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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끝, 그리고 시작 (35/39)

제34장. 끝, 그리고 시작

짙은 녹색의 나뭇잎들 사이로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그 나무들 어딘가에서 지저귀는 소리가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근처에는 시냇물이 흐르는지 새소리에 섞여 영롱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물 내음이 아델라이드의 코끝을 촉촉하게 간질였다.

아델라이드는 지상의 숲이 아닌 듯한 이곳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깨끗하기 그지없는 공기가 코를 지나 폐부로 깊숙이 내려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지자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화한 느낌이 들었다. 머릿속이 맑아지고 시야까지 깨끗해졌다.

‘여긴 어디지? 꿈속인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유독 환한 빛이 쏟아지는 곳에서 눈길이 멈췄다. 금발의 사내아이가 햇빛 속에서 자신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는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였다. 햇살을 담은 금발 때문인지, 뽀얗고 아름다운 얼굴 때문이지, 금색으로 장식된 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인지 꼭 천사 같았다.

“아, 아가…!”

저도 모르게 아이를 불렀다. 그러자 아이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가슴이 벅차올라 그만 눈물이 났다.

걸음을 옮겨 아이 앞으로 다가가니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아이의 어깨를 꼬옥 쥐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는 아이를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만큼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그때 아델라이드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생김새만 놓고 보면 아이는 어린 베르톨트 같았다. 금발 때문에 아이를 보자마자 베르톨트를 떠올리지는 못했으나 이제 보니 분위기도 베르톨트와 닮아 있었다. 아이답지 않은 묵직한 분위기가 언뜻언뜻 풍겨 왔다.

그 순간, 지금껏 잊고 있었던 사실이 생각났다.

아델라이드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하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입술이 바르르 떨리면서 동시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아가…? 내 아가?”

분명히 다리 사이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으니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 테다. 갑자기 이런 그림 같은 숲 속에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곳은 꿈에서 만들어 낸 장소일 것이고 눈앞의 이 아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머리색과 베르톨트의 외모를 꼭 닮은 아이를 이렇게 환상적인 공간에서 만날 리 없었다.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그녀의 눈을 지그시 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델라이드는 아이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움직여 아이를 품에 안았다.

작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몸이 그녀의 품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꿈인데, 꿈인 것을 아는데도 가슴이 너무나 벅차올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아이를 꼬옥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아가, 어째서 꿈에 나타난 거니.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온 거야?’

다문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동시에 바들바들 떨리는 아델라이드의 등을 아이가 다정히 쓸어 주었다. 베르톨트가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아델라이드와 아이는 그렇게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가 아델라이드의 어깨를 슬며시 밀었다. 의아한 마음에 아이를 보니 내내 미소 짓던 아이가 어느새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델라이드와 눈이 마주친 아이는 그녀의 품을 벗어나 뒤돌아 걸어갔다.

가슴이 뻥 뚫린 듯한 허전함에 아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흘러내렸다. 안간힘을 써서 겨우겨우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끄으윽 하는 이상한 소리만 터져 나왔다.

그사이에도 아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어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안… 돼! 안 돼! 가지 마!”

그러나 아이는 뒤돌아보지 않고 저 멀리 빛 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아델라이드가 울부짖었다.

“아가! 안 돼! 엄마 여기 있어! 안 돼!”

그녀의 외침을 뒤로하고 결국 아이는 빛 무리에 감싸여 모습을 감췄다.

아델라이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너무나 맑고 청량하던 숲이 순식간에 어두운 기운에 휩싸여 하늘과 같이 돌고 있었다.

‘안 돼! 아이를 보낼 수 없어! 아직 아무것도 해 준 게 없는데, 나한테 와서 고맙다고 말해 주지도 못했는데. 안 돼!’

아이를 가진 줄도 모르고 다른 곳에만 신경 쓴 엄마라서, 그 정도로 무심하고 바보 같은 엄마라서 떠나려 하는 걸까? 죄책감과 함께 두려움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점점 커져 가는 감정과는 반대로 아이를 삼킨 빛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그 빛에서 눈을 떼지 않고 악을 썼다.

“머레인! 아이를 살려 줘! 머레인!”

머레인을 목 놓아 불렀다. 얼마나 처절하게 울부짖었던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아델라이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그 순간, 거의 섬멸해 가던 빛이 갑자기 폭발하듯 터졌다. 아델라이드는 몹시도 눈이 부셔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빛이 그녀에게로 마구 쏟아져 내렸다.

* * *

아델라이드는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아직 몽롱한 가운데 주치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고자 하는 태아의 의지가 강한 건지, 아이를 살리겠다는 아델라이드 님의 의지가 강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놀랍게도 태아의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델라이드는 괜찮은 거고?”

“네, 맥이 조금 약하게 뛰긴 하지만 안정을 취하시면 회복하실 것입니다. 하혈을 하셨기 때문에 사나흘간은 무조건 푹 쉬게 해 주셔야 합니다.”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로 내려온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얼마나 놀랐던지 좀 전까지만 해도 제정신이 아니어 보였다. 지금까지 황제가 이렇게까지 놀랐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언제나 냉정했던 황제가 약혼자만 관련되면 이래저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고 생각하며 주치의 역시 내심 놀라워하고 있었다.

주치의는 아델라이드를 진료한 직후에 그녀가 하혈을 많이 하여 사산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혈을 하고도 아직 살아 있는 태아가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심장의 박동이 잦아들고 있어서 어느 순간에는 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렇기에 다시 힘차게 뛰기 시작했을 때는 너무나 놀라서 몇 번이고 다시 진찰했었다.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주치의는 황제에게 예를 올린 후 방을 나섰다.

