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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 (23/39)

제22장.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

외무부의 하루는 평상시와 같았다. 다음 날도 바쁜 일정이 계속되었다.

프리트홀트는 출근 전 아델라이드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할 때부터 초롱초롱한 눈빛을 받았다. 자신도 반드시 바젤 시찰단에 포함시켜 달라는 아델라이드의 강력한 청을, 결국 프리트홀트는 이기지 못했다. 그는 아델라이드를 포함한 시찰단 명단을 정리하고 재가를 받으러 황제의 집무실로 갈 준비를 했다.

프리트홀트는 가기 전 아델라이드를 잠시 바라보고 무슨 말인가 하려 하다가 이내 등을 돌렸다.

사실 황제의 재가가 안 날 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서류를 들고 있는 자신에게 기대에 찬 시선을 보내는 아델라이드를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 * *

프리트홀트는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가 이틀 밤을 꼬박 지새웠다고 시종장이 말한 대로 황제는 꽤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타이도 없이 풀어 헤쳐진 셔츠 차림에 포마드를 발라 단정했던 머리는 앞으로 흘러 내려와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번 바젤 시찰을 재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베르톨트는 프리트홀트를 흘깃 보더니 그가 주는 서류를 건네받았다. 그 서류에는 이번 시찰단의 목적, 기간, 인원, 일정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서류를 넘기며 한 손으로는 사인할 펜을 찾았다.

“기간, 명단만 요약해 보시게.”

“모레 출발할 예정이고, 10박 11일 여정입니다. 참가자는 저와 외교관 두 명, 그리고 아델라이드입니다.”

서류에 사인을 하려던 손이 우뚝 멈추었다. 베르톨트는 얼굴을 들어 프리트홀트를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도?”

황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제 여식도 함께 갑니다. 위험 요소는 있으나 수행 기사도 있고 저도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황제의 눈초리가 서늘해졌다.

“안 돼. 재가할 수 없네.”

그는 서류를 책상에 탁 하고 소리 나게 내려쳤다.

“폐하!”

“다른 건 몰라도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보낼 순 없어. 바젤은 지금 무법 지대나 마찬가지야.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불상사가 생기면 어쩌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문의 정예 기사도 동행할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아델라이드를 데리고 가야 하나?”

“녀석이 원한 겁니다. 고집을 꺾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아델라이드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베르톨트는 크게 한숨을 쉬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밤새도록 각 부처의 과제 수행 문제와 경과 등을 정리하고 분석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런데다 아침부터 프리트홀트가 이런 말을 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델라이드가 이 계획안을 발의했습니다. 그런 자가 가서 현장을 보고 겪어야 제대로 된 실행안이 나올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발의자가 아델라이드가 아니라 다른 이였고 그자가 시찰단으로 가겠다 했으면 이 서류에 사인을 하셨을 겁니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문제는 그 당사자가 아델라이드잖아! 자넨 어떻게 이리 냉정할 수 있지?”

베르톨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프리트홀트는 담담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라고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공무라지만 자식이 위험한 곳을 가고자 하는데 어찌 걱정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녀석의 판단이 옳다면, 그리고 절실히 원한다면 부모로서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르톨트는 눈을 감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꾸욱 눌렀다.

“좀 더 생각해 보겠네.”

“서류는 놓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빠른 시일 내에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지극히 정중하게 마지막 인사를 남긴 후 프리트홀트가 나갔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가 황제의 눈에는 납덩이처럼 무거워 보였다.

레니에는 보통 때보다 한층 더 냉랭한 표정으로 입궁했다. 거의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쉬는 날인데 황제에게서 호출이 왔기 때문이었다.

“재상, 아델라이드의 오라비인 에드가에 대한 소식을 접한 게 있나?”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그 말은, 특별하지 않은 것은 있다는 뜻인가?”

앞뒤 자르고 다짜고짜 묻더니 대답을 물고 늘어진다. 레니에는 도대체 황제가 또 왜 저러나 싶어 눈을 가늘게 뜨며 쳐다보았다.

“폐하! 저를 부르신 연유가 에드가에 대한 것을 묻기 위해서입니까?”

“그래. 퍼즐을 좀 맞추어야 하니 일단 알고 있는 것 다 말해.”

“제가 아는 것이라곤 에드가가 안달루스의 어느 지인을 찾아갔다는 것과 그 이후에 서남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뿐입니다.”

“서남 방향?”

“네. 은빛 머리카락의… 고운….”

레니에는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 침을 삼켰다.

“에드가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자를 보았다는 사람이 몇몇 있었습니다.”

