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2장.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33/39)

제32장.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말해 보라.”

“두 가지입니다. 세뇌를 한 목적이 되는 대상이 사라지거나 죽음보다 더한 충격을 받으면 세뇌가 풀립니다.”

황제가 까득 소리 나게 어금니를 물더니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그게 방법인가? 세뇌를 한 목적이 되는 대상이라 함은 아델라이드 아닌가? 그리고 죽음보다 더한 충격? 아델라이드를 자기로부터 끝까지 지켜 달라는 사람에게 죽음보다 더한 충격이 무엇이겠는가! 결국 모두 아델라이드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베르톨트는 벨라루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 이상 그녀의 말을 들었다가는 화가 나서 미쳐 날뛸 것만 같았다.

“아그리파! 레니에!”

벨라루아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레니에는 멀거니 황제를 바라보았고, 아그리파는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방법을 찾아! 그렇지 않으면 벨라루아와 에드가는 내 손에 죽어!”

황제는 집무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밖으로 나온 베르톨트는 바람이 일 정도의 큰 걸음으로 걸었다. 화를 내고 나왔지만 에드가의 절절한 마음도,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지켜 주려 했던 벨라루아의 마음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결론은 아델라이드가 죽어야 끝이 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델라이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상상만으로도 숨을 못 쉴 정도로 심장에 통증이 일었다. 이제 베르톨트, 자신의 심장의 주인은 아델라이드였다.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면 자신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이를 수렁에 빠지게 한 알렉시아 황녀를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최대한 마찰 없이 차근차근 풀어 나가려 했는데 황녀도 대신들도 자신과 아델라이드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걷는 동안 베르톨트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껏 세웠던 모든 계획을 접고 어떻게 하면 황녀와 연관된 무리들을 일망타진할 것인지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사특한 무리들을 모두 없애 버릴 작정이었다.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고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 * *

집무실을 나서던 레니에는 아그리파를 돌아봤다.

“벨라루아를 치료해 주시게. 폐하의 오라가 무척 강력해서 내상을 입었을 걸세.”

그러고 나서 레니에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때 벨라루아가 말했다.

“공작님. 에드가의 기억을 조작할 때 에드가가 어느 한 부분에서 유독 힘겨워하고 저항했습니다.”

벨라루아는 주저앉은 채로 레니에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공작님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걸 잘만 이용하면 에드가가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레니에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더라도 시간이 얼마 없어. 폐하는 오래 기다려 주지 않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에드가는 일단 나와 지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을 나온 레니에를 프리트홀트가 따라왔다. 레니에와 걸음을 나란히 하며 그가 물었다.

“재상, 이제 폐하를 어떻게 막으시겠소? 에드가를 처형하기라도 했다가는 아델라이드가 어떻게 될지 상상이 되나? 난 저 남매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네.”

레니에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까지 황제가 독단으로 일을 처리한 적은 없었지만 이번은 장담할 수 없었다.

황제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독할 정도로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 대상인 아델라이드가 잘못된다면 황제는 폭주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어떻게든 막아야 할 텐데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황제는 애초에 계획했던 바대로 대신들이나 황녀를 차근차근 굴복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모두에게 힘겨운 하루였으니 내일 폐하를 뵙고 의중을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는…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지만… 이번엔 극단의 방법을 쓸 수도 있어.”

레니에만 위기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프리트홀트도 그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대규모 숙청이 뒤따를지도 몰랐다.

그의 생각을 눈치챈 레니에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려고 한다면… 저희가 막아야겠지요.”

프리트홀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가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지만 생각하는 바는 같았다. 두 사람은 가슴을 쓸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집무실에 남아 있던 아그리파는 벨라루아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벨라루아, 그런데 어째서 그 에드가라는 사람을 구하려고 그렇게 애를 쓴 거지?”

“…….”

“그가 불쌍했어? 아니면….”

“그 사람, 당신을 닮았어.”

아그리파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양 볼을 쓰다듬었다. 뺨이 눈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아그리파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걱정 마, 벨라. 황제가 너를 해치도록 놔두지 않을 거야.”