주치의가 나가고 나서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튕겨지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몰라도 아델라이드가 눈을 살짝 뜨고 있었던 것이다. 베르톨트가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일이었다.

하지만 베르톨트는 마음껏 기뻐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아델라이드는 벌써 베개가 축축할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어서였다.

“아델….”

“…우리 아이. 괜찮은 거 확실하죠?”

“그래. 기특하게도 녀석이 잘 버텨 주었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델라이드가 자신을 좀 일으켜 달라고 말했다. 베르톨트가 주저하자 그녀는 잠시만 앉아 있겠다고 말하며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베르톨트의 마음을 한없이 약해지게 하는 눈빛이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제 목걸이… 좀 주시겠어요? 거기 화장대 위에 있어요.”

“목걸이는 왜?”

“인사를 해야 해요. 머레인에게.”

베르톨트가 목걸이를 가져와 아델라이드에게 건넸다. 아델라이드는 조심스럽게 받아 목에 건 뒤, 베르톨트의 두 손을 잡았다.

“머레인. 제 말 들리죠? 베르도 알 수 있게 소리 내어 말할게요.”

아델라이드가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머레인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레인, 고마워요.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요.”

- 무슨 소릴. 내 역할을 한 것 같아 너무 기뻐.

“머레인이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는….”

- 음…, 그건 모르는 일이야. 내가 부름을 듣고 네게 갔을 때 그 아이는 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가만히 서 있었어.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말이야. 내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다시 왔을 거야.

“그랬을 수도 있죠. 하지만 머레인 덕분에 아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해요. 정말 고마워요.”

- 아하하. 네가 목숨만큼 사랑하는 아이를 내가 살린 거군.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으니 난 한동안 좀 쉬어야겠어.

“앗. 정말이에요?”

- 하늘로 올라가려는 사람을 다시 이 세상으로 데려오는 데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요되는지 알아? 엄청나다고.

머레인은 쑥스럽게 웃고는 나중에 또 보자며 인사했다. 그러고 나서 거짓말처럼 머레인의 기척이 사라졌다.

베르톨트는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며 아델라이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듯했다.

머레인이 남긴 여운을 잠시 곱씹던 아델라이드는 이윽고 베르톨트를 바라보며 자신이 꾸었던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베르톨트는 검을 내리치는 순간 그 상대가 레니에라는 것을 인지하고 자신도 모르게 검의 각도를 바꾸었다. 그랬기에 검이 레니에의 심장을 비껴가, 레니에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만 검에 베인 상처에서 피가 많이 흘러 회복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에드가는 레니에가 쓰러진 다음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세뇌를 강제로 푸는 방법은 그 목적 대상이 사라지거나, 세뇌를 건 사람이 사라지거나, 세뇌에 걸린 사람이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이가 희생되는 것이었다.

에드가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사랑한 이는 아델라이드, 그리고 레니에였다. 후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쓰러진 레니에가 응급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에드가는 자신의 머릿속에 뿌옇게 껴 있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한데 모여 표백된 기억의 조각들에 다시 본래의 색이 입혀지면서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조작된 기억은 원래대로 복구되고, 지웠던 기억은 되살아났다.

기억을 되찾은 에드가는 멍하니 레니에를 지켜봤다. 1년 전 그때와 꼭 같았다. 레니에는 그때처럼 자신 대신 칼을 맞고 쓰러졌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차마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그가 다쳤다는 생각에 그때보다 더 큰 죄책감이 밀려들어 왔다. 그가 혹여나 잘못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온몸이 벌벌 떨렸다.

레니에가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동안 에드가는 미친 듯이 기도했다. 제발 레니에를 살려 달라고. 그러면 그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너무나 절박하고 애절한 기도 때문이었을까. 레니에는 이틀 후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에드가부터 찾았으나 침대맡을 아무리 둘러봐도 에드가가 없었다.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집사며 시중인들이 레니에에게 괜찮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에드가만 애타게 불렀다.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에드가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레니에가 깨어난 사실을 기뻐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무척이나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미안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레니에가 자신을 찾는 소리에 가까스로 용기를 낸 그는 사람들을 헤치며 레니에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드가는 이틀 동안 너무 많이 울어서 얼굴이 퉁퉁 부었는데도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레, 레니에 님….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레니에는 손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는 에드가를 보고 비로소 안심했다. 그 전처럼 그는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목 놓아 울고 있는 고운 이 사람은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쳤던 그날 이후, 모든 사건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해결되어 갔다.

알렉시아 황녀는 세뇌 마법을 이용하여 살인을 하게 한 살인교사죄 및 세뇌교사죄라는 죄목으로 그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자국의 황녀인데도 안달루스 제국은 세르비아 제국에 황녀의 처분을 일임한다고 선언했고, 며칠 후 세르비아는 알렉시아 황녀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러나 일국의 황녀이기 때문에 안달루스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의가 제기되어 다시 논의한 결과, 형량이 대폭 감해졌다.

알렉시아 황녀는 황녀의 지위에서 폐위되어 평민이 되었다. 그리고 사막과 밀림이 대부분인 대륙, 사우린으로 추방되었다. 두 눈이 뽑히고 혀가 잘린 채로.

세뇌를 건 벨라루아는 자수한 사실 및 황녀의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세뇌를 건 사정이 정상참작 되어 처벌은 면하게 되었다. 대신 향후 5년간 세르비아 황실의 궁정 마법사로서 무급 봉사를 하라고 명받았다.

레니에는 황제의 결혼식 일주일 전 업무에 복귀했다. 베르톨트는 이제 막 회복된 레니에의 몸 상태를 고려하여 휴고를 보좌관으로 임명해서 일을 덜어 주었다.

* * *

“폐하, 결혼식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태평하십니까?”

