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52 >
잠시 동민과 따로 이야기를 시작한 어드리 햅번은 고맙다는 말을 했다.
“네가 알려줘서 검사를 해 보니 암 초기 결과가 나왔어. 완치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초기에 발견해서 최대한 늦출 수는 있다고 알려주더라.”
동민은 예전에 어드리 햅번과 해어지면서 할머니가 비슷한 컨디션 이였는데 암이었다고 꼭 진단을 받아 보라고 알려 주었다.
혹시나 검사를 받지 않을까봐 스필버그에게도 그녀가 건강검진을 받게 하라고 잔소리 했더니 병원에 가서 확인 한 것 같았다.
“덕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얻게 되었네. 감사 인사를 하러 찾아 왔어.”
어드리 햅번은 생의 마지막이 다가온 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였고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잘 하고 싶다며 굶주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저도 후원해 드릴게요. 그래도 초기에 발견 했으니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요.”
아직은 동민이 살아왔던 2020년대와 비교해 의술이 덜 발달했기에 그녀의 병을 완치 시키는 것이 불가능 했지만, 초기에 발견한 만큼 늦출 수는 있었다.
동민은 어드리 햅번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왔고, 삼촌은 그녀에게 사인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었고, 탐 스루스와 이염걸도 그녀에게 사인을 받았다.
평소와 다르게 말을 못하고 쭈뼛거리는 쿠안틴에게도 어드리가 웃으며 사인을 해 주었다.
동민은 이염걸에게 부탁해 화려한 무술 시범을 그녀를 위해 시연해 달라고 했다.
“오늘은 특별히 나한18권을 선보여야겠군.”
이염걸은 자신도 알고 있는 전설의 배우인 어드리 햅번을 위해 화려한 권법을 선보였고, 소림 봉술도 시연했다.
그의 생동감 넘치는 무술 시연에 에너지를 받아간 어드리는 고맙다며 인사했고, 기회가 되면 다시 보자며 돌아갔다.
“처음에는 성용씨가 세탁소로 데리고 와서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정말 특별한 곳이군.”
이염걸은 세탁소에 머물면서 동민에게 무술을 알려 주는 동안 톱건의 주인공 탐 크루스를 보게 되어 신기하게 생각했고, 유명 감독이 하나 둘 찾아오는 것도 재미있었다.
특히 배드맨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팀 볼튼 감독이 세탁소에서 삼촌과 함께 의상을 직접 만드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오늘은 생각지도 못한 어드리 햅번이 다녀 갔고, 이염걸은 조금 더 진심으로 동민을 가르쳤다.
무엇보다 이염걸을 자극한 것은 동민이 읽고 있는 무협소설이었는데 그는 당연히도 무협소설을 좋아했다.
동민이 중간 중간 시간이 날 때마다 번역 중인 중국어로 쓰인 무협지를 읽고는 이연걸은 충격에 빠졌다.
작가가 누구인지 물어 보았지만, 동민은 알려줄 수 없다며 비밀에 부쳤고, 대작의 향기를 맡은 이염걸은 동민에게 외부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순식간에 소설을 다 읽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작품은 금용 선생님의 녹전기 이후로는 처음이로군.”
“하하.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으니까요. 이건 나중에 제가 영상화하기로 약속했으니까 정말로 외부에 발설하시면 안 돼요.”
“나도 영화인이니 원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어.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하마.”
소설을 읽은 이염걸은 갑자기 불타올랐고, 동민을 더욱 혹독하게 굴렸다.
동민에게는 더욱 지옥 같은 나날이 펼쳐졌지만, 확실히 그의 몸에 쌓여가는 실력은 빠르게 늘어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군요. 어제 미국 망명 허가가 났으니 내일은 홍콩으로 가려고 합니다.”
“벌써 두 달이 지나가 버렸네요. 수련할 때는 빨리 시간이 지나갔으면 했는데 정작 떠나신다니 아쉽네요.”