그가 벨라루아를 안았다. 벨라루아는 억눌러 왔던 두려움과 서러움이 폭발한 듯 그의 품에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날 밤, 모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고민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같았다. 모두들 누군가에게 검을 겨누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명만은 목숨 걸고 지키리라 생각했다.

칠흑 같은 밤에 별만 무심히 반짝였다.

* * *

레니에는 에드가를 자신의 집에 기거하도록 했다. 레니에가 그런 제안을 했을 때 에드가는 다소 의아했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에드가는 레니에를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눈길이 자신에게 머물면 기뻤고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의 앞에 서면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레니에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레니에는 에드가가 오자마자 사르 공작가의 주치의를 불러 그를 살펴보도록 했다. 주치의의 말에 따르면 그의 몸에는 많은 상처가 나 있었고 피로까지 쌓여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그대는 어째서 매번 이렇게 안쓰러운 모습으로 내게 오는 것인가.”

레니에는 잠에 곤히 빠져 낮은 숨소리만 내는 에드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긴 은발을 베개 위에 늘어뜨린 채 두 손을 가지런히 가슴께로 모으고 누워 있는 그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핏기 없는 얼굴이 그나마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손을 들어 길게 음영이 드리워진 그의 뺨을 쓸어 보았다.

“그때, 그렇게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후회했어.”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말하지도 않았던 속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말하면 허공에 그대로 흩어질까 봐 꽁꽁 감춰 뒀던 속내가 지금 그 대상을 앞에 두고 봇물 터지듯 흘렀다.

“그대의 동생을 마주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아? 아델라이드를 살린 건 내가 아니었지만 그대가 그토록 아끼고 애틋해한 동생이 무사히 내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대 역시 온전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어. 어쩌면 아델라이드를 매개로 그대와 다시 닿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뻤지.”

또 한 번 헛웃음이 나왔다. 그의 손가락이 에드가의 은발을 쓸었다.

“혹시나 그 마음이 조금 옅어질까, 흐려질까 싶어 다른 사람도 만나 봤어. 어리석게도, 그렇게 확실하고 강렬한 것을 의심하면서 말이야. 다시 온 그댈 이제는 놓칠 생각이 없어. 그대가 없던 그 많은 날 동안 너무나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 그러니 다시는 떠날 생각 하지 마. 이 손… 절대 놓지 않을 테니.”

레니에는 마르고 하얀 손을 꼬옥 잡았다.

“황제는 아델라이드를 지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그게 그대를 해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아델라이드가 황제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그런데….”

에드가의 손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가락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대를 지키기 위해 나도 어떤 짓이든 할 거야. 다시는 혼자 보내지 않아. 그때 나를 등지고 홀로 떠나던 그대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파.”

탄식 같으면서도 결연한 혼잣말은 자장가와 같이 에드가의 주위를 맴돌았다.

에드가를 향한 레니에의 시선이 지극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너무 부드러워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에드가의 손을 잠시 꼬옥 쥐었다가 풀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 진창을 구르게 된다 하더라도 그대 혼자 보내지 않아.”

레니에가 사르륵 침실을 빠져 나갔다. 끼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감긴 에드가의 눈에서 또르륵 눈물이 흘렀다. 달빛을 받은 눈물이 반짝였다.

에드가는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울음소리가 신음처럼 비집고 나왔다.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당신 뭐야. 나를 알아? 뭔데 그렇게 아파하는 거야? 뭔데 그리도 힘들어하는 거야?’

무엇 때문에 나는지도 모르는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말들이 가슴을 후벼 파고 심장을 쥐어짰다.

* * *

다음 날부터 귀족들의 상소문이 빗발쳤다. 귀족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델라이드가 수에비의 왕비였던 사실을 문제 삼으며 황제와 그녀의 약혼을 물러야 한다고 난리였다. 몇몇은 이참에 안달루스 황녀의 청혼을 받아들여 세르비아의 안녕을 꾀하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기까지 했다.

베르톨트는 집무실 책상 위에 가득한 상소문들을 노려보았다. 어떤 이가 어떤 내용으로 상소를 올렸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았다. 읽으면서 몇 번이나 내던지고 싶은 것을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위기에 몰릴수록, 분노가 차오를수록 머릿속이 명확해졌다. 그는 애초에 구상한 계획을 점점 더 대담하게 다듬어 가고 있었다.

