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4장. 행방불명된 남자 (25/39)

제24장. 행방불명된 남자

내일모레면 바젤에서의 일정도 끝이 난다.

그동안 외교관들은 낮이고 저녁이고 업무에 바빴다. 각자 자료를 조사하고 증거를 수집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저녁 식사 후 매일 프리트홀트의 방에 모여 머리를 맞댔다. 그러다 보면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가곤 했다.

“프리트홀트 외무대신님, 북쪽에 규모가 작은 목재소가 몇 군데 있습니다. 아직 못 가 본 곳인데, 돌아가기 전에 들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외진 곳에서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니까요.”

한 외교관이 의견을 제시하자 프리트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네. 한데 난 내일 휴고 비서관과 함께 바젤의 모든 목재소 주인들을 만나야 하네. 한자리에 모여 협의체를 만들고 공정 경쟁을 위한 합의안을 발표할 걸세. 다른 사람들은 일정이 어떻게 되는가? 북쪽 목재소에는 누가 가지?”

프리트홀트가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갑작스런 물음에 다들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중 내일 프리트홀트와 일정을 함께하지 않는 한 외교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둘은 난민촌에서 위생, 보건 교육을 실시합니다. 그것이 끝나면 신생아가 있는 가정을 방문해서 비상 약품들과 필수품들을 전달할 것입니다. 아마 한밤중은 되어야 끝이 날 것 같습니다.”

지켜보고 있던 아델라이드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 북쪽 목재소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군요. 내일은 종일 시찰단의 자료들을 정리하려고 했는데, 할 수 없죠. 제가 목재소에 다녀올게요.”

“아델라이드, 그쪽은 온통 산이야. 너 혼자 가기엔 위험해.”

프리트홀트가 인상을 찌푸렸고 휴고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제가 가고 싶지만 합의안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괜찮아요, 휴고 비서관님. 대신 클리터스 호위 대장님과 함께 다녀올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그제야 프리트홀트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펴졌다. 클리터스는 실력이나 성품, 어느 모로 보나 아델라이드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휴고가 아델라이드를 불러 세웠다.

“아델라이드 비서관님, 내일 가실 목재소 말입니다. 실은 그중 한군데에 에드가 님이 머무르셨습니다. 산 아래 목재소 주인장 몇몇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재소의 주인장은 미성년자 고용 금지 협약에 동의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이래저래 반드시 현장을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면 일부만 살펴보고 오십시오. 나머지는 떠나는 날 이른 새벽에 제가 가서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시찰단이 떠나는 시간을 좀 늦추면 되니까요.”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꼼꼼하게 보고 올게요. 또… 에드가가 머물렀다고 한다면 제가 직접 확인해야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델라이드의 청회색 눈동자가 단호하게 빛났다. 휴고는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돌아갔다.

* * *

바젤로 돌아가는 날을 하루 앞두고, 이른 아침부터 시찰단 일행은 분주했다. 모든 일정을 오늘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가 뜰 무렵 모두들 각자 일을 수행할 장소로 떠나갔다. 아델라이드가 갈 북쪽 목재소는 산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그녀는 산행을 준비해야 했다.

클리터스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활동하기 편한 승마 바지와 굽 낮은 부츠, 드레스셔츠 위에 긴 베스트 등 산에 오르기 딱 좋은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앞에 두고 그저 눈만 껌뻑였다. 계속 그가 말이 없자 아델라이드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제 모습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그녀의 물음에 퍼뜩 정신이 든 클리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저 의외여서요.”

아델라이드가 순간 에드가로 보였다. 그만큼 그녀의 옷차림이 에드가와 비슷했다. 그 녀석 역시 바지며 드레스셔츠며 베스트를 입고 다닌 기억이 났다. 물론 에드가보다는 그녀의 옷이 훨씬 화려하고 고급스러웠지만.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의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여관 문으로 향했다. 그러다 홀에서 나오던 힐다와 마주쳤다.

순간 심하게 흔들리는 힐다의 동공을 보고는 아차 싶었다. 자신의 차림새가 에드가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눈치챘던 것이다.

아델라이드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급히 고개를 숙여 힐다에게 인사하고 여관을 재빨리 나섰다. 그 뒤를 클리터스가 따라오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뒤따르던 클리터스는 마구간에 가서야 입을 열었다.

“말을 못 타십니까?”

언뜻 듣기에는 별거 아닌 질문이었다. 그러나 에드가로 행세했던 자신의 모습을 알고 있는 클리터스가 한 질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델라이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전장에서도 자신은 말을 못 타 클리터스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그가 그걸 염두에 두고 질문한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네, 못 탑니다.”

