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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 그들과 아이들 (39/39)

외전 4. 그들과 아이들

아나이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장난감 방으로 향하는 루카스가 미간을 찡그렸다. 얕게 한숨을 쉰 루카스는 걸음을 빨리했다.

문을 열자 남자아이가 제법 큰 목각 조립 인형을 들고 앉아 있고 여자아이는 땅바닥에 엎드려 펑펑 울고 있었다.

“헤레이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제 갓 세 살을 넘긴 검은 머리의 남자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헤레이스의 얼굴도 루카스만큼 일그러져 있었다.

“형님!”

루카스는 얼른 달려가 바닥에 엎드려 울고 있는 여자아이를 안아 올렸다. 이제 두 살이 된 아이는 태양을 머금은 듯한 짙은 금발에 진회색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엄마를 꼭 빼다 박은 외모였다.

아이가 루카스의 품에 안겨 가슴에 얼굴을 비벼 대며 훌쩍였다.

“오라버니…. 헤레스가 빼서 갔어…, 인형.”

“야! 내 이름 헤레이스라고 했지? 그리고 왜 반말해! 그리고! 이거 내 거잖아!”

루카스가 제법 엄한 눈빛으로 헤레이스를 노려보자 무언가 더 퍼부으려고 했던 헤레이스가 씩씩대며 입을 꾹 다물었다. 헤레이스의 눈 속엔 억울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저 쬐끄만 게….”

분이 안 풀리는지 작게 웅얼거리던 헤레이스가 주먹을 꼭 쥐며 눈물을 삼켰다. 루카스는 품에 꼬옥 안겨 있는 아나이스의 등을 토닥이다가 동생 헤레이스에게 다가갔다.

“헤레이스, 아나이스는 아직 어리잖아. 우리 멋진 황자님은 이제 장난감을 양보할 때도 된 거 같은데.”

루카스가 눈을 부드럽게 휘며 다정하게 웃었다. 고개를 끄덕인 헤레이스는 형의 팔을 잡았다. 자신도 위로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루카스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한쪽 팔은 아나이스를, 한쪽 팔은 헤레이스를 안았다. 아나이스가 곁으로 바짝 다가온 헤레이스의 볼에 입을 갖다 대어 쪽 소리 나게 입 맞추었다.

“아, 진짜! 너 치임!”

기겁을 한 헤레이스가 볼에 잔뜩 묻은 동생의 침을 손으로 박박 닦았다. 아나이스는 소리를 지르는 헤레이스를 보면서 다시 울먹거렸다. 그걸 본 루카스가 얼른 아나이스를 번쩍 안아 들고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어마마마 뵈러 갈까?”

아나이스와 헤레이스가 어마마마라는 소리에 눈을 반짝이며 루카스에게 매달렸다.

여섯 살인 루카스는 금발인 것만 빼면 외모가 베르톨트와 판박이였다. 성격도 황제를 많이 닮았으나 매사에 침착하고 꼼꼼한 것은 황후를 닮았다.

루카스는 모든 면에서 나이 같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골격이 남달라 키가 열 살을 넘긴 아이들과 비슷했고, 벌써부터 몸놀림이 날렵하고 근육이 많았다.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 주위에서는 황제보다 더 일찍 소드마스터가 될 것이라고 점치기도 했다.

루카스의 동생이자 황제 부부의 둘째 아들인 헤레이스는 이제 세 살이 된 장난꾸러기였다. 루카스와는 달리, 베르톨트처럼 머리카락이 까맸고 외모는 아델라이드를 많이 닮아 있었다.

이 꼬마는 형과는 정반대의 성향이었다. 매우 영특하고 재주가 많은 한편, 장난기가 심하고 짓궂어서 시종과 시녀들이 종종 애를 먹었다.

몸을 쓰는 것보다는 무언가를 만들고 해체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둘째 황자의 장난감은 죄다 블록이나 퍼즐 등 조립하고 만드는 종류였다.

셋째 아나이스 황녀는 두 살로, 성격과 외모 모두 황후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외모와 성격 모두 사랑스러워서 누구나 이 황녀를 어여삐 여겼지만 그중에서도 황제의 사랑이 유별났다. 베르톨트는 이 작은 아델라이드 앞에서는 전혀 맥을 못 추고 미소만 흘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냉철하고 냉혹했던 황제가 딸바보가 되었다고 하였다.

