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장. 신부의 들러리
일정을 모두 끝낸 시찰단은 아침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긴 후 여관에서 마련해 준 조찬을 먹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도 요리사의 실력을 칭찬하며, 바젤을 또 방문하면 반드시 다시 오겠다는 인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델라이드와 시간을 보내다 늦은 밤 잠을 청한 황제는 새벽에 일어나 아른프리트와 이미 황궁으로 향한 뒤였다. 황궁까지 마차로는 족히 사흘이 걸릴 거리였지만, 말을 타고 이동하는 두 사람은 하루 뒤 수도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힐다. 정말 잘 먹고 편히 있다가 갑니다. 이렇게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건 주인장 덕분이에요.”
프리트홀트가 시찰단 대표로 힐다에게 인사말을 전했다. 힐다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웃음 지었다.
“다음에 바젤을 찾으실 일이 있으시면 꼭 다시 들러 주세요.”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시찰단을 배웅하는 사람들 속에는 벤자민도 있었다. 아이는 힐다 옆에 꼭 붙어 있었다.
“벤자민, 힐다 아줌마 말 잘 듣고 있어. 편지도 보내고 수도에 오면 반드시 연락하고. 알았지?”
아델라이드가 방긋 웃어 보이자, 벤자민도 마주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보고 있던 휴고가 벤자민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반드시 연락하여라. 힐다 아줌마도 잘 지켜 주고.”
짐짓 어른스럽게 말하는 휴고를 본 아델라이드가 살풋이 웃었다. 자신을 마냥 아이 취급하지 않고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 줬던 휴고를 향해, 벤자민은 단단한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힐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제 일을 했을 뿐인데요, 뭘.”
‘아니요. 이렇게 꿈을 이루어 내 앞에 나타나 줘서요. 나도 열심히 살게요.’
아델라이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그대로 묻은 채 물기 어린 눈으로 힐다를 바라보았다.
힐다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으나 이내 고개를 젓더니 입꼬리를 억지로 올렸다. 아델라이드를 보는 힐다의 눈 역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비서관님, 행복하세요.”
“…네.”
아델라이드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힐다에게 존경, 그리고 감사를 담은 표시였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아델라이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프리트홀트는 그런 아델라이드를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혹, 저 여관 주인장과 예전부터 알던 사이냐?”
창문 밖만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려 프리트홀트를 바라보았다.
“네, 그녀는 절 몰랐지만 저는 그녀를 알고 있었어요. 그때도 전쟁이 끝나면 여관을 하나 차릴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여관 이름이… ‘꿈속의 그대’였어요. 마음먹었던 그대로 이룬 거예요.”
기분이 이상했다. 힐다를 사랑한 것은 아닌데도,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프리트홀트는 딸을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이상하죠? 사랑이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사람 사이에는 비슷한 무게를 지닌 감정들이 참 많단다. 사랑도 있고, 연민도 있고, 동정도 있지. 더군다나 그녀는 네게 말한 것을 훌륭히 지킨 것이니 얼마나 대견하냐. 그러니 네 마음이 더 복잡한 거겠지.”
아델라이드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아버지의 품 안에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마음껏 울어도 된다. 애비 앞에서는.”
프리트홀트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 * *
루이사와 아른프리트의 결혼식 하루 전. 말괄량이 루이사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도 사람들의 기대를 자아냈지만 가장 큰 관심거리는 그녀의 들러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와 재상이 들러리로 서게 된 것이다.
잘나기로 제국에서 손꼽히는 남자가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그녀의 들러리로 선다는 소식이 퍼지자, 나라 전체가 술렁거렸다. 특히 귀족 영애들은 반드시 그 결혼식에 참석할 것이라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런 분위기를 상상도 못 한 채 레니에와 베르톨트는 울며 겨자 먹기로 들러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혼식 당일.
사람들의 시선은 연단 앞의 두 남자에게 쏟아졌다. 아른프리트 측에 서 있는 신랑 들러리들은 흰 드레스셔츠에 감청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고, 루이사 측에 서 있는 두 남자는 금색 자수가 놓인 흰색 턱시도를 입고 있었다.
레니에의 은발과 흰색 턱시도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 세상의 모든 빛을 다 끌어온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거리는 그는 마치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베르톨트는 레니에와 상반된 매력을 보여 주고 있었는데, 선 굵은 그의 이목구비와 착 달라붙은 턱시도 아래 탄탄한 몸매가 묘하게 섹시한 퇴폐미를 풍겼다.
