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7장. 안달루스의 사절단 (28/39)

제27장. 안달루스의 사절단

얼마 후 안달루스 사절단이 세르비아의 수도, 녹턴에 입성했다. 서른 명의 사절단은 준비한 선물을 들고 제일 먼저 황제 베르톨트에게 찾아갔다. 사절단의 가장 앞에는 가히 절세미인이라 할 수 있는 안달루스의 황녀 알렉시아가 서 있었다.

커다란 홀에 들어선 사절단이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알렉시아 황녀의 미모를 극찬하는 소리가 나왔다.

“어머, 저 탐스런 검은 머리와 하얀 피부 좀 보세요. 완전히 인형 같아요.”

“저렇게까지 짙은 초록색 눈동자는 처음 봐요.”

“몸매 좀 봐요. 안달루스 제일의 미녀라더니 정말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네요.”

웅성대는 소리는 알렉시아가 베르톨트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을 때에야 사라졌다. 황녀는 드레스 자락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허리를 굽힌 채로 예를 올렸다.

“세르비아의 태양, 베르톨트 한스 악셀 크라젤 폰 카롤링거 3세를 안달루스의 황녀 알렉시아가 뵙습니다.”

“안달루스의 황녀 알렉시아는 고개를 드시오.”

엄중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리자 알렉시아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훤하디훤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듯 염원과 사랑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황제를 쳐다봤다.

베르톨트의 눈에도 황녀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살아 있지 않은 정물의 것과 같아서 그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았다. 감흥은커녕 집요한 눈길 때문에 오히려 점점 더 서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그도 잠시 잠깐 아델라이드를 혼자 좋아했기에 짝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황녀에게는 그 마음을 감사하게 여길 수도 없게끔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곳에서 머무르는 5박 6일 동안 즐겁고 편히 있다 가시오. 레니에 재상과 프리트홀트 외무대신이 그대들을 각별히 신경 쓸 것이오.”

그의 말 어디에도 황제는 없었다. 그는 인사말에서부터 자신의 역할을 배제했고 그녀와 선을 그었다.

“폐하, 폐하를 뵙고 싶으면 어찌해야 하나요?”

알렉시아가 곱게 눈꼬리를 휘며 생긋 웃었다. 베르톨트의 메마른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재상에게 말하시오. 그가 듣고 판단할 것이오.”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홀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기립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남기고 황제가 떠난 자리에 인상이 구겨진 레니에만 남아 사절단을 접대하게 되었다.

베르톨트는 발걸음을 외무관으로 옮겼다. 사절단이 머무르는 동안만이라도 출근하지 말라고 했으나 아델라이드는 그럴 수 없다며 오늘 아침에도 그의 품에서 재빠르게 빠져나갔다.

어제도 자신과 한차례 격한 밤을 보낸 그녀가 너무 무리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한 번은 피곤해하는 그녀를 안고만 자려고도 해 봤으나 닿기만 하면 흥분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한 마음에 베르톨트는 그다음 날 시녀장 안나에게 말해 제국에서 제일가는 보신용 음식들을 준비했다. 그 덕에 아델라이드는 그날 아침, 넘어가지도 않는 음식들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결국 아델라이드는 밤에는 그를 받아 내느라, 낮에는 외무 관련 일을 하느라 이래저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외무관 내 열려 있는 집무실 중 아델라이드가 일하고 있는 곳을 찾아냈다.

집무실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황제를 발견하고 일어나서 예를 갖추었고, 일부는 황제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서류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델라이드는 후자에 속했다.

그녀는 빼곡히 쌓여 있는 서류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무언가를 번역하는 듯 고개를 들 때마다 사전과 서류 사이에서 시선이 분주하게 오갔다.

아델라이드가 집중해서 일하는 모습을 보니 베르톨트는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신의 품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아델라이드의 옆에 있던 휴고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황제를 본 그는 인사를 하고 아델라이드의 팔을 건드리려 했으나 베르톨트가 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 그리고 휴고에게 나오라고 손짓한 다음 자신이 그녀의 옆에 가 앉았다.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황제의 눈짓에 집무실 안의 외교관들은 서류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곁눈질로 황제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베르톨트의 눈에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들어왔다. 목께를 간질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그녀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귀 옆으로 머리카락이 몇 가닥 흘러내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에만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눈이 가끔 깜빡였다. 나비의 날개 같은 속눈썹이 팔락였다.

그럴 때면 그녀의 뺨에 그림자가 졌고, 이따금 그녀가 미간을 찡그릴 때면 붉고 통통한 입술이 뾰족하게 나왔다 들어갔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지?’

베르톨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 새벽녘의 그녀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폭풍처럼 밀려오는 감각에 몸부림치다 울었다. 그녀가 내뱉는 숨결, 몸짓, 절정에 오를 때 그를 조여 오는 감각, 표정, 헐떡이며 내뱉는 신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올라 몸이 뜨거워졌다.

숨길 수 없는 자신의 아래 존재에 베르톨트는 눈을 질끈 감고 다른 것으로 주의를 돌리려 했다. 필사적으로 오늘 방문한 안달루스 사절단 생각을 하였더니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슬며시 눈을 뜨니 아델라이드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휴고 비서관님, 여기 이 부분이요.”

옆을 돌아본 그녀는 그제야 휴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이를 확인했다.

“폐, 폐하!”

베르톨트는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의 잘생긴 입술 끝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도대체 언제쯤 봐 주나 했지.”

“바쁘실 텐데 어떻게….”

놀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휴고에게 눈짓을 보냈다. 뒤이어 일어난 베르톨트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 이끌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지.”

휴고를 비롯한 외교관들이 황제에게 예를 갖췄다.

“가실까요, 레이디?”

아델라이드가 살풋이 웃으며 황제의 옆구리에 팔짱을 끼었다.

“폐하,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세요? 사절단은 보셨어요?”

두 사람의 발길은 외무관 정원으로 향했다. 복도에서부터 계단식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대가 묻고 싶은 것이 사절단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황녀인가?”

베르톨트가 발걸음을 멈추고 아델라이드를 빤히 들여다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흘겼다.

“사절단에 관한 것이 황녀에 관한 것 아닙니까? 저를 놀리시는 거예요?”

“음…. 꼭 그렇지는 않은데.”

이럴 때는 누구보다 장난스럽게 구는 남자였다. 알아도 모른 척 넘어가면 좋으련만 꼭 이렇게 한 번씩 그녀를 떠본다.

긴 손가락이 그녀의 삐져나온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줬다. 그러고는 커다란 손이 동그란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쓰다듬었다.

“내 앞이 아니면 머리 풀지 마. 이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길어 나부낄 때는 그대가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

“뭐, 뭐예요?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는 것도 그의 특기이자 장기다. 예측이 불가능하고, 가늠할 수 없고, 그리고… 잘생겼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기괴한 결론에 한숨이 났다. 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챈 황제가 살며시 품 안으로 그녀를 잡아당겼다.