헤레이스에게 형 루카스는 산처럼 든든한 존재였고 여동생 아나이스는 자신을 힘들게만 하는 존재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 사랑스럽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왜 그런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말도 잘 못해서 맨날 반말로 자신을 부르는 아나이스가 귀찮았다.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나지 않아서인지 둘은 눈만 부딪히면 싸우기 일쑤였다.

“헤레이스, 아나이스는 우리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야. 내가 없을 때 아나이스가 위험해지면 네가 동생을 지켜야 해. 알고 있지?”

오늘도 루카스는 헤레이스에게 형으로서 충고를 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형도 아직 어린아이면서 이런 말을 하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키도 크고 어른스러워서 왠지 자신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산처럼 말이다.

그러는 동안 아나이스는 루카스가 입에 넣어 준 사탕을 오물대며 루카스의 품 안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뒤에서 따르는 호위 기사들은 오늘도 의젓한 루카스를 보며 흐뭇해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황후의 집무실 앞에는 아른프리트와 루이사가 서 있었다. 루카스는 황제와 황후의 호위 기사가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집무실에 누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른프리트 경, 폐하께서 함께 계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루카스는 이런 경우가 처음이 아닌지라 당황하지 않았다. 어른들이 하는 일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특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항상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단순히 말을 하고 입맞춤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른들만의 표현 방법이 있다고도 했다. 좀 더 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니 지금은 여기까지만 알고 있어도 된다고 했다.

루카스는 지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그 어른들의 표현을 하고 있다고 짐작했다. 이런 때는 방해하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는 동생들을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헤레이스, 아나이스. 지금 두 분께서 중요한 말씀을 나누고 계시니 우린 나중에 다시 오자꾸나.”

“왜요? 우리 들어가면 안 되는 거예요?”

“어마마마 보고 싶어….”

입이 부루퉁하게 나온 두 아이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루카스를 올려다보았다.

루카스는 이런 동생들의 눈빛에 약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을 때, 루이사가 다가와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황자님, 황녀님. 지금 두 분께서 중요한 회의 중이시니 괜찮으시다면 제가 좀 놀아 드릴까요?”

루이사의 말에 헤레이스와 아나이스의 표정이 한없이 밝아졌다. 헤레이스는 그 자리에서 방방 뛰어 올랐다. 언제나 쾌활하고 명랑한 루이사는 장난기 많은 헤레이스와 죽이 척척 맞았다.

“잠시 본궁 정원에 다녀올게요. 두 분이 나오시면 기별을 주세요.”

루이사가 남편 아른프리트에게 윙크했다. 그는 알겠다며 소리 나게 웃고는 어서 다녀오라는 뜻으로 손을 흔들었다.

루이사의 앞에 선 헤레이스와 아나이스가 정원 쪽으로 뛰어갔다. 지근 시녀가 그 뒤를 마찬가지로 뛰면서 뒤따랐다. 루카스는 루이사의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루이사.”

“별말씀을요. 황자님께서는 어쩜 이렇게 어른스러워요? 아직은 어리광을 부리셔도 되는데. 키가 부쩍 컸어도, 어른이 되려면 멀었답니다. 황자님은 그 어깨에서 책임이라는 무게를 좀 내려놓으셔야 할 거 같아요. 그런 건 아직 이르다고요.”

환하게 웃은 루이사가 루카스의 손을 잡아 톡톡 두드리고는 놓았다. 루카스는 피식 웃었다. 루이사가 하는 말을 아델라이드에게서 매일 듣기 때문이었다.

황후의 하루 마무리는 아이들의 침실을 둘러보는 일인데, 마지막으로 루카스의 침실에 들른다. 침대에 누워 있는 루카스에게 와서는 이마에 입 맞추고 꼭 끌어안아 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번은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 고마운 아들, 루카스. 너무 많은 것을 잘하려 하지 말거라.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려 하지 말아. 엄마와 아빠가 있잖니. 우리 함께 천천히 풀어 가면 된단다. 엄마는 우리 루카스가 행복하고 즐거웠으면 해. 사랑한다, 아가.”

그 말을 들을 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려 했다. 자신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어마마마의 그 속삭임에 가슴이 벅차오르고 편안해졌다. 루이사의 말은 자신에게 크나큰 위로가 된 그때 그 말과 비슷하게 들렸다.

“노력해 볼게요. 루이사, 고마워요.”

루카스가 눈을 휘며 부드럽게 웃자 루이사가 순간 얼굴을 붉혔다.

