? 그럼 이염걸이랑 성용 사인도 진짜야?”
“혹시나 못 믿을까 봐 사진도 찍어 왔어요.”
동민이 현철에게 홍콩에서 스타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고, 특히 황비옹 촬영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감탄했다.
“너 엄청 잘나가는구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동민이 그에게 미국에서 유명 감독을 만났던 이야기와 스필버그 감독과 함께 홍콩에 갔던 이야기를 해 주자 다른 세상 이야기 같다며 동민을 부러워했다.
“형도 좋은 음악 만들면 유명해질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워.”
동민은 한국으로 돌아와 현철의 집에서 홍콩에서 사 온 육포를 함께 먹으며 할리우드와 홍콩 이야기를 하다가 음악이야기로 넘어갔다.
음악에 대해선 전문 지식이 없는 동민이지만, 미국 음악은 평소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많이 접하기에 간단하게나마 알려 줄 수 있었다.
“정말 너희 아버지 기획사에 들어가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야?”
“오히려 그렇게 해 달라고 할 걸요? 아빠가 돈은 많은데 기획사 일은 잘 몰라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할 거예요. 그래도 방송국 출신이라 음악방송에 넣어줄 정도는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현철은 당장 결정 내리기는 힘들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미국에서 가지고 온 음악 시디를 선물로 주었고, 조만간 미국 가수 콘서트도 아빠가 맡을 것 같으니 그들이 한국에 오면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동민은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계속 설득을 했고, 아빠의 영화 개봉과 비디오 유통을 도와주면서 자주 현철을 만나 친해지고 있었다.
“다니엘. 미국에는 언제 오는 거야? 이제 시나리오 완성했고, 배우 섭외 하고 있어. 촬영 들어가면 조감독으로 필요 하니까 빨리 돌아와.”
“알겠어요. 쿠안틴. 거의 끝나 가니까 조만간 돌아갈 것 같아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래 정확한 날짜 정해지면 알려줘.”
미국에 먼저 돌아간 쿠안틴이 영화 준비가 마무리되어 간다며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아빠 일 도와주는 것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현철이 아직 아빠와 계약을 하지는 않았지만, 집으로 초대해 인사시켜 두었다.
“아빠 이 형이 내가 이야기 했던 장현철이에요. 앞으로 대한민국 음악 대통령이 될 사람이니까 꼭 계약해야 해요.”
“하하. 그래 네 말대로 현철 군이 원하는 대로 전부 해주도록 하마. 현철 군도 부담 가지지 말고 편하게 생각해요.”
현철이 거의 넘어온 것 같아 보였고, 그가 활동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어느 정도 한국에서의 일이 마무리 되어가자 동민은 날을 잡아 혼자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가서 다시 택시를 타고 공주에 있는 한 고등학교로 향했다.
무더운 여름날 충청남도 공주시에 있는 공주 고등학교 운동장에는 남학생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늘로 햇볕을 피해 들어간 동민이 공을 던지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학생들을 살펴보고 있다가 182cm의 키에 좋은 체격을 가지고 있는 한 학생을 발견했다.
얼굴이 아직 어려 보여 기억하는 모습과 많이 달랐지만, 140을 넘는 듯 한 강속구를 던지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찾아 온 것 같았다.
“몸이 좋아 보이긴 하네. 그런데 뭐라고 하면서 말을 걸어야 하지?”
무작정 공주 고등학교까지 찾아오긴 했는데 운동과는 거리가 먼 동민이기에 뭐라고 해야 할 지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르겠다. 일단은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되겠지.”
운동부에 성장기인 고등학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건 먹는 것이었고, 동민은 스포츠 음료와 피자 20판을 야구부로 배달시켰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는 미국에서 살고 있는 동민이라고 하는데 구경하다가 친해지고 싶어서 인사드려요.”
무섭게 생긴 야구 감독이 잘생긴 동민이 말을 걸자 잠시 당황하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왔다는 소리에 관심을 보였다.
“그럼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도 직접 봤겠구나.”
야구장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고, 감독에게 뇌물로 다저스 야구모자를 선물하자 편하게 구경하라며 동민의 편의를 봐 주었다.
“저기 저 형이 투수인가 봐요.”
“그럼. 우리 야구부 에이스란다. 저 녀석은 크게 될 놈이야.”
뜨거운 태양 아래 호쾌한 모습으로 강속구를 그를 보며 감독이 흐뭇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피자 배달이 도착했다.
“난 피자 주문한 적이 없는데? 누가 시킨 거지?”
“제가 주문했어요. 열심히 운동하는 형들을 보니 같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한국에 이제 막 피자핫이 진출한 상황이라 학생은 당연하고, 감독님도 피자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공주에는 피자 가게가 없어 멀리 대전에서 주문해 배달되었기에 조금 식어 있었지만, 다들 피자를 너무 맛있게 먹었다.
“처음 보는 학생에게 이렇게 비싼 걸 얻어먹어도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저희 집 부자라서 괜찮아요. 음료수랑 같이 천천히 드세요.”
미남들과 어울리다 보니 잘생겨진 얼굴에 삼촌이 직접 만들어 준 비싸 보이는 맞춤복을 입고 있는 동민이 피자까지 사 주니 야구부 감독은 어느 잘나가는 사장님 아드님이신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감독님. 야구부 에이스 형이랑 이야기해 봐도 괜찮을까요?”
동민이 양손에 피자를 하나씩 들고 정신없이 먹고 있는 투수를 가리켰고, 감독이 그를 불렀다.
감독이 부르자 양손에 있던 피자를 호로록 먹어 버리더니 하나를 더 먹으면서 다가왔다.
“네. 감독님 부르셨습니까?”
“이 친구가 피자를 사준 건 알고 있지? 너랑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는구나.”
감독이 입꼬리를 올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고, 피자를 먹고 있는데 자신을 불러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한 학생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에 방긋 웃으며 동민을 바라보았다.
“급한 거 아니니 피자 먹으면서 말해도 돼요.”
“그래. 조금만 더 먹고 이야기해 주마.”
결국 피자 3조각을 더 먹은 그가 만족스러운 듯 배를 문지르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때는 1982년이었지. 야구부에 들어가면 라면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야구를 시작할 생각을 했단다. 그렇다고 우리 집이 못사는 건 아닌데 라면은 엄마 허락 없이는 못 먹는 음식이었거든. 그렇게 야구를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야구선수로 성공해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타석에 들어섰을 때 공에 대한 공포를 견디기 위해 밤마다 공동묘지에 찾아가 스윙 연습을 했지. 그리고 하체가 중요하다고 해서 공주산성을 토끼뜀을 뛰며 돌았단다. 그러던 중 공주 중학교 3학년 시절 감독님의 권유로 3루수에서 투수로 포지션을 바꿨는데 학부모들의 반대로 경질까지 당하게 되셨지. 이후로….”
그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을 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끝없이 말을 했고, 잠시 그 모습을 보던 감독님이 고개를 흔들며 피자 박스 정리를 시키셨다.
동민은 그가 투머치토커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려서도 그런지 몰랐고, 한참을 그의 야구 인생을 듣기만 해야 했다.
< 075 > 끝
ⓒ 아마기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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