“태평한 게 아니라 정말이지 꼼짝도 못하겠어.”

아침부터 레니에는 황제의 집무실에 들러 황제를 들볶고 있었다. 황제의 결혼식 발표 이후 예식을 담당하는 임시 부서가 꾸려져 결혼식 준비부터 각국의 손님을 맞는 준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과정을 주관하는 레니에는 죽을 맛이었다.

할 일이 태산과도 같았는데 황제는 요즈음 업무에서 손을 거의 떼고 있었다. 황제의 재가를 받지 못한 결재 서류가 하늘을 찌를 듯이 쌓여만 갔다.

“하아, 어지간히도 유난스러우십니다.”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 정말 여자들은 이걸 어떻게 견디는지. 존경스러워.”

베르톨트의 푸념 섞인 말을 들은 레니에는 관자놀이를 꾸욱 꾸욱 누르며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동안 황제가 제 연인에게 하는 짓이 꼴사납다고 생각하긴 했지만서도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레니에의 불만 가득한 눈빛이 베르톨트에게 꽂혔다. 베르톨트는 슬쩍 그 시선을 피했다.

그때 프리트홀트가 노란 액체가 담긴 유리잔이 놓인 쟁반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했다.

“폐하, 차가운 망고 주스입니다. 드셔 보십시오. 속이 좀 가라앉을 것입니다.”

베르톨트의 표정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베르톨트는 한달음에 프리트홀트의 앞으로 가서는 형형색색의 가니쉬로 장식된 커다란 유리잔을 손에 쥐었다. 잔을 들고 빨대로 주스를 한 모금 넘기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아, 정말. 경밖에 없구려. 살 것 같아.”

“아델라이드가 만든 주스입니다. 지금쯤 쓴물이 올라올 텐데, 마시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프리트홀트는 곧 사위가 될 베르톨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 대신 입덧을 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누구도 입덧인 줄 몰랐다. 한동안 일거리가 무시무시하게 쌓였기 때문에 황제가 국정을 보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입맛을 잃은 줄로만 알았다. 레니에마저 단순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의 상태가 점점 심해졌다. 급기야 음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을 하는 통에 주치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황제를 진찰한 주치의는 입덧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내놓았다.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임신한 아내가 할 입덧을 대신하는 남편들이 간혹 있긴 하나 천하의 황제가 그럴 줄이야.

워낙 놀라운 이야기여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놀라서 잠시 숨을 멈추거나 당황스러워하며 눈을 크게 떴다.

황제를 알현한 귀족들은 고개를 숙인 채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바빴다. 그렇지만 철혈군주로 이름 높은 황제를 보며 대놓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장인인 프리트홀트만 예외였다.

프리트홀트는 베르톨트가 너무나 예뻤다. 자신의 딸 대신에 입덧까지 하는 사위를 보고 있자니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황제도 힘들어하는 입덧을 아델라이드가 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살이 빠졌는데 입덧까지 하면 그야말로 뼈밖에 안 남았을 게 빤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베르톨트의 입덧은 프리트홀트가 사위를 더욱 사랑하고 신뢰하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프리트홀트와 반대로 레니에는 아내를 대신해 입덧까지 하는 베르톨트가 지나치게 유난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하다 하다 이제는 별걸 다 한다며 몰래 혀를 차곤 했다.

베르톨트가 망고 주스를 다시 한 모금 마시더니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 빙글빙글 웃으면서 레니에에게 말했다.

“아! 결혼식이 끝난 후 7박 8일 동안 신혼여행 다녀올 건데, 알고 있지?”

“무, 무슨…? 금시초문입니다.”

레니에의 표정이 다시 험악해지자, 웬일인지 프리트홀트가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재상, 폐하도 좀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재상께서 누워 계신 동안 저 몸 상태로 두 사람 몫의 일을 처리해 오셨습니다. 그러니 휴가를 보내 드리는 게 맞다고 봅니다. 지금과 같은 상태로 국정을 돌보시기엔 무리가 따르기도 하니까요.”

말투가 매우 점잖다 보니 논리 정연하게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는 것 같지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황제를 두둔하고 있는 것이다. 레니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휴, 알겠습니다. 그동안 고생하신 것 생각해서 이번만 휴가를 보내 드리지요. 단, 다녀오시면 서류 폭탄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황제가 능글맞게 웃다가 프리트홀트를 보며 고개를 까딱했다.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무언의 사인이었다. 그것을 본 레니에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베르톨트를 흘겼다.

“황손께서는 무척이나 건강하십니다. 영애께서도 마찬가지고요. 하혈을 하고 쓰러지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날 이후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주치의에게서 이틀에 한 번씩 검진을 받고 있었다. 주치의가 아델라이드를 진찰한 결과를 말해 주자 그녀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입덧도 폐하께서 대신하시니 다른 불편하신 데는 없죠?”

“네, 몸에 조금 살이 올랐고 자꾸만 고기와 과일이 먹고 싶은 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어요.”

“건강하시니 다행입니다. 평소 많이 드시지 않는 음식이 당긴다는 것은 그 음식 안에 든 영양소가 결핍되어 있어 몸이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주저 마시고 드십시오. 그리고 임신 중에는 체중이 당연히 증가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일 적정 수준을 넘어서 위험할 정도로 증가한다 싶으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주치의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델라이드는 주치의가 무슨 안 좋은 말을 꺼내려나 싶어 얼굴이 조금 경직된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걸 알아차린 주치의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결혼식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맞아요.”

“시기를 고려하면 앞으로 한 달 정도까지는 매우 조심하셔야겠으나, 다행히 황손께서나 아델라이드 님께서나 모두 건강하시니 부부관계를 가지셔도 될 것입니다.”