“어째서…. 어째서, 귀족 영애께서 말을 못 타십니까?”

클리터스의 무뚝뚝한 말투 때문에 마치 그녀를 타박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아델라이드는 질문의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클리터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의심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무례하시군요. 모든 귀족 영애가 말을 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차가운 대답 속엔 선을 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당황한 나머지 클리터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영애, 아니, 비서관님.”

자신의 한마디에 쩔쩔매는 클리터스를 보고 그에게 너무 차가웠나 싶어 미안해지기도 했지만, 입술을 앙다물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때마침 마부가 마차를 이끌고 나왔다.

“그럼, 출발하시죠.”

아델라이드의 메마른 눈빛이 클리터스를 향했다.

클리터스는 말을 몰았고 아델라이드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그녀는 마차 안에서 어젯밤 휴고가 한 말을 곱씹었다.

자신과 에드가는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책을 읽고 머리를 굴리는 것을 선호했다. 그렇기에 에드가가 목재소에서 육체노동을 했다는 것도 이상했고 무예 실력이 없는 그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바젤에서 빠져나갔다는 것이 기이했다.

- 정말 이상하군. 마법을 쓰지 않고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을까?

- 마법이요?

- 그래, 혹시 알아? 너에게 나를 준 건 에드가야. 그가 다른 마력 도구를 갖고 있을지도 모르지.

- 하아. 차라리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제가 아는 한 그는 마법에 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고 그런 도구도 몰랐어요. 그리고… 만약 무언가가 있었다면 수에비 국왕에게 잡혔을 때 이미 사용했겠죠.

- 음, 그렇긴 하군. 일단은 에드가가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그 목재소에 가 보자구. 뭔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런저런 조각을 맞춰 봐도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아델라이드와 머레인은 현장을 본 다음에 이어 나가기로 하고, 일단 생각을 멈추었다.

북쪽에 도착한 클리터스와 아델라이드는 산을 올랐다. 생각보다 경사가 가파르고 수목이 우거져 있어 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랜 기간 체력을 단련해 온 클리터스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척척 올라갔지만 아델라이드는 그러지 못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숨이 흐트러지고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문득 뒤를 돌아본 클리터스가 아델라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십시오. 산세가 녹록지 않습니다.”

그 손을 빤히 바라보던 아델라이드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그가 내민 손을 잡는 대신 땀이 맺힌 이마를 손으로 한 번 쓱 닦아 냈다.

“우습네요.”

“뭐가… 말입니까?”

“출발할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전 경께 짐만 되고 있어요.”

“아닙니다. 짐이라니요?”

“그렇다면 그 손, 거두어 주세요. 많이 힘들어지면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클리터스가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거절당했다고 해서 민망하지는 않았다. 단지 서운할 뿐이었다.

힐끗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가 가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뒤를 부지런히 뒤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손을 뻗은 것이지, 어떠한 의도도 의미도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고 내치는 그녀의 말이 퉁 하고 가슴을 때렸다. 때리고 간 자리가 텅 비어 버린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만 계십시오.”

그는 주위를 둘러본 후 땅에 엉켜 있는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헤쳤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단도를 꺼내, 나뭇가지 중 제법 굵고 긴 놈을 골라 잔가지와 표면을 쓱쓱 긁어냈다.

“이걸 쓰십시오. 그냥 걷는 것보다는 뭐라도 짚고 오르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겁니다.”

아델라이드가 지팡이를 받아 들고는 땅을 몇 번 두드렸다.

“좋네요.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깍듯한 행동에 클리터스의 눈빛이 살짝 흐려졌다.

두 사람이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어느덧 두 시간여가 흘렀다. 산 중턱에 올랐을 때부터 군데군데 목재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곳에 기껏해야 스무 명 안팎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소규모 목재소였다. 목재소 하나당 건물이 한 채뿐이어서 둘러보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세 개의 목재소를 살펴보고 조금 더 올라가니 휴고가 말했던 그 목재소가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서 일하고 있던 서너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그들은 나무를 판재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판재를 재단해 가구를 만들고 있었다. 즉, 이곳은 목재소가 아니라 목공소라고 부를 법한 곳이었다.

- 하아. 왜 에드가가 이곳에 머물렀는지 알겠네요.

- 왜?

- 에드가는 나무를 원 상태에서 판재 형태로 만드는 목재소 일보다는, 원하는 형태로 만드는 목공소 일이 맞았을 거예요. 몸 쓰는 건 좋아하지 않았지만 손재주는 제법 있었거든요.