“약혼자께서 나의 품이 그리우신가? 우리 침실로 갈까?”

그녀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팔을 밀었다.

“침실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들어가요? 정말 남들이 흉본다고요.”

얼굴이 있는 대로 빨개진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서 웅얼거렸다. 황제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왜 이러는 거지? 자꾸 이러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토닥이던 손길은 어느덧 아래로 내려가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베르톨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더니 오뚝한 콧날을 내려와 입술을 핥았다.

“으응.”

듣기 좋은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는 웃는 건지 앓는 건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그녀의 목덜미에 더운 숨결이 닿더니 귓가를 간지럽혔다.

“침실까지 가지도 못하겠는걸.”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하체로 이끌었다. 아델라이드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이자 그가 다시 얼굴을 들어 그녀의 입술에 입 맞추었다.

두 사람은 결국 본궁으로 발길을 돌렸고 들어가자마자 가장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 사랑을 나눴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만 보면 발정 난 짐승처럼 달려드는 자신이 어이가 없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결코 숨기지 않았다. 태어나 지금까지 이런 감정을 느낀 적도 없고, 이렇게 누군가에게 빠져든 적도 없었다.

지독한 소유욕이라 해도 좋았다. 그녀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그녀의 마음과 육체 모두를 완벽하게 갖고 싶었다.

결국 아델라이드는 외무관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 안 돼! 안 돼요!”

다가올 무언가를 예감한 그녀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베르톨트는 겉옷은 입은 채 속옷만 벗은 그녀의 다리를 어깨에 걸친 그대로 그녀를 안고 섰다.

“쉬이! 괜찮아. 무서우면 내 목을 안아.”

그녀의 통통하고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은 그는 무섭도록 하늘을 향해 일어난 그의 물건 위로 그녀의 엉덩이를 그대로 내렸다.

“흐으으….”

아델라이드가 울듯이 신음했다. 이런 자세로 섹스가 가능할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길고 굵고 단단한 그것이 한참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아래가 버겁고 꽉 찬 나머지 뚫고 나올 것 같은 흉흉한 느낌에 눈물이 났다.

“하… 베르. 베…르!”

“다 들어갔어. 그대의 안이 좋아서 난리군.”

베르톨트는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씨익 웃었다. 무척이나 따뜻하고 축축하고 쫄깃한 것이 자신의 것을 꽉 물고는 놔주지 않았다.

잠시 그녀에게 안심할 시간을 준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으로 접힌 채 서서 박히는 이 자세는 여자의 몸속에 페니스가 매우 깊이 들어오게 하기에 그의 살덩이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델라이드는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끅끅대며 울었다. 목이 저절로 뒤로 넘어갔다.

퍽, 퍽, 퍽.

강하게 치받드는 존재가 그녀가 꼭 느끼는 그 부위를 쓸면서 위아래로 왕복 운동을 했다.

“흐아악! 아앙! 제발… 제발!”

그녀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서로의 체액이 넘쳐 몸이 부딪힐 때마다 질척이며 끈적이는 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이러다 정신을 놓겠다 싶을 만큼 고통과도 같은 쾌감에 아델라이드가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 너무, 좋아…. 하아! 미친!”

베르톨트가 미친 듯이 엉덩이를 움직이고 허리를 동시에 튕기자 그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마치 교미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동물 같았다.

“그, 그만. 하아앙! 아앙! 그, 그만! 이, 이상해. 부…서져. 하읏!”

아델라이드의 울부짖음에도 그는 인정사정없었다. 퍽퍽 소리를 내며 쿵쿵 내벽 깊숙한 곳을 때리는 것이 자궁까지 울렸다.

그녀의 질에서 나온 야한 물이 꽉 들어찬 성기 사이로 뚝뚝 떨어졌다. 더 매끄럽고 강하게 남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흘리는 애액과는 다른 것이었다.

여자도 너무 느끼면 남자가 사정할 때처럼 맑은 물이 나온다고 했다. 아델라이드의 이렇게 야해 빠진 모습은 이 세상에서 베르톨트 자신밖에 못 볼 것이다. 영원히.

만족감과 자극적인 느낌이 한껏 차오르자 바로 사정해 버릴 것만 같았다. 베르톨트는 이 미칠 듯한 쾌감을 조금 더 느끼고 싶어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 내고 허리를 움직였다. 뿌리까지 들이찬 내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를 그를 조이고 주물렀다.

“…큭!”

퍽퍽 소리를 내며 쾌감이 번쩍일 때마다 그녀가 울면서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 모습이 미치게 자극적이었다. 베르톨트는 더욱 강하게 올려쳤고, 마침내 베르톨트의 정액이 그녀의 안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파도처럼 밀려드는 격정에 몸을 떨었다.

베르톨트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좋았다. 제 물건을 잘라먹을 듯이 조이는 뜨거운 내벽뿐 아니라 떨어질까 두려워 꼭 안긴 몸, 파들파들 떨리는 엉덩이와 자신의 목을 꽉 쥔 손 모두가 너무너무 예뻤다.

“하응…. 하아….”

제 정액을 가득 품고 아직도 절정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야한 모습까지도 못 견디게 좋았다.

자신은 아직 갈증이 완전히 풀린 게 아니었지만 지금 아델라이드의 상태로는 더 이상 자신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뺨에 아직도 흐르고 있는 눈물을 핥고 눈, 코, 입에 입 맞추며 그녀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주었다.

이렇듯 격렬한 정사를 거나하게 치르고 외무관으로 돌아간 아델라이드는 몸과 정신이 모두 지쳐 일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서류를 보던 그녀는 한숨을 짙게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본궁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후들거리는 육체를 어서 빨리 침대에 누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밤이 되어 아델라이드가 맨몸에 나이트가운만 걸친 채 서류를 들여다볼 때, 베르톨트는 침대 헤드에 느긋하게 기대어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낮에 못한 일을 침실까지 가져와 마저 하는 그녀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맡은 일을 끝까지 해내려 하는 그녀의 성실함과 책임감이 좋았다.

어른대는 촛불에 아델라이드의 옆얼굴이 음영을 그리며 너울댔다. 그는 오뚝한 콧대에서 입술, 우아한 목, 그리고 여민 가운 사이로 드러나는 봉긋한 가슴과 분홍색 정점까지 이어지는 선을 멍하니 쳐다봤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미치게 맛있어 보였다.

‘미친 것이 틀림없군.’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뱉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아델라이드가 그를 돌아보았다.

“네?”

동그랗게 눈을 뜬 그녀가 몸을 돌리자 가운 사이로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나신이 보였다. 베르톨트는 웃음 띤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냐. 그저… 어떻게 하면 그대를 다시 침대로 데려올 수 있을까 생각했어.”

