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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그레이닝은 자신이 구상한 애니메이션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동민이 바로 10만 달러 수표를 작성해 주자 선물로 자신이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때 스케치한 그림을 주었다.
“와. 노란색 피부에 머리카락이 특이하네요.”
“캐릭터가 조금 다듬어 질 수는 있겠지만, 기본 구성을 이대로 갈 거야.”
맷 그레이닝이 동민에게 선물로 준 그림에는 샘슨 가족의 초기 디자인이 그려져 있었다.
미국 방송 역사 상 최장수 시트콤이자 애니메이션이 되는 샘슨 가족은 스프링필드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특이하게 생긴 노란색 가족 시트콤이다.
1987년 트레이시 울먼 쇼에서 30초짜리 단편으로 반영되다 반응이 좋아 1989년 12월부터 정규 시리즈로 편성되고, 미래에 친숙한 디자인으로 바뀌게 된다.
수많은 작가와 감독, 제작진이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거쳐 지나가는데 특이하게도 주요 작가진이 문과 출신이 아니라 이공학 학위 소지자로 구성된다.
데이비드 코헨은 하버드 수학과를 졸업해 컴퓨터공학 석사를 가지고 있고 캔 킬러는 하버드대 응용수학 박사, 제프 웨스터브룩은 프린스턴대학에서 컴퓨터공학 박사를 하고 예일대학에서 교수로 일한 경력도 있다.
이렇게 공돌이 작가들이 많이 있어 대학원이나 공대를 까는 농담이 은근 많이 나오게 된다.
샘슨 가족하면 워낙 많은 애피소드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지만, 동민은 다양한 버전의 특이한 오프닝을 가장 좋아했다.
‘케샤 틱톡 뮤직비디오 버전도 좋았고, 80년대 명작들을 패러디한 LA Z Rider도 재미있었지.’
동민이 샘슨 가족 캐릭터 라이센스를 구입했지만, 캐릭터 상품 판매 말고 어떤 식으로 수익화 될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샘슨 가족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스케치 나오는 거 종종 보내주세요.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드네요.”
“할리우드 세탁소에 숨어 있는 신비한 동양인 꼬마 그림도 그려서 보내줄게.”
예상보다 훨씬 더 활기찬 맷 그레이닝을 보자 샘슨 가족의 성격이 어디서 나왔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돌아가는 그의 양 손에 종류별로 김치를 잔뜩 쥐어 주었고, 필요하면 더 보내주겠다고 했다.
“앞으로 샘슨 가족 만화에 김치 이야기가 종종 나오겠지?”
동민은 그렇게 계속해서 미국 주류문화에 조금씩 김치를 풀어 갔다.
샘슨의 라이센스 지분을 구입하고, 플래툰의 수익을 회수하며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던 중 앤젤리나가 동민에게 선물 받은 물건을 자랑했다.
“다니엘. 이거 서니에서 나온 최신 워킹맨이다. 이것 봐 이렇게 작은데 기능은 엄청 많아.”
“좋은 거 샀네? 앤젤리나는 어떤 가수 좋아해?”
“요즘은 마이클 잭슨이지. 그런데 위킹맨은 산 게 아니고 선물 받았어.”
앤젤리나가 한쪽에 모여 들떠 있는 아이들을 가리키자 모두 똑 같은 워킹맨을 가지고 있었다.
“설마?”
“신지가 반 친구들한테 전부 선물로 줬어. 그런데 다니엘은 못 받았네?”
동민은 일본에서 전학 온 신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신지는 학교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혼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지난 생일파티 때 태어나 처음으로 좌절감을 경험한 신지는 이후 학교 아이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엄청난 물량 공세를 퍼 붙고 있었다.
한창 일본이 잘 나가는 타이밍도 딱 맞아 떨어져 신지의 노력이 빛을 보았고, 서니 회장 손자답게 아직 출시도 하지 않은 최신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인 워킹맨을 학급 친구들에서 하나씩 돌렸다.
동민만 빼고.