‘하아. 깜짝 놀랐네. 무슨 어린아이가 그런 표정을 지어? 우리 황자님, 크면 장난 아니겠네.’

루이사는 아델라이드를 닮은 찬란한 금발에 베르톨트를 쏙 빼닮은 얼굴을 한 루카스의 옆모습을 흘깃 보면서 가슴을 쓸었다.

루카스는 동생들을 향해 웃으며 뛰어갔다. 부모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고, 루이사가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편, 황후의 집무실에서 아델라이드는 옷을 매만지며 베르톨트를 흘겼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피식 웃었다.

“그대가 먼저 도발한 거야.”

“누가 뭐래요? 그렇다고 꼭… 그렇게….”

“그렇게 뭐어?”

베르톨트가 다시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아델라이드가 시선을 피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꼭 매번 그렇게 끝까지 가야겠느냐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튼 다음부턴 이, 이러지 말아요.”

“싫은데. 더 하고 싶은데 한 번으로 참은 거야.”

“베르!”

“그대는 내 아내야. 남편이 아내를 안고 싶다는데 왜 자꾸 조심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지?”

진심으로 정색을 하며 물었다. 아델라이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황제이기 전에 남자야. 당신을 보면 입 맞추고 싶고 안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하…, 정말…!”

그 대상이 나라서 좀 버겁다구요. 뒷말은 삼켰다.

그나저나 결혼한 지 6년이 넘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은지, 원래 정력적인 사람이라는 건 알았지만 새삼스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베르톨트를 보니 자연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 * *

창을 세차게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저녁부터 내리는 장대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칠흑같이 검은 밤하늘에 간혹 번쩍하고 번개가 쳤다.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는 침대에 누워 낮에 있었던 일들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겠네요.”

“예산을 뽑아 오라고 했어. 정확히 나와 봐야 알겠지만 레니에는 현재 바젤에서 걷히는 세금을 일부 개선 비용으로 넣을 생각인가 봐.”

“아무래도 바젤은 목조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엄청나니까 그럴 수 있겠네요.”

아델라이드는 베개에 얼굴을 떼고 베르톨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손을 들어 그의 단단한 가슴 근육을 쓸자 베르톨트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오늘은 또 어떤 내용으로 베갯머리송사를 하려고 나를 유혹하시나?”

그녀가 푸스스 웃으며 그의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꼭 그런 의도는 아니지만 베르톨트는 할 말이 있는 낌새를 귀신같이 눈치챘다.

“이번 휴가 말이에요…. 혹시 계획 있어요?”

“계획?”

“없죠?”

“우리 별장으로 가려 했는데, 왜?”

“그러지 말고 우리 바젤로 가요.”

“바젤?”

“네, 힐다와 클리터스가 초대했어요. 가 보고 싶어요.”

힐다는 클리터스와 연인 사이이고, 현재 힐다는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 바젤에서 제일가는 사업가였다. 힐다의 여관은 이제 매우 크고 고급스러운 호텔로 단장해 새로이 문을 열게 되었는데, 그 개관식에 힐다가 아델라이드를 초청했다.

“나도 클리터스를 만나고 싶고… 바젤의 발전 현황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긴 한데….”

베르톨트가 잠시 뜸을 들이자 아델라이드는 조밀하게 잡힌 배 근육을 따라 입을 맞추었다. 마치 고양이가 간혹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소리 내어 웃은 그가 그녀의 얼굴을 잡고 시선을 맞추었다.

“이런, 이런…! 우리 부인께서 급하셨나 보군. 알겠어. 바젤로 가지.”

아델라이드가 눈을 빛내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하던 건 마저 해야지.”

베르톨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벌써 느른하게 풀려 욕망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뜨거운 손길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을 스윽 스치면서 은밀한 그녀의 입구로 향했다.

그때 창밖으로 번쩍하고 번개가 치더니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눕혀 품에 가두고는 그녀의 귓불을 핥아 올렸다.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런 날은 크게 소리 내도 전혀 모르겠어.”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곧바로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고 물컹하고 축축한 혀가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진득한 혀 놀림에 아랫배가 지잉 하고 울렸다. 혀가 뒤엉킬 때마다 의식이 멍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등 뒤를 감싼 팔뚝이 아델라이드를 품 안으로 더 깊숙이 끌어 당겼다.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두 사람은 행위에 열중하느라 알아채지 못했다.