아델라이드는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옆에 놓여 있는 베개를 들어 그에게 던져 버렸다. 원망의 말도 함께 날아갔다.

“이 구제불능 짐승! 좀! 적당히 하라고요!”

진정으로 화가 난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평소 들을 수 없는 표현이 터져 나왔다.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씨근대고 있었다. 낮에 일을 마치지도 못하고 그렇게 해 댔는데 지금 또 그 생각뿐이라니 놀랍고 서운했다. 온몸에 흔적이 없어질 틈이 없었다.

그 후로 사절단이 돌아가는 5일 동안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의 몸에 손도 대지 못했다.

* * *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지?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무엇 때문에 왔는데!”

알렉시아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꽉 쥔 주먹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전하, 제발 소리를 낮추십시오. 누가 듣습니다.”

“흥! 들으라지. 내가 겨우 재상과 말하려고 온 줄 알아? 그 사람 왜 나를 홀대하는 거지? 왜 나를 모른 척하는 거야? 그래, 나를 만나고 나서 어디로 갔지?”

황녀의 날카로운 시선은 난처해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안달루스 외무대신에게로 향했다. 그는 괜스레 옷자락을 쥐었다 폈다 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그게… 약혼자에게 가셨습니다. 얼마 후 본궁으로 두 분이 사라지셨고요.”

알렉시아는 기가 찼다. 자신이 사절단으로 왔는데 자신은 본체만체하고 그 약혼자와 사라져? 그렇게 그년이 좋은 거야? 대체 어떻기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표정도 없이 그림처럼 가만히 서 있는 벨라루아를 노려보았다.

“그년을 봐야겠어. 네가 가서 약속을 받아 내.”

“알겠습니다.”

황녀의 눈이 번뜩였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 * *

다음 날부터 안달루스 사절단과 외무부 간의 협상이 열렸다. 두 나라의 외교관들은 준비한 자료를 토대로 바젤의 삼림권을 두고 설전을 벌였다.

터무니없는 주장에 비해 안달루스의 외교관들은 논리적인 변론을 펼쳤을뿐더러 제시한 근거 역시 구체적이었다. 프리트홀트와 휴고는 생각보다 철저한 그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델라이드는 양국이 협상을 벌이는 동안 자료를 준비하면서 외교관들을 지원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구보다 바쁘게 일하느라 그녀는 어느덧 녹초가 되어 있었다.

지친 그녀는 외무관 밖으로 나와 잠시 한숨을 돌렸다. 정원을 거니니 날 선 신경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했다.

“안녕.”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누군가 인사를 했다. 따뜻한 낮인데도 팔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아델라이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후드를 쓰지 않은 채 긴 갈색 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 벨라루아가 서 있었다.

- 그 마녀구나.

베르톨트는 안달루스 사절단이 방문하는 이 시기에는 절대로 머레인을 떼어 놓지 말라고 했었다. 아델라이드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반짝였다.

“호오. 그 목걸이, 봉인이 풀린 거야?”

쇳소리가 섞인 음성은 다시 들어도 여전히 음울하다.

“너를 건드리기 쉽지 않겠구나.”

그녀의 웃음소리가 아델라이드 주위를 맴돌았다.

“어, 어딨어요?”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있는 아델라이드의 손마디가 애처로울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견고했다.

“뭐가?”

“에드가.”

“오호, 정말 대단해. 내가 데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바젤에 시찰단이 왔다 갔다더니 그것도 알아낸 거야?”

“자꾸 딴소리 말아요. 에드가, 당신한테 있죠? 무사해요?”

벨라루아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환영이 아닌지 미끄러지듯 기묘하게 발을 놀리고 있지 않았다. 분명 바닥에 발을 대어 걷고 있었다.

“음…. 우리 대화를 좀 하자고. 난 네게 관심이 아주 많아.”

“에드가의 안위부터 먼저 말해요.”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벨라루아가 곱게 웃었다.

“황제가 약혼했다는 것을 알고 황녀의 노여움이 대단해. 약혼녀가 누군지 직접 봐야겠다고 바득바득 우기잖아. 그래서 내가 사절단이 되어 가 보자고 했어. 나도 그 덕에 네 얼굴도 좀 보고. 더 이뻐졌네. 살은 좀 빠졌지만.”

한쪽 눈을 찡긋한 그녀가 야살스럽게 웃었다.

“에드가, 건드리지 말아요!”

“건드려? 내가? 너는 나를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서운한걸. 난 너희 인간들처럼 야만적이지 않아. 누군가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건 나로서도 끔찍하다고. 걱정 마. 에드가는 잘 있어. 그리고 황녀는 내가 데리고 있는 그 예쁜 청년이 네 오빠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고.”

그녀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와 아델라이드의 귓가에 속삭였다.

“황녀도 나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이뻐하는 너의 약점을 그녀에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고스란히 바칠 수는 없었지. 어쨌든 내 곁에 얌전히 있기는 해.”

“얌전히? 그게 무슨 뜻이죠?”

- 이 마녀 사악해. 믿지 마.

“말 그대로. 얌전히…, 아주 얌전히.”

위험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강제로 납치당한 에드가가 얌전히 있을 리 없었다. 그건 자신이 아는 오라버니가 아니지 않은가.

아델라이드는 분노가 치밀었다. 그가 살아 있다고 들었는데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설마, 독이라도 쓴 거예요?”

“오! 역시 똑똑해. 그런데… 독은 아니야. 그도 너나 나처럼 무척 고단했더구나. 그래서 쉬라고 재워 놓았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벨라루아가 믿어 달라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 과장된 표정 속에 일말의 진심이 있다고, 이상하게 아델라이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아직 결정하지 못했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이야. 황녀는 가끔 나보다 더 사악할 때가 있어. 그런 그녀를 어디까지 믿고 도와줘야 할지 가늠이 안 돼. 그나저나 네가 힘들어할 땐 안쓰럽다가도 이렇게 행복해하는 건 또 보고 있기 짜증 나네. 이상하지?”

이야기가 더 길어졌다가는 자신이 오히려 더 짜증이 날 것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죠?”

“우선 황녀를 만나.”

“그리고요?”

“그다음엔 네가 하는 걸 보고 결정할게.”

“좋아요. 이따 협상이 끝나거든 봐요. 당신도 황녀와 같이 나올 거죠?”

“응. 난 여기 널 보러 왔어.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보고 가야지.”

“그럼 나도 황궁 마법사와 함께 올게요. 그래야 균형이 맞겠죠.”

“마법사가 있어? 세르비아 황궁에?”

“당신 때문에 생겼어요.”

아델라이드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순적이게도, 마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르비아에서 궁정 마법사를 들였다. 그것은 황제를 위협했던 벨라루아 때문이었다.