황제는 집무실 안에 기립해 있던 아른프리트를 불렀다.

“경. 재상 레니에를 부르게!”

얼마 안 있어 레니에가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종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때때로 두 사람의 고성이 오고 갔으나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날 황제는 귀족 회의를 소집했다. 수도에 있는 남작 이상 되는 귀족들은 모두 불려 왔고 작위가 없더라도 각 부처의 관리이기만 하면 무조건 참석해야 했다.

“오늘 난 그대들에게 중요한 발표를 할 것이다.”

황제의 눈초리와 말투가 싸늘했다. 귀족들은 참석하기 전까지 품었던 기대감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황제가 아델라이드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알렉시아 황녀의 청혼을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하길 내심 바랐던 것이었다.

“난 스트라우스 가문의 영애인 아델라이드를 약혼자로 맞았다. 이는 모두들 알고 있겠지. 그런데 안달루스 황실에서 청혼서를 넣었다.”

베르톨트가 모여 있는 귀족들을 눈으로 한번 훑었다. 그들은 황제의 형형한 눈빛에 움찔했다.

“현재 세르비아에 가장 위협이 되는 나라가 어디인가? 바로 안달루스이다. 그런데 그 안달루스에서 감히! 청혼을 했어.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귀족들이 술렁였다. 황제는 그들의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흉흉한 기세로 말했다. 그 내용이 사뭇 심각해서 다들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을 때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나를, 우리 세르비아를 얕잡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약혼자까지 있는 일국의 황제에게 어떻게 청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마치 누군가에게 떠밀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억지로 하는 듯 잔뜩 위축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재무부의 수장, 콘라드였다.

“폐, 폐하. 꼬옥… 그렇게만 보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폐하의 야, 약혼자가 예전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을 알고 평소 폐하를 흠…모하던 안달루스 황녀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어 처, 청혼서를 넣었을 수도….”

“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황제는 비죽이 웃으며 콘라드의 말을 잘랐다.

“안달루스가 세르비아의 귀족들이 경처럼 생각하기를 바랐다면 어쩔 텐가? 이 청혼 때문에 세르비아의 귀족들이 황제와 척을 지고, 편을 나눠 서로 물고 뜯기를 바랐다면?”

베르톨트가 손에 쥔 청혼서를 격하게 흔들어 댔다.

“그렇다면 지금 안달루스가 바라는 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리 상소문이 많이 올라온 것을 보면. 나더러 안달루스 황녀와 혼인을 하라고 상소한 이도 있다지? 하아!”

그가 귀족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연이어 호통쳤다.

“정말로 제정신들인 게야? 과거 적국의 왕비였던 사람하고의 혼인은 안 되고 현재 적국의 황녀와의 혼인은 된단 말인가? 입이 있으면 말해 보게. 안달루스 황실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안달루스를 내 발아래 바치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나에게 약혼자를 폐하고 황녀와 혼인하라고 말하는 그대들은 세르비아의 신하인가, 안달루스의 신하인가! 안달루스가 의도한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자를 뭐라고 하는지 아는가?”

모여 있는 이들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 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신호가 켜졌다.

“적국이 원하는 대로, 의도한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 바로 간자이다!”

순간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실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들 간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겠지?”

황제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모두의 어깨를 짓눌렀다. 귀족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폐하! 저희들의 못나고 협소한 시각을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어리석은 저희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폐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무릎을 꿇은 귀족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황제의 용서를 구했다. 계속 고집을 꺾지 않으면 간자로 몰리리라고 직감한 것이었다.

황제는 세르비아 역사상 최고로 훌륭하고 최고로 잔인하다고 불리는 군주였다. 여기서 더 나아간다면 황제가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자신들을 쳐 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스카는 허탈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황제가 상황을 이렇게 역전시킬 줄이야.