“…관계요?”

“네. 너무 무리하지만 않으시면 괜찮습니다.”

“아, 네에…. 참고하겠습니다.”

아델라이드는 얼굴에 열이 확 오르는 게 느껴져 고개를 숙이며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주치의는 작게 웃더니 다음 진료 때 찾아뵙겠노라며 방을 나섰다.

아델라이드가 손등으로 홧홧해진 뺨의 열기를 식히고 있을 때, 윤이 다가와 에드가가 접객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거의 뛰다시피 걸어 접객실로 향했다. 뒤를 따르는 윤과 마리안이 천천히 가시라고 말렸지만 아델라이드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가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마침내 접객실에 다다른 아델라이드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오라버니!”

웃음이 가득 실린 목소리를 들은 에드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델라이드를 맞았다. 아델라이드는 흐트러진 숨을 고르면서도 뛰듯이 빠르게 걸어 에드가의 앞에 섰다.

“이런, 이런…. 임신부가 이리 뛰어다녀도 되는 거야?”

에드가가 살포시 웃으며 핀잔 아닌 핀잔을 주자 아델라이드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괜찮아요. 방금 전 주치의가 와서 아주 건강하다고 했어요.”

아델라이드는 오라버니 앞에서만큼은 자신이 여전히 아이처럼 느껴졌다. 마냥 웃음이 나와서 자꾸만 헤실헤실 웃게 되었다. 아이를 가졌어도 아직 소녀 같기만 한 여동생을 보니 에드가의 마음도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르고 달달해졌다.

“다행이구나.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으니 조금만 주의하렴.”

“알았어요. 그나저나… 오라버니도 좋아 보여요. 며칠 동안 궁에 안 오시더니 무슨 일이 있었어요? 레니에 님은 아무 일 없어 보이시던데요.”

“아…. 그냥… 조금 바빴단다.”

에드가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아델라이드는 에드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세뇌가 그렇게 풀렸을 때부터 오라버니의 마음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사실… 좀 놀라긴 했어요.”

아델라이드는 에드가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레니에 이야기만 나오면 오라버니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방금 전에도 레니에의 이름을 듣자마자 오라버니의 어깨가 움찔했다. 아델라이드는 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베르, 아니 폐하가 전에 그러셨어요. 제가 남장을 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제가 남자여도 그 어떤 존재여도 사랑한다고 말해 줬어요. 제가 보기에는 오라버니도 레니에 님도 서로를 그렇게 아끼는 것 같아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너무 부끄러워 마세요. 전 항상 오라버니를 지지해요.”

에드가는 아델라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동생은 아주 가끔 누나 같은 말과 행동을 하곤 했다. 지금이 바로 그랬다.

세르비아에서는 동성연애를 그다지 부정적으로 보지 않지만, 자신이 나고 자랐던 수에비에서는 동성애가 금기시되고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니 레니에보다 자신이 이 문제에 훨씬 더 예민했다. 동생에게도 그 마음을 쉽사리 털어놓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만일 아델라이드가 이렇듯 먼저 손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사실을 말하기까지 더욱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고맙구나…. 그래, 네 말대로야. 다시 만난 그 사람을 이번에는 놓치기가 싫었어. 아직 대외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며칠 전 난 그분의… 정인이 되었다.”

어렵사리 입을 뗀 에드가는 단어 하나하나를 힘겹게 내뱉었다. 아델라이드는 아무 말 없이 에드가를 안아 주었다.

“잘하셨어요. 축하해요, 오라버니.”

그제야 에드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자신보다 훨씬 작은 동생이 자신을 안고 등을 두들겨 주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한참 토닥이던 손길이 떨어지고 나서 에드가는 문득 생각난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이 사실을 한 분 더 알고 계셔. 어쩔 수 없이 말하게 되었지만….”

“그게 누구…?”

“프리트홀트 경이다.”

“아버지요?”

“그래, 그분은 참으로 따뜻한 분이더구나. 며칠 전 나를 찾아오셔서 내가 원한다면 나를 너와 같이 양자로 입적하시겠다고 하시더라. 하지만 거절했어. 난 발루아 가문의 가주야. 비록 대를 잇지는 못하겠지만, 그래서 우리 대에서 발루아 가문이 끝이 나겠지만 그래도 스트라우스 가문의 가주가 될 양자 자리를 꿰차는 건 양 가문 모두에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프리트홀트 경께는 잘 말씀드렸다. 내가 경의 양자가 될 수 없는 이유들을 말씀드리다 보니 자연스레 레니에 님과 내 관계를 말하게 되었어. 처음엔 좀 놀라시더니 금방 받아들이시더구나. 너처럼 내 세뇌가 풀린 것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하셨나 보더라고.”

“아버지가 그러셨군요.”

아델라이드는 콧등이 시큰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이렇듯 오라버니까지 생각해 주는 프리트홀트가 더없이 고마웠다.

“그분께서는 힘이 들거나 힘이 필요할 때 서슴없이 말해 달라 하셨어. 정말… 우리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더구나. 그나저나 스트라우스가는 세르비아에서 명문 중의 명문인데 가주 자리를 이어받을 이가 없어 걱정이구나. 너는 곧 황후가 될 테니 말이야.”

“음…, 그건 어쩌면 제가 해결할 수도 있어요.”

“어, 어떻게 말이야?”

“아버지를 위해 요즘 꽤 머리를 굴리고 있거든요. 조금 더 확실해지면 가장 먼저 오라버니에게 말씀드릴게요.”

아델라이드는 방긋 웃으며 이제 산책이나 좀 하러 가자며 에드가의 손을 이끌었다.