사실 이렇게 깊은 산속에 목공소가 있다는 것이 의외이긴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왜 에드가가 이곳에 머물렀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때 한 남자가 클리터스와 아델라이드가 서 있는 입구로 걸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흰 황실에서 나온 외무부 시찰단입니다. 바젤의 목재소 현황을 파악하고 있어요.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 나선 클리터스가 품에서 명패를 꺼내 남자에게 보여 주었다. 황실 마크가 새겨져 있는 외무부 시찰단의 명패였다.

남자는 그것을 꽤 유심히 보더니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협조하겠다고 했다. 아델라이드가 먼저 물었다.

“다른 목재소와 달리 이곳은 목공소네요.”

“네, 다른 목재소에서 만든 판재를 바로 공급받아 이렇게 가구나 장식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저희는 모두 전문 목수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목공소가 이렇게 산중에 있는 거죠? 좋은 판재야 마을이나 도심에서도 공급받을 수 있을 텐데요.”

나무를 베어서 옮기기가 어려우므로 목재소가 산중에 있는 것은 이해되지만, 원목을 세심하게 다듬는 목공소나 가구 공방은 소비자와 가까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공소는 마을 중심이나 도심에 있었다. 이렇게 산중에 위치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질문을 받은 남자가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델라이드는 자신들의 방문 목적을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저희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은 시찰단입니다. 저희 조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남자가 단호한 기색의 아델라이드를 빤히 바라보더니,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잠시 밖으로 나가실까요?”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는 말하기 곤란했던지 그는 두 사람을 데리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목공소에서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테이블과 의자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벽면 한쪽엔 수도와 기다란 식탁이 있었다.

그 식탁 위로는 각종 다기와 찻잎을 보관하는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아마 목수들의 쉼터인 듯싶었다.

남자는 의자를 내어 주며 앉으라고 했다. 두 사람이 착석하자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모든 가구는 중간 유통을 거치지 않고 바로 안달루스로 들어갑니다.”

안달루스라는 말에 클리터스와 아델라이드의 눈이 절로 커졌다.

“그건 불법이잖아요.”

“네. 불법이죠. 하지만 어떻게, 왜 저희가 만든 작품들이 그렇게 흘러가는지 모릅니다. 모든 건 안달루스 사람 한 명이 중개합니다. 그가 일주일에 한 번씩 들러 가구들을 수거해 가죠.”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가구들은 무게나 부피가 만만치 않아서 혼자 수거하기 쉽지 않을 텐데요. 더군다나 이런 산중에서요.”

“그게… 마법을 쓰는 것 같아요.”

“마법이라뇨? 마법사가 있다는 겁니까?”

아델라이드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덩달아 놀란 클리터스가 한 손으로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꽈악 쥐었다.

“이 목공소에서 살지는 않습니다. 저희 목수들은 벌써 일 년째 이곳에 기거하고 있지만 그 마법사하고 호위 기사처럼 보이는 안달루스인들은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에 한 번씩 오곤 했어요. 그런데 그 마녀가 마지막으로 왔다 간 지 벌써 십여 일이 지났습니다.”

“마녀…!”

아델라이드는 마녀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가뜩이나 마법사의 수가 적은 상황, 안달루스와 연관된 ‘마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한 명이었다.

벨라루아.

아델라이드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벨라루아,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왜? 질문과 추측이 한데 섞여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긴 경비를 서는 사람도 주인장도 없는데, 혹시 마법으로 감시를 하는 겁니까?”

클리터스는 아까부터 신기하게 여겼던 것을 질문했다. 이 목공소에는 감시하거나 관리하는 자가 없는 것 같은데 목수들이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실은….”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흰 그 어떤 목수들보다 많은 보수를 받고 있습니다. 다들 자발적으로 안달루스를 위해 일하는 셈이죠. 그러니 감시도 필요 없었습니다. 또 여기서 숙식이 가능하니 산 아래로 내려갈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요.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안달루스 사람들이 좀 이상해졌습니다. 저희에게 전혀 관여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가구를 더 만들어 내라는 둥, 질이 떨어졌다는 둥, 이렇게 하면 보수를 안 주겠다는 둥 이런저런 트집을 잡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저희 목공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일을 배우던 청년을 데려가기도 했습니다. 아주 성실하고 성품이 좋은 청년이었는데….”

- 청년이라니? 청년?

머레인이 반짝였다. 아델라이드의 머릿속은 잠시 암전되었다. 빙글빙글 돌고 있던 세상이 갑자기 칠흑처럼 어두워지더니 발아래가 한없이 꺼져 가고 있었다.

- 아델라이드! 정신 차려! 아델라이드!

아델라이드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가 미친 듯이 반짝였다. 클리터스는 하얗게 질린 아델라이드의 얼굴을 곁눈으로 흘끔거리더니 그녀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놓았다. 그 바람에 그녀는 아득해지던 정신을 겨우 붙들었다.

