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장. 도시, 바젤
바젤에 이르는 길은 험난했다. 평야는 오래지 않아 계곡으로 변했고, 잘 닦인 도로가 이어지다가도 이내 돌이 많은 험지로 변했다. 울퉁불퉁 모가 난 산길을 가느라 마차는 심하게 흔들렸다.
아델라이드는 한참 전부터 멀미를 느끼고 있었다. 일분일초가 너무나 괴로웠다. 하얗게 질린 그 얼굴을 본 프리트홀트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델라이드, 괜찮은 거냐?”
“하아…. 후, 후작님….”
이제는 대답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프리트홀트는 마차의 작은 창문을 열고 클리터스를 불렀다.
“클리터스 경!”
일행의 선두에서 말을 몰던 클리터스가 말머리를 돌려 마차 쪽으로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잠시 쉬도록 하지. 멀미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네.”
“비, 비서관님께서 많이 괴로워하십니까?”
흠칫 놀란 클리터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프리트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클리터스는 허공으로 손을 올려 행렬을 멈추었다.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한다!”
클리터스가 우렁찬 목소리로 휴식을 명하자 행렬이 멈춰 서고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의 아델라이드가 휘청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클리터스는 얼른 말에서 내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델라이드는 그의 손을 잡고 바닥으로 발을 디뎠다.
“비서관님. 크게 심호흡을 해 보십시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시범을 보이는 그를 따라 아델라이드는 여러 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렇게 심호흡하는 와중에도 괴로운 나머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클리터스가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가느다란 그녀의 몸이 애처로울 정도로 바르작거렸다.
“안 되겠어요. 저기 가서 좀 앉으십시오.”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멀미가 이렇게 자신을 괴롭게 할 줄 몰랐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숨 쉬기가 힘들었고,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모두 흩어져 보였다. 그녀는 클리터스가 가리킨 곳에 주저앉아 계속해서 심호흡을 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클리터스는 자신의 말로 가서 수통과 함께 작은 알약을 가지고 돌아왔다.
“좀 드세요. 한결 나아질 겁니다.
“무엇인가요?”
“송진 가루에 건매실과 레몬을 넣어 환으로 만든 것입니다. 멀미에 효과가 있으니 씹어서 물과 함께 넘기십시오.”
아델라이드가 퀭해진 눈으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환을 세 개 정도 입에 털어 넣고 몇 번 씹으니 풀 비린내와 함께 쓴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맛이 너무 쓴 나머지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자 클리터스가 수통을 주며 물과 함께 삼키라고 했다. 순순히 받아 든 아델라이드는 수통에 든 물을 들이켰다. 그러자 입 안의 쓴 것들이 목구멍 뒤쪽으로 넘어갔다.
“잘하셨습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올려다보았다. 클리터스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클리터스 경!”
그때, 그를 부르는 프리트홀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돌려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델라이드는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그를 ‘대대장님’이라고 부를 뻔했다.
클리터스의 눈빛은 예전의 자신, 그러니까 에드가를 볼 때와 꼭 같았다. 지금도 그의 눈빛은 자신에게서 에드가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클리터스의 그러한 눈길을 오롯이 받아 낼 용기가 없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마주하면 자신이 에드가였던 것을 들킬 것만 같아 마음이 몹시 불안했다.
‘가급적이면 대대장님과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아델라이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바젤 시찰단이 출발하기 며칠 전.
“휴고, 네가 바젤에 다녀와야겠다.”
“제가요? 전 이번 시찰단에서 빠졌는데요.”
“알아. 하지만 네가 가서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레니에는 집무실로 들어선 사촌을 보며 말했다.
“전에 귀환해서 찾아보라고 했던 친구, 기억나지?”
무표정했던 휴고가 입술 끝을 올리며 웃었다. 레니에는 그런 휴고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리지만 그 속에 새끼 능구렁이들이 득실득실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저렇게 웃는다는 건 무언가 알고 있거나 꿍꿍이가 있다는 의미였다.
“기억납니다. 에드가 죠세파 로렌느 드 발루아.”
일부러 풀 네임을 말한 휴고가 안경 너머로 해사하게 웃었다.
“에드가가 바젤을 지나 안달루스로 갔어. 네가 가서 소상히 알아봐.”
“흠…. 꽤 용의주도한 인물인 것 같은데, 용케 바젤에서 흔적을 찾으셨나 보네요.”
“그 흔적이라는 것도 불안해.”
에드가는 영민하고 철저했다. 두 달 전, 그가 휴고를 먼저 귀환시켜 에드가를 찾으라고 명한 바 있지만 실패했을 정도로 그의 자취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가 서남 방향으로 갔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바젤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다고 했다. 그에게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은 예감에 레니에의 평온했던 마음에 물결이 일렁였다.
“그런데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하면 안 물어볼 거냐?”
휴고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걸 고맙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조각을 맞추느라 머리 좀 굴렸으니까요. 그런데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단 말입니다.”
휴고는 레니에의 사촌 동생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에게도 제국 최고의 두뇌인 레니에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레니에의 옆에서 일을 배우면서 사고력이 놀라울 정도로 진화했다.
