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5 >
김치를 맛있게 먹는 법을 배운 오프리 윈프라가 시카고로 돌아갔다.
오프리 윈프라 쇼는 시카고의 ABC 직영국인 WLS 로컬 토크쇼로 시작하여, CBS로 갈아탄 다음 미국 전역으로 86년 9월 16일 부터 방송된다.
이후 140 개국에서 방송되고, 미국에서면 주간 평균 4,600만 명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직접 만나본 오프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확실하고, 말을 잘하는 당찬 여자였다.
여러 이슈를 만들기도 하고, 몇 사람에게는 막말을 하긴 하지만, 전국 방송으로 유명해 지기 이전의 그녀라 동민이 쉽게 지분 투자를 하고 만나 볼 수 있었다.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지만, 그 것을 무시할 정도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자기에 미리 친분을 쌓아 두어야 했다.
‘이번 기회가 아니었으면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났겠지. 어린 몸에 세탁소에 있다 보니 제약이 많긴 하네.’
동민의 생각과 반대로 어린 몸에 세탁소에 있으면서 엄청난 일을 하고 있었다.
오프리 윈프라 쇼 계약이 끝나고 평범한 나날을 보내며 세탁소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마이크 타이슨이 20살의 어린 나이에 해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우와. 늙어도 무서운데 젊으니 혈기가 끓어 넘치는 것 같네.”
타이슨의 경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세탁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니 데브가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왔다.
“다니엘! 나 됐어!”
“무슨 말이에요? 물 좀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 해봐요.”
동민이 내민 물을 벌컥 들이 킨 조니 데브가 기뻐하며 말했다.
“나 드라마에 캐스팅 되었어! 드디어 주연이야!”
“정말요? 주인공으로 뽑힌 거예요? 어떤 드라마에요?”
조니 데브는 21세기 점프 스트리트 라는 청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되었다.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청춘 드라마였고, 미국이라 그런지 살짝 매운맛이 들어 있었다.
내년에 시작해 91년까지 총 5시즌이나 만들어지고, 조니 데브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알리게 된다.
“축하해요. 이제 바빠지고 유명해지겠네요?”
“지금 보다는 바쁘겠지만, 스튜디오가 다행히 여기서 가까우니 자주 놀러 올게. 너도 촬영 스튜디오에 구경 하러 와.”
필리핀에서 고생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되었던 조니 데브는 한국에서의 몸보신과 드라마 주연 캐스팅으로 얼굴이 밝아졌다.
“플래툰 개봉은 언제 한대요?”
“영상 편집은 끝났다고 하던데 아직 음향 작업이랑, 배급사 알아보고 있나봐. 주변에서 크게 기대하고 있지는 않던데 정말 괜찮은 거야?”
동민이 플래툰 영화 이야기를 하자 지분 투자를 한 그를 걱정해 주었다.
“촬영할 때 힘들었죠?”
“아직도 가끔 훈련 받을 때 꿈을 꿔.”
조니 데브가 그때를 회상 하며 부르르 몸을 떨자 동민이 안심하라고 했다.
“고생한 만큼 좋은 영화가 만들어 질 거예요. 돈 많이 벌면 갈비 먹으러 가요.”
“부대찌개도 먹으러 가자. 감자탕도 생각나네.”
그와 한국 여행 때 있었던 이야기를 즐겁게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앤젤리나가 삐지는 바람에 그녀를 달래 주느라 두 사람은 진땀을 흘렸다.
다음날 학교에서도 앤젤리나는 동민에게 삐져 있었고, 일부러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단단히 삐진 것 같은데? 태권도장에 가서 미트를 차다 보면 저녁에는 풀리겠지?’
동민도 이제 포기하고, 수업을 기다리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처음 보는 동양인 남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셨다.
“이 학생은 새로 전학 온 신지 오노스케 에요. 아직은 영어가 서투니 잘 챙겨주세요.”
비싸 보이는 맞춤옷에 일본 초등학생용 란도셀을 매고 있는 아이는 척 봐도 잘 사는 것 같아 보였다.