“넌 이제 마법사가 필요하지 않을 텐데.”

벨라루아가 아델라이드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흘깃 쳐다보았다.

“저 때문에 마법사를 대동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 때문이지.”

“나? 재미있군. 좋아. 어떻든 간에 이따 보자구.”

그녀는 몸을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길모퉁이를 돌아 그녀가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아델라이드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적어도 에드가가 무사하다는 것은 알아냈다. 그렇게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던 에드가에게 드디어 한 발짝 다가서게 된 것이다.

사절단에 황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벨라루아가 함께 올 것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절단이 도착한 첫날,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둘째 날인 오늘, 아델라이드는 협상 자료를 만들자마자 바람을 쐰다는 명목으로 혼자 정원을 거닐었다. 벨라루아가 접근할 수 있도록.

그리고 아델라이드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있는 아델라이드의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렉시아 황녀가 에드가의 존재를 모른다는 희망적인 정보와 그가 벨라루아의 주문에 걸려 자고 있다는 다소 씁쓸한 정보를 알려 주기까지 했다.

아델라이드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가슴이 덜컹거렸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이 쉽게 진정되지 않아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괜찮으십니까?”

정원의 나무 사이에서 하얀 옷을 입은 하얀 머리의 사내가 나타났다.

아델라이드의 등에 가득했던 상처를 없애 줬던 마법사이자 벨라루아의 어릴 적 스승. 바로 이번에 황제가 새롭게 임명한 궁정 마법사, 아그리파였다.

“괜찮습니다. 혹시 들으셨어요?”

“네. 벨라루아는 여전하네요.”

눈을 감고 있는 아그리파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단지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 있을 뿐이었다.

베르톨트가 아그리파를 어떻게 찾아 설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궁정 마법사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아델라이드는 매우 안심이 되었다. 등의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마음의 상처까지 동시에 사라지게 한 그는 그만큼 그녀에게 든든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다만 든든한 사람이라는 것과 별개로 그의 섬세한 이목구비는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 보였다. 마법사인 줄 몰랐다면 예술가라고 생각했을 듯한 그의 분위기와 아그리파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그리파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고 요절한 세르비아 천재 화가의 이름이기도 했으니까. 그는 묘하게 에드가와 꽤 닮아 있었다.

“마법사님. 벨라루아가 제 오라버니 에드가를 주문으로 재웠다는 게 무슨 뜻이죠?”

그의 감긴 눈꺼풀이 희미하게 떨렸다.

“순수하게 재우기 위해 주문을 걸기도 하고, 최면을 걸어 실토나 자백을 받기도 하죠.”

“최면…요?”

아델라이드는 ‘최면’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지 모르는 에드가를 어떻게든 빼내 와야 할 텐데 지금으로써는 방법이 없다. 답답한 나머지 절로 짙은 한숨이 나왔다.

“걱정 마십시오. 벨라루아가 에드가 님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을 겁니다. 놀랍게도 벨라루아는 아델라이드 님께 꽤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진실로 미움 받을 짓을 하진 않을 겁니다.”

“제게 호감을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자신도 벨라루아를 마냥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가 연민인지, 동정인지, 아니면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인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씁쓸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감이라니, 그건 너무 많이 나간 것 아닌가.

“제가 아는 벨라루아는 타인에게 지나치리만큼 관심이 없습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알렉시아 황녀에게 벌써 아델라이드 님의 과거와 오라버니의 존재를 알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황녀의 눈을 피해 에드가 님을 숨기고 있다는 것은 아직 벨라루아의 마음을 돌릴 기회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녀를… 저희 쪽으로 데려올 순 없을까요?”

“…….”

아그리파는 흠칫하더니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심경이 조금이라도 배어 나왔던 목소리가 멎은 상황. 감긴 눈과 닫힌 입에서는 어떤 대답도, 어떤 감정도 나오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황녀 쪽을 선택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게 사라지지 않는 한 그쪽에 있을 테고요.”

“아그리파 님이 설득하면 움직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오지 않을 겁니다. 저를 미워하고 있어요.”

“미워해요? 왜…요?”

그는 또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가늠할 수 없는 허탈함과 슬픔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너무 개인적인 것을 여쭤봤네요.”

“아닙니다. 그저 별 도움이 안 되는 얘기라 꺼낼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아그리파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지만 아델라이드의 눈에는 억지웃음으로 보였다. 그는 앞으로 서너 걸음 걸어 나오며 아델라이드에게 함께 걷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아그리파의 옆으로 가 나란히 걷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인 아그리파는 원래 안달루스 제국의 명망 있는 귀족가 자제였다. 지위와 재산을 누리며 편히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미련 없이 가문을 나왔다.

그가 추구하는 삶은 혼자만의 수련으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름난 마법사들을 찾아 그들의 능력을 보고 배우면서 세상의 아픈 곳과 낮은 곳에서 마법을 베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녀가 출몰했고, 공개적으로 처형당할 예정이라는 이야기가 퍼졌다.

아그리파는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다. 진정 사악한 환술을 쓰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에게 잡혀서 속수무책으로 처형당하지도 않을 텐데 또 멀쩡한 여자를 마녀로 몰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처형 장소로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처형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여자가 화염 속에 갇혀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누구 하나 그녀를 도와주지 않고 마녀라고 손가락질하며 돌을 던져 댔다.

아그리파는 마법을 펼쳐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구해 냈다. 그리고 자신이 가끔씩 기거하던 산속 아담한 별장으로 벨라루아를 데리고 갔다.

전신에 화상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끔찍했다. 아그리파는 자신이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에 어떻게든 그녀를 살려 내고 싶었다.

그는 우선 마법으로 그녀의 몸속에 쌓인 열기와 독소를 빼내고, 이후 정성 들여 내상을 치료했다.

처음 며칠 동안 벨라루아는 의식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신음을 내질렀고 울부짖었다. 그럴 때마다 아그리파는 가슴이 미어졌다. 아직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작은 여자인데, 그런 여자를 보호해 주지는 못할망정 마녀랍시고 이렇게까지 만든 인간들이 무서웠다.

아그리파는 그녀를 토닥토닥 얼렀다. 간혹 그녀가 고통에 온몸을 비틀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묶기도 하며 오직 치료에만 전념했다.

벨라루아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2주가 지난 후였다. 그녀는 사람들을 피하고 무서워했으며 오로지 아그리파만 따랐다.

아그리파는 그녀가 다시는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을 그녀에게 전수해 주었다.