물론 그는 레니에처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는 아니고 오히려 종종 비논리적인 엉뚱한 상상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 상상이 가끔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질 때가 있었으니, 이번이 그런 경우인 것 같았다. 레니에는 입술을 씰룩였다.
“물어봐!”
“아델라이드 님과 에드가 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에드가? 전장에서의 에드가?”
시치미를 뚝 떼며 되묻는 레니에를 보며 휴고가 큰 소리로 웃었다.
“왜 이러십니까? 저도 현장에 있었던 일인입니다. 전장에서의 에드가 님이 지금의 아델라이드 님이라는 것을 알아요.”
레니에는 휴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역시 사촌 동생의 상상력은 무서울 정도였다.
“에드가는 남자야. 어떻게 아델라이드 님이 될 수 있겠어?”
휴고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보자 레니에는 그 눈길을 슬금슬금 피했다. 녀석이 촉을 세울 때는 뒤로 물러서는 게 최선이다.
“하아, 정말. 연기도 너무 어설프고.”
휴고가 팔짱을 끼더니 미간을 찡그린 채로 한숨을 푹푹 쉬어 댔다.
“알겠습니다. 형님 입으로는 말해 주지 않으시겠다 이거죠? 그렇다면 전 아델라이드 비서관에게 가서 형님이 찾으시는 그 에드가가 바젤로 갔다고 말해야겠네요. 그녀의 반응을 보면 뭐, 또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겠죠.”
즉각 자리에서 일어선 휴고는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는 집무실 밖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아…. 저 징그러운 놈.”
레니에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휴고는 누구보다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긴 하나 아직도 저렇게 애처럼 짓궂은 구석이 남아 있었다. 사촌 형이자 세르비아의 재상을 협박하다니.
결국 시찰단이 떠나기 바로 전날, 휴고도 그 무리에 합류했다.
* * *
“한 시간만 더 가면 바젤에 도착합니다.”
클리터스가 마차의 열린 창에 대고 말했다. 프리트홀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이틀 동안의 여정은 생각보다 고단했다. 아델라이드는 멀미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고, 그때마다 클리터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처음 한 번을 제외하면 그들이 직접 대면할 일은 없었다. 프리트홀트가 항상 그들의 사이에서 모든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도착이 임박하자, 프리트홀트는 외무관들에게 시찰과 관련된 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휴고와 마차를 바꿔 탔다.
눈을 감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아델라이드를 휴고가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아델라이드가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그녀의 청회색 눈동자가 휴고를 향했다.
“제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휴고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전 이번 외무부 일 외에도 어떤 사람에 대해 알아보러 바젤에 왔습니다.”
알 수 없는 말에 아델라이드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대답을 바라지 않았다는 듯 휴고가 곧장 말을 이었다.
“혹시, 에드가 죠세파 로렌느 드 발루아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아델라이드의 동공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등받이에 묻혀 있던 그녀의 허리가 곧게 펴지며 몸이 앞으로 쏠렸다.
“어, 어떻게…?”
“황제 폐하와 공작 전하의 명입니다. 바젤에서 그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며, 소상히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바젤에서요?”
“아무래도 바젤을 통해 안달루스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바젤을 거쳐 갔는지, 또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달루스 어디로 갔는지 등등 알아봐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하여 전 업무를 좀 쪼개야 합니다. 외무대신께는 이미 말씀드렸지만, 아델라이드 비서관님께는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네요.”
놀라 동그랗게 떠진 그녀의 눈이 쉬이 작아지지 않았다.
“휴고 비서관님. 그, 그 정보를 알아내면, 제게도 알려 주지 않으시겠어요?”
“왜요?”
그녀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차마 솔직히 말할 수가 없었다.
“에드가라는 분과 어떤 관계인지 말씀해 주시면 정보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아델라이드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선택한다는 것은 동시에 선택하지 않은 것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자신과 에드가와의 관계를 밝히면 에드가의 정보를 알 수는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인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수에비의 왕비였다는 것이 드러나더라도 에드가를 찾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휴고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 아델라이드의 정체를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당혹감에 흔들리던 아델라이드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에드가는 나의 오라버니예요.”
이번엔 휴고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다래졌다. 휴고는 그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오, 오라버니요? 그와 남매라는 겁니까?”
“네, 남매입니다.”
휴고가 “하!” 하며 실소를 터뜨렸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아델라이드가 전장에서의 그 에드가라는 것은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마력석을 이용해 간자들을 잡았을 때 그도 현장에 있었기에 그러한 사실을 추론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위장 마력석이 그녀의 성별을 바꾸었을 것이라는 데에는 휴고 특유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왜 아델라이드가 에드가라는 이름을 사용했는지, 왜 레니에 형님과 폐하가 자신에게 에드가라는 자를 찾으라는 건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하지만 아델라이드와 에드가라는 자가 남매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명쾌해졌다.
“하아! 그랬군요. 그 발루아 가문의 남매가 당신과 에드가였….”