식장에 자리한 여자들의 시선은 둘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저마다 머릿속으로 자신들의 취향껏 두 남자를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도대체 식은 언제 끝나는 거야?”
베르톨트는 짜증을 짓씹으며 짙은 눈썹을 씰룩였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인 레니에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내가 왜 지금 이 순간… 너랑 똑같은 옷을 입고… 너와 똑같은 자세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
“제가 할 소리입니다, 폐하.”
두 사람이 서로 한탄하며 작게 대화하고 있을 때 식이 시작된다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신부 측 좌석 앞쪽 빈자리에, 때마침 들어온 프리트홀트와 아델라이드가 착석했다. 베르톨트는 아델라이드를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였다.
‘어디서든 눈에 띄는군.’
그가 피식하며 웃음을 흘리자 레니에가 입매를 비틀며 비아냥거렸다.
“그렇게 좋으십니까?”
베르톨트가 곁눈으로 레니에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곧 은근하게 물어 왔다.
“부러우냐? 부러우면 지는 거다.”
이번에는 레니에가 그를 흘기며 낮게 뇌까렸다.
“부럽지 않습니다. 그냥 바보 같아 보여서요.”
베르톨트의 주먹에 슬며시 힘이 들어간 순간, 하객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신랑 아른프리트가 입장했다.
융단이 깔린 길을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신랑은 며칠 동안 제대로 관리를 받아서인지 평소보다 훨씬 잘생겨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연습의 결과로 입에는 억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곧이어 하객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따갑게 쏟아졌다. 신부가 등장할 차례였다.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루이사는 오늘따라 순백의 여신과 같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루이사의 웨딩드레스는 그녀의 볼륨감 있는 몸매를 한껏 강조해 주는 머메이드라인의 디자인이었다. 목선을 드러내기 위해 목걸이를 하지 않은 대신 커다란 귀걸이를 하였고, 과감한 디자인을 은근하게 연출하기 위해 베일을 앞에서부터 뒤집어써 등 뒤로 길게 늘어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부가 오늘은 좀 봐 줄 만하네요.”
레니에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했다. 베르톨트도 희미하게 미소를 보였다.
“그러게. 괜찮군.”
루이사는 결혼식에서도 특유의 활발한 성미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활짝 웃으며 아른프리트에게 향하는 그녀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가는 중간중간 주위를 둘러보며 장난스럽게 눈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식이 진행되는 동안,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자신들이 루이사의 들러리로 서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이사는 둘에게 누이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 귀족가의 여식으로서 집안에서 교양 수업을 받아야 할 때, 루이사는 레니에와 함께 베르톨트를 찾았었다.
황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내야 했던 베르톨트는 두 사람과 목검으로 장난을 치며 뛰어 노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행동이 먼저 앞서고 덤벙대기는 했지만 루이사는 외로운 베르톨트를 위해 부모님의 꾸지람을 감수하고 황궁을 드나드는, 그런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속 깊은 정을 알기에 두 남자는 루이사를 진심으로 챙겼다. 그들보다 루이사가 서너 살 더 나이가 많았지만 마치 동생을 보살피듯 루이사를 대하곤 했다. 성인이 된 루이사가 좋은 혼처를 다 떠나보내고 기사 훈련에만 매진했을 때도 두 사람은 퍽 걱정했었다.
그러다 그들은 루이사의 마음이 아른프리트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른프리트가 좋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루이사와 나이 차이도 나고 아내와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펄쩍 뛰며 루이사를 말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루이사가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루이사가 다른 이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이사가 근 7년간이나 아른프리트를 마음에 두자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그 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르톨트는 루이사를 아른프리트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전장에서 두 남녀가 매일 얼굴을 맞대면 없던 마음도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 어느 순간부터 아른프리트는 루이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참으로 지난한 시간을 보냈어. 앞으로 잘 살겠지?”
루이사와의 추억을 회상하던 베르톨트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잘 살 겁니다. 벌써부터 아른프리트 경은 공처가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래야지. 아른프리트 경은 루이사를 업고 다녀도 모자라.”