다행히 그녀는 재능이 뛰어나 그의 가르침을 매우 빨리 습득했다. 그런 제자가 너무나 기특해 아그리파는 기꺼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두 사람은 아그리파가 예전에 그랬듯 대륙을 유랑하며 마법을 수련해 나갔다. 그러는 동안 벨라루아의 몸은 완쾌되었지만 얼굴의 상처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얼굴 한쪽을 가리고 다녔다. 아그리파는 그것이 못내 안타까워서 상처 제거 마법을 익혀 상처를 없애 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아그리파의 마법 능력이 예전 같지 않았다. 새로운 마법을 익히는 것이 요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본래 지닌 능력마저 자꾸만 힘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래도 벨라루아에게는 여전히 스승이었고 친구였다. 아그리파는 그녀가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고, 또한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보호막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승으로서 존경했지만 어느새 자신의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나날이 커지는 마음을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을 때 벨라루아는 아그리파에게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잔뜩 긴장한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뱉었다. 당장 연인 관계가 될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서서히 여자로서 봐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한 유대가 강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그리파에게서 나온 대답은 야멸찼다. 그는 너와 나는 여자와 남자가 아닌 스승과 제자라며 선을 딱 그었다. 그리고 계속 이런 감정을 품을 거라면 헤어져 각자 갈 길을 가자고 했다.

“혹시… 제가 이렇게 상처투성이라서, 그래서 받아 주실 수 없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그렇다면 왜요? 왜 저는 안 되는 건가요?”

“넌 언제나 나에게 제자이고 친구야. 한순간도 널 여자로 본 적이 없다.”

일말의 희망도 주지 않는 대답이었다. 벨라루아는 절망했다. 세상이 또 한 번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볼 때마다 꾹꾹 눌러 왔던 설움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 아픔의 크기가 너무 커져 버려 전처럼 웃으며 그를 볼 수 없었다. 차가운 아그리파를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 또한 없었다.

그날 밤 벨라루아는 아그리파와 지내던 집에서 무언가에 쫓기듯 나와 버렸다. 다시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며, 다시는 상처받지 않겠다며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그의 품을 벗어났다.

* * *

“그녀를 많이 아끼셨군요.”

아그리파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제가 벨라루아에게 갖는 이 감정이 이성 간의 사랑인지, 인간에 대한 사랑인지는 아직까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합니다. 전 그때 벨라루아를 받아 줄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마법력을 잃어 가고 있었으니까요. 지켜 줄 수 없으니 그녀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녀에게 솔직히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아델라이드가 처음 듣는 아그리파의 웃음소리였다.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아마 전 그때 벨라루아에게 강하게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그녀를 언제나 지켜 주는,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마법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금세 회복될 거라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래서 결국은 그녀를 잃게 되었지요.”

“그럼… 눈은 언제 다치신 거예요?”

“벨라루아가 떠난 직후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들이닥쳤어요. 마녀를 잡겠다고요. 그때 눈을 다쳐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가 다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델라이드의 입매가 굳어졌다. 그녀는 인간들의 무지함과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그로부터 10년 만에 그녀를 보겠네요. 볼 수는 없겠지만.”

아델라이드는 메마른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애처로울 정도로 차가웠다.

아그리파를 만나고 외무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델라이드는 알렉시아 황녀의 시녀와 마주쳤다. 시녀는 황녀가 외무관의 접견실에서 따로 만나길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어째서 비서관을 통해 정식 만남을 요청하지 않고 기록이 남지 않는 사적인 만남을 요청한 것인지 의아했지만, 아델라이드는 알겠다고 답했다.

아델라이드는 접견실에 먼저 도착해 황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꽤 시간이 지나도 황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이 여자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아무리 일국의 황녀라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디 있어? 더군다나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해 놓고.

- 나타나겠죠….

- 무례해. 괜히 기선을 잡으려 하는 것 같아.

- 그런 것 같아요.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네요.

그때 아델라이드의 뒤에 서 있던 윤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델라이드 님. 차라도 드릴까요?”

“아냐.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아델라이드가 살포시 웃었다. 속은 바짝바짝 타고 있었지만 황제의 약혼자로서, 또 외무대신의 비서관으로서 품위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차분히 다잡고 있을 때 접견실의 문이 딸깍 열렸다. 아델라이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벨라루아가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알렉시아 황녀가 나타났다.

황녀는 전해 들은 바와 같이 인형 같은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흰 피부에 칠흑같이 검은 긴 머리는 주위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일 듯이 강렬했다. 아델라이드가 생기 가득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 알렉시아는 생명이 없는 정물 같은 느낌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아델라이드 라울 드 스트라우스가 안달루스 제국의 알렉시아 황녀님을 뵙습니다.”

알렉시아는 자신에게 예를 취하는 아델라이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가 허리를 펴고 눈을 맞추자, 그제야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다.

“앉으세요, 황녀님.”

알렉시아는 의자에 앉았고 벨라루아는 그녀의 뒤에 섰다. 아델라이드는 아주 잠시 벨라루아를 보고는 눈인사를 했다. 벨라루아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저를 만나기를 청하셨다고요. 무슨 이유인지요.”

아델라이드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단단한 눈빛이 알렉시아 황녀를 똑바로 보았다.

“당신, 재미있군요. 나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제법이에요.”

아델라이드를 만나기 전만 해도 알렉시아는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할, 별거 아닌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벨라루아가 보통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때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여자는 자신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고개만 까닥이는 정도로 다소 무례하게 인사했는데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

“당황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황녀님이 뵙기를 청한다기에 자리를 마련했을 뿐입니다.”

원래 귀족들은 첫 만남에서는 서로의 외양이나 학식, 교양 등을 칭찬하는 수준에서 대화를 그치고 속내는 서서히 꺼낸다. 그것이 그들의 대화법이었다.

그런데 아델라이드는 안달루스의 황녀를 대면하고도 그런 형식적인 대화 없이 바로 용건이 무엇이냐며 훅 들어왔다. 여려 보이는 그녀의 겉모습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알렉시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여태 혼자셨던 세르비아의 황제께서 약혼을 하셨다길래 약혼자가 어떤 분인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윤이 다가와 두 사람 앞에 놓인 찻잔에 조심스럽게 차를 부었다. 찻잔에서 뜨거운 김이 사르륵 올라왔다. 그 모양새를 잠시 지켜보던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들어 황녀의 짙은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보았다.

“황녀님. 직접 뵙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나 이런저런 일로 이미 서로에 대해 알고 있으니 돌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델라이드의 말에 알렉시아 황녀는 물론이고 뒤에 서 있던 벨라루아까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벨라루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전 엄연히 폐하의 약혼자입니다. 황녀님께서 폐하를 마음에 두고 계셔서 요상한 술수도 쓰고, 벨라루아를 시켜 저도 납치하려 하셨지만 그럼에도 저는 폐하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폐하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알렉시아 황녀가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찻잔에서 차가 쏟아져 테이블을 흥건하게 적셨다.

“네가 감히…!”