“그 청년… 은발인가요?”

남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은발이에요.”

아델라이드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묻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배어났다.

“이름은 에…드가고요?”

남자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델라이드는 얼굴을 숙였다.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어금니를 꽈악 깨물었다. 바지 자락을 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변해 갔다.

남자는 조금 더 말을 하고는 다시 목공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원래 이곳에는 십여 명의 목수가 일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세 명만 일한다고 했다. 안달루스 인들이 작업에 트집을 잡으며 그들을 채근하기 시작하자 목수들의 마음이 떠나간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이곳을 뜬 결정적인 계기는 에드가가 사라져서였다.

납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녀가 에드가를 강제로 데리고 사라지자, 보수가 아무리 많아도 이런 곳에서는 일할 수 없다며 다들 떠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은 단 세 명뿐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남자가 나가고 나서도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니, 일어설 수가 없다는 것이 더 맞았다. 클리터스는 그런 그녀의 곁을 가만히 지켜 주었다.

그녀는 남자의 이야기를 곰곰이 정리해 봤다.

에드가는 이 목공소에서 목수들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지만 이십 일 전쯤 벨라루아가 그를 납치했다 그러나 벨라루아가 왜 에드가를 데리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그 마녀가, 에드가가 네 오라비인 것을 알고 있을까?

- 그럴지도 몰라요. 에드가가 발루아 가문임을 알게 되었다면 그가 제 오라버니인 것을 눈치챘겠죠.

- 그런데 왜 데려갔을까?

- 후우. 벨라루아는 그 알렉시아 황녀의 사람이에요. 제가 납치당했을 때도 그 황녀가 저를 잡아오라고 했었으니…. 에드가는 저를 잡기 위한 미끼인 셈이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무작정 안달루스로 간다고 해서 벨라루아를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녀가 에드가를 데리고 간 것을 확신하면서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알렉시아 황녀를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독을 이용해서 한 제국의 황제를 해치려 했으니 간악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사람에게 에드가를 데려갔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신의 예상이 터무니없는 상상에 그치길 바랐다. 그녀의 절박한 마음을 달래 주듯 머레인이 반짝였다.

- 일단은 내려가자.

- 벨라루아가 다시 오진 않을까요?

- 안 올 거야. 아까 그 남자는 목수들이 자발적으로 이곳에 있었다지만 여기엔 마법진으로 결계를 쳐 놓았던 흔적이 있어. 혹시 있을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서지. 그런데 그 결계가 모두 사라졌어. 그건 그들이 철수했다는 뜻이야. 다시 오진 않을 거야.

- 그럼 에드가를 어떻게 찾죠…?

- 에드가가 그 마녀와 함께 있든 황녀와 함께 있든, 너를 낚기 위한 미끼라면 그들이 곧 네게 연락을 해 오겠지.

머레인은 꽤 타당성 있는 결론을 내렸고 아델라이드도 수긍했다.

이 일을 꾸민 것이 알렉시아 황녀라면 최종 목표는 세르비아의 황제, 베르톨트일 것이다. 그를 가지기 위해 아델라이드를 제거해야 한다면 에드가만큼 좋은 미끼는 없을 것이니, 자신을 없애기 전까지는 에드가를 어쩌지 않을 것이리라.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그나마 안심이 됐다. 온몸을 팽팽하게 당겼던 긴장감이 조금 느슨해졌다.

“아델라이드 비서관님, 이제 내려가야 합니다. 조금 더 지체하면 날이 어두워질 겁니다.”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클리터스가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이제 그만 내려가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던 찰나, 아델라이드가 휘청했다.

급히 커다란 손이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붙잡은 사람이 클리터스라는 것을 알고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클리터스가 퍼뜩 손을 떼고 몸을 뒤로 물렸다. 아델라이드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 * *

산에서는 해가 일찍 진다. 시간이 그리 늦지 않았는데도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빨리 내려가야 했다. 아델라이드와 클리터스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조심하십시오. 산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더 위험합니다.”

앞서가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아델라이드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자꾸만 발이 미끄러졌다.

아까 전 목공소에서 너무 놀라고 긴장해서 그런지 손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팡이가 있어서 그나마 더듬더듬 걷는 것이지, 그것마저 없었으면 꼼짝도 못 할 뻔했다. 그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간혹 클리터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아델라이드를 돌아보았다. 주저주저하는 모양새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입술만 달싹거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결국 말을 뱉었다.

“제가 안고 내려갈 수 있습니다. 사실 그게 더 빠르지요.”

“괜찮습니다. 조금 더디더라도 그냥 내려가요.”

“조금이… 아닙니다.”