탐 크루스는 바쁜 일정으로 동민이 매일 수련을 받는 동안 몇 번만 배울 수 있었다.
그래도 기본 체력이나 운동신경이 워낙 뛰어났기에 두 달 동안 이염걸에게 특훈을 받은 동민과 1대1 대련을 할 수준은 되었다.
정작 동민 다음으로 많은 수련을 받은 쿠안틴은 어쩔 수 없는 몸치라 동민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려준 투로는 10년 이상 수련해야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보여주기에는 화려하나 직접 실전에 쓰기엔 아직 다니엘의 수준이 일천하니 싸움은 되도록 피하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저도 폭력은 싫어해서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계속 수련하다 보면 신체 균형도 좋아지고, 건강해 지니 하루도 빼 먹지 말고 반복 하도로 하세요. 점검 하러 올 겁니다.”
다행히 두 달 동안 이염걸은 동민이 매일 수련할 수 있도록 습관을 들여 놓았고, 동민도 아침마다 수련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이염걸이 돌아가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찾아왔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자랐군. 몸도 꽤 좋아진 것 같은데?”
“중국 무술 챔피언에게 개인지도를 받고 있어서 몸이 단단해 지긴 했어요. 스티븐 잡스씨도 잘 지내셨죠?”
픽사를 인수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심히 넥스트와 픽사를 운영 중이 잡스가 세탁소 까지 찾아 왔다.
동민이 소림사 무술 포즈를 잡자 그가 재미있어 하더니 세탁소를 둘러보고는 칭찬 했다.
“예전에 왔을 때 여기도 들려 볼 걸 그랬군. 할리우드에 이런 숨은 명소가 있을 줄이야.”
“아는 사람만 아는 특별한 장소죠. 여기 휴게실에서 감독들이 비밀 만남을 가지기도 해요.”
잡스를 휴게실로 안내해 채식주의자인 그를 위해 비빔밥을 만들어 주었다.
“여기 김치는 맛이 다르군. 자네를 만난 이후로 매일 김치를 먹고 있는데 이게 더 맛있는 것 같아.”
“집에서 직접 만든 김치라 맛이 다를 거예요. 한국은 집마다 김치 맛이 달라요.”
이상하게도 스티븐 잡스는 식사를 하면서 동민의 눈치를 살짝 보았고, 자신 만만하던 3년 전 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결국 기다리던 동민이 먼저 물어 보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내가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감독들과 자주 대화를 하는데 은근 자네 이름이 나오더군.”
잡스는 감독 사이에서 동민은 꽤 유명한 인물이고 많은 자금으로 영화에 투자해 계속해서 재산을 늘려 나가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내가 사비를 들여 틴토이라는 영화를 만들었 거든.”
“아카데미에서 상도 받으셨더라고요. 늦었지만 축하드려요. 개인적으로 아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어요.”
“그렇지? 나도 처음에는 컴퓨터만 보고 픽사를 인수 했는데 애니메이션을 만들다 보니 예술 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협업의 중요성도 알게 되었어. 좋은 작품을 만들면 무언가 세상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이야기한 잡스는 마지막에 결론을 말했다.
“그래서 픽사의 컴퓨터 부서는 넥스트에 흡수시키고, 애니메이션만 남겨서 운영할 생각이야. 본격적으로 운영을 하고 싶은데 구조를 바꾸고 내가 사비를 더 투입하기 전에 지분이 있는 너에게도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지분이 바뀔 수도 있는 건가요? 제 지분은 줄이고 싶지 않은데요?”
“당연히 지분을 바꾸면 안 되지. 그러려면 너도 현금 투자를 해야 하겠지만.”
결국 잡스는 동민에게 투자를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왔다.
잡스는 자신이 만들었던 전 회사에서 나오면서 큰 현금을 받긴 했지만, 넥스트와 픽사에서 계속 적자가 나면서 대부분의 재산을 두 회사에 투입하게 된다.