말을 하던 휴고의 머릿속에 번쩍 하고 번개가 쳤다. 생각에 잠겨 잠시 시선을 바닥에 두었던 그가 고개를 휙 들어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그럼, 아델라이드 당신이, 당신이 그 수에비의…?”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그 바람에 아델라이드의 몸이 앞으로 쏟아졌지만, 다행히 휴고가 순발력을 발휘해 넘어지는 그녀를 받아 냈다. 휴고와 아델라이드의 놀란 눈빛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마차 문이 벌컥 열렸다.
“비서관님! 괜찮으십…니까?”
기세 좋게 문을 연 클리터스는 둘이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휴고와 아델라이드는 급히 떨어져 앉은 후 괜스레 옷을 툭툭 매만졌다. 휴고가 헛기침을 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마차를 세우고.”
“아이 하나가 마차에 뛰어들었습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클리터스가 휴고의 어깨 너머로 아델라이드를 바라보았다.
“아이요? 괜찮습니까?”
아델라이드는 아이라는 말에 깜짝 놀라 마차에서 내렸다. 뒤따라오던 마차에서는 프리트홀트가 문을 열고 내렸다.
마차의 앞에는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수행 기사 하나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로는 크게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델라이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가 땅에 엎어져 있는 아이를 덥석 안았다. 아이의 팔을 들어 보기도 하고 다리를 들어 보기도 하며 아이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비서관님, 마차와 부딪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앞을 보지 않고 달려오다가, 말이 놀라 앞발을 드는 것을 보고 그대로 기절한 것뿐입니다.”
수행 기사가 뒷머리를 긁으며 겸연쩍게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아델라이드는 아이를 품에 안고 흔들었다. 아이는 뼈만 앙상한 게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것 같았다. 씻지도 못했는지 얼굴에 검댕이 잔뜩 묻어 있었고, 옷도 군데군데 헤어져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아이를 안은 채 두리번거리던 아델라이드는 길가의 큰 나무들을 보고는 클리터스에게 말했다.
“클리터스 님. 마을에 다 오긴 했지만 잠시 저 나무 그늘에서 쉬어 가는 게 어떨까요? 아이가 정신이 들 때까지만요.”
고개를 끄덕인 클리터스는 기사들에게 나무 밑으로 이동할 것을 명했다. 아델라이드는 아이를 안고 나무 그늘을 향해 걸었다.
“비서관님, 무겁습니다. 제가 안겠습니다.”
클리터스의 만류에도 아델라이드는 아이를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 아이, 지나치게 가볍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잠겼다. 걸어가는 아델라이드의 뒷모습이 클리터스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왔다.
나무 그늘에 도착한 아델라이드는 손수건에 물을 적셔 아이의 얼굴과 손발을 닦아 주었다. 그러면서 아이의 몸을 면밀히 살폈다.
- 이 아이 말이야. 좀 이상한데.
그때 머레인이 반짝였다.
- 지나치게 말랐잖아. 그리고 손발은 또 왜 이래.
그러고 보니 큰 상처는 없었지만 손과 발이 너무 거칠었다. 심한 노동을 했는지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있고 여린 살이 터져 있었다. 이 손으로는 무언가를 잡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아델라이드는 아이의 조그마한 손을 쥐고 가만히 쓸었다.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손길을 느꼈는지,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위로 올라갔다. 아이와 아델라이드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신이 좀 드니?”
아이는 영문을 몰라 잠시 멍하니 아델라이드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하얀 여자가 보였다. 그녀의 밝은 금발은 마치 금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았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청회색 눈동자에는 따뜻함이 가득했다. 하얀 여자는 목소리도 낭랑하고 부드러운 데다 좋은 냄새까지 났다.
천사가 아닐까.
아이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머물렀다.
아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자 아델라이드가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말을 붙였다.
“겉으로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혹시 다친 데가 있는지 알고 싶구나.”
그제야 상체를 일으킨 아이가 아델라이드의 품에서 벗어나 그녀를 마주 보고 섰다.
“괜찮아요…. 근데 아까는 말한테 밟히는 줄 알았어요.”
그 작은 몸이 잘게 떨리는 게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였다. 아델라이드는 아이의 두 손을 잡으며 시선을 맞췄다.
“많이 놀랐지? 이제 괜찮단다.”
“죄, 죄송해요….”
“죄송하긴. 모두가 무사하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자신이 뛰어온 길을 돌아보는 아이의 눈빛에는 어린아이답지 않은 두려움과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 이 아이 뭔가 불안해 보여.
- 아무래도 누구에게 쫓기거나 어딘가에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가, 이름이 뭐니?”
아델라이드가 아이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상냥하게 묻자 불안해하던 아이의 얼굴에 홍조가 일었다. 천사같이 예쁜 누나가 자신의 뺨을 만지니 어쩔 줄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베, 벤자민이에요.”
“벤자민… 행운이라. 좋은 이름이구나. 그런데 어쩌다가….”
아이는 흠칫 놀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어째서인지 대답도 못하고 눈동자만 또르륵 굴리고 있었다.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
- 우선 뭘 좀 먹여야 하지 않을까? 배가 불러야 입도 열겠지.
- 그래야겠네요. 아이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니 의사에게도 좀 보여야겠어요.