그가 망설이며 한 말에 아델라이드는 민망해졌다. 자신의 굼뜬 행동 때문에 의도치 않게 폐를 끼치고 있었다. 이런 것은 정말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안겨서 내려갈 순 없었다.

“도움을 주신다면 빨리 내려가긴 하겠지만 혹 누가 본다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제가 조금 더 분발하겠습니다.”

클리터스의 입술이 한일자로 굳어졌다. 허락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씁쓸한 건 아델라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기에 고마웠지만, 그의 호의를 덥석 받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 발을 내디뎠다.

그때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탈진 곳에서 아델라이드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손 쓸 새도 없이 그녀는 2미터가량 미끄러져 클리터스의 바로 옆까지 내려왔다. 그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다급하게 꿇고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비서관님!”

아델라이드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엉덩방아를 찧은 것도 한심하고, 안고 내려가겠다던 그의 말을 거절하자마자 이리 미끄러진 것도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얼굴이 있는 대로 발갛게 물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델라이드는 몸에 힘이 쭉 빠졌지만, 입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저 우습죠? 경의 말을 거절하자마자 이렇게 넘어지는 꼴이라니.”

클리터스는 그녀의 자조적인 웃음에 마음이 무거웠다.

목공소에 있을 때부터 자꾸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그녀였다. 그녀를 직접적으로 도와주지는 못해도 자신이 여기에 있으니 마음 편히 가지라고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그녀는 거부했었다.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무겁게 입을 뗀 그는 아델라이드의 발목을 살폈다. 살짝 부어오른 발목을 돌리니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 나왔다. 꼬챙이가 발목을 꿰뚫는 듯한 아픔에 반사적으로 나온 소리였다.

흘끔 쳐다본 그녀의 얼굴에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지만 그와 시선이 부딪치자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클리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뼈에는 지장 없지만 근육이 놀란 것 같습니다. 이대로는 내려갈 수 없으니 정말로 업히셔야 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한사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벌써 사방이 어두워져 앞의 나무들이 구분되지 않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기온까지 뚝 떨어지면 낙오된 채 불상사를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아델라이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클리터스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돌려 그녀의 눈앞에 널찍한 등을 보였다. 그녀가 낑낑대며 상체를 일으켜 그의 등에 업혔다.

클리터스에게 업힌 아델라이드는 손을 어쩌지 못해 그의 등을 살짝 잡았다. 그 상태에서 몸을 덜 닿게 하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니 그가 걸을 때마다 그녀의 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클리터스가 그녀를 한 번 단단히 추켜 업은 후 말했다.

“제 등에 바짝 붙으세요. 그리고 목에 팔을 두르십시오.”

아델라이드는 머뭇머뭇했지만 결국 그의 말대로 했다. 그에게 꼭 붙어 팔로 그의 목을 감쌌다. 그래야 업은 그도 편하고 자신도 편할 것이어서 복잡한 생각들은 잠시 머릿속에서 치워 두기로 했다.

클리터스의 등에 업혀서 내려오는 내내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한 번 더 자신의 정체를 물을 법도 한데 그는 의외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산 아래로 완전히 내려오자 멀리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두 인영이 보였다. 한 사람은 황실 기사단장인 아른프리트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황제였다.

클리터스의 등에 업힌 아델라이드를 보자 황제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가씨로군.”

말에서 내린 베르톨트가 두 사람 앞에 우뚝 섰다.

“이제 그만 비서관님을 내려놓으시게.”

일부러 비서관님이라며 높여 말하는 것이 왠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아델라이드가 클리터스의 등을 밀며 내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으나 클리터스는 그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클리터스 부니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비서관님이 내려오시던 길에 발목을 삐끗하셨습니다. 혼자 걸으시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는 아델라이드가 버둥거려도 꿈쩍 않고 말을 이었다.

“아델라이드 비서관은 내 약혼자가 될 테니 자네가 업고 있는 것은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네.”

클리터스와 아델라이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떨결에 클리터스가 아델라이드를 바닥에 내려놓자 베르톨트가 성큼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폐하!”

“숙소까지는 나와 함께 가지.”

떠나기 전, 황제는 클리터스를 힐끗 보고 한마디 했다.

“고생했네, 클리터스 경.”

황제에게 예를 취한 클리터스는 카를로스에 오르는 아델라이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황제와 아델라이드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친밀해 보였다.

아델라이드가 프리트홀트 후작의 양녀가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인데 어째서 두 사람이 오래된 연인처럼 보이는 것인가. 두 사람 모두 성격이 활발한 편이 아니라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런 이들이 언제 저런 사이가 됐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클리터스는 아델라이드를 앞에 태우고 말을 모는 황제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 * *

“어떻게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일은 어쩌시고요? 약혼 얘기는 뭔가요?”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와 둘만 있게 되자 참고 있던 질문을 쏟아 냈다. 두 사람 뒤로 멀찍이 아른프리트가 말을 몰고 있었다.