픽사에는 최종적으로 5천만 달러나 쓰게 되는데 그가 퇴사하면서 받은 돈의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민과 지분을 나눠 가지고 있으니 동민의 투자를 받을 수도 있었고, 동민이 영화 투자로 자금 여유가 있다는 걸 듣고는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렇다면 저도 투자를 해야겠지만, 앞으로 운영 방향은 알아야겠죠? 프리젠테이션 부탁드릴게요.”
지금은 스티븐 잡스보다 갑의 위치에 있는 동민이 프리젠테이션의 신으로 불리는 잡스로 부터 브리핑을 받았지만, 아직 스토리텔링 노하우가 덜 축적된 그의 프리젠테이션은 딱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일단 작품을 향한 열정은 확실히 느껴지네요. 1천만 달러를 투자하실 거라고 하셨으니 저도 같은 금액을 넣어야겠네요. 그리고 기술이랑 노하우는 충분히 축적 된 것 같으니 혼자서 고생하지 마시고 디즈니랑 미팅을 한 번 해 보세요. 그쪽은 제가 입김을 넣을 수 있을 거예요.”
원래도 픽사는 91년에 디즈니에게 함께 애니메이션을 만들 자고 제안하게 되는데 아쉬울 게 없는 디즈니는 아주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민이 조만간 개봉하는 해양 액션 블록버스터 인어 공주에 큰돈을 투자했기에 협상에서 조금은 유리한 위치에 있을 수 있었고, 버크셔 해서웨이에서 열심히 동민의 명의로 디즈니 주식을 모으고 있어 발언권도 꽤 강해졌다.
“그렇게 해 준다면 정말 고맙겠군. 역시 할리우드에서 영향력이 크다더니 사실이었어.”
잡스는 기뻐하며 돌아갔고, 동민은 그에게 김치를 포장해 주었다.
파라마운트 투자사의 닐에게 연락해 픽사에 자금을 송금하게 했고, 이제는 기말고사에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학교생활에 집중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상급학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 한국보다 쉬운 교과 과정에 동민은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의 수학 수업에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같은 교실에 있는 성숙한 여학생과 늙어버린 남학생들은 동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야! 너 얼마 전에 천재소년 두기에 나왔더라. 앞으로도 계속 거기 나오는 거야?”
“아니. 그 에피소드에만 출연하기로 했어. 더 나와 달라고 했는데 바빠서 안하기로 했어.”
“그래? 다들 더 출연하고 싶어서 안달인데 넌 이상하네? 나도 배우를 하고 있는데 만나서 반가워.”
얼굴에 개구쟁이라고 쓰인 것 같이 장난기가 가득한 남학생이 동민에게 말을 걸었다.
동민은 고등학생 치고는 앳띤 그를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누구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고, 스튜디오에서 지나가다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아보니 너 학교에서 유명하더라. 별명이 김치 보이라던데? 나도 한국인 친구가 많아서 김치는 많이 먹어봤어. 처음에는 이런걸 왜 먹지라고 생각 했는데 먹으면 먹을수록 중독되더라.”
김치를 좋아한다는 그의 말에 동민은 조금은 잘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학교 나오기 정말 싫어서 딱 유급 당하지 않을 정도만 나오는데 넌 괜찮아? 그러고 보니 똑똑하니까 다를 수도 있겠구나. 중학교 2학년이라고 들었는데 벌써 이 수업을 듣다니. 내가 아는 한국인은 전부 수학을 잘하더라?”
“평균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많긴 하지만, 전부 잘 하는 건 아니에요. 수학 싫어하는 한국인도 많아요.”
동민도 전생에는 문과 출신인 만큼 수학을 싫어했는데 미국은 한국보다 훨씬 쉬워서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학이 좋지도 않았다.
끝없이 재잘거리는 그에게 동민이 이름을 물어 보았다.
“그런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 출연했었어요?”
“드라마는 단역으로만 나와서 못 봤을 거야.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을 안 알려 줬구나. 난 리오라고 해.”
< 052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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