일행은 우선 예약한 여관을 찾아 여장을 풀기로 했다. 아델라이드는 벤자민을 자신의 마차에 태웠다. 자리가 부족했기 때문에 휴고는 졸지에 아이를 안고 타게 되었다.
마차의 진동이 자장가처럼 느껴졌는지 휴고의 품에 안긴 벤자민은 곧 잠이 들어 버렸다. 그만큼 아이는 많이 지쳐 있었다.
휴고는 품에 안겨 기절하듯 잠이 든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벤자민은 더럽고 가냘팠지만, 아이 특유의 포근함이 있었다. 그것이 신기해 한참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이를 좋아해요?”
아델라이드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든 휴고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아뇨.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꽤 잘 안고 있네요. 벤자민은 휴고 님의 품이 편한가 봐요.”
아델라이드가 보기에 휴고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의도치 않게 기분을 겉으로 드러내면 지금처럼 멋쩍어하거나 깜짝 놀라곤 했다.
사실 휴고는 매우 장난기가 많고 재미난 사람이지만 사촌인 레니에를 롤모델 삼아 생활하다 보니, 재미있고 따뜻한 성정이 마음속 깊숙한 곳으로 숨어 버렸다. 그러나 본성이 어디 가겠는가. 가끔 보이는 휴고의 엉뚱한 상상력과 기발한 창의력은 그의 이러한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휴고는 아델라이드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이를 보며 이처럼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은, 냉철한 이성을 추구하는 자신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의 따뜻한 온기는 그에게 계속해서 이상한 울림을 주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며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휴고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젤은 삼림 자원의 보고인 만큼 녹음이 무척이나 짙고 싱그러웠다.
창문을 여니 세찬 바람이 들어왔다. 아델라이드는 잠든 벤자민을 깨울까 염려되어 급히 창문을 닫았다. 그때 휴고가 얼른 앉은 자세를 바꿔 아이에게 오는 바람을 막는 것이 보였다.
그의 민첩한 행동에 다시금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휴고는 아델라이드의 웃음을 모른 척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그런 험한 일들이 일어나다니 믿기질 않네.’
바젤의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그녀는 바젤에서 일어나는 흉악한 범죄들을 떠올렸다.
- 사람도 겉으로 봐선 모르듯이 사람 사는 곳도 마찬가지지.
머레인은 작은 한숨을 쉬며 인생 다 산 어른처럼 말했다.
- 머레인은 마냥 애들 같다가도 가끔 너무 어른스러워요.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어요.
- 나를 파악하려 하지 마. 나도 나를 모르니까.
머레인은 금세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돌아왔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순수하기 그지없는 나이에 봉인된 머레인은 그 감성과 경험으로 오랜 시간 마력석으로 살아왔다. 그러니 어떤 때는 어설프고 순수하고 직설적이었다가도 또 어떤 때는 성숙하고 무심하고 초연했다. 잘 모르는 이가 본다면 조울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시찰단 일행은 마을 입구를 지나 꽤 번화한 시내로 진입했다. 조금 더 달리자 여러 개의 숙박업소가 나타났다. 클리터스는 그중에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나 고풍스럽고 단아한 여관 앞에 말을 세웠다.
아델라이드는 문을 열고 마차에서 내렸다. 클리터스가 재빨리 다가왔지만 그녀는 그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만 잠시 미소를 띠며 그에게 눈길을 주었다.
“전 괜찮아요. 휴고 비서관에게서 아이를 받아 주세요.”
클리터스는 아이를 안은 채 몸을 일으키려는 휴고에게서 벤자민을 받아 들었다. 이후 마차에서 완전히 내리자마자 휴고가 다시 벤자민을 안아 들었다.
그사이 여관에서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급하게 뛰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황실에서 오셨지요?”
두 남자 중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마차에 붙어 있는 황실 문양을 바라보며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열 명으로 10박 11일 예약했네.”
“네,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제법 능숙하고 예의 바르게 손님을 맞이했다.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수준의 태도로 보아 아무래도 주인장이 무척 교육을 잘 시킨 듯했다. 아델라이드는 여관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꿈속의 그대]
- 꿈속의 그대?
- 아델라이드, 왜 그래?
- 하아. 꿈속의 그대? 힐다?
머레인이 왜 그러냐고 계속 물었지만, 아델라이드는 밀려오는 벅찬 감정 때문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여관의 문이 열리고 조금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런 옷차림의 여인이 등장했다. 우아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그녀는 일행을 보며 곱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시찰단의 호위 대장인 클리터스와 프리트홀트 앞에 서서 허리 굽혀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꿈속의 그대’ 주인장, 힐다입니다.”
힐다.
세르비아의 전장에서 만났던 노예. 짧은 시간이지만, 아델라이드에게 연정을 품었던 여자.
그녀는 전쟁이 끝나는 대로 적당한 곳을 찾아 여관을 차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여관의 이름을 ‘꿈속의 그대’로 정하겠다고 했다. 에드가였던 아델라이드의 눈동자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 힐다가 지금, 정말로 ‘꿈속의 그대’의 주인이 되어 아델라이드의 눈앞에 있었다.
‘멋있네요, 힐다. 정말 멋있어요.’