전장에서 구르는 동안 정치력이 녹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주장과 카리스마로 이번 일을 황제에게 유리하도록 마무리 지었다. 오스카의 생각과 달리 안달루스 황녀의 계략이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이제 과연 어떤 명분을 들고 와야 약혼자를 폐할 수 있단 말인가. 황제의 혼인에 딴지를 걸면 걸수록 세르비아의 적이자 안달루스의 간자로 몰리는 상황에서 오스카는 별다른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오스카는 다른 이들처럼 무릎을 꿇었다.

*

“폐하! 그게 말이 됩니까!”

“레니에, 시야가 왜 그렇게 좁아? 이걸 역으로 이용하자고.”

귀족 회의 하루 전.

베르톨트가 아른프리트를 시켜 레니에를 불렀었다.

레니에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황제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귀족들이 과연 납득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레니에! 아델라이드의 존재가 없다고 생각해 봐. 약혼자가 없는 상황인데 안달루스가 청혼서를 보내왔다고 가정해 보라고.”

레니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베르톨트는 그런 레니에를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좋군요.”

“그렇지?”

“네, 아주 좋은 지적입니다. 사실 아델라이드 님이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고 이상한 것이 알렉시아 황녀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 두 가지를 빼고 청혼서가 왔다는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오히려 귀족들을 압박할 거리가 생기겠어요. 으흠…. 아주 재미있게 상황을 몰아갈 수 있겠네요. 그들은 지금 아델라이드 님의 과거를 꼬투리 잡을 생각에 희희낙락하느라 다른 건 머릿속에 없을 테니까요.”

베르톨트가 큰 소리로 웃었다.

“역시! 그대는 천재야. 그리고 나를 너무 잘 알아.”

“너무 좋아하지는 마십시오. 이번 일을 제가 먼저 생각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려 합니다.”

“그럴 것까지야. 레니에 네가 동의해 주지 않으면 내가 자신 있게 밀어붙이지 못하는 거 알잖아.”

레니에는 얄미울 정도로 흡족해하는 황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청혼서가 상황을 완전히 역전시키겠군요.”

“그래. 귀족들을 극적으로 몰면 더는 쓸데없는 소리를 못 하겠지.”

“안달루스를 압박할 도구도 될 것 같습니다.”

“맞아. 이젠 본격적인 여우 사냥을 할 차례야.”

베르톨트의 눈이 반짝였다. 레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두 사람은 나머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 *

“지금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간자인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던 귀족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들 입을 다문 채 그저 황제의 다음 말만 기다리고 있었다.

“간자라…. 하지만 이번 한 번의 실수로 그대들을 간자로 규정할 수는 없지.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네.”

그제야 귀족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마치 지옥을 경험하고 온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이 모든 일들이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된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대들이 나를 지극히 아끼는 마음에서 미처 안달루스의 간계를 못 알아챘다 하더라도 분위기를 이렇게 몰고 간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느냐 하는 걸세.”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장내에는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황제의 서늘한 음성과 그 말의 의미를 볼 때, 누군가는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드디어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제일 먼저 이 간악한 안달루스 황녀의 청혼서를 반겼던 자가 누구인가?”

침묵.

“누가 제일 먼저 나의 귀하디귀한 약혼자의 과거를 들먹이며 자격 운운했는가?”

다시 침묵.

“누가! 제일 많이! 그대들에게 곧 안달루스가 세르비아의 것이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는가!”

“…….”

“누가!”

장내와 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는 황제의 분노에 귀족들은 모두 있는 대로 움츠려들었다. 그러면서도 하나둘 시선을 돌렸다. 그 누구에게로.

귀족들이 일제히 바라본 사람은 다름 아닌 행정부 수장 오스카였다. 자신들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느릿느릿 고개를 돌려 황제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내놓은 것이었다. 안색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 가는 오스카를 베르톨트는 아무 표정 없이 지켜보았다.

더 이상 시선을 견딜 수 없었던 오스카는 바닥에 넙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폐, 폐하…. 폐하! 아닙니다. 전, 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여기 그대를 바라보는 이들이 모두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군.”

“폐하! 그런 게 아니라….”

“아른프리트! 오스카를 지하 감옥 안에 가둬라! 그리고 제대로 실토할 때까지 심문하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안달루스 황녀와 내통했고 그 대가로 무엇을 받으려 했는지. 또한!”