황제가 소리 내어 웃자 그 진동이 등을 통해 전해졌다. 이렇게 그가 자신을 뒤에서 안으면 그의 목소리의 울림이 고스란히 느껴져 아델라이드는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하나씩 해, 아델.”

“그럼, 우선 어떻게 바젤에 오신 거예요?”

“그대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서. 그제 밤에 결국 참지 못하고 이곳으로 말을 몰았지.”

“정무는 어쩌시고요? 폐하가 말씀하신 대로 클리터스 경이 계셔서 안전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고 내일이면 돌아간다고요.”

“남은 일은 레니에에게 주고 왔어. 우리 천재 재상이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잖아. 조금 더 굴리면 돼.”

황제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그의 성격상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일을 넘겼다는 것은 레니에가 해도 문제가 없는 일만 남았다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잠시 찌푸렸던 아델라이드의 이마가 펴졌다.

“또 다음 질문이 뭐였지?”

물어보는 베르톨트의 목소리에서 웃음이 묻어났다. 그의 청량하면서도 느른한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약혼이요. 이건 또 무슨 말씀이죠?”

“그대와 약혼하고 싶어. 루이사와 아른프리트의 결혼식이 끝나면 바로 발표하고 일주일 후 약혼식을 할 거야. 레니에가 준비할 테니 그대는 내게 오기만 하면 돼.”

아델라이드는 베르톨트의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 전이었다면 알겠다고 기쁘게 대답했을 텐데 하필 지금은 에드가의 소식을 들은 후였다. 목공소에서 에드가가 납치되었다는 이야기가 떠오르는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 죄책감이 슬며시 올라왔다.

에드가는 벨라루아에게 납치되어서 어찌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자신만 혼자 황제의 품에 안겨서 마냥 행복해할 수는 없었다. 그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아델라이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베르톨트는 그녀의 몸을 한 번 꽉 안았다가 풀었다.

“아델, 무슨 일 있었어?”

베르톨트의 따스한 목소리에 힘입어 그녀는 목공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짧고 간결하게 사실을 말하고 자신이 추론하는 바를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 벨라루아가 그대의 오라버니인 에드가를 납치했고 그것은 그대를 잡기 위한 미끼란 거지? 이 모든 것은 알렉시아 황녀가 나를 갖기 위해 꾸민 계략이고.”

“사실 확실한 것은 에드가가 벨라루아에게 납치당했다는 것뿐이에요. 그 사실을 알렉시아 황녀가 알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아요. 벨라루아가 황녀의 사람이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이야기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어느덧 ‘꿈속의 그대’ 앞에 다다랐다.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고 있는 베르톨트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는 기사였다. 그처럼 압도적인 미모와 카리스마를 지닌 기사가 말을 타고 나타나자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그를 쳐다보느라 바빴다.

손님을 맞이하러 나온 힐다 역시 여관 문을 열자마자 황제를 보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전장에서 막사 생활을 할 때 황제를 본 적이 있어서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었다. 말에서 내리고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세르비아 제국의 황제였다.

힐다가 허리를 깊숙이 숙여 베르톨트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세르비아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눈썹을 움찔거린 베르톨트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나를 아는가?”

“네, 폐하. 전장에서 급여를 받는 노예로 있었습니다. 그때 폐하를 몇 번 뵈었습니다.”

“그랬군. 그래도 시끄러워지는 것은 원치 않으니 주인장은 그저 나를 수도의 기사쯤으로 대해 주게나.”

“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외무부 시찰단의 일로 방문한 걸세. 내 신분을 위장하는 것도 업무의 연장선이지. 그러니 주인장 또한 협조를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지 않으면 공무집행방해죄가 되거든.”

베르톨트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자 힐다는 그의 말에 농담이 섞였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럼 조금 무례하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만 기억해 주십시오.”

황제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힐다는 허리를 숙여 다시 예를 취하고는 여관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프리트홀트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황제를 보고 상당히 놀랐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왕 이렇게 뵌 김에 지금까지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황제에게 보고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베르톨트는 그런 이유로 방문한 것이 아니라며, 일은 황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때 하자고 손을 내저었다.

“그럼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일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한 순간부터 프리트홀트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아델라이드의 손을 끌며 여관 안으로 등장하는 황제를 봤을 때부터 심기가 불편하던 터였다.

“아델라이드를 보러 왔네. 내가 위험할 수도 있다고 그리 말했건만,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산에서 발목을 다치지 않았나.”