팔짱을 끼고 걷는 남매는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났다. 이 그림 같은 광경을 본 시종과 시녀들은 하던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남매가 가는 곳마다 모두들 넋을 잃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 *

황제의 결혼식과 동시에 열흘간의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날 세르비아 곳곳에서는 황제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타국에서도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귀한 선물을 손에 든 사절단들의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대륙 곳곳에 퍼져 있던 마법사들도 결혼식 날 세르비아를 방문하여 황제 부부를 축복하였다. 아그리파와 벨라루아가 마법사들에게 세르비아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그들을 초청한 덕분이었다.

마법사들은 세르비아의 번영을 바란다며 질병을 치료하거나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 내는 등의 마법들을 시전했다. 그렇게 한껏 들뜬 축제 분위기 속에서 세르비아 제국민들은 입을 모아 황제를 칭송했다.

그리하여, 세르비아 안팎에서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황제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결혼식은 시작부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보통 신부들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반면 아델라이드는 황제의 손을 잡고 그와 동시에 입장했다. 아델라이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황제가 동시 입장을 고집했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져 아델라이드는 황후로서 만인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추후 제국민들의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의 동시 입장이 유행하였다.

아델라이드가 이날 입은 의상은 목까지 올라오는 네크라인에 노출 하나 없이 디자인된 웨딩드레스였다. 상체는 딱 달라붙고 허리부터 넓게 퍼지는 프린세스 라인의 드레스는 고고하면서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드레스에서 풍기는 느낌은 그야말로 아델라이드 그 자체였다.

이제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금색 머리카락은 말끔하게 빗어 넘겨 그 위에 면사포를 덮었다. 정수리에서 시작된 면사포는 발끝을 지나서도 풍성하게 이어졌다. 몇 미터인지도 모를 정도로 까마득하게 길었다.

그날 모인 많은 사람들은 아델라이드를 보고 탄성을 한 번 내지르고, 그 곁에서 자신의 반려에게 사랑과 존경을 듬뿍 담은 눈빛을 보내는 황제를 보고 또 한 번 감탄했다.

성대한 결혼식에 이어 황후의 대관식이 진행되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머리 위에 황후의 관을 씌워 주고는 무릎을 꿇고 황후의 손에 입 맞추었다. 황제로서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를 갖춰 황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모두들 놀란 눈으로 황제를 쳐다봤지만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로써 세르비아 제국 역사상 황제와 제국민이 가장 사랑한 황후가 탄생하였다.

황제와 황후는 결혼식이 끝난 직후 황제의 별장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마차 안은 굉장히 넓고 쾌적했지만 아직 입덧이 끝나지 않은 황제에게는 마차 여행이 고역이었다. 그는 안색이 하얗게 변해서는 황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좀 쉬었다 갈까요, 폐하?”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니야. 어서 빨리 도착해서 맑고 시원한 공기를 맡고 싶어.”

“걱정이에요. 입덧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래도 정말 많이 나아진 거야.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사람들 체향이 아주 끔찍하게 느껴졌거든. 지금은 그저 멀미가 나는 정도이니 그 전과 비교하면 살 것 같아.”

베르톨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아델라이드의 표정은 어두웠다.

“…죄송해요, 폐하.”

“그런 말 말아. 이 고역을 그대가 겪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정말 다행이라고 한 번 더 강조하고는 베르톨트가 또다시 피식 웃었다.

“아, 혹시 아까 클리터스 봤어?”

“네, 힐다와 벤자민도 함께 있더라고요.”

“그래. 바젤에서 안 오고 뭐 하나 했더니 그 여관 주인장하고 연애했나 봐. 바젤을 재정비한다고 했던 건 변명이었나.”

아델라이드가 푸스스 웃으며 베르톨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래도 모두들 제 짝을 찾아가고 있네요. 다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에요.”

“그래, 다행이야.”

베르톨트가 머리를 아델라이드의 어깨에 더 깊숙이 묻었다. 한숨 푹 자라고 다정하게 말한 아델라이드는 그를 눕혀 자신의 허벅지에 그의 머리를 올렸다. 그녀의 다리 위에 머리를 댄 베르톨트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감은 베르톨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아델라이드는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사르르 빗어 넘겼다. 잠들었어도 그 촉감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지 베르톨트는 목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릉 하는 소리를 냈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낮은 절벽 위에 있는 별장이었다. 별장이 자리한 이 지역은 온화한 기후와 기가 막힌 풍광으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세르비아의 부호라면 누구나 이곳에 별장을 두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베르톨트가 소유한 이 별장은 유독 거대하고 아름다운 수영장을 끼고 있었다. 별장 내 수영장은 계단식으로 깎인 절벽에 형성된 수영장으로 곧장 이어졌다.

계단 하나하나에 자연과 어우러진 수영장이 있었고, 맨 아래쪽 계단에 위치한 수영장 아래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 바로 바다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이렇게 설계한 사람은 베르톨트였다. 베르톨트의 의도는 별장 내 수영장에서 바다까지 아무도 모르게 갈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구현되었고 이 설계는 많은 건축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별장에 도착한 황제 부부는 늦은 저녁을 먹었다. 베르톨트는 신선한 공기와 뛰어난 풍광을 접한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서 평소 입덧 때문에 입에도 대지 못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곧장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왔고 베르톨트가 그녀를 실내 수영장으로 이끌었다. 바닷가 쪽을 바라보고 있는 수영장을 본 아델라이드는 매우 이국적이고 멋진 풍경에 감탄하여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베르…. 너무, 너무 아름다워요!”

한참 후 아델라이드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치자 베르톨트가 크게 웃었다.

“그렇지? 그대에게 이곳을 정말 보여 주고 싶었어.”