도통 루이사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던 베르톨트였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동안 담겨 있던 말을 밖으로 꺼내었다. 평소 같으면 무슨 일 때문에 칭찬하느냐고 놀려 댔겠지만 레니에도 지금은 같은 마음이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는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요? 자식까지 있는 나도 설레네요.”
“그러게요. 옆에 서 있는 레니에 각하는 또 얼마나 아름다워요. 시커먼 아들 녀석들 말고 딸을 낳았어야 했는데. 사위 삼으면 딱 좋겠네요.”
“저분들은 어떤 분을 만나시게 될까요?”
“너무 눈이 높아서 아무나 안 만나는 걸까요?”
“레니에 각하는 그래도 꽤 어울리시는 것 같던데 폐하는 전혀 모르겠어요.”
프리트홀트와 아델라이드의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근처 사람들도 흥미롭게 듣고 있는 것인지 조용히 해 달라고 채근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 왜 있잖아요. 전에 대연회 때 폐하랑 같이 춤 췄던.”
“아! 스트라우스가의 영애요?”
화제가 아델라이드로 옮겨 가자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손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프리트홀트가 아델라이드의 손을 잡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두 명의 부인들을 돌아다보았다.
그제야 앞에 스트라우스 후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부인들은 크게 당황하며 눈을 깜빡였다.
“후, 후작님.”
“식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작이 부드럽게 웃으며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부인들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민망하기도 민망했지만 경고를 주는 후작의 모습이 참으로 신사다워 또 다른 의미로 얼굴이 붉어졌다.
“후작님은 우리 집 남자랑은 정말 다르시네요.”
“그러게요.”
자기들끼리 소리를 최대한 죽여 말한다고 하는 것이 이번에도 프리트홀트와 아델라이드의 귀에 들렸다. 아델라이드는 프리트홀트를 곁눈으로 슬쩍 보고는 살포시 웃음을 터뜨렸고 프리트홀트도 멋쩍은 듯 미소 지었다.
문득 프리트홀트는 시선을 신부 쪽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신부 도우미로 나선 시녀장 안나와 눈이 마주쳤다.
도우미는 원래 신부와 성별이 같고 친한 친구가 맡아야 하지만 루이사는 친한 여자 친구가 없었다. 그 문제로 고민하는 루이사를 위해 베르톨트가 시녀장 안나에게 적당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안나는 그냥 자신이 도와주겠다며 도우미를 자청했고, 그래서 오늘 신부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는 등의 도움을 주고 있었다.
평소 우아하고 조용한 안나는 예의 그 기품 어린 태도로 루이사 근처에 서 있었다. 안나와 눈이 마주친 프리트홀트가 고개를 까닥하며 인사를 건네자 안나의 얼굴에 홍조가 살짝 올랐다. 그녀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식이 진행되는 도중 베르톨트는 몇 번이나 아델라이드를 돌아보았다. 가벼운 미소를 띤 채 신랑과 신부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간질였다.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그 집요한 눈길을 눈치챘는지 아델라이드가 베르톨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처럼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베르톨트는 자신의 심장에 퍼지는 감미로운 전율을 느꼈다.
식이 끝난 후 루이사는 곧바로 아른프리트와 신혼여행을 떠났고, 식에 참석했던 귀족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귀가하자마자 그들은 황제가 보낸 서신을 한 통씩 받았다. 내용은 일주일 후 황제의 약혼식을 거행한다는 것이었다. 식은 조촐하고 간략하게 치를 예정이니 참석치 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약혼식 전에는 황제의 약혼 상대를 밝히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서신을 받은 다음 날 많은 귀족들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줄을 섰다.
* * *
재상 레니에를 중심으로 행정부, 재무부, 사법부, 외무부의 대신들이 모두 모였다.
약혼 발표 이후 대신들의 알현 요청이 쇄도했지만 베르톨트는 모두 거절했다. 그러다가 사흘이 지난 오늘에서야 각 부처의 대신들을 한꺼번에 소집하였다.
황제를 만나야겠다고 목소리를 드높였던 오스카와 콘라드, 다니엘은 정작 황제를 보자 서로 눈치만 봤다. 황제가 대신들을 훑어보고는 헛웃음을 날렸다.
“그렇게나 나를 보고자 하셨는데 왜 이리 조용한 것인가?”
여느 때보다 차분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황제의 이런 목소리는 자칫하다가는 미운털이 단단히 박힐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폐하. 갑작스럽게 약혼을 발표하셔서 매우 놀랐습니다.”
