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7 >
동민이 구석에 숨겨둔 유리병을 가지고 나오자 세 감독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푸른색 병을 보니 술인가 보구나. 사실 이상하게 밥을 먹는데 술이 생각난다고 했는데 넌 어린 녀석이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냐?”
초록색 병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확인하니 하늘색의 유리병이었다.
‘이때는 소주병이 하늘색 이였구나.’
동민이 테이블에서 갈비를 먹고 있는 네 명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어른들은 고기를 먹으면서 꼭 소주를 같이 드시더라고요. 이건 소주라는 한국 술인데 20도 조금 넘으니 그렇게 독하지는 않을 거예요.”
사실 이 자리에서 가장 소주를 마시고 싶은 사람은 동민 이였지만, 차마 초등학생의 몸으로 술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술이 남으면 몰래 챙겨야겠다고 생각했고, 소주 마시는 법을 알려 줬다.
“먼저 건배를 하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공손하게 마셔야 해요. 연장자가 술을 주거나 받을 때는 한손이지만, 어린 사람이면 양손을 써야 해요.”
“할리우드에서는 나이가 많으면 늙은이 취급만 받았는데 한국의 풍습은 아주 마음에 드는군.”
가장 나이가 많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한국식 예절에 만족스러워 했고, 가장 어리면서 배우인 탐 크루스는 감독들이 주는 술을 열심히 받아 마셨다.
“이거 생각보다 금방 취해요. 그렇게 많이 마시면 위험한데?”
“이 정도는 물이지. 술이라더니 달구나.”
숨겨둔 소주를 한 병만 가지고 왔는데 금방 술이 동나 버렸고, 한 병씩 추가 하다 보니 벌써 7병이나 마시고 있었다.
소주를 처음 마시는 외국인은 별 생각 없이 넙죽넙죽 마시다 일어나는 순간 취해 버리는데 지금은 이미 모두 만취 상태로 보였다.
“동민이 이게 어떻게 된 거니?”
“죄송해요. 삼촌. 소주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서 한 병만 줬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버렸어요.”
휴게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 잠시 확인하러 들어온 삼촌이 널려 있는 소주병을 보고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한인 타운에서 소주를 구할 수는 있었지만, 워낙 비쌌기에 숨겨두고 아껴 마시고 있었는데 그걸 홀라당 마셔버린 것이다.
“하아. 어쩔 수 없지. 동민이 넌 안 마셨지?”
“미스터 킴 걱정하지 마시오. 술이 너무 맛있어 우리 마실 것도 없는데 다니엘에게 주었겠소?”
“맛있게 드셨다니 뭐라고 하기도 힘 드네요. 다들 취하신 것 같은데 제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이만 정리하도록 하지요.”
다들 직접 운전을 하고 왔기에 삼촌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삼촌. 다들 가시기 전에 기념사진만 찍어 주세요.”
그들이 떠나기 전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했고, 동민은 카메룬 제임스 감독, 스콧 형제 감독, 탐 크루스와 함께 회식 장면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다. 종종 놀러 오도록 하마.”
“미세스 킴. 음식도 맛있었고 챙겨주신 김치도 잘 먹도록 하겠습니다.”
“오~ 세탁소 벤을 타고 집에 가다니 오늘 정말 재미있는 하루군요.”
감독 세 명이 모두 베버리힐즈에 살고 있었고, 삼촌은 그들을 세탁소 벤에 태워 데려다 주었다.
탐 크루스는 너무 취해 잠에 들었고,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그냥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아이고 머리야. 여기가 어디지? 어제 고기 먹은 기억이 나는데···”
탐 크루스가 숙취로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자 평범한 가정집 게스트룸이 보였다.
방에서 나와 거실로 가자 동민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할리우드 세탁소 미스터 킴의 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숙모가 콩나물 해장국 끓여 두셨으니까 그거 먹으면 괜찮아 질 거예요?”
“고맙구나. 어제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실수하지는 않았니?”
“그냥 기절해서 잠만 잤어요. 탐 형 데리고 가니까 숙모도 좋아하셨고, 미쉘 누나도 좋아하던데요?”