황녀의 눈가가 노여움과 분노로 벌겋게 변했다. 하지만 아델라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또한, 황녀님께서는 사적으로 부르셨다지만 시기가 시기인 데다가 저는 세르비아 외무부의 일원입니다. 그러니 안달루스의 바젤 삼림권 주장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안달루스의 주장은 고서에 나온 이야기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허구일지도 모르는 야사를 내세워, 전쟁까지 불사해야 할지도 모르는 민감한 외교 문제를 이렇게 밀어붙이시면 안 되지요. 안달루스에서 고심한 것은 알겠으나 이는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순간 황녀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황제의 약혼자는 자신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인물이었다.

귀족이라고 해 봤자 별거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기껏해야 남들보다 조금 더 아름답거나 조금 더 영특한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영특한 정도가 아니었다. 아델라이드의 말과 태도에는 일국의 군주에게서나 볼 수 있는 위엄과 품위가 흐르고 있었다.

“지금 영애는 나와 사절단의 협상 문제를 논하겠다는 겁니까?”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알렉시아는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얼마나 손에 힘을 줬는지 주먹 쥔 손마디에 뼈가 도드라질 정도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억울하고 분해서 뒤로 넘어갈 것만 같았다.

“논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논할 가치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알렉시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뒤에 서 있는 벨라루아도 아연실색하여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얘기는 나한테 할 필요 없어요.”

“왜 필요가 없습니까?”

“난 안달루스의 황녀로서….”

“황녀님은 사절단의 대표로서 오셨습니다. 잊으셨습니까?”

아델라이드가 실망했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사절단의 대표로 오시면서 단순히 폐하 혹은 폐하의 약혼자인 저를 만나기만 할 생각은 아니셨겠지요? 그리고 안달루스 황실이 고작 그런 의도로 황녀님을 보낸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니 사절단의 자격을 갖춘 황녀님께 우리 세르비아의 뜻을 전하는 겁니다. 아, 물론 뒤에서 황녀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선에서 협상을 마무리 짓는 주먹구구식 외교를 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방금 전 끝난 협상에서 지금 제가 말씀드린 바를 논의했고, 그 근거 자료 역시 전달했습니다. 참고로 그 자료는 제가 만들었고요.”

알렉시아는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접견실에 들어와 아델라이드, 이 여자를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제까짓 것이 나를 상대할 수나 있을까 싶어 우스웠는데,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에게 압도되고 있었다. 위압감을 주는 그 모습은 기이하게도 세르비아의 황제와 닮아 있었다.

급기야 난생처음으로 사람이 두려워서 한기가 들었다. 이대로 계속 대화한다면 만신창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라앉은 자존심을 애써 끌어 올렸다. 알렉시아는 처음 그녀를 마주 봤을 때처럼 다시금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하아. 제법이군요. 하지만 뭘 믿고 이리 나대는 건가요? 일개 시중 노예였으면서.”

그 말에 아델라이드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이 시중 노예였다는 것을 황녀에게 알릴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벨라루아.

벨라루아가 황녀에게 말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니, 벨라루아가 황녀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심 믿고 있었던 듯했다.

잠깐 벨라루아를 봤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벨라루아의 눈빛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평정심을 잃지 말자. 시중 노예였다고 알고 있을 뿐이야. 내가 수에비의 왕비였던 것에까지 연결 지을 수는 없을 거다.’

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들어와 얽히고설켰다. 아델라이드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최악의 경우, 벨라루아가 자신의 오라비인 에드가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황녀가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엔 시중 노예였지만 현재는 폐하의 약혼자이자 외무대신의 비서관입니다. 이에 합당한 대우와 예의를 해 주시길 바랍니다.”

알렉시아는 어떻게 해서든 저 담대한 태도를 꺾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진흙 구덩이 속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기가 질릴 대로 질린 알렉시아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변했을 때 접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곧 아그리파가 들어왔다. 발소리 하나 없이 물 흐르듯 아델라이드에게 다가와 그녀의 옆에 섰다.

“황녀님도 마법사를 대동하셔서 저도 세르비아의 궁정 마법사님을 모셨습니다. 괜찮으시겠지요?”

아그리파가 두 손을 모으고 합장하듯이 황녀에게 인사했다. 잠깐 숙인 고개를 따라 하얀 머리가 흘러내렸다. 아델라이드는 황녀의 뒤에서 충격으로 굳어 버린 벨라루아를 보았다.

벨라루아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아그리파를 보고 있었다.

마치 진짜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제가 잘못 본 것인지 몰라도 벨라루아의 두 눈이 물기로 젖어 있는 것은 아닌가, 잠시 잠깐 생각했다.

“난 폐하의 정인이라면 좀 더, 아니 매우 존귀한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후작가의 영애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중 노예 출신이 그런 자리에 올라가선 안 되겠지요.”

알렉시아는 새로이 등장한 아그리파의 존재는 깡그리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녀의 안에서 그때의 기분이 되살아났다. 황제가 독에 당하고서도 해독약을 자신에게 구걸하기는커녕 기껏해야 시중 노예밖에 되지 않는 여자를 보기 위해 그 고통을 참아 가며 말을 돌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비참하고 더러운 기분이.

그녀의 안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엉켰다. 아델라이드를 향한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황녀께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폐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그래요? 두고 보도록 하죠.”

아델라이드는 여전히 담담하게 대꾸했다. 황녀는 마치 눈싸움을 하는 양 아델라이드를 노려보다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휙 돌렸다. 벨라루아는 그때까지도 아그리파를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문 밖으로 나가기 전 알렉시아는 벨라루아를 잠깐 돌아봤다.

“좀 쓸 만해졌다 싶었더니 멍청하게 굴기는.”

알렉시아는 벨라루아를 가늘게 뜬 눈으로 한 번 쳐다보고는 곧장 나가 버렸다.

복도를 걷는 황녀의 구두 소리가 잦아들자, 벨라루아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왜, 왜….”

벨라루아의 목소리에는 울음인지 뭔지 모를 것이 섞여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아그리파만이 담겨 있었다.

“벨라….”

아그리파가 벨라루아에게 손을 뻗으며 한 걸음 다가가자 허공을 날카롭게 찢는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도대체 왜!”

동시에 접견실의 유리창이 부서질 정도의 충격이 발생했다. 접견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몸을 앞으로 접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 멀쩡한 건 벨라루아와 아그리파뿐이었다.

“벨라, 그만!”

“어떻게, 어떻게 여기 있어?”

벨라루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아그리파의 감은 눈매는 잔뜩 일그러졌다.

“벨라, 진정하고 내 말 좀….”

“가까이 오지 마!”

벨라루아가 악을 썼다.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 금방이라도 아그리파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녀는 두 손을 펴 얼굴을 가렸다. 곧 어깨가 잘게 떨리더니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아델라이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서 있었다. 벨라루아의 흐느낌이 커지자 안쓰러운 나머지 그녀에게 한 발 다가갔지만 아그리파가 더 빨랐다.