베르톨트는 혀를 끌끌 차며 프리트홀트의 차가워진 눈초리에 맞섰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닙니다. 황궁까지 3일 정도 걸린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5일 후면 볼 수 있을 텐데 굳이 오늘 이렇게 오셨으니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해? 무슨 오해?”

“폐하와 아델라이드가 특별한 관계라고 말입니다.”

“맞네. 특별한 관계. 약혼할 거니까.”

프리트홀트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놀라움과 당혹감이 섞인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지금, 약혼이라고 하셨습니까? 결혼도 아니고 약혼이요?”

베르톨트가 이마 위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나도 결혼하고 싶지. 그 누구보다 결혼하고 싶네. 하지만 결혼은, 특히 타국민과의 결혼은 그 절차가 만만치 않아. 그러니 약혼을 먼저 진행하려고 하는 거야. 아델이 나의 반려로서 대접받고 지위를 누리는 동안 결혼 준비를 할 걸세.”

프리트홀트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잘생긴 청년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 누구보다 대견해하고 사랑했던 이 청년은 결코 허투루 일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성정이었다. 그런 그가 관례대로 곧장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약혼부터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껏 약혼을 허례허식이라며 비난했던 황제가 말이다.

세르비아 제국에서 약혼을 먼저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고, 그런 경우는 공식적인 관계가 되기 전 육체관계를 떳떳하게 맺고 싶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과연 황제도 이에 해당할 것인가. 잠시 생각하던 프리트홀트가 숨을 고르고 물었다.

“폐하,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며 베르톨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단순히 관계를 공인하고 그 아이를 취하려 하시는 겁니까?”

베르톨트의 눈꼬리가 가느다랗게 경련했다.

“혹 아델라이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프리트홀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는 역시 자신이 신뢰하는 신하다웠다. 자신이 육체관계 때문에 약혼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 때문임을 간파한 듯했다. 베르톨트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경의 의심이 맞아.”

아델라이드를 양녀로 삼으라고 권할 때는 하지 않았던 말이다. 굳이 아델라이드의 과거를 모조리 밝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베르톨트는 프리트홀트에게 미안해졌다. 어떻게 맺어진 인연이든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고 있으니, 아버지로서 아델라이드의 과거를 알 권리가 있지 않을까. 평소에는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을 뿐 쉽게 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말을 할 때였다.

“아델라이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네 명뿐이야. 나와 레니에, 아델의 오라비, 그리고 경의 집에 있는 소니아지. 경까지 알게 되면 이제 다섯 명이 될 거야.”

“들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베르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정확히 알려면 자신과 아델라이드가 전장에서 황제와 시중 노예로서 만났던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했다.

만일 아델의 과거에 대해 사실만 나열한다면 듣는 사람은 그녀가 남편을 죽이고 왕국을 탈출했다는 대목에서부터 거부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델라이드가 남자로 위장하고 자신의 노예로 일했다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출발한다면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이유를 훨씬 더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이 굉장히 동정적으로 들릴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베르톨트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풀어 타인을 설득하는 데는 기가 막힌 재주를 갖고 있었다. 그는 아델라이드가 전장에서 라술러를 이용해 알게 모르게 병사들의 목숨을 살린 것, 간자들을 잡은 것, 미약에 당한 자신을 대신해 마녀에게 납치당한 것까지 간결하지만 드라마틱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도, 그 당시 어떠한 고통을 당했는지도 털어놓았다.

프리트홀트는 황제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라움을 넘어서서 경악했다. 자기가 아는 어떤 이야기보다 극적이었다.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아델라이드가 수에비 왕국에서 어떤 처지였는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들을 때는 숨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었다. 그 여린 것이 그런 시간들을 견디어 왔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욱신거리고 아프도록 저려 왔다.

베르톨트는 중간중간 프리트홀트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그가 아델라이드를 딸로 삼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아델라이드가 어떠한 일을 당했는지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그가 온몸을 부르르 떨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을 보고는 안심했다.

그는 인간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아델라이드에게 일어난 일에 진실로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올라오는 눈물을 참으려 눈을 껌뻑이기도 했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던 베르톨트까지 새삼스럽게 가슴이 아파 올 정도였다.

“그래서 아델라이드를 공식적인 반려로서 내 곁에 두려 하는 것이네.”

프리트홀트는 촉촉해진 눈가를 연신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사위가 될 녀석 앞인데 우는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그렇습니까….”

“후작도 예상하겠지만 결혼 얘기가 나오면, 그때부터 대신들은 승냥이 떼가 되어서 아델라이드를 물어뜯을 거야. 자신들의 여식을 황후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는 작자들이 꽤 있지 않나. 어쩌면 아델라이드의 과거가 드러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걸세. 그때를 대비해야지.”