베르톨트가 턱을 쓸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폐하가 알고 계신 정보는 무엇입니까?”

“아델에게서 오라비 얘기를 듣고 정보 길드를 통해 수소문해 보았어. 오늘 새로운 소식을 들었는데… 아무래도 바젤을 통해 안달루스로 들어간 것 같아.”

“바젤이요?”

“네가 말한 서남 방향과도 맞고 그쪽에서 목재를 다루는 목수 중에 에드가 같은 자가 있었대. 아무래도 바젤에서 일을 해 여비를 마련한 다음 국경을 넘은 것 같단 말이지. 아니면… 아직도 바젤에 있든가.”

“눈에 띄는 외모의 이방인이니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한 한 빨리 안달루스로 들어갔겠죠.”

베르톨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지.”

“이번에 바젤에 외무부 시찰단이 가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어제 재가해 달라고 프리트홀트 경이 서류를 올렸어.”

“그럼, 프리트홀트 대신에게 알아보고 오라고 하실 겁니까?”

베르톨트의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서류… 사인하지 않았어.”

“어째서요?”

“시찰단에 아델라이드가 있더라고. 알겠지만 바젤은 위험해. 그녀가 갈 곳이 못 돼.”

레니에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아델라이드 님이 이번 이주민 정책의 입안자이니 현장에 반드시 가려고 하실 겁니다. 현장을 알아야 정책을 제대로 세울 테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에드가 소식을 알 수 있다면 말할 것도 없죠.”

“그래서 골치야. 프리트홀트에게 시찰단을 다시 꾸리라고 얘긴 했지만 아델라이드가 물러서지 않는다더군. 재가해 달라고 서류를 아예 놓고 갔어.”

베르톨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그리 단호하게 나오는 프리트홀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단호하다 뿐일까. 공은 공이라며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라 조언하기도 했다. 아버지로서 걱정하면서도 허락을 해 줬는데, 왜 아버지도 아닌 베르톨트가 딴지를 거냐는 듯한 말투였다.

베르톨트가 한숨을 푹 내쉬고 말을 이었다.

“오라비 얘길 들으면 흥분해서 위험한 일에 빠질 수도 있어. 이따 같이 차 한잔하기로 했으니 그때 설득해 봐야겠어.”

“설득이… 될까요?”

불가능할 거라는 뉘앙스에 베르톨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을 쏘아보는 황제의 매서운 눈빛에 레니에는 순간 움찔했다.

“설득을 해야지!”

“쉽지 않으실 겁니다. 그 남매는 고집이 여간 아니니까요.”

능글맞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레니에의 눈동자에 아련한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 같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베르톨트는 말없이 친우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 * *

베르톨트의 눈에 비친 아델라이드는 오늘도 여전히 반짝거렸다. 아델라이드는 황제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둘만 있을 때는 두고 오라 하여 마력석 목걸이는 몸에 지니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따뜻한 찻잔을 들어 올려 살짝 입을 대고는 한 모금 입 안에 넣었다. 코로 스며드는 은은하고 고급스런 향만큼이나 기분 좋은 맛이 입 속 가득 퍼졌다.

“차 맛이 훌륭합니다.”

“그대가 좋아할 줄 알았어.”

베르톨트가 모양 좋은 입술 위에 미소를 덧그렸다. 일단은 시작이 좋았다. 그녀가 차를 좋아하는 기색이라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아델.”

황제가 낮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불러 왔다.

“네, 폐하.”

“그대…. 바젤 시찰단에 합류하고 싶다고?”

찻잔 받침에 찻잔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은 아델라이드가 잠시 두 손을 맞잡고 황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베르톨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녀가 이렇듯 고요한 눈빛으로 자신을 볼 때면 반드시 무언가 주장을 펼쳤었다.

“폐하. 합류가 아니고 원래 제가 가야 하는 겁니다. 제가 짠 계획안이니 직접 현장을 살펴보고 세세한 정책을 입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델라이드의 눈매가 단단했다. 베르톨트를 마주 응시하는 그 눈빛은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바젤은 위험해.”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이를 보내.”

“…죄송합니다.”

이렇게 나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할 때 자신의 말에 얼굴을 붉히던 아델라이드가 공적인 일에는 이리 단호해지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델라이드. 바젤은 어린아이와 여자에게 매우 위험한 지역이야. 그만큼 치안이 좋지 않다고. 그대가 아니더라도 이번 외무부 시찰단에 여성이 함께하는 건 너무 위험해서 재가할 수 없어.”