바닥에 넙죽 엎드린 오스카는 몸을 벌벌 떨었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고통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두렵고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가솔들 또한 모두 잡아들이고 재산을 모두 몰수하라! 특히 친인척이 이와 연루되었는지, 비리가 있었는지 낱낱이 조사하라. 무엇인가가 발견된다면 모두 온전치 못하리라!”

어느새 장내로 들어온 아른프리트와 그의 병사들은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 오스카를 끌고 나갔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오스카는 자신의 죄를 부정했다. 그러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스카는 오랫동안 밖으로는 제국민의 칭송과 존경을 받아 왔다. 안으로는 오래도록 황가와 인연을 맺었고 정치에 잔뼈가 굵은, 한마디로 노련하고 연륜 있던 대신이다. 그렇지만 세르비아의 제국민과 나, 황제를 기만하고 가벼이 여긴 죗값을 받아야 할 것이며 앞으로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자가 생길 시 가차 없이 처단할 것이다.”

귀족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서슬 퍼런 황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장내에 모여 있는 이들의 심장을 서서히 쥐었다가 폈다. 그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황제가 환한 미소를 띠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의 세 치 혀에 조금이라도 흔들린 그대들의 경거망동을 조용히 넘어가려 하는데….”

황제가 말끝을 흐리며 좌중을 훑어보았다.

“폐하. 하문하십시오. 저희 각 부의 수장들도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사법부의 수장, 다니엘이 즉각 답하자 황제는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부드럽게 휘었다.

“고맙네. 모두들 원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 이제는 내가 정말 혼인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이제 황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르기에 모두들 대답하는 대신 조용히 경청했다.

“안달루스에서 나를 다시는 이런 식으로 이용하려 하지 않도록 빠른 시일 내에 혼인을 해야겠네. 물론 그 상대는 아델라이드 죠세파 로렌느 드 스트라우스이지.”

몇몇 귀족들의 입에서 참담한 신음이 흘러 나왔다. 황제는 매우 만족스럽게 웃었다.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레니에와 프리트홀트는 귀족들의 머리 위에서 노는 황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다음 날, 세르비아 황실은 대륙 전체에 황제 베르톨트 한스 악셀 크라젤 폰 카롤링거 3세의 결혼식을 정확히 한 달 후에 거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 * *

쨍그랑!

알렉시아는 시녀에게 물 잔을 던졌다. 시녀의 얼굴을 가까스로 비껴간 물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처참하게 부서졌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무능력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연륜 있고 능수능란하다고 생각했던 오스카 행정대신이었다. 그가 세르비아 안에서 자신의 뒷배가 되어 줄 세력을 착실히 만들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오늘 안달루스에까지 날아든 소식은 그 기대를 무참히 깨뜨렸다.

“하아. 혼인이라고? 누가 그렇게 둘 것 같아?”

독기가 있는 대로 오른 알렉시아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패망한 나라의 왕비였던 여자보다 자신이 못한 것이 없었다. 아니, 그런 여자와의 비교가 가당키나 한 것인가. 가진 것도, 줄 수 있는 것도 자신이 더 많았다. 그런데 왜 황제는 자신을 보아 주지 않는 걸까.

알렉시아는 그의 곁에 있는 여자만 없어지면 그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이 벗겨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신을 온전히 봐 줄 것이라고도.

그러니 아직 기회는 있다. 화가 나고 분하지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나에게는 너의 오라비, 에드가가 있으니….’

* * *

세르비아 전역은 황제의 결혼식 이야기로 들썩였다. 황제와 아델라이드의 관계는 사람들의 입을 거치면서 극적으로 미화되어, 두 사람은 역경과 고난을 이겨 낸 단단하고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연인으로 일컬어졌다.

제국민들은 과거 수에비의 왕비에서 노예로 전락했으나 세르비아 제국군을 라술러라는 약초로 살리고, 간자를 색출해 내고 또 황제를 살린 아델라이드를 현명하고 용기 있는 여인이라고 칭송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이야기로,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퍼져 나갔다.

이는 모두 베르톨트와 레니에의 연출이었으며 프리트홀트와 휴고가 시나리오와 배급을 맡았다.