이윽고 소리가 제법 크고 다급해졌다. 아델라이드가 흠칫 놀라 베르톨트의 가슴에서 떨어졌다.

베르톨트가 짜증스럽게 상체를 일으켰다. 들어오라고 말하자 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무시는 데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아나이스 황녀님께서….”

윤이 들어와 여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의 뒤에서 나타난 아나이스가 후다다닥 뛰어와 침대 위로 폴짝 올랐다. 그러고는 아델라이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마마마. 무서어요. 무서어….”

아나이스가 작은 몸을 잔뜩 웅크리며 더욱 파고들었다. 아델라이드는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부드럽디부드러운 몸을 꼭 끌어안았다.

“천둥소리 때문이구나.”

아델라이드가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자 아나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천둥이 쳤을 때 놀라셨는지 마마께 가겠다고 하셔서….”

윤은 황제 부부의 은밀한 밤을 깨 버린 것이 민망하고 죄송하다는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윤의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황제 부부의 침실 문밖에서 불침번을 서는 시종과 시녀들은 밤에 부부가 얼마나 뜨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제는 그 시간을 방해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고 용납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윤이 잔뜩 겁을 먹을 만했다.

“괜찮아, 윤. 아나이스가 놀랐으니 당연히 달래 줘야지.”

“괜찮으니 그만 나가도 좋아.”

아델라이드와 베르톨트가 괜찮다고 하자 윤은 가슴을 쓸며 안심했다. 우는 황녀를 어떻게든 자신이 달래었어야 했나 하고 후회하던 중이었다.

황제 부부의 말이 떨어지자 윤은 곧바로 문을 닫고 물러났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품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 아나이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 딸, 많이 무서웠어?”

“네, 너무 무더워요. 천둥소리는 너무 커서 하늘이 찌저지는 거 가타요.”

울먹이는 아나이스가 혀 짧은 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베르톨트는 귀여워서 못 참겠다는 듯 아이의 어깨와 팔에 입 맞추며 아프지 않게 살짝살짝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간지러운지 움찔움찔 거렸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짓으로 아나이스를 안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 아버지가 안아 줄 테니 이리 오렴.”

베르톨트가 아나이스를 뒤에서 안자 아이는 순순히 아델라이드에게서 떨어져 아버지의 품으로 안겼다.

그때 또 한 번 천둥 번개가 쳤다. 번쩍이는 빛이 두어 번 침실을 비추더니 정말 하늘이 찢어질 듯 커다란 소리가 났다.

겁에 질린 아나이스가 베르톨트의 팔을 꼭 잡았다. 베르톨트는 아버지가 함께 있으니 안심하라며 아이의 등과 엉덩이를 토닥였다.

“베르. 루카스와 헤레이스 좀 보고 올게요. 혹시 울고 있을지도 모르니….”

아델라이드가 아나이스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잠옷 위에 나이트가운을 입고는 침실 문을 나섰다.

꽤 시간이 흐른 후 아델라이드가 침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왼손으로 루카스의 손을, 오른손으로 헤레이스의 손을 잡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울었는지 눈물 자국이 뺨에 남아 있었고 루카스는 쭈뼛대며 불편해하고 있었다.

“너희들도 무서운 게냐?”

베르톨트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헤레이스는 입을 비죽 내밀어 불만을 표시했고 루카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델라이드가 베르톨트를 곱게 흘기며 그런 말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이 애들도 아직 어리잖아요. 이런 날은 원래 다 같이 모여 자는 거라고요.”

아델라이드는 어렸을 적, 천둥 번개가 요란하던 날 에드가와 소니아 모두 모여 한 침대에서 잤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무서움에 떨었는데, 나중에는 서로의 온기 때문인지 무섭다는 생각이 달아나서 아침이 올 때까지 장난을 치고 놀았었다.

아델라이드는 두 아들의 손을 끌어 침대로 올라갔다. 부부의 침대는 두 사람이 쓰기에 지나치게 넓었다. 매일 꼭 붙어 자니 굴러다니지 않는 한 침대의 모든 면적을 쓸 수가 없었다.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가 나란히 눕고, 아델라이드 옆으로 헤레이스, 루카스 순으로 누웠다.

처음에는 아델라이드 바로 옆에 루카스가 누웠는데, 왜 항상 자신은 어마마마 옆에 눕지 못하는 거냐며 헤레이스가 투정하자 루카스가 일어나 자리를 바꿔 주었다.