어젯밤 20대의 잘생긴 탐 크루스가 만취되어 집으로 들어오자 미쉘 누나가 난리를 부린 것이 떠올랐다.
지금도 집 안에 있으면서 화장도 하고 가장 아끼는 옷을 입고 있었다.
“누나. 탐 형한테 콩나물 해장국 좀 데워줘.”
“응? 응. 그래 알겠어. 잠깐만.”
탐 크루스를 힐끗힐끗 보고 있던 미쉘이 후다닥 주방으로 도망쳤고, 동민은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준비 다 되었어요. 아침 드세요.”
탐이 평범한 미국식 아침식사를 생각하고 식탁으로 갔지만, 처음 보는 이상한 국이 올라와 있었다.
“이건 뭐니? 정말 이상하게 생긴 음식이구나.”
“콩나물 해장국이라고 하는 건데 해장에 정말 좋으니까 한번 속는 샘 치고 먹어봐요. 맛도 괜찮아요.”
“컹냐멀 해좡쿡?”
콩나물이라는 걸 처음 본 탐은 투명하기까지 한 국에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뜨거우니까 이렇게 따로 덜어서 밥이랑 같이 비벼 먹어봐요. 달걀은 어느 정도 익을 때 까지 가만히 두세요.”
딱히 내키지 않았지만, 동민이 계속 먹으라고 재촉하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미쉘 때문에 아주 조금 맛을 보았다.
“응? 생각보다 훨씬 맛있는데? 맑고 투명한데 왜 깊은 맛이 나는 거지?”
이상한 맛을 상상했던 탐은 예상외의 맛에 안심하며 콩나물 해장국을 끝까지 먹었다.
“어때요? 머리는 조금 괜찮아요?”
“어? 정말 숙취가 없어졌네? 어떻게 된 거야?”
“콩나물 뿌리 쪽에 아스파라간산이 많이 들어 있는데 숙취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히드를 없애는 역할을 하거든요.”
“아스파라거스? 아세트 뭐라고?”
“하여간 효과가 좋은 한국 해장음식이에요.”
콩나물 해장국으로 정신을 차린 탐 크루스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매니저가 집으로 찾아왔다.
“어제, 오늘 신세를 졌구나. 나도 종종 세탁소에 놀러 가도록 하마.”
“저도 기회가 되면 촬영장에 놀러 갈게요. 가시는 길에 부탁 하나만 드려도 돼요?”
동민은 탐에게 가는길에 미쉘을 학교에 대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탐은 그녀를 내려다 주고는 인사로 허그까지 해주었다.
그 모습을 본 미쉘의 친구들은 난리가 났고, 미쉘은 하루아침에 학교에서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동민은 또 한명의 할리우드 유명인사와 친분이 생겼고, 계속해서 세탁소에서 방과 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민아 이번에는 드라마 스튜디오로 심부름을 다녀와야겠다.”
“네. 거기도 몇 번 가봐서 잘 알고 있어요. 걱정 하지 마세요.”
“그래. 조심히 다녀 오거라.”
동민이 운반하는 배달물이 늘어나면서 삼촌은 자전거를 구해주셨고, 자전거가 생긴 동민은 넓은 스튜디오를 구석구석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다니엘. 오랜만이네?”
“드라마는 잘 보고 있어요. 인트로 음악 잡 뽑으셨던데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 하셨지~.”
“하하. 덕분에 반응이 아주 좋단다. 장기 방영할 것 같구나.”
예전에 지나가면서 도움을 주었던 멕가이버 시나리오 작가들이 직원 식당에서 동민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잠깐 여기 앉아서 쉬다 가렴.”
동민에게 디저트를 사 주며 할리우드에서 도는 재미있는 소문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데 얼굴이 좋지 않은 사람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드라마 잘 되서 19부작 더 만든다면서?”
“이야기가 너무 늘어나서 큰일이야. 주연 배우들은 계약을 안 하고, 예산은 줄었는데 스토리를 늘리려니 엉망이네.”
동민이 물어보자 인기 드라마 뷔의 메인 작가라고 했다.
“우와! 그 쥐 잡아 먹는 파충류 외계인 나오는 드라마요?”