대신들 중에서 행정부의 수장 오스카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모인 이들 중 최고 연장자이자 황제를 반대하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일로 놀라긴. 시커먼 사내놈들만 득실거리는 전장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이젠 여인이 그리워. 그러니 내가 약혼한다고 해서 너무 소란 떨지 말게.”
황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여인의 살 냄새가 그리워 체면상 약혼이라도 하고 여자를 안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오스카는 황제가 그리 단순한 이유로 약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저 잘생긴 낯짝에 순간 냉소가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약혼자는 어느 가문의 영애입니까?”
“미리 알 것 없네. 황궁에 들어오면 그때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야.”
황제의 무심한 대답에 오스카는 마음이 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거였으면 이렇게 모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폐하. 황후 자리를 계속 비워 놓아서야 되겠습니까. 약혼은 그대로 진행하시되, 제국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명망 있는 가문의 영애를 황후로 들이셔야 할 것입니다.”
역시 녹록지 않은 오스카였다. 이마에 잡힌 주름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닌 듯 관록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처럼, 이번 약혼은 황제의 뜻대로 하게 하지만 중요한 황후 자리는 그렇게 하게 놔두지 않겠다는 속셈이었다. 베르톨트의 진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국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경,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갑자기 황제의 목소리가 엄중해졌다.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예, 폐하. 많은 대신들이 폐하의 국혼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오스카의 옆에 있던 재무부의 수장 콘라드가 오스카를 돕는다고 말을 이었다. 그는 대신들 가운데 좀 눈치가 없기로 유명하였다. 황제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빈말이라도 고맙군. 지금 이 평화가 왜 지속되는지 아는가? 내가 혼인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나, 재상?”
황제는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니에를 보며 물었다. 레니에는 나직이 한숨을 쉬더니 대신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폐하께서 어느 한 가문에 혼담을 넣는 순간, 그 가문은 어마어마한 권력을 등에 업게 됩니다. 지금과 같은 힘의 균형이 깨질 수가 있지요. 폐하는 그것을 염려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계속 황후 자리를 비워 놓겠다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 서두르지는 말자고. 다만 그동안 혼자 있을 나를 위해 약혼에는 너무 간섭들 하지 말고.”
단호한 황제의 말이 대신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황제를 이길 수 없다.
결국 대신들은 약혼 문제에는 한발 물러서야겠다고 결론 내린 후 자리를 파했다. 회의장을 나서면서 수군거리는 대신들 사이에서 프리트홀트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황제의 약혼자가 자신의 여식이라는 말은 더더욱.
대신들이 물러가자, 레니에는 베르톨트를 노려보았다.
“그나저나 아무리 조촐한 약혼식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일주일 안에 준비를 마칩니까?”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마. 그저 조촐하게 우리끼리 식사 한번 하면 돼.”
레니에는 기가 찼다. 그의 눈에 분노가 어렸다.
“식사요? 좋습니다. 식사는 그렇다고 치고, 경매에서 그 비싼 다이아몬드는 왜 구입하셨습니까? 그리고 멀쩡한 방은 왜 새롭게 단장하고 계시고요? 본궁 정원 보수 공사는 왜 하십니까?”
“귀신같은 놈. 경매에서 다이아몬드 낙찰받은 건 또 어떻게 알았지?”
“정말 참으로 조촐하십니다.”
레니에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약혼 여행도 가고 싶은데 지금은 도저히 시간을 만들 수 없어서 포기했어.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황후로 책봉하고 옆자리에 앉히고 싶지만 꾹 참고 있는 거야. 그러니 좀 모른 체해.”
날카롭게 받아칠 줄 알았던 베르톨트가 의외로 순순하게 답했다. 레니에는 도무지 그의 속을 알 수 없었다.
“뭡니까, 갑자기 이 태도는.”
레니에도 한발 물러선 어조로 말했다. 베르톨트는 친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보고 있기도 아까워. 뭐라도 해 주고 싶어.”
말이 끝나자마자 레니에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세상 사랑 혼자 다 하는 것 같은 저 모습이 애틋해 보이기는커녕 자신 앞에서 괜히 위세를 떠는 것처럼 보였다. 의도한 게 아니라면 정말 저것도 재주다 싶었다.
‘아주 애처가 나셨구만. 눈꼴사나워서,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