“폐하, 그렇기 때문에 호위 기사들을 그 어느 때보다도 능력 있는 분들로 꾸렸습니다. 저희 스트라우스 가문의 기사 두 명도 함께할 것입니다.”

“그래도 안 돼! 내 뜻은 변하지 않아.”

베르톨트는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로 저벅저벅 걸어가 팔짱을 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드의 담담한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이 그녀에게 떼를 쓰고 있는 것만 같아 불편해졌다.

험한 일을 많이 겪은 아델라이드였다. 노예 생활도 했었고 자신 때문에 마녀에게 납치까지 당했었다. 그러니 그녀가 더 이상 위험에 처하거나 고통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마음이 자신만의 고집이고 아집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그런 환경에 노출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니,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

아델라이드는 손안에 들어왔다가도 자꾸만 빠져나가는 사람 같았다. 베르톨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등지고 있는 베르톨트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그의 넓은 어깨와 등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황제가 어떤 마음으로 안 된다고, 불가하다고 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마냥 연인으로만 보는 그가 안타까웠다.

자신과 그는 둘 다 나랏일을 하고 있고, 막중한 나랏일을 하는 사람이 사사로운 것에만 매달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황제일 텐데 이리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큰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렇지만 그는 황제다.

냉철하고 이성적이며 성실한 세르비아의 군주. 자신이 빌미가 되어 그 모습을 잃으면 안 되는 것이다.

“폐하…. 세르비아의 태양이시며, 지존이신 폐하.”

접견실에 퍼지는 낭랑한 아델라이드의 목소리에 베르톨트가 뒤돌았다.

그녀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있었다. 둥그렇게 퍼진 치마 가운데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서는. 베르톨트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델! 어서 일어나!”

그가 다급히 걸어와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자신을 일으키려는 그 손을, 아델라이드가 부드럽게 잡아 저지했다.

“폐하! 제가 이 세상에서 빚을 꼭 갚아야 하는 이가 있다면, 제가 제 생명을 누군가를 위해 버려야 한다면… 그건 바로 폐하입니다.”

“후우…. 아델, 그대가 이렇게 극진하게 폐하라고 부르면 우리 사이가 너무 멀게 느껴져.”

베르톨트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묻어났다. 아델라이드가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어린 새가 지저귀는 소리처럼 청량했다.

“좋아요, 베르톨트. 당신은 점점 나락으로 가라앉고 있던 저를 구원해 주셨어요. 그리고 지금은 저의 손을 잡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고 있죠. 그래서 저를 모두 드리고 싶어요.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가진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하찮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저의 솜털 하나하나, 저의 숨결 하나까지도 소중해요. 당신이 소중히 여겨 주니까 소중해졌어요. 이미 저는 당신의 것이에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폐하의 것인 저를 다치게 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위험에 빠뜨릴 수 있겠어요? 소중히 할게요.”

그녀가 베르톨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베르톨트는 잠시 멍해졌다. 살아가면서 이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아니, 이런 감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심장에 싹이 돋고 가지가 올라와 꽃을 피우는 기분이었다. 간질거리면서도 지끈거리고 뻐근했다. 행복하면서 아련하고 또한 뿌듯했다.

“하아…. 아델!”

“폐하, 그러니 걱정 말고 보내 주세요. 전 폐하와 오래도록 행복할 거니까.”

결국 소리 내어 웃은 그는 이마에 손을 대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그대를 어떻게 이길 수가 있지?”

베르톨트는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는 한숨을 내뱉고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품에 안았다. 얼굴을 내려 그녀의 귓가에 천천히 속삭였다.

“곰 같다가도 이럴 때는 한없이 약은 여우 같아.”

아델라이드가 활짝 웃으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키가 한참 큰 베르톨트 때문에 그녀는 발뒤꿈치를 한껏 올려야만 했다. 그녀도 그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폐하는 늘 여우 같은데 지금은 곰 같아요.”

베르톨트가 쿡쿡 웃었다. 그러고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클리터스 부니에를 수행 기사로 데려가.”

“대대장님을요?”

“그래. 그래도 내가 가장 인정하는 기사야. 클리터스라면 그래도 마음을 놓을 수 있어.”

“하지만 저…를 알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더라도 데려가. 그 정도 기사가 아니면 안 돼.”

“알겠어요.”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베르톨트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 데이트는 어쩌지?”

무슨 말이냐는 듯 아델라이드의 표정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잠시 후 그녀는 아, 하는 탄성을 질렀다. 그런 그녀를 본 베르톨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폐하. 데이트는… 바젤에 다녀와서요.”