한창 일본이 잘 나가는 시기라 그런지 명문 할리우드 초등학교에는 한국인 학생보다 일본인 학생 수가 더 많았다.
전생에 일본 영화계와 싸우다 죽기는 했지만, 동민은 딱히 일본인을 싫어하지 않았다.
일본 영화계와 정권이 싫은 거지 개인적으로 친한 일본인 친구도 있었다.
미래에야 일본의 전성기가 저물면서 이상한 실사 영화를 만들지만, 최 전성기인 지금은 어디서도 따라할 수 없는 넘사벽 수준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었다.
‘인건비가 비교적 저렴하고, 돈이 넘쳐흐르는 지금에야 가능한 거였지. 일본도 한 번 놀러가긴 해야겠다.”
미래소년 코난으로 데뷔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가 한창 성장하는 시기였고, 조만간 만들어질 아키라도 동민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신지가 동민의 옆 자리에 앉았다.
“만나서 반가워. 난 다니엘이라고 해.”
“일본인이니? 반가워.”
“아니 한국인인데 일본어를 조금은 할 수 있어.”
한 때 진성 덕후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기에 동민의 일본어는 꽤 수준급이었다.
동민이 한국인이라고 하자 신지의 표정이 바뀌더니 고개를 돌리며 무시했다.
‘이놈 봐라. 어린놈이 아주 싹수가 노랗구나.’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에 살짝 열이 받았지만, 학교 안에서 핵인싸인 동민은 별로 아쉬운 게 없었다.
학교를 오래 다닌 다른 일본인 학생들은 모두 동민을 좋아했고, 생일 초대도 여러 번 했었다.
이 녀석도 다른 일본인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금방 태도가 바뀔 거라고 생각했다.
‘태도가 너무 불량스러우면 존 시나 패밀리를 투입시키면 되겠지.’
쉬는 시간이 되자 교실 아이들이 새로 전학 온 신지 주변으로 몰려 들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서니 회장님이야. 아빠가 미국 할리우드에 영화사를 살 거라고 해서 미국으로 왔어.”
“우와~ 정말? 그럼 다니엘도 알겠네. 다니엘은 구리스에도 나왔어.”
동민은 일본 대기업 서니 회장의 손자라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내년인 87년에 서니픽처스가 생기고, 나중에 콜럼비아스 픽처를 인수하지?’
미국 메이저 영화사로 자리 잡는 서니픽처스의 미래를 떠올리고 있는데 동민을 쳐다보던 신지가 말했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 했는데 구리스에 나왔던 배우였구나. 또 영화에 출연하고 싶으면 아빠한테 말해서 도와줄게.”
신지가 동민을 내려다보는 눈빛과 함께 입 꼬리를 올리자 순간 동민의 머리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동민이 욱하며 무언가 말하려다 겨우 진정했다.
‘꼬마애의 도발에 넘어갈 뻔 했네. 실력이 보통이 아닌걸?’
“됐어. 딱히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나는 나중에 영화감독이 될 거야.”
“정말? 다니엘은 영화감독을 해도 멋있을 거야.”
동민이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말에 같은 반 아이들이 좋아했고, 금방 관심이 신지에게서 동민에게로 넘어갔다.
순간 신지의 눈에서 질투의 불꽃이 타올랐고, 그것을 본 동민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너희 아빠도 영화 쪽에서 일하시는 거야? 그래서 영화에 출연했어?”
“아니야. 다니엘은 삼촌 세탁소에서 살고 있어. 학교에서 유명해.”
신지는 혹시나 하며 동민의 부모님도 영화 비지니스에 관련된 일을 하는지 물어 보았지만, 세탁소에서 살고 있다는 말에 동민을 낮추어 보았다.
학교 아이들이야 처음에는 세탁소 차를 타고 하교하는 동민이 이상해 보였지만, 종종 찾아오면 유명 스타 덕에 보통 세탁소가 아니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아직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신지가 또 다시 동민을 도발했다.