연신 고개를 끄덕인 프리트홀트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겠지요. 어서 빨리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으나 그렇지 못할 바에는 공식적인 연인이 되어 폐하의 보호를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벨라루아 말이야.”

“알렉시아 황녀가 보냈다는 마녀 말입니까?”

“그 마녀가 이 바젤에서 에드가를 납치해 갔어.”

“아델라이드의 오라비를요?”

“아마 곧 아델라이드에게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해 올 걸세. 그 마녀가 하든, 알렉시아 황녀가 하든. 그러니 더더욱 약혼을 서둘러야겠어.”

“마녀라면 마법을 쓰니 기사들만으로는 막아 내는 데 한계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마녀, 내게는 상처를 입더군. 또 마법에는 마법으로 대항해야지. 그 방법도 마련해 놓았네.”

“마법으로 대항하신다고요?”

“이번에 궁정 마법사 한 명을 들였지. 아주 실력이 좋아.”

베르톨트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프리트홀트는 잠깐 잊고 있었다. 황제가 얼마나 치밀하고 빈틈없는지를.

“알겠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고 계시군요.”

베르톨트가 빙글거리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린 후 아델라이드가 들어왔다. 두 사람이 너무 오랫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자 휴고를 비롯한 외교관들이 한 번 들어갔다 오라며 그녀를 떠민 것이었다.

아델라이드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등 떠밀려 온 것을 후회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시선이 못 견딜 정도로 뜨거워서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었다. 한 명은 사랑스럽다는 눈빛이었고, 다른 한 명은 대견하고 애틋해하는 눈빛이었다.

“저, 다시 나갈까요?”

멋쩍게 웃는 그녀를 본 베르톨트가 쿡쿡 웃었다. 그는 문 앞에서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는 그녀의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탐스러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랑 얘기를 좀 나누는 게 좋겠어, 아델.”

그녀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한 베르톨트는 두 사람만 두고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간 후에도 아델라이드는 무슨 일인지 몰라 문 앞에서 불안해하며 서 있었다.

프리트홀트는 지금처럼 간혹 아델라이드에게서 보이던 자신감 없는 모습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자꾸만 심장이 뻐근해져 왔다.

“아델라이드,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녀가 천천히 프리트홀트에게 다가왔다. 발걸음이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프리트홀트는 그녀에게 다가가 두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폐하께… 너의 일을 모조리 들었다.”

“저, 저의 일이요?”

“그래. 네가 남장을 했던 것도, 네가 그…. 그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도, 또… 어떤 일을 당했다는 것도.”

프리트홀트는 말하는 중간중간 목구멍에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고개를 숙여 그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눈 속엔 눈물이 한가득 차올라 있었다.

“내 딸…. 많이 힘들었겠구나.”

프리트홀트의 말에 아델라이드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잠시 불안했던 마음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죄스러웠던 마음도, 표현할 수 없었지만 어색하고 불편했던 마음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떨어졌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델라이드에게 낯설기만 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준 사람은 에드가였다. 그는 자신과 같이 자라 왔기 때문에 자신만 그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그를 보호하게 되었다. 그랬기에 마냥 기댈 수만은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프리트홀트라는 아버지를 두면서부터는 한없이 든든한 힘을 알게 되었다. 오라버니나 막강한 연인과는 또 다른 존재였다.

그런 프리트홀트가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어 자신을 저버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과거를 말하기 싫었다.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막 시작한, 이 따뜻하기 그지없고 푸근한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죄, 죄송해요. 말씀…드리려 했는데…, 무서워서….”

어깨를 떨며 계속 눈물을 쏟고 있는 아델라이드는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쉴 새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처로울 만치 떠는 그녀를 프리트홀트가 살짝 안아 주었다.

“난 네 아비야.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의 아픔을 모른 척한다더냐. 힘들고 지치고 외로울 땐 내가 항상 네 뒤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아델라이드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부녀는 한참을 그렇게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한 사람은 그동안 겪었을 그 모진 시간을 대신 아파했고, 한 사람은 한없이 고마워하고 가슴 벅차했다.

눈물바다가 지나간 후, 프리트홀트는 베르톨트의 든든한 조력자로 변했다.

그가 넌지시 꺼낸 약혼 이야기에 아델라이드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 에드가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약혼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황제의 곁에 있어야 가장 안전하고, 또 가장 빠르게 에드가를 데리고 올 수 있다는 아버지의 설득에 결국 그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밖으로 나온 두 부녀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아델라이드의 코는 빨개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베르톨트는 빙그레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두 사람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고 있음에 만족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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