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아델라이드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수영장 안으로 이끌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아델라이드는 조심스럽게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그와 함께 절벽 수영장으로 뛰어들었다. 물에 흠뻑 젖은 채로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와락 끌어안았다.

“꺄악! 베르!”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이런 과감한 수영복을 입을 생각을 했지?”

그가 내뿜는 열기가 아델라이드에게 온전히 전해져 왔다. 그녀는 움찔하면서도 수영을 할 줄 몰라 그의 품에 그대로 안겨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마음이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프, 프란체스가 만들어 준 거예요. 저한테 어울린다고 해서….”

베르톨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손으로는 훤히 드러나 있는 허리를 쓸었다.

“그래, 어울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야한 거 알아?”

“제가요?”

“그래. 프란체스는 다 좋은데 왜 자꾸 그대를 헐벗게 하는지 모르겠어. 지금은 이런 모습을 나만 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아델라이드의 목덜미에 얼굴을 댄 그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가져서 그런가? 가슴도 더 부풀었고 엉덩이도 좀 더 살이 올라서 아주….”

‘나를 미치게 한다고.’

뒷말은 삼켰다. 베르톨트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쥐자 흡, 하며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가 하혈을 하고 쓰러졌던 그날 이후로 그녀를 안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의 건강이 악화될까 봐 걱정해서였다.

입덧도 입덧이지만, 밤마다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들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며 자신의 욕망 따위는 꾹꾹 눌러 왔는데 이제는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주치의한테서 우리 이제… 다시 해도 된다고 들었는데….”

그의 손이 위로 올라와 한껏 부풀어 오른 가슴을 만지작거리다가 움켜쥐었다. 아델라이드가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덧…하잖아요.”

“그래서? 입덧은 많이 나아졌어. 그리고 음… 우린 신혼여행 왔고….”

베르톨트의 뜨거운 입술이 활짝 드러난 아델라이드의 맨어깨와 가슴 사이를 핥으며 지나갔다. 조금씩 그녀의 숨결이 거칠어지자 베르톨트가 끄응 하고 앓는 신음을 냈다. 흥분한 그가 아델라이드의 입술을 베어 물었다.

간만에 했기 때문인지 두 사람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수영장에서 조금 거칠게 한 번,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한 번, 침실로 돌아와 또 한 번 느긋하게 사랑을 나누었다. 마지막에는 아델라이드가 너무 과한 것 같다며 베르톨트를 슬며시 밀어내려고 하기까지 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하겠다며 그녀를 살살 달래고는 정말로 자신의 말을 충실히 실행했다. 그녀를 부드럽게 대하며 천천히 움직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델라이드는 그건 또 그것대로 견디기가 힘들었다.

격한 움직임도 아닌데 심장이 마구 울려 댔다. 고장이라도 났나 싶을 정도로 그의 손길이며 호흡에 거세게 반응하며 그녀를 한계까지 몰고 갔다.

마침내 머리끝까지 치솟은 쾌감이 터졌다. 동시에 아델라이드는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반 탈진 상태로 숨을 몰아쉬다가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베르톨트의 눈빛도 진득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짙은 눈이 땀과 체액으로 젖은 아델라이드의 나신을 느른하게 쓸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맞추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말보다 더 강렬하고 솔직한 시선 속에서 두 사람은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나누었다.

일주일간의 신혼여행은 꿈만 같이 흘러갔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깨어나면 산책하고, 그러다가 서로 눈을 맞추고 행복해하다가 사랑을 나누었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았다.

아델라이드와 베르톨트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고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행복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꿈 같은 시간이었다.

* * *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흐른다. 다만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더디고 잔인하게, 즐거움과 행복에 둘러싸인 이들에게는 짧고 아쉽게 느껴질 뿐이다. 아델라이드와 베르톨트, 그리고 두 사람의 지인들에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루이사는 아델라이드의 새로운 호위 기사가 되었고, 클리터스는 바젤시에 주둔한 기사단의 단장이 되어 바젤에 정착했다. 바젤은 현재 세르비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여서 클리터스는 도시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게 치안 유지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프리트홀트는 최고 시녀장 안나와 혼인을 했다. 이는 아델라이드가 발 벗고 나서서 성사되었는데 놀랍게도 안나는 결혼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했다. 프리트홀트는 이 나이에 부끄럽다며 말을 아꼈지만 지인들은 그를 건강하다고 치켜세웠고 아델라이드는 누구보다 기뻐했다.

레니에는 매일 열심히 일을 했지만 업무량이 줄지 않아 황제에게 크게 한 번 역정을 내었다. 베르톨트는 그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증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휴고는 재상 보를 맡게 되었고, 레니에와 휴고 모두 보좌관과 비서관을 두었다.

근무 환경이 한결 나아진 덕에 레니에는 에드가와 여유롭게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레니에의 업무를 나눠 가진 휴고는 일을 처리하면서 자신이 매우 능력 있는 행정가임을 깨닫게 되었다.

추운 겨울이 끝나 가고 따뜻한 봄기운이 살랑이기 시작하는 어느 날.

아델라이드는 더 이상 부풀 수 없을 정도로 부푼 배를 하고는 프리트홀트, 에드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즘 어머니께서는 괜찮으세요?”

“그게… 좀 힘들어하는구나. 그 사람도 나이가 많으니 버겁겠지.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원.”

말을 그렇게 해도 프리트홀트는 세상 그 어느 남편보다 아내에게 극진했다. 임신해서 힘들어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자신이 나쁜 놈인 것 같다며 자책하고 아내에게 미안해했고, 마치 안나의 수족처럼 굴며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닥 못 하게 했다.

프리트홀트의 아내 사랑은 이미 파다하게 소문이 난지라 그가 그렇게 말해도 아델라이드는 그저 웃기만 하였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건강하시니 순산하실 겁니다.”