‘자식 하는 짓이 나름 귀엽네. 최신이라고 해도 조만간 CD가 나올 건데. 하긴 CD 플레이어도 서니가 잘나가지?’
동민이 일본 버블 경제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2년 전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플라자 합의를 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플라자 합의 라는게 일본 버블경제의 신호탄이 되었다는 정도는 동민도 알고 있었다.
조만간 일본의 버블 붕괴가 진행된다는 걸 떠올리자 신지에게 뭐라고 하기도 미안했다.
그렇게 어른의 넓은 아량으로 신지를 귀엽게 생각하고 있는데 존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다니엘 큰일 났어!”
“무슨 일 이야?”
원래도 덩치가 컸던 존 이 5학년 2학기가 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신지 그놈이 최신 워킹맨을 나눠 주면서 나쁜 걸 강요하고 있어!”
“무슨 강요를 하길래 이렇게 호들갑이야?”
“아이들에게 김치를 그만 먹겠다고 약속하면 위킹맨을 나눠주고 있어.”
“뭐라고?”
존의 말에 동민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린아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힘들게 입맛을 길들여 놓은 김치를 먹지 말라니 선을 넘어도 한참 넘어섰다.
“앤젤리나, 설마 너도 김치를 먹지 않겠다고 약속한 거야?”
“아니야. 나한테는 그런 말 하지 않고 그냥 선물로 줬어.”
설마 앤젤리나가 배신하지 않을 거라 믿고 있었지만, 워킹맨을 들고 있었기에 물어 보았다.
상황을 알아보니 동민과 친한 아이에게는 그냥 선물로 주었고, 그렇게 친하지 않은 아이에게는 김치를 먹지 않기로 약속을 받아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교활한 녀석이었군. 이대로 아이들이 김치를 그만 먹게 할 수는 없지.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마음을 다시 김치로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신지와 그의 패거리가 다가왔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다니엘한테서 마늘 냄새가 나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초등학생의 유치한 도발에 넘어갈 수 없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신지가 동민의 책상위에 워킹맨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를 올려 두었다.
“이번에 아빠가 미국에 서니픽처스 영화사를 설립했는데 기념으로 만든 한정판 워킹맨이야. 갖고 싶으면 줄게.”
“필요 없어 난 카세트 테이프 잘 안 들어. 아직 LP 가 좋아.”
“그러고 보니 영화 좋아한다고 했지? 내가 아빠한테 말해서 영화사 구경 시켜 줄 테니까 너도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동민이 매일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들락거리는 걸 모르는 신지가 서니픽처스 스튜디오를 구경시켜 주겠다며 유혹했다.
“필요 없어. 너 친구들한테 김치 먹지 말라고 한다면서? 김치가 얼마나 좋은 음식인데. 너도 매일 먹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매운걸 도대체 왜 먹는 거야?”
“너 맵찔이였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남자가 그 정도도 못 먹다니 쯧쯧.”
동민이 신지에게 김치도 못 먹는다며 뭐라고 하자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실제로 신지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너무 매워 먹을 수가 없었다.
“흥 그런 거 안 먹어도 맛있는 일본 음식이 많다고.”
솔직히 세계적인 인지도 면에서는 일본 음식이 한국 음식보다 훨씬 알려져 있는 건 사실이었다.
“초밥이랑 일본라면이 먹고 싶긴 하네. 일본 음식 중에 맛있는 게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한국도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 많아. 네가 잘 모르는 것뿐이야.”
신지가 열심히 동민을 도발했지만, 별로 반응 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설득되는 것 같은 기분에 신지가 결투를 신청했다.
“예전에 너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 프로레슬러들이 왔다면서? 이번에 누가 더 유명한 사람이 데리러 오는지 내기하자. 내가 이기면 넌 김치 그만 먹고, 내가 진다면 김치를 먹도록 하지.”
“정말이지? 약속한 거다.”
“너야말로 김치 그만 먹을 각오하라고.”
신지는 프로래슬링 선수들이 동부에서 프로모션 투어를 하고 있는걸 알고 있기에 동민이 래슬러를 부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동민은 세탁소에서 WWE의 수장 빈스 맥마흔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 보내주는 김치는 잘 먹고 있네. 거긴 별일 없지?”