아델라이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몸을 휙 돌리고 눈을 껌뻑였다. 자신을 알아볼까 봐 불안해서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치면서도 기쁨으로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휴고는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수행 기사들이 직원들을 따라 말과 마차를 몰고 마구간으로 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짐 가방을 들고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힐다는 자신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다 곧 아까부터 시선을 잡아끌던 여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여장을 풀고 1층 홀로 내려오세요.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스쳐 지나가던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들어 힐다의 눈을 바라봤다. 순간, 힐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 감사합니다.”
아델라이드는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힐다의 눈이 더욱 커다래졌다.
‘닮았어. 에드가와 닮았어.’
* * *
아델라이드는 휴고에게 벤자민을 자신의 방에 눕혀 달라고 말했다. 시찰단 중에 여자는 아델라이드뿐이기에 방을 혼자 쓰는 것은 지휘관인 프리트홀트와 여성인 아델라이드, 이렇게 두 사람이었다.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두 명이 한방을 써서, 아델라이드가 벤자민을 맡지 않으면 어느 한방은 세 명이서 쓸 수밖에 없었다.
프리트홀트의 방을 제외하곤 모두의 방에 똑같이 침대 두 개와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고 실내 목욕탕을 갖추고 있었다. 규모가 크진 않아도 모두 깨끗하고 짜임새가 있었다.
방 안을 둘러본 아델라이드는 이 모든 것이 야무진 힐다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은 그녀는 직원을 불러 따뜻한 스프와 부드러운 빵을 갖다달라고 했다. 며칠 굶었을 것 같은 벤자민을 위해서였다.
아델라이드가 침대맡으로 돌아왔을 때 벤자민이 잠에서 깨려는지 뒤척였다. 작은 손을 매만지니 녀석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깼니?”
아델라이드의 얼굴이 보이자 벤자민은 안심한 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몸을 일으킨 아이가 상체를 벽에 기댔다.
“벤자민, 우선 뭘 좀 먹자꾸나. 사람들이 곧 음식을 가져올 거야.”
벤자민은 깨끗한 침구 위에 앉아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자신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 저 때문에 더러워졌어요.”
“괜찮아. 먹고 난 다음에 씻으면 돼. 시트랑 이불은 깨끗한 것으로 바꾸면 되고.”
벤자민은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고개를 떨구었다. 이 환하게 빛나는 사람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더욱더 더럽게 느껴져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음식이 왔나 보다.”
아델라이드가 곧장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힐다가 쟁반을 들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힐다는 놀라서 눈이 동그래진 아델라이드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영양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아이가 있다고 들었어요. 어린 송아지를 몇 시간 동안 푹 고아서 만든 스튜예요. 부드럽고 영양도 만점이죠. 들어가도 될까요, 비서관님?”
능숙하면서도 깔끔한 말투와 태도였다. 아델라이드는 약간 얼떨떨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옆으로 비켰다.
힐다는 협탁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곧 따뜻하면서도 맛있는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벤자민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비서관님도 내려가셔서 식사를 하세요. 기사님들은 벌써 내려오셨어요.”
“아니에요. 전 나중에 할게요. 우선은 이 아이부터….”
아델라이드가 쟁반을 가져와 아이에게 스튜를 떠먹여 주려 하자 벤자민이 작은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혼자 먹을 수 있어요.”
잠시 멈칫한 아델라이드는 웃으며 벤자민의 무릎 위에 쟁반을 올려 주었다.
“알았어. 너무 급하게 먹으면 위가 놀라니까 천천히 먹도록 하렴.”
“먹고 씻을게요.”
“응?”
아델라이드가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다.
“목욕탕에 물소리가 나요. 저를 씻기시려고 하신 거죠? 제가 먹고 나서 혼자 씻을게요.”
“아, 그래도….”
“저 열 살이에요. 누가 씻겨 줄 나이 아니라고요.”
빠르게 말한 벤자민이 얼른 뚜껑을 열어 스튜를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었다. 그러고는 야무지게도 꼭꼭 씹었다. 아델라이드는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 요 녀석, 꽤 영민하네.
머레인이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뒤에 서 있던 힐다도 소리 내어 웃었다.
“영특하네요. 눈치도 빠르고 자존심도 있어요. 안심하고 내려가 식사를 하셔도 될 것 같군요.”
힐다는 아델라이드에게 눈짓으로 밖을 가리키며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아델라이드는 힐다와 함께 방을 나섰다.
“비서관님, 기사님들에게 저 아이에 대해 대충 얘기를 들었어요. 저 아이, 아마 목재소에서 도망쳐 나왔을 거예요.”
앞서 걷던 아델라이드가 뒤를 돌아보았다.
“목재소요?”
“네. 저렇게 도망쳐 나오는 아이가 간혹 있어요.”
힐다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식사하신 후에 얘기 나누시죠. 다른 분들도 이곳의 상황을 아셔야 할 테니까요.”
아델라이드는 1층으로 내려가 일행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음식은 꽤 훌륭했다. 메뉴도 메뉴지만 맛이 좋아 모두들 여관의 요리사를 칭찬했다.