아델라이드가 미안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데와 데이트할 시간을 내려고 이틀 밤을 꼬박 새웠어. 잔뜩 기대하게 해 놓고… 너무한 거 아닌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나직하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층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아델라이드는 몸이 나른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늘어질 틈도 없이, 허리에 닿은 베르톨트의 손이 그녀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아델라이드는 눈앞에 보이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놀라 숨을 삼키고 황급히 대꾸했다.

“죄송해요, 폐하.”

“말로만? 말만으로는 신뢰가 안 가. 행동을 해야지.”

조금 전까지 순하디순했던 그의 눈빛이 서서히 사납게 일렁이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내빼는 게 상책인데 그의 팔 안에 갇힌 바람에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아델라이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베르톨트의 폭풍 같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는 한 손으로 아델라이드의 머리를 감싼 후 곧장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을 삼켜 버렸다.

뜨거운 숨결이 부딪히고, 입술 사이로 들어온 그가 감아 올린 혀로 입 안을 휘저었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할딱이는지 흐느끼는지 자신도 분간이 안 되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그녀를 정신없이 빨아들이던 그가 다급한 손길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더운 숨을 토해 내며 힘줄이 도드라진 그의 팔을 세게 잡았다. 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그가 지나가는 모든 곳은 불에 덴 듯 뜨겁고 질척했다. 이러다가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폐, 폐하…. 여기선… 싫어요….”

“그럼, 어디서?”

베르톨트의 혀는 집요하게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그녀의 쇄골부터 귓불까지 구석구석 핥아 댔다.

“침, 침실….”

그러자 그가 아델라이드를 번쩍 안아 올렸다. 또다시 입술을 길게 빨며, 입술을 떼지 않은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아델라이드는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가 향한 곳은 정말 침실이었다.

침대 위에 그녀를 내려놓자마자, 그는 그녀의 위로 올라가 한층 더 미친 듯이 그녀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갈급한 손길이 드레스 자락을 위로 잡아 올렸다. 그녀의 허벅지를 벌리고 자신의 하체를 조금의 공간도 없이 밀착했다. 그 크고 뜨거운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꽉 잡아 쥐었다.

아델라이드는 자신에게 닿아 있는 그가 위험할 정도로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옷을 입었음에도 그의 중심이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져 있는 것이 느껴졌고 숨결은 짐승처럼 거칠었다.

잔뜩 흐트러져 침대 위에 뒤엉켜 있는 그때, 그가 돌연 멈칫하더니 어금니를 까득 소리 나게 꽉 다물었다. 허벅지에 닿은 그의 손이 놀랍게도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아…, 안 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도 아델라이드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경계선을 넘으면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베르톨트가 짙은 숨을 토해 냈다.

“약혼이라도… 하자. 그대를 안지 못하는 건 고문이야.”

미친 듯이 몰아붙이던 그가 무섭도록 자신을 통제하며 뱉어 낸 말이었다. 약혼. 아델라이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붉어진 눈가를 훔쳤다.

베르톨트는 전쟁을 끝내고 황궁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그녀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한참 잘못 짚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를 갖고 싶고, 안고 싶어 온몸의 감각들이 미쳐 날뛰었다. 제어가 되지 않는 욕망이 한계에 직면하기 전에, 자신이 짐승이 되기 전에 그녀와 식을 치러야겠다는 일념이 지금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다만 결혼을 하려면 대신들의 동의를 구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하므로 결혼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약혼이었다.

약혼을 하더라도 결혼 전 동침하면 뒷말이 나오긴 하겠지만 세르비아의 정서상 그다지 흉이 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자신은 현재 스물일곱 살로,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상태였다.

혼기를 놓친 황제가 약혼 후 바로 약혼자와 밤을 함께하겠다고 선언할 때 이를 굳이 반대할 이가 누가 있으랴. 선례를 보면, 전전대 국왕도 약혼 후 바로 왕비를 들였고 그보다 앞서 꽤 많은 선조들이 그리했다.

예전만 해도 베르톨트는 이것이 하루라도 빨리 합방을 하려는 선조들의 꼼수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실천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대뜸 결혼부터 하겠다고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어쩌면 약혼이 그녀와 혼인할 가장 빠르고도 확실한 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약혼 기간 동안 그녀를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을 대신들에게 내주고 자신은 그녀를 돕고 또 그녀와 맘껏 사랑하는 것이다.

감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세르비아 황제의 약혼녀가 된 그녀와 말이다.