“맥마흔 사장님도 잘지내시죠? 요즘 잘나가신다고 들었어요.”
“하하. 자네가 알려준 컨셉이 아주 잘 먹히더군.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프로래슬러들은 평소 고기를 많이 먹는데 동민이 알려준 구운 김치에 푹 빠져 있었다.
고기를 먹다 질리더라도 김치를 먹으면 고기를 계속 먹을 수 있다며 동민에게 여러 번 김치를 부탁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동민이 저번과 같이 학교에 와줄 수 있겠냐고 물어 보았지만, 동부에서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라 당장은 어렵겠다고 했다.
아쉽지만, 이해한 동민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니엘. 오랜만이야. 미스터, 미세스 킴도 잘 지내시지?”
“네. 삼촌은 바쁘죠?”
“무지 바빴지. 이제야 조금 여유가 생겼어. 안 그래도 너랑 식사 한 번 하려고 했는데 잘 되었네.”
“그럼 다음 주에 볼래요?”
그는 동민의 학교로 와서 데리고 같이 가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다.
시간이 흘려 신지와 내기를 한 날이 다가왔고, 학교에 소문이 퍼져 전교생이 둘의 배틀을 구경하러 왔다.
“여기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면 용서해주마.”
“뭐라는 거야?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너야 말로 오늘 김치 한포기 다 먹을 준비나해.”
동준과 신지의 신경전이 펼쳐지던 중 멀리서 자동차 배기음이 들려왔다.
검은색 자동차가 큰 소리를 내며 다가오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 되었고, 그 차가 가까워 질 수로 웅성거림이 커졌다.
“저 차는 키트잖아!”
“우와! 전격 Z 작전에 나오는 자동차야!”
전격 Z 작전은 82년부터 86년인 작년까지 방영된 드라마로 인공지능이 탑재된 최첨단 자동차와 전직 형사 마이클이 악당을 무찌르는 내용이었다.
검은색 폰티악 파이어버드 트랜스 암이 학교 앞에 서자 자동차를 좋아하는 남자 아이들이 열광했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별 반응이 없었지만, 차에서 데이비드 핫셀호프가 내리자 난리가 났다.
“네가 신지군이니? 너를 데리고 오라는 지령을 받았다. 어서 타거라.”
“우와. 대박! 키트에 탈 수 있다고?”
얼마 전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주인공이 선망의 대상인 최첨단 인공지능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자 난리가 났다.
“후훗. 보았느냐? 어서 패배를 인정하시지.”
“생각보다 힘을 썼나 보군. 서니픽처스에서 만드는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나보지?”
“우리 아빠가 이 정도라고. 이제 너도 내 밑으로 들어오지?”
신지의 도발에 동민은 시간을 확인했고, 멀리서 날카로운 배기음이 들려왔다.
부아아아앙~~~~.
시끄러운 배기음을 내며 16밸브 4기통 엔진을 장착하고, 113마력에 최대 9100RPM을 자랑하는 가와사키 GPZ-900R이 빠른 속도로 달려왔다.
끼익~~~!
오토바이가 멋있게 슬라이드 하면서 동민 앞에 멈춰 섰다.
강렬한 등장에 모든 아이들이 긴장하며 숨죽였고, 청바지에 항공점퍼를 입은 남자가 얼굴을 가리는 헬맷을 쓴 채 동민을 불렀다.
“다니엘. 헬맷은 챙겨왔지?”
“미리 준비했죠.”
동민은 챙겨온 헬맷을 쓰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올라탔다.
동민을 태운 남자가 엑셀을 당기며 배기음을 내다가 궁금해 하는 아이들을 위해 헬맷을 벗었다.
“까~~~~~~아!”
그의 얼굴을 본 여자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고, 몇 명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하고 주저앉았다.
몽롱하게 그를 쳐다보는 아이들에게 그가 한마디 했다.
“얘들아. 김치 꼭 먹어야 한다.”
< 027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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