힐다는 그들이 식사하는 내내 음료 코너에서 음료를 만들기도 하고 중간중간 부족한 것이 없나 살피기도 했다. 직원들도 힐다만큼이나 능숙하게 테이블 시중을 들었다. 이곳 1층 다이닝 홀만 보아서는 이 외진 도시는 아무 일 없이 그저 평화롭게만 보였다.
식사를 끝낸 시찰단 일행은 모두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그들 틈에는 힐다가 끼어 있었다. 프리트홀트가 그녀를 초대해 자리에 함께해 주기를 부탁해서였다.
“자, 아까 아델라이드에게 하셨던 이야기를 마저 해 주십시오. 저 아이와 또 바젤에 대한 이야기를요.”
프리트홀트를 비롯하여 모든 이들의 시선이 힐다를 향했다. 힐다가 긴장되는 듯 마른침을 삼켰다.
“바젤을 시찰하기 위해 나오셨다니, 제가 아는 대로 말씀을 드릴게요. 우선 ‘꿈속의 그대’를 기준으로 북쪽으로 10킬로미터쯤 가시면 난민촌이 있어요. 원래는 서쪽에 있었는데 툴루즈에서 넘어오는 난민의 수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자 결국 북쪽으로 이동했죠.
문제는 이 난민촌을 중심으로 생겼어요.
아시겠지만 북쪽을 제외한 동, 남, 서쪽은 삼림이 우거져 있어 곳곳에 대형, 중소형 목재소들이 들어서 있어요. 그런데 인력난이 끊이질 않고 있어요. 나무는 넘쳐 나는데 일할 노동자가 부족하니까요. 그러다 보니 난민촌에 사는 사람들은 목재소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노동력이 부족하다 보니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할 수 있는 이들은 모두 목재소에서 일하게 되었죠. 지금은 아이들까지 동원되고 있어요.”
휴고가 물었다.
“여기 바젤의 청년들은 목재소에서 일을 하지 않습니까?”
“목재소 일은 육체적으로 매우 힘들어요. 바젤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좀 더 쉬운 일, 편한 일을 찾아서 더 번화한 도시로 가죠. 힘든 일은 더 값싸게 써 먹을 수 있는 불법 이주민들의 몫이에요.”
이번엔 아델라이드가 물었다.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노동에 동원되는 거죠?”
“난민들은 합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가 없어요. 그렇다 보니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어요. 당장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지요. 처지가 그러하니 아이들이라고 일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죠. 간혹 부모가 돈을 받고 아이들을 파는 일도 있어요. 또 몇몇 악덕 고용주들은 난민 아이들을 납치해서 노동에 동원시키기도 해요.”
현재 바젤은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바젤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영지의 기사들도 암암리에 자행되는 불법을 막을 길이 없었다.
제재하려 할 때마다 목재소의 고용주나 판매 상인들이 불평과 불만을 쏟아 냈다. 그들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목재 사업을 지속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세금을 내냐며 도리어 큰 소리를 쳤다.
“아마 2층에 있는 벤자민도 부모가 돈을 받고 팔았거나 납치되어 왔을 거예요. 이렇게 여러분의 눈에 띈 건 정말 행운이죠. 현지인들은 아무도 그들을 도와주지 않아요.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다녀간 한 외지인도 여러분처럼 노동하는 아이들을 가엽게 여겼지요.”
“외지인이요?”
휴고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네, 실은 한 달 전쯤 은발의 남자가 바젤에 왔었어요. 너무 눈에 띄는 외모라서 모두들 그를 기억해요. 그 사람은 자진해서 그 험한 목재소에 들어가 일을 했어요. 그러면서 목재소의 최고 고용주들을 설득해 15세 이하의 어린 아이들은 노동에 동원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 냈죠. 정말 놀라웠어요.”
“그, 그 사람 이름을, 아세요?”
아델라이드가 말을 더듬었다. 입술이 바들바들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럼요. 제 첫사랑하고 이름이 같은걸요.”
힐다가 꼭 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아델라이드와 시선을 마주했다.
“에드가예요.”
* * *
황제를 알현하러 온 루이사의 태도가 오늘따라 유난히 삐뚜름했다. 베르톨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는 언제 그 성질머리를 고칠 거지?”
“폐하, 전 그냥 이대로 살렵니다.”
“힘들어지는 건 아른프리트야. 내가 아니라고.”
“아른프리트 경은 괜찮습니다. 그렇죠?”
루이사가 옆에 서 있는 황실 기사단장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변하지 않는 루이사도 그렇고, 그런 그녀에게 꼼짝 못하는 늦깎이 신랑도 베르톨트에게는 답답하긴 매한가지였다.
“아무튼 나는 그대의 들러리를 설 수 없어. 다른 이한테 부탁해 봐. 레니에 같은….”
그때 레니에가 접견실로 들어섰다. 그의 입매가 씰룩였다.
“부탁은 이미 했습니다. 전 루이사 부단장의 들러리가 되기로 했습니다.”
“거 보세요. 레니에 공작도 제 들러리가 되기로 하셨습니다.”