에드가가 웃으면서 말했다.

에드가와 프리트홀트는 요새 부쩍 가까워졌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성향이 비슷했다. 만날수록 서로 쿵짝이 잘 맞는다고나 할까.

프리트홀트는 예전부터 젊은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워낙에 좋아했지만 에드가와의 대화는 특히나 좋아했다. 그는 대화 상대를 배려하며 이야기를 부드럽게 끌어가는 에드가를 진심으로 아끼고 있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을 때였다.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토해 냈다.

“아델! 왜 그래? 어, 어디 아파?”

출산이 임박한 시기였다. 아델라이드의 표정이 조금만 변해도 에드가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아, 아니에요. 조금… 불편할 뿐.”

아델라이드는 사실 티타임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가벼운 진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초산일 경우 진통이 시작되었다고 바로 출산하지는 않는다던 주치의의 말이 생각나서 진통 간격이 더 짧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델라이드가 평온한 표정을 되찾자 세 사람의 즐거운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남자가 놀라서 아델라이드를 붙잡았다.

“하아. 하아! 아버지… 그리고 오라버니!”

“그, 그래. 마, 말하거라!”

프리트홀트는 아델라이드보다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아델라이드가 힘겹게 웃었다.

“도저…히 못 참겠…어… 하윽! 하악! 의사 좀…. 낳을 것 같….”

두 남자는 고통스러워하는 아델라이드를 보면서 눈앞이 하얘지는 느낌을 받았다. 에드가는 즉시 달려 나갔고 프리트홀트는 아델라이드를 자신에게 기대게 하였다.

이제 세르비아 제국의 황손이 태어날 때가 된 것이다.

* * *

모든 일은 예전부터 준비되어 온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전문 산파와 주치의가 들어오고 침실은 금세 분만실로 바뀌었다.

소식을 받자마자 베르톨트는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달렸다. 침실 옆 대기실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따라온 레니에도 엉겁결에 대기실에 들어왔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약간 부푼 배를 안고 안나가 들어왔다. 노련한 시녀장이지만 능숙한 산모도우미이기도 한 안나는 대기실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뒤 분만실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베르톨트, 레니에, 에드가, 프리트홀트, 이렇게 남자 네 명이 득실대는 기이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간혹 들리던 아델라이드의 비명이 5분에 한 번 들릴 만큼 잦아졌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들을 때마다 베르톨트는 손마디가 하얗게 되도록 주먹을 쥐고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게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참다못한 레니에가 결국 베르톨트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폐하! 제발 좀 기운을 거두십시오. 같이 있는 사람 생각도 좀….”

그때, 또다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듣는 베르톨트까지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에드가는 도저히 듣지 못하겠는지 머리를 쥐어뜯다가 아예 손으로 귀를 가렸다. 프리트홀트는 눈을 감고서 아델라이드의 비명이 들릴 때마다 움찔움찔 어깨를 떨었다.

베르톨트는 미칠 것 같았다. 입덧도 대신했는데 할 수만 있다면 아이도 대신 낳고 싶었다. 심장이라도 꺼내 줄 수 있는데 정작 그녀가 저토록 고통스러워할 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하아!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레니에도 답답하고 애가 타는지 누구에게 하는 소린지도 모를 소리를 해 댔다. 에드가는 급기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했다.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게 곧 울 것만 같았다. 프리트홀트도 두 손을 초조하게 맞잡고는 일어났다.

그렇게 모두가 정신없이 소식만 기다리는 가운데, 문이 열리며 주치의가 나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모두들 주치의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베르톨트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델은 괘, 괜찮은가?”

“곧 황손이 나오실 것 같습니다. 자궁 문이 5센티 정도 열렸습니다. 초산이라 진통이 좀 길기는 하지만 아무 이상 없이 진행 중입니다.”

“이상 없이 진행 중이라고? 저렇게 아파하는데?”

주치의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더니 자신만 바라보는 네 남자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너희 남자들이 무엇을 알겠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출산할 때 여자는 상반신과 하반신을 끊어 내는 듯한 고통을 느낍니다. 그것을 지금 5분에 한 번씩, 아니, 이젠 2분에 한 번씩 느끼고 계신 겁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우므로 무사히 출산한다는 것은 축복이고, 그래서 엄마가 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지요.”

남자들은 주치의의 말을 들으며 잠시 멍해졌다. 무척이나 위대한 일. 그들은 아델라이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출산에 무지했던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겼다.

다시 아델라이드의 비명이 터지자 주치의가 베르톨트에게 말했다.

“폐하, 들어오십시오. 아무래도 황후 마마의 곁에 계시면서 손이라도 잡아 주시고 힘을 보태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그래도 됩니까?”

레니에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가 알기로는 대륙 어디에서도 아이를 낳을 때 남편이 함께하지는 않는다. 일종의 금기와 같았다.

“출산할 때 많은 여성들은 끔찍한 고통을 느낍니다. 남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것을 모르겠지요. 그 순간순간을 여자들은 혼자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간혹 잘못되기도 하지요. 지금까지 그래 왔지만, 이제부터는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힘든 순간을 남편도 함께 겪으며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고통과 기쁨이 모두 여자의 몫입니까? 남자도 이젠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후 마마께는 폐하가 필요합니다.”

주치의의 말에 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숙연해졌다. 그의 말은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레니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폐하,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제발 황후 마마의 손 좀 꽉 잡아 주십시오. 밖에 있는 우리도 애가 타서 죽겠습니다.”

에드가와 프리트홀트도 베르톨트에게 다가와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어서 들어가게. 우리 딸이 기다린다고 하지 않나.”