* * *

외무부의 시찰단이 떠나는 아침. 시찰단을 배웅하기 위해서 외무부 건물 앞에 몇몇 외무관들이 나와 있었다. 그 옆에는 커다란 마차 두 대와 수행 기사 다섯 명이 탄 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프리트홀트는 황궁에서 파견한 수행 기사 두 명, 스트라우스 가문의 수행 기사 두 명, 그리고 클리터스 부니에와 차례대로 악수를 했다.

“클리터스, 자네가 우릴 수행해 준다니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

“급하게 폐하의 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후작 각하와 오랜만에 길을 떠나니 설레는군요.”

그의 커다란 몸집과 굵은 목소리 덕분에 프리트홀트의 얼굴에 안심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프리트홀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뒤를 돌아본 프리트홀트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는 아델라이드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그녀가 앞으로 걸어 나오자 클리터스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대연회 때 봤는지 모르겠네만 내 여식이네. 이번에 비서관 자격으로 함께 갈 거야.”

아델라이드는 클리터스의 표정이 변한 것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모른 척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델라이드라고 합니다.”

클리터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연회 때 프리트홀트의 양녀라고 소개하는 소리가 들려 힐끔 보긴 했지만 워낙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던 터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후에는 구석에서 혼자 술을 홀짝이느라 황제와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잠시 보았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대는 것 같았으나 그는 마음이 울적하여 그마저도 귀에 담지 않았다.

성대하게 연 대연회건 대축제건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온통 차지한 인물 때문이었다. 클리터스가 울적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했다.

수도로 환궁하는 군대 속에서 에드가를 찾지 못했다. 눈 씻고 찾아보아도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레니에에게 물어보려 했지만 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애가 바짝 탔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니 녀석이 어떻게 됐을 리도 없고 전쟁이 끝났으니 탈영하지도 않았을 텐데 녀석의 행방은 묘연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여쭈었더니 에드가를 면천시키고 원하는 곳으로 보내 주었다고 했다. 황제는 그곳이 어딘지는 자신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에드가를 찾을 길이 없었다. 클리터스는 크게 낙담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 자신의 마음이라도 전했으면 녀석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아니, 적어도 어디로 갔는지만 알아도 수소문해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녀석을 찾을 일말의 단서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사라진 녀석에게 배신감 같은 것도 들었다. 그래도 세르비아와 연을 맺게 해 준 게 자신인데, 그런 자신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졌단 말인가.

‘내가 너에게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던가.’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그저 혼자 두근대고, 혼자 기뻐하고, 혼자 낙담한 자신이 어이없고 바보 같았다.

그 후로 며칠 동안은 무척 힘이 들었다. 녀석을 향한 마음도, 녀석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도,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까지, 죄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가슴이 묵직한 것이 마음속에 축축한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잠을 자기도,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멍하게 생각에 잠기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 종일 침대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기력하고 잠이 쏟아져 황실 기사단장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휴가가 필요하다며 훌쩍 녹턴을 떠났었다.

그사이 황실 기사단장의 직위는 아른프리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 또한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말을 달리기도 하고 걷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서서히 마음을 다잡았다. 녀석과는 그렇게 스치기만 할 운명이었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여인이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후벼 파던 녀석과 닮아 있었다. 머리카락 색도 다르고 눈동자 색도 다르고 성별도 달랐지만 프리트홀트의 양녀라는 이 영애는 에드가, 그 녀석과 많이 닮아 있었다.

에드가가 남자인 것은 확실했다. 세르비아에서는 노예로 삼기 전, 그 성별을 확인하고자 반드시 옷을 벗겨 본다.

게다가 매사 빈틈없는 레니에가 그것을 확인했다. 그는 에드가가 옷을 벗었을 때 남자였다고 했다. 그가 거짓을 말할 리는 없으므로 에드가는 분명히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곱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은 분명히 여자였다.

에드가와 닮았지만 그 녀석은 아닌 것이다. 지독히 닮았지만 그 녀석은 아닌 것이다.

클리터스는 비틀린 입매를 바로 하고 심호흡을 했다.

“클리터스 부니에입니다.”

입을 열자 나오는 자신의 갈라진 목소리가 스스로도 매우 낯설었다.

“훌륭한 분이 같이 가 주셔서 마음이 놓입니다.”

“수행 기간 동안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클리터스가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델라이드도 무릎을 굽혀 예를 취하고는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앞에서 걸어가는 아델라이드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잡았던 마음이, 이제는 단단해졌을 거라고 생각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윽고 시찰단 일행이 마차에 오르고 수행 기사들이 말을 몰았다.

드디어 바젤 시찰단이 출발하였다. 시찰단 호위대장은 클리터스 부니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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