그가 얼른 다가와 벨라루아의 팔을 잡았다. 순간 벨라루아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그를 야멸차게 뿌리쳤다. 그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아! 잡아서 뭐 하려고? 이 애송이 계집애하고 무슨 일이라도 벌이려고?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다음에 볼 때는 정말 재미있어질 거야.”

모진 말을 퍼부은 벨라루아는 아델라이드를 흘끗 보고는 접견실을 나가 버렸다. 아그리파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 내쳐진 손을 잠시 허공에 뻗어 보았다.

“어떡하죠? 화가 많이 난 것 같은데….”

벨라루아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아델라이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드가가 벨라루아에게 잡혀 있으니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거나 꾀어내야 하는데, 이렇게 노하게 만들어서는 일만 꼬일 것 같았다.

“조금 진정되면 제가 다시 만나 보겠습니다.”

아그리파는 보이지도 않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방으로 돌아온 벨라루아는 방 안을 가로지르며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살아 있었어.

다행이야.

그런데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녀를 돕기로 한 걸까.

오랫동안 깊게 가라앉아 있었던 감정들이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한꺼번에 폭발했다. 그 감정이 놀라움인지 안타까움인지, 분노인지, 아니면 안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어느 것이 먼저인지도 모른 채 온통 뒤죽박죽되어 나와 버렸다.

아그리파,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그날 밤, 벨라루아는 그를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섰었다. 그런데 그때 마녀를 잡겠다며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 당시 아그리파는 원인도 모른 채 마법 능력을 잃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난 사람들이 몰려가서 해를 가하면 충분히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벨라루아는 돌아가지 않았다.

성난 인간들.

벨라루아에겐 공포였다. 그때로부터 4년 전, 그런 이들에게 잡혀서는 마녀로 몰려 감옥에 끌려갔다. 그 안에서 당했던 일들을 생각하면 온몸이 뻣뻣해지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그리파를 만나고 나서 1년 동안 그와 이곳저곳 다니며 치료도 하고 수련도 받아 아픔이 많이 옅어졌다고는 하나, 상처는 나아지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작은 계기라도 생기면 깊은 속살을 꼬챙이가 마구 파헤치는 것과 같이 고통과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무 뒤에 숨어 무지와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보면서 벨라루아는 그때와 같은 공포에 휩싸이고 말았다. 머리로는 아그리파를 구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그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서 빨리 사람들에게서 멀어져야 한다고, 익히 고통을 아는 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 벨라루아는 자신의 마음을 거절한 아그리파를 향한 애증과 그를 도와주지 않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쳤다는 자책감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벨라루아에게 아그리파는 그야말로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처였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은 벨라루아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 *

아델라이드를 만난 뒤 알렉시아는 비서관에게 행정대신 오스카와의 약속을 잡으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된 이상 아델라이드의 반대편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세르비아에 오기 전 알렉시아가 미리 조사한 바로는 아델라이드의 뒤에 스트라우스 후작이 있고, 스트라우스 후작과 비등하게 맞서는 자가 바로 오스카 백작이었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알렉시아는 벨라루아의 주위에 심어 둔 자에게 벨라루아를 한층 더 밀착해서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벨라루아는 자신의 편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도무지 자신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델라이드를 납치하라고 지시했을 때 벨라루아는 동행했던 자객들을 모두 잃었을뿐더러 황제에게 당해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채로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녀를 다그쳤지만, 황제가 사랑하는 여자는 시중 노예인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좀 더 알아봐야 한다는 말과 함께 황제를 무력이나 마법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는 답답한 말만 해 댔다.

물론 소드마스터라고 알려진 세르비아의 황제를 벨라루아가 한 번에 해치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의 검에 벨라루아가 그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그 이후로 알렉시아는 벨라루아에 대한 밑도 끝도 없던 신뢰가 사라졌다.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능력을 보인 것은 물론, 황제의 여자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괘씸죄를 적용하여 벨라루아에게 바젤에서 툴루즈로 넘어오는 목제품 관리를 맡겼다. 알렉시아는 바젤의 솜씨 좋은 목제품과 다양한 예술품들을 비밀리에 툴루즈로 들여오고 있었는데, 이것들에 상당한 차액을 붙여 팔아서 생긴 이윤으로 비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이미 벨라루아에게 신뢰가 떨어진 상태여서 그때까지만 해도 알렉시아는 아무 기대 없이 벨라루아를 바젤로 보냈다.

그러나 역시 벨라루아의 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차익을 내며 알렉시아의 비자금을 순식간에 불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벨라루아는 다시 황녀의 곁으로 돌아와 내밀한 측근이 되었지만 알렉시아는 몰래 감시자를 붙여 벨라루아의 모든 것을 면밀히 감시했다.

벨라루아는 가장 능력 있는 측근이기는 하나 믿을 수는 없었다. 언제 자신을 저버릴 배신자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 알렉시아의 생각이었다.

‘안달루스로 돌아가면 벨라루아가 납치해서 재워 둔 그 남자를 좀 알아봐야겠군.’

얼마 전 감시자의 보고에 따르면 벨라루아가 웬 남자를 납치해서 감금하고 있다고 했다. 무언가 있다는 묘한 느낌이 들어 잊지 않고 있었는데 돌아가는 대로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순간적으로,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의 안광이 황녀의 눈에 비쳤다가 사라졌다.

* * *

베르톨트는 쉐도우에게서 알렉시아 황녀와 아델라이드가 만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쉐도우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아델라이드가 황녀에게 한순간도 밀리지 않고 시종일관 당당하게 말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는 자리에 함께 있던 레니에는 아델라이드가 그렇게 결연하게 행동했다는 것에 놀라워하며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베르톨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가득 달려 있었다.

“시녀장.”

문 옆에 서 있던 안나가 베르톨트의 앞에 와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 당장 본궁 정원으로 아델라이드를 데려오게.”

“폐하, 아직 보고가 남았습니다.”

레니에가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베르톨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놓고 가. 내일 아침까지만 답을 주면 되지 않나.”

베르톨트는 벌써 일어나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나가기 전,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레니에를 돌아보았다.

“오스카의 첫째 데이비드 말이야. 정보는 잘 모으고 있겠지?”

“네, 기대에 부응하게도 탈세와 비리 정보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습니다. 오늘 알렉시아 황녀가 아델라이드 님께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 오스카 쪽으로 손을 뻗치려 하겠지요.”

“빙고. 역시!”

레니에의 대답에 만족한다는 듯 베르톨트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고는 사라졌다.

‘정말 황제만 아니면, 정말 소드마스터만 아니면, 한 대 먹이겠구만.’

레니에는 제 맘대로 하기엔 베르톨트가 너무나 잘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 *

프리트홀트와 휴고, 아델라이드, 외교관들은 내일 다시 마라톤협상이 이어질 것을 대비해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미진한 것들을 보충하고, 잘못되거나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느라 모두들 여념이 없었다.