베르톨트는 옆에 있는 아나이스를, 아델라이드는 헤레이스의 등을 토닥였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부모와 함께 누워선지 꽤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재잘댔다. 대부분은 아나이스가 혀 짧은 소리로 하는 말이었고 중간중간 헤네이스가 야유를 하는 등의 추임새를 넣었다.

천둥 번개가 계속 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잘대던 아이들이 어느 순간 잠들었다.

아나이스가 제일 먼저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고, 아나이스를 계속 약 올리던 헤네이스도 곧 눈을 감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며 자지 않으려 애쓰다가 동생이 조용해지자 그대로 잠든 것이었다.

루카스의 눈도 스르르 감기려 할 때 베르톨트의 낮고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스, 잘 자거라.”

황제는 루카스에게 아버지이자 군주이자 스승이자 우상이었다. 그런 존재 앞에서 루카스는 헤네이스나 아나이스처럼 스스럼없이 굴지 못했다. 아버지임에도 항상 어려웠고 동시에 존경스러웠다.

루카스는 이렇게 뜻하지 않게 아버지의 사랑이 느껴질 때면 가슴이 뜨거워졌다.

“네, 폐…하도 안녕…히 주무…세….”

루카스의 대답이 늘어지면서 말끝이 잦아들었다. 베르톨트는 잠드는 와중에도 자신의 잘 자라는 인사에 폐하라고 답하는 어린 아들이 짠했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그가 손을 크게 뻗어 루카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카스는 눈이 감기면서도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모두 잠들었다. 상체를 살짝 일으켜 아델라이드를 보니 그녀도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잠든 아델라이드와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지나간 시간들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다. 세르비아를 위해 황제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 정신없이 지나온 시간들은 아델라이드를 만나기 전 정신없이 지나온 시간들과는 달랐다.

둘이 만나 어느덧 다섯이 되었다.

국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면 사랑스런 아내가 시선을 맞추어 주었고 아이들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아델라이드를 만나기 전이 오로지 지독하게 버티고 견디어야 했던 인내의 시간이었다면 지난 6년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채우는 시간이었다.

베르톨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 *

친애하는 힐다에게.

먼저 이번 여름에 초대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겠네요. 3년 만에 갖는 휴가라 우리 모두가 매우 기대하고 있어요. 더군다나 새롭게 개장하는 최고급 호텔이라니 아이들은 벌써부터 설레서 잠을 못 자겠다네요. 사실 저도 매우 궁금해요. 성공한 힐다의 모습도, 힐다의 멋진 호텔도.

클리터스 경과는 어떤가요?

저번 서신에서는 그에게 먼저 프러포즈를 해야겠다고 하셨는데 전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힐다처럼 앞서 나가는 여성이라면 원하는 이성이 나타났을 때 용감하게 호감을 표시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그러지 못했지만요.

이 서신을 힐다가 받을 때는 힐다의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드네요. 레니에 공과 에드가가 지난번 바젤을 방문했을 때 힐다에 대한 클리터스의 속마음을 들었거든요. 제 예감이 틀리지 않을 거예요.

만나면 우리 밤새워서 이야기해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바젤에 파견된 궁정 마법사, 아그리파와 벨라루아도 잘 있죠? 힐다의 답장에서, 마법사들이 질병을 치료하는 등 이주민들의 보건 복지에 힘쓰고 있다는 내용을 보고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몰라요. 재단의 자선 활동이라는 명분하에 궁정 마법사를 좀 무리해서 보냈거든요. 큰 도움이 되고 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아! 그리고 함께 초대해 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다니엘은 저희보다 하루 늦게 도착할 거예요. 어머니의 고향을 경유해서 바젤로 들어갈 거라 하니 첫날에는 저희 객실만 준비해 주시면 돼요. 여러모로 번거롭게 하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되는데, 너무 설레서 자꾸만 뻔뻔해지네요. 부디 이해해 주세요.

같이 동봉한 것은 벤자민의 서신이에요. 오늘 벤자민이 다니는 아카데미에 갔다가 받아 온 거예요. 황실 우편이 훨씬 빠르니 같이 보내 달라고 하더군요. 서신을 보면 알겠지만 벤자민은 정말 훌륭히 해 나가고 있어요.

그럼, 그날 뵙도록 하고 이만 줄일게요. 언제나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원하겠습니다.

당신의 친구, 아델라이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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