그동안 아델라이드는 에드가를 만나기 위해서 매일같이 레니에의 저택을 방문했다. 그러나 에드가는 번번이 거절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오늘도 에드가를 보러 온 아델라이드는 마찬가지로 에드가를 방문한 벨라루아, 아그리파와 마주쳤다.

아델라이드는 언젠가 한번 벨라루아를 만나려고 했으나 에드가가 만남에 응하면 언제든 달려 나갈 생각에 벨라루아를 만날 짬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이렇게 마주친 것이었다.

아델라이드는 잘됐다며 두 마법사에게 시간을 내달라 했다. 레니에는 기꺼이 손님 접객실과 고급스러운 차를 제공했다.

“벨라루아, 우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알렉시아 황녀에게서 오라버니를 지키려 애썼다는 것을 들었어요.”

벨라루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어쩐지 몸이 편치 않아 보였다.

“감사 인사를 들으려고 에드가를 구한 게 아니야. 그러니 그런 낯부끄러운 말은 하지 마.”

그녀는 아델라이드에게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 것이 어색한지 손발을 꼼지락댔다. 그리고 잠이 오는데 억지로 버티려는 듯 자꾸만 눈을 부릅떴다.

“공작님. 에드가가 언제부터 저렇게 내리 자고 있는 거죠?”

벨라루아는 눈에 힘을 주며 레니에에게 물었다. 레니에는 그녀가 갑자기 자신에게 말을 붙인 것에 놀라 잠시 움찔했다가 미간을 폈다.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깨지 않고 있네. 무슨 문제가 있나?”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저도 피로감이 몰려 눈을 뜨고 있기가 힘이 듭니다. 그저 피곤하다고 보기엔 이상합니다. 음… 에드가를 잘 지켜보고 계세요.”

말끝을 흐린 벨라루아가 아그리파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그리파는 레니에와 아델라이드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벨라루아가 많이 피곤한 듯합니다. 저희는 일단 가 보겠습니다. 혹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제게 바로 연락 주세요. 저는 벨라루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벨라루아는 아그리파의 팔을 부여잡아 힘겹게 일어섰다. 두 사람은 예를 갖추고 방을 나갔다.

“레니에 님. 에드가는 좀 어떻습니까?”

매일 허탕을 치면서도 아델라이드는 에드가의 상태를 매번 물었다. 에드가가 황녀에게서 받은 고문 때문에 육체적으로 많이 지쳐 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기억을 강제로 주입당하기까지 했으니 정신적으로도 휴식과 치료가 필요할 거라는 염려를 떨칠 수가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러나… 주입당한 기억과 제가 해 주는 이야기가 달라 원래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심하게 피곤해하고 두통을 호소합니다.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잠에서 깨지 않는 것도 그 여파라고 생각했는데 벨라루아를 보니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네, 그런 것 같아요. 벨라루아도 심신이 많이 불안정하고 힘들어 보였어요. 아그리파가 돌보고 있으니 별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왠지 불안하네요.”

레니에도 같은 생각이었다. 아직 터지지 않은 폭탄을 쥐고 있는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에드가가 잠에서 깨면 아델라이드 님과의 만남을 적극 주선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매일 이렇게 오지 마시고 그냥 황궁에 계세요.”

아델라이드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그녀가 서글프게 웃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요. 에드가 혼자 싸우고 있는 거 같아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어요. 잘못된 기억 때문에 절 미워한다 하더라도… 차라리 저한테 화내면서 쏟아 내기라도 하면 좋겠어요.”

아델라이드는 고개를 떨궜다. 무릎 위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요즘 그녀는 매일 울었다. 지독하리만큼 힘든 시간을 버틸 때도 이렇게 눈물이 헤프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눈가가 마를 틈이 없었다. 레니에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그만 우세요. 한 달 후면 기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손수건을 받아 든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황궁으로 들어가셔야지요.”

“…네.”

“저도 폐하를 뵈어야 하니 같이 가시죠.”

레니에와 아델라이드는 함께 방을 나섰다. 밖에는 황제의 예비 신부인 아델라이드의 호위 기사, 클리터스 부니에가 서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