안달루스 사절단의 주장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논리 면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으나 협상을 진행하면 할수록 공감하는 부분들이 생겨났다.

사실 바젤에서 생산되는 목재의 절반 이상은 안달루스 제국에서 사들였고, 그 유통의 길목인 툴루즈는 세르비아 제국에 터무니없는 액수의 관세를 내고 있었다. 목조 건축을 선호함에도 목재 생산량이 적어 건축 자재가 달리는 안달루스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안달루스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무역 구조를 고쳐 보고자 무리하게 바젤의 삼림권을 주장한 것이었다.

협상 테이블에서 안달루스는 바젤의 삼림권을 가져가는 대가로 몇 가지 안을 내놓았고, 이는 세르비아에게 제법 솔깃한 제안이었다. 어느 것을 택해도 세르비아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결국 세르비아 외무부는 신중하게 검토해 보겠다고 하고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얼마 후 황실의 최고 시녀장 안나가 외무관을 방문했다. 폐하께서 스트라우스 영애를 모셔 오라고 했다는 전언과 함께였다.

프리트홀트는 황제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심부름 온 안나에게는 유감이 전혀 없었기에 그녀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나는 예의 그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프리트홀트는 문 밖에 서 있는 안나에게 다가갔다.

“곧 끝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어느 정도면 될까요?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으면 폐하께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20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프리트홀트는 몸을 돌려 들어가려다가 다시 안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지 마시고 제 방에서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네?”

“20분이라고는 하지만 최고 시녀장님을 어찌 서서 기다리게 한단 말입니까? 그건 폐하를 보필하는 분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폐하께도 불경이 됩니다.”

프리트홀트는 어째서 자신이 폐하를 들먹이며 그녀를 설득하는지 몰랐다. 그저 그녀가 계속 서 있는 것이 거슬렸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녀가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안나는 그럼 잠시만 머물겠다며, 프리트홀트를 따라 그의 개인 집무실로 들어갔다. 아담한 그곳은 주인을 닮아 정갈하면서도 섬세했다.

안나를 테이블에 앉도록 이끈 뒤 프리트홀트는 능숙하게 찻잔에 차를 부었다. 따끈한 꽃향기가 올라왔다.

“능숙하시네요.”

“오랫동안 직접 했으니까요.”

안나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폐하를 지근에서 모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벌써 10년이 넘어가지요?”

“네. 하지만 계속 전장에 나가 계셔서 어렵거나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황실의 주인이 없으니 적적하고 쓸쓸해서 힘들었지요. 시종과 시녀들은 모두 폐하가 오셔서 무척 기뻐하고 있어요. 저 역시 부족했던 마음이 꽉 들어차는 기분입니다.”

하긴 프리트홀트도 그러했다. 아무리 자신보다 어린 군주라 해도 군주가 황실에 있는 것과 전장에 나가 있는 것은 안정감이 확연히 달랐다.

중간에서 레니에가 황제의 공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오가며 황제와 대신들의 의견을 조율했다지만, 그래도 매일 얼굴을 맞대고 정사를 함께 돌보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안나의 말에 깊게 공감한 프리트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아델라이드 님까지 오셔서 너무나 기쁩니다.”

“그렇습니까?”

“그럼요. 아시겠지만 폐하께서 얼마나 외로운 분이십니까? 감정 표현도 안 하시는 분이 아델라이드 님만 보면 눈빛부터가 달라지니까요.”

안나는 아델라이드와 함께한 이후로 후작이 황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면 그녀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그녀에게 황제는 아들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아델라이드의 이야기를 꺼냈다.

“약혼 기간이 길어질까 걱정입니다.”

“걱정 마세요. 폐하는 끝까지 영애를 지킬 겁니다. 그리고 절대 영애의 명예에 흠이 가지 않게 하실 거예요. 철두철미하시니까요. 또… 진정으로 사랑하시니까요.”

마지막 말을 할 때 안나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프리트홀트는 그런 안나를 조금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델라이드가 회의가 끝났다고 알렸다.

“그만 가 보겠습니다. 차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시, 시녀장.”

곧장 일어서는 안나를, 프리트홀트가 다급하게 불렀다.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안나와 눈을 마주한 순간 프리트홀트는 자신이 왜 그녀를 불렀는지 잊어버렸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 그게…. 언제 정식으로 차 한잔하시죠.”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평소 안나와 따로 만나 차를 마시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가. 프리트홀트는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의아하게 여기며 되는 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 딸을 살펴 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제가 차 한잔 대접하고 싶습니다.”

안나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항상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평소처럼 돌아왔다.

“알겠습니다. 쉬는 주말에 초대해 주십시오.”

그녀는 공손하게 절하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엉겁결에 일어났던 후작은 그제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자신이 방금 안나에게 한 말을 곰곰이 되씹었다.

* * *

아델라이드가 본궁 정원에 도착했을 때 베르톨트는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꼬고 앉은 그의 자태에서 우아함이 넘쳐흘렀고, 불어오는 미풍에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이마로 흘러내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아델라이드를 본 그가 빙긋이 웃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외무부 회의에서 발언하느라 바로 일어나지 못했어요.”

“괜찮아, 아델. 이리 앉아.”

베르톨트가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맞은편이라고는 하나 테이블이 크지 않아서 그녀가 앉자 서로의 무릎이 닿았다.

“황녀와 만났다고?”

“네….”

“아주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줬더군.”

베르톨트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상체를 숙여 아델라이드의 얼굴에 바짝 얼굴을 갖다 대며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튼 빙 둘러 얘기하진 않았어요.”

“황녀가 놀랐을 거야. 내 약혼자가 이렇게 당찬 줄 몰랐겠지.”

“처음엔 어떻게 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는데 약속 시간에 꽤 늦는 것을 보고는 저만 깍듯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황녀는 어떤 마음일지 모르지만 저는 안달루스 제국의 누구를 만나든 세르비아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나가니까요.”

어떻게 만들어진 단단함일까. 그녀의 생각은 밤하늘의 별보다 반짝이고 의지는 다이아몬드보다 견고하다. 베르톨트는 이 영롱한 여자 때문에 가슴이 벅찼다.

아델라이드의 손을 잡아 손가락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애정과 경외의 표시였다. 그녀의 뺨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대는 매번 나를 감동시켜.”

“감동씩이나요? 이번엔 좀 이기적이었을 뿐이에요.”

“더 이기적이어도 돼. 그대가 원한다면.”

“음, 사실 황녀가 마치 폐하가 자신의 남자라는 듯이 말해서… 그래서 더 못 들어 주겠더라고요.”

아델라이드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황제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그녀가 질투를 하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자신에 대해 소유욕을 보이는 것이 기뻐서, 그는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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