루이사는 친하게 지내는 귀족가의 친구가 없었다. 친한 사람이라곤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과 아른프리트, 그리고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온 레니에와 베르톨트뿐이어서 그녀의 들러리가 되어 줄 수 있는 친구는 레니에와 베르톨트밖에 없었다.
레니에와 베르톨트. 달리 말하면 세르비아의 재상과 황제였다.
베르톨트는 그 많은 하객들 앞에 들러리로 선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안 좋았다. 게다가 레니에와 똑같은 옷을 입고 나란히, 줄곧 동상처럼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욕지기가 나왔다.
베르톨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지 레니에의 표정이 떨떠름했다. 그는 괜스레 레니에를 노려보았다.
“그럼, 두 분 모두 승낙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황제의 입에서 다시 거절의 말이 나올까 봐, 루이사는 말을 뱉자마자 아른프리트의 팔을 잡아끌고 쏜살같이 접견실을 나가 버렸다. 베르톨트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만지며 그녀가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아른프리트는 도대체 루이사의 어디가 마음에 든 거래?”
레니에도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겠습니다. 뭐, 저런 끝 간 데 없고 개념도 없는 성격이 좋았는지도 모르죠.”
“아른프리트가 고생 좀 하겠어.”
베르톨트와 레니에는 모처럼 같은 생각을 하며 동시에 혀를 끌끌 찼다.
“폐하, 휴고로부터 전서조가 왔습니다. 외무부 시찰단이 바젤에 잘 도착했고 난민촌의 실정을 파악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 다행이군.”
“아델라이드 비서관의 오라비인 에드가 소식도 있었습니다. 에드가가 바젤의 목재소 주인들과 협상하여, 15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고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이끌어 내었다고 하는군요.”
“협약?”
“규모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목재소끼리의 경쟁이 매우 치열한가 봅니다. 그러다 보니 미성년자까지 고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에드가가 고용주들과 담판을 지어 미성년 고용을 금지하기로 결론을 이끌어 냈었다고 합니다.”
베르톨트는 헛웃음을 삼켰다.
“하아. 도대체 그 남매는….”
그들이 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아델라이드의 모습으로 미루어 그 에드가라는 남자 역시 분명 여린 듯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레니에의 설명을 들어도 그런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그런 자의 행적치고는 너무도 단단하지 아니한가. 대단한 무예의 소유자도 아닌 그가 맨몸으로 불의와 싸운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베르톨트는 괜스레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레니에도 베르톨트와 비슷한 마음이었다. 어째서 이 남매는 어딜 가나 이런 행적을 남겨서 자신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인가.
“그리고 폐하.”
이마를 짚었던 손을 내려놓은 베르톨트가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스카 행정대신이 수상합니다. 아델라이드 님의 뒤를 캐고 있는 듯합니다.”
“오스카 경이?”
“정보 길드에 아델라이드 님의 과거 행적을 의뢰했다고 합니다.”
“하여간 그 늙은이는 눈치도 빨라.”
“어떻게 할까요?”
“일단은 그냥 내버려 둬. 그럴 줄 알고 정보 길드에 아델라이드의 가짜 행적을 뿌려 놓았어.”
“…빠르시군요.”
베르톨트가 짙은 눈썹을 위로 올리며 씨익 미소 지었다.
“그래도 그 여우 같은 늙은이라면 오래지 않아 눈치챌 거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스카에겐 흠이 하나 있지. 애비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아들 말이야.”
“데이비드 말씀이십니까?”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에는 빠르게 황제의 뜻을 알아챘다. 황제는 데이비드의 비리를 파헤쳐 두었다가 결정적인 때가 오면 그걸 빌미로 오스카의 발목을 잡을 심산이었다.
“알겠습니다. 데이비드의 행적을 알아보겠습니다.”
뭣처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레니에였다. 머리가 좋기도 했지만 이렇게 손발이 잘 맞을 때는 그야말로 일할 맛이 났다.
“또 하나, 재상, 그대가 해 줄 일이 있어.”
그러나 이렇게 재상이라고 정중히 불러 줄 때는 긴장을 해야 한다. 그는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어쨌든 황제였다. 황제의 명은 거절 못 한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는 종종 무리한 업무를 내리곤 했다.
“말씀하십시오.”
“다음 달 루이사와 아른프리트가 결혼식을 올리고 나면, 나와 아델라이드도 약혼을 할 거야.”
“폐하!”
“그대들이 계속 성화였잖아. 결혼하라고!”
“대신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내 나이, 이제 해를 넘겨 스물여덟이야. 이렇게 늦은 나이에 결혼도 아니고 약혼을 하겠다는데, 뭘 얼마나 반대하겠나.”
레니에가 베르톨트를 향해 억지웃음을 보였다.
“그 표정은 뭐야?”
“약혼은, 허례허식이라며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조촐하고 간편하게 할 거야.”
“전에 레나드 백작이 약혼한다고 했을 때도 대놓고 욕을 하셨잖습니까.”
베르톨트의 눈썹이 구겨졌다. 인상이 있는 대로 험악해졌다.
“그냥 좀 넘어가! 그럼 네 녀석은 내가 아델을 안고 싶어서 미치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레니에는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러셔야죠. 이 둘도 없는 친우에게는 항상 솔직하셔야 합니다.”