“세탁소에서 산다고? 잘 됐네. 앞으로 내 옷은 다니엘 한태 빨아오라고 해야겠다.”
“픽업 서비스는 추가로 1달러를 더 내면 돼. 그런데 넌 스타일이 너무 일본스러워서 옷부터 사야겠다.”
동민이 도발을 가볍게 넘기고, 오히려 받아치자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었고, 신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동민은 몰랐지만, 이 순간 서니 픽처스와의 악연이 시작 되었다.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동민은 신지나 다른 아이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다시 반복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신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동민의 인기를 실감하게 되었고, 질투심에 타올랐다.
“정말 다니엘 초대 안 할 거야? 그럼 많이 안 올걸?”
“괜찮아. 우리 집은 배버리힐즈에서도 좋은 집이니까 다들 오고 싶어 할 거야. 일본에서 요리사도 불렀어.”
“여기 애들은 대부분 잘 사는데? 생일 파티에 김치도 준비 해야 할 거야. 다들 생일에 김치 없으면 싫어해.”
전학 온지 한 달이 지났고, 신지는 다가오는 자신의 생일 파티를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하고 있었다.
다른 일본인 아이들이 생일 파티에는 다니엘을 초대해야 한다며 조언을 해 주었지만, 신지는 끝까지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치? 설마 조선인이 먹는 김치 말하는 거야? 그런걸 도대체 왜 먹는 건데?”
“김치가 얼마나 몸에 좋은데. 거기에다 기름진 미국 음식이랑 궁합도 좋아.”
동민의 노력으로 학교 아이들은 평소에도 김치를 먹게 되었고, 생일 파티에 김치가 없으면 준비가 부족하다며 학교에 소문 돌았다.
유행과 친구의 평가에 민감한 아이들은 동민의 의도대로 김치를 먹었고, 처음에는 싫어하던 아이들도 어느덧 적응을 넘어 중독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하지만, 신지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절대로 김치를 준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흑흑.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멋있는 저택에 유명 요리사까지 일본에서 직접 초빙해온 생일 파티에는 일본인 친구 세 명만 참석했고, 신지는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신지가 절규하는 동안 동민은 평소와 같이 스튜디오에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하러갔다.
이제 스튜디오에는 동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놀이터 마냥 여기저기 구경 다녔다.
“다니엘. 안 그래도 세탁소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잘 됐다.”
“무슨 일이에요? 드라마 시나리오 때문에 그래요?”
동민을 부른 사람은 시나리오 팀에서 일하는 작가였다.
동민의 도움으로 성적이 오른 드라마가 많았기에 다들 동민을 좋아했다.
“너 학교에서 공부 잘 하니?”
“음. 미국 와서 첫 학기 빼고는 계속 1등이에요.”
“우와~! 완벽한걸? 수학 잘하는 재수 없는 똑똑한 아시아인 배우를 찾고 있었는데 혹시 관심 없니?”
“드라마 배우 찾는 거예요? 드라마는 시작하면 오래 찍어야 하잖아요. 저 바빠서 안돼요.”
“주연 배우는 아니니까 걱정 하지마. 비중 있는 조연이긴 하지만, 메인 배우들이 나오는 장면이 대부분이라 일주일에 한, 두 시간 만 촬영하면 될 거야.”
시나리오 작가는 드라마에 양념 같은 역할이 필요한데 동민이 그 역할에 완벽하다며 출연해 달라고 계속해서 부탁했다.
동민은 영화감독이 꿈이지 배우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길게는 10년을 찍어야 하는 드라마에는 더욱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빠지면 시나리오를 전부 고쳐야 한단 말이야. 재미있을 거니 시나리오 한 번 읽어 볼래?”
“에고. 읽어는 볼 건데 저 많이 나와야 하면 안할 거에요. 재미있으면 생각 해 볼게요.”
드라마 작가가 건네 준 시나리오의 제목을 보자 동민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하필 이 드라마라니. 내 첫사랑이 나오는 드라마잖아!’
동민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그녀의 미소를 보며 두근거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 025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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