베르톨트는 두 사람의 손을 한 번 꼭 쥐고는 주치의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뜨거운 열기와 피 냄새가 코를 훅 찔렀다. 분만실 안에는 김이 희뿌옇게 피어올라 있었고 그 사이로 양손이 침대 기둥에 묶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아델라이드가 보였다. 허리 아래는 커다란 흰 천으로 가려져 있고 천 아래로는 하얀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베르톨트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산파의 손과 침대 시트, 침대 아래에 피가 어지러이 묻어 있었다. 시녀들은 뜨거운 물을 연신 나르고 있었고 안나는 아델라이드의 얼굴에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아 주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를 보자 반가움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베, 베르!”

“울지 마, 아델. 울면 힘이 더 떨어지잖아.”

베르톨트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아델라이드는 얼마나 애를 썼는지 눈의 혈관이 다 터져서 눈이 빨갰다. 입술은 어찌나 짓씹었는지 엉망진창이 되어 피가 나고 있었다.

“아델…!”

가늘게 떨리는 아델라이드의 손을 크고 따뜻한 손이 꽈악 잡았다. 베르톨트는 자신 때문에 아델라이드가 이런 고통을 겪는 것 같아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의 표정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아델라이드가 그의 손을 다정하게 쓸었다.

“괜찮아요. 처음은… 초산은 원래 이런 거래요.”

이 와중에도 자신을 보며 배시시 웃는 그녀가 너무 예뻤다. 베르톨트는 희고 떨리는 손가락에 키스를 했다.

갑자기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그녀가 숨을 거칠게 토해 냈다. 베르톨트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더 이상 구길 수 없을 만큼 얼굴을 구겼다.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다.

아델라이드의 사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고통스러운 표정의 그녀가 얼굴을 좌우로 거칠게 저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아파야 아이가 나오는 것인가. 베르톨트는 절망스러웠다.

“마마! 힘주세요! 이제 나오려 합니다. 머리가 보여요.”

산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이 찢기는 고통을 참아 내는 그녀가 보였다. 베르톨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기도했다.

‘제발 빨리 나오게 도와줘! 제발! 이 빌어먹을 신들아!’

아델라이드는 1시간가량 더 진통을 했다. 마침내 아이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터져 나왔을 때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남자들은 일제히 행동을 멈추었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긴장감이 얼마간 감돈 후 분만실 문이 열리고 베르톨트가 나왔다.

황제의 머리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얼굴에는 땀과 함께 눈물을 흘린 자국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웃음을 머금은 채 프리트홀트에게 다가왔다.

“축하드립니다. 할아버지가 되셨네요.”

그리고 에드가에게도 웃으며 말했다.

“괜찮네. 아델은 건강해. 아이도… 아주 건강하네.”

베르톨트는 아무 말 없이 울먹이는 에드가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옆에 있던 레니에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을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폐하. 그런데 황자님이십니까? 황녀님이십니까?”

그때서야 생각난 듯 베르톨트가 “아, 맞아.” 하고 말했다. 그 모습을 레니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황자야. 지나치게 건강한 황자.”

베르톨트가 빙그레 웃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다음 주치의가 아이를 안고 나왔다. 문 밖에 서서 기다리던 남자들은 그제야 비로소 세르비아 제국의 적통인 황자를 볼 수 있었다.

배냇저고리를 곱게 입고 천에 감싸여 있는 아기는 햇살처럼 빛나는 금발만 엄마를 닮았다. 이목구비는 누구도 반박 못 할 만큼 베르톨트를 쏘옥 빼닮아 있었다.

심지어 미소마저도 베르톨트를 닮았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는 아이를 보며 사람들이 움찔했다.

주치의는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고 웃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며, 범상치 않은 아이로 크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황자가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은 제국은 물론 대륙 구석구석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많은 이들이 황자를 축복했고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기원했다.

아델라이드는 진통을 상당히 오래 했지만 별 탈 없이 회복하였고 황자는 건강하기 그지없었다.

갓난아기 황자를 본 사람들은 금발만 빼면 완전히 작은 베르톨트라며 신기해했다. 베르톨트도 놀라워하며 자신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정도였다.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를 쏙 빼닮은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이를 안고 직접 젖을 물리는 아델라이드를 볼 때마다 베르톨트는 넋을 잃었다. 너무나 감동적이고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델라이드가 눈을 들어 그를 마주 보면 베르톨트는 예의 그 멋진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 미소는 그녀에게 소리 없이 말했다.

‘아델, 그대가 내게 와 주어서 내 인생이 참으로 충만해졌어. 고맙고, 미안하고… 그리고 사랑해.’

그럴 때면 아델라이드는 환히 웃으며 화답했다. 마치 그의 미소에서 그 말을 정확히 읽어 낸 것처럼.

* * *

황제와 황후의 사랑 이야기는 장편의 서사시로 만들어져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대표적인 연애사로 손꼽히게 되었다.

제국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신분에 대한 깊고 질긴 편견이 사라져 갔다. 또한 타국민들을 배척하는 분위기도 옅어졌다. 세르비아인들은 황후를 존경하고 사랑하면서 너그러워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베르톨트와 아델라이드, 그리고 그들의 지인들은 매일 사랑하고 감사하고 때로는 아옹다옹했다. 쉼 없이 사랑하고 화를 내는 스스로가 이따금 어리석어 보여도 그들은 사랑을 함으로써 진정 삶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를 찾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도 끝이 났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애틋하게 느껴지는 소중한 사람과 이제 새로운 인생을 써 나가게 되었다.

매일 시행착오를 겪지만 어김없이 다음 날의 해는 떠올랐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모르기에 늘 새롭게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으니 오히려 설레었다.

<본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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