‘끝까지 캐물어야 직성이 풀리는 놈 같으니.’
표정만 보면 레니에를 씹어 먹고 있는 베르톨트를 향해, 언제 그랬냐는 듯 공손히 허리를 굽힌 레니에가 한마디 했다.
“알겠습니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이 한마디에 베르톨트의 입가에 미소가 달렸다. 따끈한 기운이 그의 가슴속으로 천천히 번져 갔다.
* * *
벤자민은 며칠 동안 힐다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델라이드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시찰을 나가서 저녁때가 넘어서야 돌아왔기 때문에 벤자민을 돌볼 틈이 없었다.
벤자민에게 아델라이드는 멀리 환한 빛 속에 있는 천사 같았지만 힐다는 누나 같고 친구 같았다. 밝고 싹싹한 힐다는 벤자민에게 그만큼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대해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벤자민은 힐다가 누구보다 편해졌다.
클리터스는 대개의 시간 동안 아델라이드의 곁을 지켰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지키기 위해 황제가 직접 파견했다는 스스로의 소임을 명심하고 황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다. 하지만 아델라이드는 그것이 퍽 불편했다.
휴고는 시찰을 하는 짬짬이 에드가에 관한 소식을 모으고 다녔다. 그러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는 목재소의 최고 고용주들을 만나 이야기도 나눠 보고, 인근의 영지민들을 수소문해 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부턴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고. 에드가는 갑자기 증발해 버린 것이었다.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의 에드가가 국경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분증을 위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깨끗하게 국경을 넘을 수도 있나?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걸까. 갑자기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니고, 하늘로 솟은 것도 아니고.’
휴고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여관으로 돌아온 그는 아델라이드를 찾아가 지금까지 찾은 에드가에 대한 정보를 그녀와 나누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아델라이드는 애가 타서 애꿎은 물만 자꾸 들이켰다.
그런데 그날 밤 아델라이드의 방문을 두드린 손님은 휴고뿐만이 아니었다.
휴고가 가고 나서 얼마 후, 힐다가 아델라이드의 방문을 두드렸다. 힐다의 손에는 다기가 담긴 쟁반이 들려 있었다.
“비서관님, 잠시 저랑 차 한잔 나누시겠어요?”
아델라이드는 힐다의 방문이 뜻밖이었다. 그녀가 간혹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아델라이드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전장에서의 에드가를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그녀의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들어오세요, 힐다 님.”
방 안으로 들어온 힐다는 테이블 위에 다기를 내려놓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오르다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벤자민을 이곳에 머물게 할까 해요. 잔심부름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잘된 것 같아요. 여기서 먹이고 입히면서 학교도 보낼 거예요. 휴고 님도 벤자민의 후견인이 되어 주시겠다고 했고요.”
“휴고 비서관이요?”
아델라이드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네, 수도로 돌아가면 후견인 증서를 보내겠다고 하셨어요. 벤자민이 15세가 되면 왕립 아카데미에 보내 주시겠대요. 우선은 본인이 원해야겠지만요.”
“세상에, 정말 잘됐네요. 잘됐어요.”
“네, 벤자민은 정말 운이 좋은 아이예요. 아델라이드 비서관님과 휴고 비서관님을 만났으니까요. 이 얘기를 드리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힐다 님. 그 아이에게 가장 큰 행운은 힐다 님이에요. 성년이 될 때까지 함께해 주실 거니까요.”
그녀는 조용히 답하며 힐다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힐다는 그녀의 부드러운 눈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를 향한 힐다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참으로 닮으셨어요.”
아델라이드가 순간 눈꺼풀을 올렸다가 내렸다.
“제가 아는 두 명의 에드가를 다 닮으셨어요.”
“그, 그래요?”
“네, 한 분은 전장에서 만난 저의 짝사랑이었고, 또 다른 한 분은 바젤에 머무셨던 에드가였죠.”
힐다는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소리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델라이드를 볼 때마다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에드가와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을 찾아오겠다는 황제의 시중 노예 에드가가 자꾸만 떠올랐다.
“짝사랑이라니, 힐다 님답지 않네요.”
힐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고백하자마자 단칼에 거절당했어요.”
힐다는 피식 웃으며 말했지만, 지켜보는 아델라이드의 입에서는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창피하거나 민망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말이, 정말 진심으로 들렸거든요.”
아델라이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바로 힐다를 거절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조, 좋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네, 좋은, 아니 아름다운 사람이었어요. 비서관님처럼.”
아델라이드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죄송해요, 왜 비서관님만 보면 그 사람이 생각나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 나중에 찾아온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짙은 한숨이 아델라이드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전쟁이 끝나면 에드가를 찾아 나서면서 힐다도 찾아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황제와의 관계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그 계획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더군다나 스트라우스 가문의 영애가 되어 있었다.
“저를 닮았다는 그 에드가라는 사람…, 잊으세요. 전장에서의 인연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더더욱 잊으세요.”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힐다의 눈이 눈물로 젖어 갔다. 잊으라는 말. 그 주제넘으면서도 잔인한 말에 힐다는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델라이드는 심장이 커다란 바위에 짓눌린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