어릴 적 무시무시한 외계인의 등장에 가슴을 졸이며 텔레비전을 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판박이 풍선껌 엄청 사먹었는데. 그때 짝꿍 지숙이한테 다이애나라고 놀리다 여러 번 꼬집혔었지.’
뷔는 워너브라더스에서 제작하고 NBC에서 방영한 인기 드라마였다.
년 최초의 미니시리즈 5부작을 만들 때는 제작비도 많이 들이고 신경을 많이 써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부작의 대성공으로 후속편 19편이 추가 되었는데 이미 5부작에서 스토리가 완결된 상태였다. 드라마 특성상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데 19편이나 만들려면 예산이 부족하고, 이야기도 억지로 만들어야 해서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후반부에 주연배우들이 막 죽기 시작하더니 흐지부지 끝났었지? 한국에서도 마지막화가 너무 열린 결말이라 친구들이랑 내용 가지고 싸운 기억이 나네.’
인조 피부 아래 뱀의 피부가 숨겨진 것과 살아있는 쥐를 먹는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나도 기억날 정도로 당시 충격과 공포를 주었었다.
여주인공 줄리엣이 외계인에게 잡혀 살색 전신타이즈를 입고 다이애나에게 고문 받으며 세뇌 당하는 장면도 기억이 났는데 친구들과 옷을 입었는지 아닌지 가지고 싸우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보기엔 조금 므흣하긴 해지.’
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독을 뿜는 장면까지 떠 올리던 동민이 시나리오 작가에게 물어보았다.
“꼭 19편까지 만들어 야해요? 너무 무리다 싶으면 17이나 16편으로 줄이면 이야기가 압축되면서 스토리가 지루해지지 않을 거고, 주인공들도 어떻게든 살려 나갈 수 있을 거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 하는데 방송국에서는 어떻게든 19편을 만들라고 하더구나.”
“그러면 감독님을 잘 설득 하셔야겠네요. 이 드라마 세계적으로 인기 있던데 스토리 망쳐 버리면 두고두고 욕먹을 걸요? 전 세계 시청자한테 욕먹는 거 보다 방송국장한테 욕먹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래. 네 커리어를 길게 봐도 그러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우리도 다니엘 말 듣고 잘 되었으니 대충 듣지 말고 고민 해봐.”
초반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해성같이 등장했던 드라마가 흐지부지하게 끝이나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다른 결말을 만들었으면 했다.
그러고 보니 남자 주인공인 마이크 도노반의 조수로 토니라는 동양인 남자가 나오는데 주인공을 구하다 죽긴 하지만, 그는 한국인 배우였다.
그래서 인지 드라마에서 한국에 관한 이야기도 조금 나왔었다.
동민은 차마 한국인이 나오는 드라마가 망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오늘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분을 부를 테니 7시에 할리우드 세탁소로 와 주세요.”
“네가 도와줄 수 있다고?”
“제가 아니고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알고 있어요. 꼭 오셔야 해요.”
세탁소로 돌아간 동민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뷔 드라마 이야기를 들은 그가 세탁소로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뷔 드라마의 메인 작가가 할리우드 세탁소로 들어왔고, 이미 도착해 그를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 하며 말했다.
“카메룬 제임스 감독님?”
“자네가 다니엘이 말한 메인작가로군. 지금 상황은 전해 들었네. 쉽지는 않겠지만, 몇 가지 방안이 있긴 하다네.”
영화와 드라마는 많이 달랐지만, SF와 특수효과의 대가이자 외계인 영화인 에일리언즈를 만들고 있는 카메룬 감독의 조언을 큰 도움이 되었다.
예산을 알뜰하게 쓰기로 유명한 카메룬 감독의 도움으로 예산을 절약하면서 스토리를 매끄럽게 정리하는 법을 배워갔다.
“정말 고맙구나. 덕분에 문제를 해결할 방향이 보이는 구나. 큰 도움을 받았는데 내가 보답할 방법은 없니?”
“괜찮긴 한데 가능하다면 드라마에 한국 이야기를 더 넣어 주세요.”
< 017 > 끝
ⓒ 돈많을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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